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을 통해 본 한산도와 통영
임원빈(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이순신리더십연구소장)
임진왜란 시기를 통틀어 우리 국민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해전은 누가 뭐래도 한산해전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순신 장군이 벌인 해전 가운데 전략적으로 가장 큰 의미가 있는 해전이요, 대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한산대첩이 언급되어 왔던 것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 장군이 중심이 된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이 시작되는 임진년(1592년) 첫 해, 네 차례 출동 열 여섯 번의 크고 작은 해전을 벌여 모두 승리하였다. 한산대첩은 임진년(1592년) 제3차 출동(7월 6일∼7월 13일) 때에 있었던 해전이다.
한산해전은 일본 최정예 함대와의 한판 승부였다.
한산해전의 가장 큰 특징은 일본 최정예 수군과의 한 판 승부였다는 것이다. 임진년(1592년) 조선 수군의 제1차 출동(5월 4일∼5월 9일)과 제2차 출동(5월 29일∼6월 7일) 중에 있었던 일곱 차례의 해전에서 모두 패했다는 보고를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용인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일본 수군 장수들에게 조선 수군을 격파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조선 수군을 제거하지 않고는 남해를 통해, 서해로 올라가 평양까지 진격한 일본 지상군에게 군량과 보급품을 전달함과 동시에 수륙협공으로 조선을 공략한다는 조선 침략 전략이 성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순신이 중심이 된 조선 수군은 제1, 2차 출동을 통해 110여 척 이상의 함선을 격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제 인근의 해상에 여전히 일본 함선들이 출몰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곧 바로 전라좌·우수영과 경상우수영의 함대를 통합하여 출동에 나선다. 일본군의 조선 침략 사령부격인 부산 인근 남해 연안의 일본 함대를 격파하고, 후방을 위협함으로써 일본 지상군의 조선 내륙 공략을 중지시키거나 후퇴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 제3차 출동의 목적이었다.
임진년(1592년) 제1, 2차 출동 때 조우했던 일본 함대의 작전 목표가 대개 남해 연안에서의 경쟁적인 노략질이었다면, 제3차 출동 중 한산해전에서 맞닥뜨린 일본 함대의 작전 목표는 조선 수군의 제거에 있었다. 한 마디로 한산해전에 참여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는 일본 수군을 대표하는 최정예 함대였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장계를 보면, 한산해전은 시작부터 조선 수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 한산해전 하루 전인 1592년 7월 7일 저녁, 당포에 도착한 이순신의 조선 함대는 미륵도에 피난하고 있던 목자(牧子) 김천손으로부터 ‘일본 함선 70여 척이 견내량에 정박해 있다’는 결정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반면,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휘하는 일본의 함대는 조선 수군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하루 밤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밤 새 작전계획을 세운 이순신 장군은 7월 8일 아침, 일본 함대를 견내량으로 부터 한산도 근처의 넓은 바다로 유인하였다. 견내량은 해협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처럼 큰 함선이 기동하기에 불편할 뿐만 아니라 평소 일본 수군들은 해전을 하다가 불리하면 배를 육지에 대고 도망가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학익진(鶴翼陣)’ 전술은 선두의 함선에 집중 포격을 가하여 일시에 격파하기 위한 전술이다.
일본 함대가 한산도 인근 외양에 도착하였을 때 가장 먼저 이순신 장군이 펼친 해전 전술이 널리 알려진 ‘학익진(鶴翼陣)’ 전술이다. ‘학익진’ 전술은 개전 초기 선두에서 공격해 오는 일본 함선을 학의 날개 모양으로 에워싸고 일시에 격파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술이다. 학의 날개처럼 적선을 에워싼 이유는 선두의 함선 2∼3척에 대해 집중 포격을 가함으로써 총통의 명중률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한산해전에 앞 서 이순신 장군은 승리를 확신하였다.
