자화상
김경옥
(1)
태어날 때 첫 애가 아빠를 닮았다고, 엄마는 좋아했지만, 머리카락은 숱이 많고 굵고 검었다. 피부는 누런 황소 같았고, 목이 짧았다.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며, 무용을 열심히 하면 예뻐지는 줄 알고, 유치원과 초등학교 때 즐겨했다.
바로 아래 동생은 엄마를 닮아, 머리카락이 가늘고 숱이 적고 부드러웠다.
피부는 하얗고 반짝거렸으며, 목이 길어 어떤 옷을 입혀도 예쁘게 돋보였다.
늘 그렇듯이, 그 어느 날도 두 자매가 사이좋게 손잡고 밖에 나갔는데, 동네 사네 아이가,
“저기 저, 흑인과 백인이 걸어온다.” 조롱하듯 “깔~깔~” 소리치며 골목길로 도망갔다.
황당했다.
‘내 얼굴이 흑인처럼 까맣게 보였나?’
(2)
목이 긴 광주시립발레단 무용수들이 3-3, 4-4 짝을 지어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팔랑인다. 빨강 장밋빛 발레복 속에서 날아갈 듯 유연한 발동작과 동시에, 빨간 핀을 꽂은 머리와 팔을 예쁘게 움직이며, 밝은 미소로 황홀케 한다. 순간 옛 경험이 떠오른다.
유치원 발표회 때, 빨강장미꽃이 되고 싶었는데, 선생님이 백합꽃이 어울린다고 나에게 하얀 백합꽃 발레복을 입혀주었다. 주연 역할을 맡은 빨강장미친구가 무대 중앙에서 가장 돋보이게 방긋거려 귀여움을 독차지했었다.
하얀 장밋빛 무용수 한 명이 남자 무용수와 함께 등장하여 빨강 장미꽃 사이사이를 휘젓고 다니다가 무대 중앙에서 화려하게 피날레를 장식한다. “와~!”, “예쁘고 멋있다.” 대강당이 찌렁찌렁 박수 소리 요란하다.
나의 초등학교무용선생님은 <백조의 호수>작품발표회 때, 나도 발레리나가 될 소질이 충분히 있다고 하셨다. 발동작도 잘하고 팔의 움직임도 좋은데, 다 좋은데, 목이 짧아 목선이 예쁘지 않은 게 큰 흠이라고 하셨다.
아쉬워하며, “발레여, 빠이빠이~.” 했었다.
그리고 오늘, 예술회관 대강당에서 발레 파키타를, 광주시립발레단 무용수들이 한결같이 긴 목으로 표현하는 동작들을, 하염없이 부럽게 바라보고 있다. (2019 10 14)
(3)
아버지께서 피아노를 사주셨다.
피아노는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리고, 발로 페달을 밟아 강약을 조절한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무대위에서 혼자 독주를 할 수 있다는 꿈에 취하여, 중1 시작 한 두 달 전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재미있었다. 새벽 5시 동광주역에서 기차가, ‘뛰~~ 칙칙폭폭’ 소리 지르며 떠날 때마다, 일어나 응접실에 있는 피아노와 흥겹게 손가락운동놀이 하듯 했다. 종종 아빠가 옆에 서서, “우리 딸의 피아노 치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니, ‘아~’ 기분이 좋다” 하셨다. 아빠를 닮은 딸로 태어난 보람이 느껴졌다.
중3 때, “경옥이는 피아노에 소질이 있어요. 단지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5살부터 시작한 애들보다 좀더 연습을 많이 해야겠지요. 서울 예고로 진학하기를 추천합니다.”
나의 얼굴에 장미꽃이 핀 듯, 기뻤다.
그런데, 몇 일후, 심각한 얼굴로, “엄마는 네가 고등학교까지는 광주에서 다녔으면 좋겠다. 대학교를 서울로 보내고 싶다.”
“그럼, 전남여고네.”
“전남여고 다니면서도 얼마든지 피아노는 열심히 칠 수 있을거야. 고맙다. 엄마의 마음을 이해해줘서.”
슬펐으나 엄마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또 몇 일후, “피아노는 취미삼아 하고, 대학은 약학대학으로 가거라. 피아노는 계속 연습을 해야 하지만, 약사는 면허증만 따 놓으면 자유롭잖아?!”
세월 참 빠르게 흘렀다. 펑펑 놀다가, 엄마 아빠 다 돌아가시고, 애들은 시집 장가가서 잘 살고 있고, 병원약국에 취직한지 벌써 10년째다. 시립병원이라 5년마다 재단이 바뀐다.
새로 시작하는 빛 고을 의료재단으로부터 약제과장 임명장을 받았다.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는 앞으로 5년 더 일할 수 있다. 그럼, 엄마 나이 80세가 되겠네.”
“뭐라구? 80세까지 일한다고?”
“일하는 것이 집에서 혼자 있는 것보다 낫잖아?”
친구는 "건강하다는 증거야", "축하해", "늦깎이"라 한다.
'행복한 늦깎이?' '늦깎이, 행복해?'
혼자서 중얼중얼 거리며, 거울 앞에서 춤추듯 몸동작을 바꿔본다.
'괜찮네. 목이 짧아도, 피부색이 하얗지 않아도. 그냥,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며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