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반여동 향(鄕)선생 연일 정씨 반계 정기진
반계 정기진 선생은 반여동 중리마을에서 1809년에 태어났다. 공의 휘는 기진이요 자는 문백, 호는 반계, 본관은 연일이다. 문학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장산 아래 반여동에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쳐 이 지방의 학자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그의 후손은 없었으며, 문하의 제자인 김문주 등이 계축년(1913년)에 변향계를 조직하여 향선생(鄕先生, 지방에서 명성이 높은 선비)으로 제향을 받들었다.
선생께서는 동래향교 전교와 반송동 삼절사 산장, 동래부 향청 좌수를 역임하셨다. 1874년 충렬사 안락서원장 재임 시에는 석대리의 영양 천씨 가문의 아름다운 효행의 행실을 알리려고 동래부 부사와 고을을 순행한 암행어사에게 표창의 은덕을 내려달라고 여러 번 청원 호소문을 올렸다.
선생께서 1885년에 돌아가시니 고을 선비들 361명이 모여 판향(瓣香) 함진숭의 옛날 고사를 본받아 1914년에 하나의 계를 수계하여 판향계라 이름하고, 매년 음력 3월 16일 반여4동 옥봉산 기슭 판향단에서 제향을 봉행한다.
양재일이 지은 정기진의 묘갈(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명에 따르면 연일 정씨는 고려조 한림학사 영양공 정습명(鄭襲明)이 시조이다. 그 아들 변균이 문과에 급제하여 주박동정 전서였고, 그 아들 겸목이 문과에 급제하여 내지전서였으며, 그 아들 린신이 문과에 급제하여 대학박사였으며, 그 아들 지태가 문과에 급제하여 내시전서였고, 그 아들 종흥이 진현관 대제학이었으며, 그 아들 림이 봉익대부 판도판서였다. 여러 대를 전하여 12대손 휘 영종이 영천에서 동래로 와서 살았다.
연일 정씨의 시조 정종은(鄭宗殷)은 지백호(정씨 시조. 신라 유리왕 때 정씨 성을 하사받음)의 후손으로 신라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내고 김유신(金庾信 : 595~673)과 함께 삼국통일에 공을 세웠다. 하지만 사건에 연루되어 인동(仁同) 약목현(若木縣)으로 옮겨 호장(戶長)을 지낸 까닭으로 후손들이 본관을 연일로 했다. 또한 연일이 영일(迎日)로 바뀌었기 때문에 영일 정씨라고도 하고, 또 연일의 옛 이름이 오천(烏川)이었으므로 오천 정씨라고도 한다.
그러나 정의경(鄭宜卿) 이후 다시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의종 때의 중신으로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하고 포은 정몽주(鄭夢周 : 1337~1392)로 이어지는 지주사공파와 고려 때 감무(監務)를 지낸 정극유(鄭克儒)를 1세조로 하여 문정공 정사도(鄭思道 : 1318~1379), 송강(松江) 정철(鄭澈 : 1536~1593)로 이어지는 감무공파로 나누어져 있다. 이 양파는 동원이면서도 중간계보를 잃어버려 촌수를 따지지 못한다.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