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는 말은 해를 가리키고 ‘타’라는 말은 달을 가리킨다. 해와 달은 양과 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타요가는 우리 몸의 양기와 음기를 서로 조화시킨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하타요가는 여러 가지 동작과 호흡법을 통하여 육체와 정신의 단련을 위주로 하는 요가이다. 보통 시중에서 미용체조 위주로 하는 요가로서 우리 나라에 가장 널리 소개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요가가 바로 이 하타요가이다.
하타요가의 여러 동작들이나 호흡법들은 우리들의 의식을 각성시키고 영혼을 정화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러나 동작이나 호흡법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마음을 제대로 닦지 않으면 그것은 사상누각과 같다. 이러한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올바른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안목이 그만큼 중요하다.
아무리 고난도의 동작을 한다 하더라도 마음이 제대로 닦여 있지 않으면 그것은 서커스나 기계체조에 가까운 것이지 진정한 요가와는 거리가 멀다. 진정으로 명상이 무엇이고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그렇게 요란하고 복잡한 고난도의 동작들을 취할 필요가 없다.
‘라자’라는 말은 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라자 요가는 왕의 요가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특이한 자세나 호흡법보다는 의식각성법을 위주로 하는 요가를 라자요가라고 한다. 아무래도 명상의 정수는 특이한 자세나 호흡법보다는 순수하게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자요가는 하타요가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많이 쓰인다.
라자요가라는 개념은 때로는 매우 막연하고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명상법도 각 문파마다 천차만별이어서 일률적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대체로 의식을 한 곳에 모아 산란한 마음을 가라않혀 마음 깊은 곳의 고요와 평화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물론 고요와 평화가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라자 요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요가가 그러하듯이 우주의식과 하나가 되어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만트라’라는 말은 眞言(진언) 내지는 呪文(주문)이라는 뜻이다. 우주는 극미세계로부터 극대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파동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소리는 각기 고유의 파동영역을 지니고 있는데 그중에서 어떤 특수한 소리들은 우리의 마음을 더 빨리 각성시키는 힘이 있다. 진언이나 주문은 바로 그러한 특수한 소리를 가리킨다.
만트라 요가란 진언의 반복을 위주로 하는 요가이다. 주문을 계속 반복함으로써 그 힘을 증폭시켜 우리의 의식을 보다 각성된 어떤 상태로 만들려는 것이 만트라 요가의 목적이다.
전세계 어디에나 주문을 이용하는 명상법이 있다. 고래의 주술사들은 대개 주문을 애용하였다. 중국의 도교도 주문을 이용하는 것이 주된 명상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만트라 요가에는 직접 입으로 소리를 내는 방법도 있고, 입으로는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반복하는 방법도 있다. 입으로 소리를 내든지 마음속으로만 반복하든지 간에 그 진언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만트라 요가는 고도의 정신집중을 불러올 수 있고, 그 정신집중이 초능력을 부르기도 한다. 예로부터 초능력을 행하는 사람 가운데 만트라 요가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지금도 흔히 장난으로 ‘수리쉬 마하수리’라는 만트라를 하면서 도술을 부리는 흉내를 내기도 하는데, 이는 그러한 사실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다.
만트라 요가는 단지 정신을 집중하거나 초능력을 개발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한 것은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하다. 만트라 요가의 근본목적도 다른 요가와 마찬가지로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다.
