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조선의 연회
내 거주지는 "재의 거리”라는 거리에 있었다. 이 거리는 남북으로, 도시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수 마일에 걸쳐 뻗어 있었다. 직선이었다면 꽤 위풍당당한 했었을 지도 모른다. 운치만 따진다면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단자일반적인 의도였을 뿐이고, 마치 도시를 어슬렁어슬렁 산책하듯이, 실제로 변덕스럽게 여기서는 오른 쪽으로 저기서는 왼쪽으로 꺾였다. 길의 폭도 가변적이었다. 이제, 그것은 외길로 축소되었다가 다시 광장 같은 것으로 확장되었다.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집들이 길을 침범하면 침범하는 그대로 이어졌다. 또, 심하게 돌출된 벽이 있으면 그에 따라 줄어들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가, 곧, 방임하듯이, 얼핏 무제한으로 확장되었다.
다른 길과 마찬가지로 이 길도 공간이 넓어지면, 유서 깊고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수많은 무단 점유 간이상점들이 차지했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조선식 통행로였다.
길이가 길어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것이 하나인지 여러 개인지 의문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의 강들의 이름을 볼 때, 이름이 여러 개라는 이유로 하나라는 정체성을 훼손한다는 결론을 섣불리 내리지는 않는다. 남쪽에서는 왕실의 영묘(靈廟) 앞에서부터 당당하게 시작하였지만, 아무도 이 신성한울타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무용지물이었다. 그래서 이 거리는 사람이 걸어 다니게끔 외벽을 따라 특정 교차로와 연결될 수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길이 넓어질 수 없었다. 하지만 북쪽은, 내 집 문 앞을 통과한 후 얼마간 더 뻗어 있었는데, 그중요성이 크게 떨어졌고, 협곡을 따라 올라가다가 마침내 자연 상태의 정원(혹은 공원)에서 끝이 난다. 이 공원에는 "파란 일각수 계곡”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 너머 산의 돌풍으로 만들어진 작은 계곡 중 하나였으며, 위쪽 끝에 반원형의 둔덕으로 둘러싸여 꽤 경사지게 움푹 파인 곳이 있었다.
비록 모래 바닥이었지만, 작은 골짜기는 울툭불툭한 소나무들이 자리 잡았으며, 골짜기 정상에 골짜기를 둘러쌓은 성벽이 있어, 사실상 다른 세계와 단절되어 있었다. 성벽은 흙으로 만들어 물에 적셔 접착시킨 후 쌓았다. 마르고 나니 하나의 단단한 덩어리가 되었는데, 지금까지는 마치 계곡의 외딴 곳에 자연을 이용한 방어벽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골짜기 입구에는 동네 여자들이 물을 긷는 우물이 있었고, 바위 위에는 그곳 이름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큰 길은 바위 바로 바깥쪽에 있는 통행문에서 끝이 나는데, 좁은 길은 이 통행문을 지나 계속 이어져 계곡의 한쪽을 따라 올라가다가 반원형으로 꺼진 곳의 꼭대기에 있는 두서너 개의 정자 앞에서 멈추었다.
이 자연적인 원형경기장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우주의 고요함이 감돌았다. 도시의 소음은 아래 쪽 움푹 꺼진 곳에서 사라졌고, 그 고요한 곳에서는 옆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무들 사이로 도시가 잠깐씩 발밑에 보였으며, 그 너머로 파란 빛이 도는 남산의 산등성이가 솟아 있었다.
음력 섣달 초순의 어느 날, 그 평온한 고요가 무자비하게 침략 당했다. 가마꾼들이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올 때, 몇 달 동안 작은 계곡을 감싸고 있던 고요한 정적이 깨졌다. 한 대가 지나가자마자 다른 한 대가 그 뒤를 따랐다. 남여가 차례로 계곡을 타고 올라가 꼭대기에 다다랐고, 정자 앞 난간에서 차례로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을 토해냈다. 한겨울이라 날씨가 너무 추워서 밖으로 나온 관리는 난간 저쪽 구석에 서 있는 일종의 여름별장으로 급히 피난하였다. 이 정자 안으로부터 창호지 문을 통해 이미 온 손님들의 흥겨운 소리가 벌써 들려왔다. 그는 문을 밀치고 안으로 사라졌다.