한산해전에 동원된 일본 함선은 판옥선과 크기가 비슷한 대선 36척을 포함하여 대·중·소선 총 73척이었다. 반면 조선의 함선 세력은 거북선[盲船] 3척, 판옥선 55척, 소선 50척 등 총 108척이었다. 한산해전에 앞 서 이순신은 승리를 확신하였다. 조선의 함대가 수적으로, 질적으로 모두 우세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고만한 것은 승패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배 안에 타고 있는 일본 장병들까지 모조리 없앨 수 있을까>라고 하는 전과(戰果) 확대의 문제였다. 그래서 그는 일본 함대를 육지로 도망갈 수 없는 한산도 근처의 넓은 바다까지 유인하여 격파하였으며, 일본의 패잔병들을 먹을 것이 없는 한산도로 도주하도록 유도하여 굶어 죽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한산대첩은 세계해전사에 빛나는 해전으로, 왜적의 한 쪽 팔을 자른 것 같은 해전이었다.
전투결과는 이순신이 예측한 대로 완전한 승리였다. 일본 함대의 경우 참전한 대·중·소선 73척 가운데 대선 35척을 포함하여 모두 59척이 격파 및 나포된 반면 조선 함대는 단 한 척의 함선도 침몰되거나 격파되지 않았다. 세계해전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한산해전의 패배 이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을 만나면 해전을 하지 말고 회피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한산대첩이 임진왜란 전황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에 도착하여 <일본 수군 십여만 명이 지금 또 서해를 통하여 올 터인데, 어가(御駕)가 여기서 또 어디로 갈지 모르겠습니다>라는 글을 보낸 적이 있었다. 적은 원래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서쪽으로 오려고 하였던 것인데, 이 한 번의 전투로 인하여 적의 한쪽 팔을 자른 격이 되었으니 고니시 유키나가가 아무리 평양을 얻었어도 그 세력은 고립되었기 때문에 감히 더 진군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한산도는 ‘바다의 통제영’이었다.
임진왜란이 벌어진 다음 해인 계사년(1593년) 7월 14일, 이순신은 진을 한산도로 옮긴다. 전라좌수영의 본영인 여수에서는 호시탐탐 서쪽 바다와 호남을 노리는 일본 수군의 서진(西進)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같은 해 8월,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겸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다. 이 시점부터 한산도는 여수 본영 이외의 장소로써 통제사가 머무는 행영(行營)이 되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여수를 본영(本營)으로, 한산도를 진(陣) 또는 본진(本陣)으로 불렀으며, 해영(海營)이라고 지칭한 경우도 보인다. 여수가 육지에 있는 삼도수군통제영 본영(本營)이었다면 한산도는 일본의 서진을 차단하기 위해 특별히 설치한 조선 수군의 전진기지 이른바 ‘바다의 통제영’[海營]‘이었던 것이다.
통제영은 어떻게 위치가 바뀌어 왔나?
정유년(1597년) 7월, 칠천량해전 패배 이후 한산도의 ‘바다의 통제영’은 폐쇄되고 일본군들이 호남을 장악함에 따라 여수의 본영도 기능을 상실한다. 같은 해 8월,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수군 재건의 토대를 마련한다. 그리고 정유년(1597년) 겨울을 목포의 고하도에서 보내고, 무술년(1598년) 2월 17일 고금도로 진을 옮겨 본격적으로 수군의 재건에 착수한다. 이렇게 보면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여수)은 정유재란 발발 이후 기능을 상실하고 행영(行營)으로써의 ‘바다의 통제영’만이 고하도로, 고금도로 옮겨 다닌 셈이 되는 것이다. 이순신 전사 직후인 무술년(1598년) 11월 25일, 임금 선조는 이시언을 통제사로 삼았으며, 1601년에는 이시언을 다시 경상우수사로 임명한다. 그리고 1601년 11월에는 류형을 ‘경상우수사 겸 통제사’로 임명한다. 이렇게 보면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로 시작된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책은 제4대 통제사 이시언, 제5대 통제사 류형으로 이어지면서 ‘경상우수사 겸 통제사’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상우수영 겸 삼도수군통제영’은 거제 오아포에서, 1602년 고성으로 옮겼다가, 1604년 제5대 이경준 통제사 재임 시절에 다시 두룡포(현 통영)로 옮겨 수군이 해체될 때까지 그 역할을 다 하였으니 이것이 오늘날 경상남도 통영이 생겨난 유래이다.
통영은 이순신의 나라 사랑 정신을 온전히 계승한 호국의 성도(聖都)이다.