만트라 요가는 간단하고 효과가 빠르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는 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현재 불교에서 많이 하는 呪力(주력)수행은 바로 만트라 요가의 영향으로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석가모니는 주력수행법을 가르친 적이 없고 초기 불교에도 이러한 수행법은 없었다. 이것은 대승불교가 후기에 이르러 밀교화되면서 불교 내에 요가와 탄트라적인 요소가 대거 스며들 때 그 영향으로 형성된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 불교의 주력 수해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산스크리트어 원문인 진언을 가지고 하는 방법과 부처와 보살의 이름을 가지고 하는 방법이다. 산스크리트어 진언으로는 ‘옴마니반메훔’이나 <천수경>에 나오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고, 불보살의 이름으로는 관세음보살,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등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일심일념으로 진언이나 이름에 몰두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의식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소리를 내어 주력수행을 하면 더 빨리 효과를 볼 수 있다. 소리의 힘은 여럿이 같이 할 때 더욱 증폭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사찰이나 불교 수련장에 가보며 많은 불교 신자들이 목탁에 맞추어 밤새도록 ‘관새음보살’이나 ‘석가모니불’을 계속 부르는 수행법을 행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주력 수행과 비슷한 것으로는 염불 수행이 있다. 염불은 그야말로 불보살의 이름을 부른다는 뜻이다. 염불수행은 주력수행처럼 소리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그 불보살의 이름을 입으로 부르거나 마음속으로 외우면서 그들의 거룩한 모습이나 무한한 자비의 위력등을 마음속으로 그리는 것을 더 중시한다. 이것은 종교적인 신앙심을 이용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 사람들은 추상적이고 본질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이고 현상적인 것을 더 좋아한다. 그것이 훨씬 직접적으로 와닿기 때문이다. 주문과 부적 중에서 수련법으로서 더 호소력이 있는 것이 주문이다.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보통의 경우 청각이 시각에 비해 우리의 의식에 더욱 직접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음악이 미술보다 대중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직접 소리를 내서 하든지 마음속으로 하든지 간에 주문은 우리의 의식을 빨리 집중시켜 어떤 상태로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 마음속으로라도 계속 같은 소리를 반복하면 고유의 파장의 장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주문을 여럿이 같이 하는 경우에는 더욱 강력한 효과를 낸다. 게다가 약간의 호흡법과 일정한 형식을 갖춘 예배의식을 더하면 그 위력은 더욱 막강해진다.
그러나 주문 명상법은 어느 정도 의식의 차원을 심화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어도 완전한 대자유인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는 데는 오히려 미세한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특정한 주문을 통하여 우리의 의식을 특정한 상태로 만드는 것 자체가 더 깊게 보면 우리의 의식을 구속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은 보통 때에는 거친 파도에 휩싸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거친 파동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트라가 만들어 내는 파동은 훨씬 미세하다. 만트라를 계속 반복함으로써 우리는 점차 그 미세한 파동에 젖어 들 수 있다. 그 미세한 파동에 젖어 들면 거친 파도와 같던 우리의 마음이 바람 없는 날의 아침 호수같이 잔잔하고 고요해진다.
그러나 미세한 파동 또한 파동이다. 궁극적인 깨달음의 세계는 어떠한 파동도 없는 세계이다. 즉, 물결이 일어나기 전의 세계이다. 만트라를 통한 방법으로는 우리의 마음을 고요한 호수의 잔 물결 수준으로 만들 수는 있지만 물결이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를 알 수는 없다.
물론 주문을 강조하는 명상법에서는 주문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가서 주문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주장일 따름이다. 의식의 구조와 원리상으로 보았을 때 특정 주문에 의해 형성된 미묘한 마음의 힘은 그리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이 미묘한 힘은 나중에 수행자의 의식이 궁극적인 세계로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주문을 외우면 그 주문이 지니고 있는 문화적.종교적 집단주관의 틀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명상법들도 집단주관의 틀의 영향을 받지만 주문 명상법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한 편이다. 왜냐하면 말이라고 하는 것보다 집단주관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우리의 의식을 강하게 구속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말 속에는 개념과 이미지가 있고, 우리는 그 개념과 이미지를 통하여 이 세상을 이해한다. 즉, 말은 우리에게 이 세상을 인식하는 틀을 제공한다. 그것은 물론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집단주관의 틀이다.
주문은 말을 사용하는 명상법이다. 그 속에는 우리가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어떤 특정한 이미지와 개념들이 숨어 있다. 요가의 만트라를 외우면 요가적인 의식상태에 들어갈 것이고, 불교의 진언을 외우면 불교적인 의식상태에 들어갈 것이고, 도교의 주문을 외우면 도교적인 의식상태에 들어갈 것이다.
어떤 주문을 열심히 외우면 여러 가지 신통이 열리기도 하고 미묘한 세계를 체험하기도 한다. 그 종교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자신들의 종교의 효험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집단주관적 착각으로 진정한 깨달음이나 진리와는 한참 거리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주문을 외우는 방법은 그리 수준 높은 명상법이 아니다.
