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정태성 목사
제목: 6과 원죄를 자기 죄로 인식하는 방법
1. 원죄를 자기 죄로 인식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인간의 상태는 창조된 인간이 아닌 하나님같이 된 신적 존재가 된 상태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원죄를 자기 죄로 인식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원죄의 인식은 인간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발생한다. 이 말은 인간의 원죄의 인식은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지 능동적으로 발생 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외부 혹은 수동적 의미란 무엇을 말하는가? 외부로부터 혹은 수동적 의미란 인간으로부터가 아닌 예수로부터, 예수의 오심으로부터를 의미한다.
한 인간이 원죄를 자기 죄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아닌 외부로부터, 그리고 수동적 작용으로 발생 되는데 그 작용은 예수의 오심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예수의 오심으로 인해서 비로소 인간은 원죄를 자기 죄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2. 예수께서 오셔야만 원죄를 인식할 수밖에 없는 이유?
<갈라디아서 1장 4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갈라디아서 1장 4절에는 이 세상을 악한 세상으로 말씀하고 있다. 말씀에서 말하는 세상은 인간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 세상을 악한 세상이라고 규정한다.
악한 세상에서 원죄를 자기 죄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세상이 악한 세상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고, 그 세상에는 죄가 있고, 그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께서 오신 것은 악한 세상의 표상과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심지어 예수께서 오신 그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악한 세상이라고 말씀한다..
<마태복음 11장 2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 우니라 하시니라.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렇다! 예수께서 오신 세상은 의인이 하나도 없는 악한 세상이다. 그 세상에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그 악한 세상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5장 22절>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세상에 죄가 있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때 선포하신 죄가 바로 원죄다. 그리고 그 원죄를 선포하신 분이 예수이시다! 예수께서 악한 세상에 원죄를 선포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또 발생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오신 이유와는 다르게 세상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가장 깨끗하다고 스스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세상은 악한 세상이 아닌 매우 선하고 착한 세상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상은 예수의 오심과는 정반대의 상태였다. 이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과 이 땅에 오신 세상은 악한 세상이 아닌 그야말로 예수께서 굳이 오실 필요가 없었던, 적어도 구약 적 시각으로 봤을 때는 완벽한 ‘의’에 세상이었다.
구약 적 시각으로 봤을 때라는 말은 구약의 율법을 따라 사는 행위적 시각을 말한다. 이 시각으로 볼 때 예수께서 오시기 전과 오신 그 당시 세상은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의’가 충만한 온전한 상태의 세상이었다. 이것은 말씀을 통해 충분히 증명된다.
<마태복음 5장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물론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의’와는 다른 의미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예수께서 ‘의’가 있다고 언급할 만큼 율법적 행위에 대한 그들의 ‘의’는 완벽 그 자체였다.
3. 예수께서는 왜 율법의 행위로 완벽한 세상에 오셔야만 했는가?
<마태복음 1장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디모데전서 1장 15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예수 오심은 죄에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예수의 오심은 죄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만약에 죄가 없었다면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가 오셨다는 것은 이 땅에 죄가 있다는 것이고, 또한 죄인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오신 세상이 아무리 율법의 행위로 완전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 세상은 의인이 하나도 없는 죄악 된 세상일 뿐이다. 이러한 세상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같이 된 상태의 세상이다. 이 상태가 예수께서 오신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었고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악한 자들이다.
예수께서 율법의 행위로 완벽한 세상에 오신 이유는 그 당시의 그 사람들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 하나님같이 되어버린 첫 사람 아담, 즉 악한 자들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예수 당시, 그 사람들은 아담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 모두가 아담들이다.
1) 예수 당시 악한 세상의 실존적 인물
우리는 원죄를 우리의 죄로 인식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당시의 사람들의 상태를 통해 알 수 있게 된다. 즉 그들의 상태가 곧 아담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구체적으로 그들의 실존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성경에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같은 실존 인물을 찾기란 사실 무척이나 쉽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매우 특수하거나 특이하거나 혹은 폐쇄적이어서 사람들과 접촉과 왕래가 없어 찾기 힘든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우 보편적이고 일상적이며, 심지어 누구나 그 사람들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대상이고 쉽게 접근이 가능한 사람들이므로 그 사람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상황 외에 그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악한 세상에 오신 예수를 가장 격려하게 저항하고 반대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시도한 자들을 찾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원죄를 범한 실존적 인물이다. 예수를 반대한 그들이 곧 원죄를 가진 자들의 실존이다.