그렇다면 왜 두룡포(현 통영)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부산과 호남을 침범하려는 왜적에 대해 모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제영이 부산 가까이 있으면 거제 외양을 통해 곧 바로 호남을 침범하려는 왜적을 막을 수가 없고, 여수처럼 너무 서쪽에 위치하면 부산 쪽으로 공격해 오는 왜적에 대해 신속히 대응할 수가 없으니 그 중간에 위치한 두룡포가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통제영의 위치 선정에 대한 당시 조선 조정의 고민은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에 ‘바다의 통제영’을 설치하여 옥포 쪽의 외해 해로와 견내량 쪽의 내해 해로를 동시에 차단하여 호남을 지키고자 했던 이순신의 그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통영은 임진왜란 시기 한산도에 설치했던 ‘바다의 통제영’의 의미와 정신을 온전히 계승한 호국의 성도(聖都)이다. 이순신 장군 순국 7주갑을 맞이하여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되새기고, 체험하며, 전파할 수 있는 뜻 깊은 제57회 통영한산대첩축제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 이 글은 <제57회 통영한산대첩축제> 홍보 소식지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홍보 담당자에게 원고를 보내면서 칼럼방에 올려 봅니다.
첫댓글 둥둥둥..
북가죽이 찢어질 듯한 북소리..
성진하라..!
군령에 맞추어 학이 날개를 펴고
긴 울음 같은 포성이 울리니..
적들을 품에 안고
적들의 죽음을 조였나니..
울리나니 승전고요..
나부끼느니 승전기라!
하성군님..어디 있어유..ㅎ
@일심 집에서 대패삽겹을..ㅎ
@하성군 하성군님 시간되는 줄 알았더라면 함께 했을 텐데...ㅠ
@진해현감 애쓰셨습니다.
지난번 한산도 통제영을 방문했을 시기에
부산방향을 굽어 보았습니다. 神이 창조한 절묘한 섬!
한산도 였습니다. 적의 西進을 막고 감시할수 있는 기가막힌 위치!
장군께서 이러한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작전이 아니었나 합니다.
계사년에 5월 8일에 제6차 출동을 시작한 이후...7월 14일..한산도로 전진기지를 정할 때까지 ..2달 여 동안..거제 인근 바다를 오가며...진칠 장소를 면밀히 살펴 본 것 같습니다. 이후..조선의 주력부대는..각각의 본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칠천량 해전까지 한산도에서 머무르면서 작전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ㅎ
아직 한산대첩축제 홍보지에 실리기 전 따끈따끈한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에고..지부장님..이제 귀가 중...4차까지 했어요..ㅎ
넹...이거 보내고...어제 진해 간 것이랍니다...ㅎ
한산대첩은 이 글의 정독으로 깨끗하게 정리가 될테인데..
부산대첩은 언제 나올꼬?
기다립니다.
일심님! 부산에는 오겹살 육겹살도 있습니다. ㅎㅎㅎ
부산지부장님은..자나깨나..부산대첩이시네요...오겹살에 소주 한 잔 하러...부산 한 번 가겠습니다...ㅎ
한산대첩이 한산도와 현재의 통영 지역에 미치는 의의에 대해 잘 읽었습니다~~
더운 여름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요~
한산도에 '바다의 통제영'을 설치한 것과...정유재란 종료 이후...두룡포에 통제영을 설치한 이유가 거의 유사하다고 생각되네요....남해의 가운데...에 있으면서 부산을 비롯한 경상도와 호남을 지키기에 가장 적합한 곳...그 곳이 바로 통영인 것 같습니다..고맙습니다...ㅎ
일심님 글 접하되어 반가히 잘 읽었습니다
더운 날씨 건강 하십시요
넹...더운 여름...동에 번쩍..서에 번쩍...활약하시는 해주오씨님...화이팅!....입니다...고맙습니다...ㅎ
한산해전을 다시 생각하며(1)
이렇듯 유명한 한산대첩인데...몇 가지..불분명한 것이 있어요...바로..한산해전에 참전한 조선 수군 함대의 함선 척수 입니다. 일본의 함선 세력은 ..이순신 장군의 장계에 분명히 대중소선 73척으로 기록되었는데..정작 우리의 함선 척수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장계에는..경상우수영의 함선 세력이 7척이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제2차 출동 때 참여한..전라좌수영 23척..전라우수영 25척을 기준으로 유추해 보면..여기다.. 경상우수영 함선 7척을 더하면 되니까....55척 정도가 되는 것인데요..