모임 행사는 외무부 관리 중 한 명이 외무부를 위해 연 연회였다. 고위 관리들은 각자가 차례로 다른 관리들에게 베풀 수 있는 일련의 만찬에 대한 행복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향응을 교묘하게 단번에 확보했다. 이것이 연속물의 첫 번째였고, 파란 일각수 계곡이 첫 만찬 장소로 선정되었다. 그 모든 신성함에도 불구하고, 그 장소가 존재하게 된 것은 단지 그런 목적을 위해서였다. 가장 아름다운 장소들은 언제나 유흥 장소로 선택되는데, 꼭 연회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 편안히 풍경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오늘 같은 경우 불편하기 때문에 이런 예찬은 불가능했고, 저녁 식사는 다른 곳에서 보다 더 저녁다웠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주요한 존재이유를 박탈당했더라도, 공원의 한가운데에서 열린 만찬은 영내에서의 만찬보다는 그들의 생각과 더 잘 맞아떨어졌다. 파란 일각수는 무자비하게 겨울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앞 사람들을 따라 난간을 걸어가 여름별장으로 들어갔다.
여름별장은 시의 신전이었다. 그 안의 벽은 시로 덮여 있었다. 우연히도, 바로 이 잔치를 베풀어준 관리의 작품이다. 그 집은 두 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중 첫 번째는 하인들이 대기실로 쓰는 방인데, 하인들은 날 보자 뒤로 물러서서 나를 지나가게 했다. 추위를 쫓기 위해, - 종이 벽은 있지만 추위를 막기에 충분하지 않다 - 화로를 안쪽 방 중앙에 놓아두었다. 이 주변에는 등받이가 높은 의자가 드루이드원처럼 배치되어 있었고, 일행이 의자에 앉아 열심히 담배를 피우고 농담했다. 그래서 그들은 저녁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몇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조선의 잔치는 하루 종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만약 잔치가 너무 성급하게 시작된다면, 결국엔 시간이 남아 참가자들의 정당한 쾌락에 대해 자책감을 느낄 수도 있다. 화로에도 불구하고 매우 추웠지만, 조선인들은 매우 두꺼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연하게 앉아 있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일본사람들보다 이성적이다. 일본인들은 관습이 복장을 대신하는 것 같고, 겨울이면 우리들 대부분이 단순히 얼어붙을 것 같은 옷을 입고 불행의 그림 주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다른 나라에서 폐질환으로 죽는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나라에서 더 흔하게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녁 식사 전의 시간은 결국 과거가 되고, 마침내 우리는 다른 정자로 소환되었다.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관리들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조선인은 옷을 입는 대신 저녁을 먹기 위해 옷을 벗는다. 그 관습은 칭찬할 만하다. 그는 더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한다. 아마도 우리가한 번은 음식에 대해 토론하고, 다른 한 번은 흥미 거리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도 똑같이 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두 번째 정자가 아직 데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을 따라할 마음이 없었다. 우리는 모두 여덟 명으로 큰 직사각형의 식탁에 자리를 잡고 먼저 국과 술이 내어 왔다. 이것이 첫 번째 순서였고, 그 동안 식탁은 손도 안 댄 채로 있었다. 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음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접시들은 반구형의 놋쇠 그릇들이었다. 이것들은 고기, 생선, 채소, 과일로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릇의 용량을 넘어 공중으로 높이 위엄 있게 치솟았다. 그릇마다 절편들이 차곡차곡 가득 포개져 있었는데, 그릇의 모양을 따라 가장자리 위로 올라가면서 꼭대기는 둥글게 원통의 탑을 쌓았다. 한 그릇에는 고기를 잘게 썰고, 또 다른 그릇에는 생선을 썰고, 세 번째 그릇에는 반죽을 구운 것 등등이 있었다. 극동의 어떤 음식도 완벽히 마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피라미드는 매우 견고해서 의도적으로 흐트러뜨리지 않는 한, 마침내 전체가 없어질 때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였다. 분명히, 일부를 덜어낸 후에도 나머지는 무너지지 않았다. 식탁중앙에 걸작이 있었다.