(1) 원죄를 가진 실존적 인물, 그들은 누구인가?
<마태복음 9장 3절>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마태복음 9장 11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태복음 9장 34절>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마태복음 12장 2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마태복음 12장 14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마태복음 12장 24절>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마태복음 19장 3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마태복음 21장 45-46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마태복음 22장 15절>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마태복음 22장 34-35절>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누가복음 5장 30절>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누가복음 6장 2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누가복음 7장 39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누가복음 10장 25절>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누가복음 13장 14절>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누가복음 15장 2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누가복음 22장 2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요한복음 8장 59절>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요한복음 11장 53절>
이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 하니라.
위 말씀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인 서기관들, 제사장과 대제사장, 마지막으로 장로들이다.
이들은 예수께서 오신 그 땅에서 예수와 가장 극렬하게 대립했고, 예수를 따라 다니면서 항상 예수의 말을 반대했던 자들이다. 이들의 유일한 목적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위의 말씀 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이 예수에 대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들 외에 실제 적으로 예수와 다툼이나 논쟁을 벌인 사람들은 성경에 없다. 오직 저들만 지독하게 예수에 저항하고 반대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자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 스스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같이 되어버린 원죄의 상태에 있는 실존들이고, 이들이 원죄를 범한 악한 자들의 실존 인물들이다.
<마태복음 12장 34절>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이러한 악한 자들의 실존 인물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악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악한 자들이 바로 아담의 원죄를 그대로 전가 받은 죄인들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원죄를 자기 죄로 인식하는 실질적인 방안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원죄를 자기 죄로 인식하는데 굳이 전과 같이 아담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아담의 모형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상태를 통해 우리는 원죄 인식을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우리의 원죄를 인식하게 하는 실질적인 수단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우리의 원죄의 인식을 좀 더 명확하게 체감할 수 있도록 보여주는 실제적 존재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다. 성경을 통틀어 원죄를 인식하게 하는 수단은 ‘저들’ 외에 실제적 수단은 없다. 있다면 그 모형들을 얘기해 보라!
아담의 후손은 인류이다. 그리고 그 인류의 대표적인 삶을 산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곧 우리이고, 나 자신이다. 아담과 저들과 우리와 나는 하나, 모두 선악과를 먹은 원죄를 가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의 원죄 인식을 아담까지 가져갈 필요가 없어졌다. 저들을 통해 우리의 원죄를 인식하면 된다.
2) 원죄의 표징이 되는 저들 상태와 그 내용 무엇인가?
<로마서 5장 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위 말씀을 보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고, 그리고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위의 말씀에서 말하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 죄는 아담의 원죄를 말하며,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다’라는 말 또한 원죄를 말한다.
한 사람의 죄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원죄를 갖게 된 것이다. 이 말은 한 사람의 원죄의 상태가 그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전가되어 모든 사람도 원죄의 상태가 되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 상태의 실제적인 사람들이 바로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도 당연히 이미 원죄를 가지고 있는 상태이었던 것이다.
3) 원죄를 가진 그 상태의 사람들은 어떠한 상태를 말하는가?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바리새인들이나 혹은 서기관들의 악함에 대해서 매우 둔감하다. 그들은 신앙에서 관심 밖의 대상들이다. 마치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들이 원죄를 가진 악한 자들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이들에게 악함을 찾기란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들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의미의 악함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법을 어긴 적이 없으며 심지어 그들은 그들의 세상에서 칭찬받거나 높임을 받은 자들이다.
<요한복음 3장 10절>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이러한 자들에게 범죄, 혹은 악함, 불의, 불법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보편적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전혀 악한 자들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의 인식 밖의 대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악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모든 인간도 그들과 동일한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둔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식이 가능한 시선으로 저들을 보면 안 된다. 저들을 보는 우리의 시각은 철저하게 예수의 시각을 쫒아 가야 한다. 그래야 저들의 원죄를 알 수 있게 되고, 비로소 우리의 원죄도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저들의 원죄의 상태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의 시선을 따라가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께서 보시는 저들에 원죄의 상태와 내용에 대해서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