그런데 일본측 기록인 <고려선전기>에는...한산해전에 이어 벌어진..안골포해전에 참여한 조선의 함선 세력을..대선 58척(맹선[거북선] 3척 포함)..소선 50척 총...108척으로 되어있습니다..당대의 자료로써 한산해전에 참여한 조선함선세력을 가장 자세하게 기록하였다고 보여집니다.
저도 글 읽다가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108척?
잘 다녀가셔서 다행입니다.
진해현감님이 애 쓰셨군요..
@동자갑선 부회장님꼐도..바람맞고...이제..정말 ..뒷방으로 물러나야할 것 같아요...ㅎ
한산해전을 다시 생각하며(2)
또 하나의 문제는..한산해전에 참여한 거북선의 척수 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장계를 보면...본영 거북선과 방답진의 거북선은 분명히 확인되는데..순천부의 거북선은 확인이 안됩니다. 그러나..일본의 자료인 <고려선전기>에 위에서 처럼...3척이라고..기록되어 있으니..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부산파왜병장의 장계 내용에 의하면 본영 거북선의 토병 정인이, 박언필이 부상을 입었고, 방답거북선의 격괄군인 종 춘세와 종 연석이 중상에 이르지 아니할 정도의 상처를 입은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순천 거북선은 잘 만들어져서 부상자가 없었나 봅니다.
한산해전을 다시 생각하며(3)
한산도로 진을 옮긴 시점도...생각해 볼 여지기 있는 것 같아요...계사년 일기에는 음력 7월 14일..한산도 두을포로 진을 옮겼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이충무공전서> 권 15..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작일(어제) 진을 한산도로 옮겨..해로를 막을 계책을 실행하고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은상 선생님은 이 편지가 7월 16일 쓴 것이라 하였으니..이를 기준으로 보면...7월 15일...진을 옮긴 것이 됩니다. .7월 14일과 7월 15일..저는...일기를 신뢰하고 싶네요..ㅎ
뵈옵는것 처럼 반 갑고 글 잘읽고 공부 했습니다,건강하십시요,
넹...경상우수사님..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습니다...건강에 이 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듯 합니다..무더위...내내 건강하시길..기원드립니다....ㅎ
오늘도 폭염경보 속에 엄청 덥습니다. 한산대첩을 <한산도 바다에서 왜놈들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저는 그 이면에 두가지 점에 주목합니다.
우선 날짜가 7월8일(양8/14)이라는 점, 그 더운 여름날에 하루 죙~일 격군들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땀흘려 범벅이 돠면서 노저어 싸우지 않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는 사전에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으면 실전에서 학익진을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요즘처럼 무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수신호 깃발로 연락했을텐데, 한 두척도 아니고 55척이 분란하게 움직여서 전투를 하려면 사전에 엄청난 훈련량과 리더의 지략이 있었던 듯 싶습니다.
장계를 살펴 보면...이순신 장군은 전라우수영 함대와 만나면..꼭 진형 훈련을 한 것으로 나옵니다. 제3차 출동하기에 앞서..이순신의 전라좌수영 함대와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는 7월 4일 저녁에 만나서..7월 5일...하루 종일..해전 진형 훈련을 한 것이 확인됩니다. 아무리 이순신 장군이라 한들..장병들과의 훈련없이..어떻게 이런 전과를 창출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3차 출동은..내내 폭염 기간이었으니.. 한산해전 당일(양력 8월 14일)..아마..노를 젓는 격군이나..활 시위를 당기는 사부들...총통의 화약을 쟁기고..불을 붙이는 총통 운영 요원들..모두들..땀으로 범벅이 되고...숨은..턱까지 차 올라왔을 듯..합니다. 이 무더위에..
전투를 치렀던 조상님들을....다시 생각하게 해주신 송현마을님...감사드려요....덥다고도 못하겠네요....ㅎ
나라를 구하려는 굳은 마음 하나로 삼복더위에 치른 한산대첩의 전투 장면들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한산대첩의 승리를 되세기는 뜻에서 충무공이순신 장군 백원동전과 오백원 동전 학익진 학(두루미)를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일심님! 공부 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날씨도 더운데..버드나무님..열공하고 계시네요....그리고..버드나무님의 이충무공에 대한 존경심...저를 부끄럽게 하네요....잘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