‘얀트라’라는 말은 도구, 도형이라는 뜻이다. 어떤 특정한 소리들이 우리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힘이 있듯이 어떠한 특정한 형태 또한 우리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힘이 있다.
예컨대 이스라엘 국기에 있는 다윗의 별은 정삼각형을 바로 세운 것과 그 정삼각형을 거꾸로 세워 놓은 것을 합친 매우 단순한 도형인데, 거기에서 신비한 힘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히란야 파워’라고 한다. 그리고 피라미드 모양을 지닌 물체에서도 신비한 힘이 나온다고 한다. 이것을 ‘피라미드 파워’라고 한다.
얀트라 요가는 주로 사각형, 삼각형, 육각형, 언형 등의 추상적인 도형들을 배치한 특수한 그림을 바라보면서 명상한다. 얀트라가 표현하는 세계는 주로 우리 내면 의식의 세계를 추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불교에 만다라라는 말이 있는데 엄밀히 말해 얀트라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거의 같은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우리 나라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탱화들은 만다라를 그러니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적 같은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얀트라라고 할 수 있다.
얀트라나 만다라나 부적 등에는 각기 고유한 기운이 있는데 기감이 발달한 사람들은 그것들에서 나오는 기를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을 자신의 기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얀트라를 계속 바라보면서 집중을 하다 보면 의식이 점차 변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일상적인 의식의 차원을 넘어 내면의 심오한 의식세계를 체험할 수도 있다. 이 얀트라 요가는 특히 시각이나 형태감이 발달한 사람들, 예컨대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더욱 어울린다.
얀트라 요가는 만트라 요가에 비해서는 행하는 사람들이 드문 편이다. 우리나라 불교사찰에도 만다라를 그린 탱화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구체적인 수행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부적이라고 하는 것도 주로 사악한 기운을 방지하는 용도로 쓰이지만 그것을 통해 구체적으로 정신집중을 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그 이유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시각적인 효과가 청각적인 효과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강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얀트라 요가 또한 만트라 요가와 마찬가지로 의식을 특정한 상태로 끌어올리는 데는 효과가 있지만 깊은 깨달음을 얻는 데는 한계가 있다.
‘쿤다리니’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원초적인 힘이다. 인도철학에 의하면, 우주 창조의 근원적인 힘이 소우주인 우리 인간의 몸에도 숨겨져 있는데 그것이 바로 쿤다리니라고 하는 것이다.
쿤다리니는 우리 몸의 항문과 성기 사이인 회음 안쪽에 나선형의 모양으로 숨겨져 있다고 한다. 흔히 똬리를 튼 뱀의 모양으로 묘사된다. 영어로는 ‘serpent power'라고 하는데, 뱀의 힘이라는 뜻이다. 이 쿤다리니는 성기 근처의 회음에 숨어 있다가 요가를 통하여 각성이 되면 척추를 따라 올라가 정수리에 이른다고 한다. 쿤다리니가 각성될 때 몸과 마음은 크게 변하여 여러 가지 초월적인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모든 요가는 쿤다리니를 각성시키려고 하는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동작이나 호흡으로 쿤다리니 각성만을 중점적으로 하는 요가를 쿤다리니 요가라고 한다. 요가에서는 쿤다리니가 완전히 각성되어 정수리까지 올라갈 때 비로소 깨달음이 완성된다고 한다.
그러나 쿤다리니의 각성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다른 명상법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선사들에게는 이러한 체험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의 관점으로는 쿤다리니의 각성이 깨달음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쿤다리니의 각성자체가 깨달음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쿤다리니 요가는 물론이고 요가수행을 전해 해보지 않은 일반인 가운데서도 쿤다리니가 각성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쿤다리니가 각성되면 종종 초능력을 동반하기도 한다. 명상에 대한 안목이 전혀 없는 가운데서 쿤다리니가 각성되거나 초능력이 생기면 도리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특히 조그마한 초능력을 깨달음이라고 착각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쿤다리니 요가는 매우 특이한 호흡법과 정신집중법을 동원하여 행하는 명상법으로서 스승없이 함부로 수행할 경우 매우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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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고맙습니다..
요즘 요가원들이 많이 생겨나는데 몸과 마음을 다스릴수 있는 곳이어야 하는데..거의 다이어트가 목적이죠.
상업적인 요가는 오히려 독이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