다른 모든 접시들은 단지 주변의 들러리들이었다. 그것은 주위의 그릇들보다 다소 크기도 하거니와 쌓은 음식의 높이도 그것들보다 훨씬 높았다. 그것은 최고의 공예품이었으며, 선의 아름다움은 확실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것은 우아한 반구형 뚜껑을 가진 원통형 그릇으로 그것의 독특한 장점은 분획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각각 전체의 사분면을 차지하고 있는 4가지 종류의 과일이 촘촘하게 쌓여 있었다. 한 부분은 전적으로 귤, 다른 부분은 배, 세 번째 부분은 곶감, 그리고 네 번째 부분은 밤이었다. 이들 사이의 구분이 너무 분명해서, 세 부분을 제거해도 네 번째 부분은 여전히 쌓인 채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뉴욕 꽃집들은 꽃 별로 나누어지게 꽃다발을 만드는데, 그럴 이유가 많음에도 조화롭지 않다. 그 과일탑이 그러했다. 식사할 때 명백하게 드러났듯이,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찬사를 받을만하게 한 가지씩 빼먹는 편리함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여전히 국을 먹고 있었다. 이것은 여러 관리들의 몸종들이 이웃 방에서 뚜껑 덮인 도자기 그릇에 담아 들여왔다. 몸종들의 수는 많아서 모든 일을 하는 한 사람을 위해 네댓 명이 옆에 서서 명령을 반복하고,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들려주며 그를 격려했다. 하지만, 그들은 요리사가 아니라 종업원이었기 때문에, 국 끓이는 일을 망치게 하지는 못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술과 맥주를 내놓느라 바빴다. 이 맥주는 최근에 수입되었고, 이미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조선에서도 완전히 자리 잡았다. 일본은 수입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스스로 제조를 시작한 지 오래되어, 이제는 많은 토종 양조장이 대도시의 주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 있어, 일본인들은 그 제품 제조 자체가 외국 상표의 위조보다 훨씬 더 수익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국 상표의 위조는 한때 가장 수익성 이 좋은 사업이었다.
국그릇을 치우자 수행원들은 이때까지 있던 탁자 중앙에서 그 거대한 높이에 대해 나의 무한한 감탄을 불러 일으켰던 음식들 중 일부를 차례대로 돌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경이로운 요리 건축을 파괴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요리의 일관성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부는 쇠고기, 일부는 돼지고기, 일부는 얇게 바른 노란 생선살 튀김으로 구성되었다. 대부분이 조선인에게는 즐거운 방향제였고, 외국인의 입맛에도 결코 부적절하지 않았다. 쌓은 봉분중하나가 나에게 바쳐지고 있었고, 완고한 내부를 파헤치고 있을 때, 나는 연회장 저쪽 끝의 소동을 알아차렸다. 마침 고개를 돌려 시종들 틈에서 아름다운 환영이 방 안으로 펄럭이며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가장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고 매우 깨끗한 젊은 여성이었다. 이러한 자연과 예술의 결합 속에서 그녀는 매우 돋보이게 빛났는데, 단정함만이 이 민족의 뛰어난 특징이라고 할 수 없다. 그녀는 꽤 수줍어하며 앞으로 나아갔는데, 짐작했던 것처럼, 갑자기 그녀가 나를 보게 되었다. 그녀는 마치 유령을 본 듯했다. 그녀의 수줍은 겸손함은 곧 거짓 없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녀는 방의 가장 먼 구석으로 가, 보호하려는 듯 몸을 움츠렸다.
모두가 웃기 시작했고, 나를 호랑이라고 불렀는데, 끔찍한 사람들에 대한 조선어 직유였다. 그녀에게 그 이름은 진짜였다. 하인들이 그렇게 하게 했다면, 그녀는 방에서 도망쳤을 것이다. 말 그대로 그녀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움츠려 서 있었고, 처음에는 일행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모든 감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비록 내가 어느 정도 길들여진 호랑이기도 했지만, 마침내 그녀는 스스로를 달래,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탁자에 앉았다. 그녀는 가끔씩 내 방향으로 슬쩍 시선을 보내며, 내가 여전히 조용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신했다. 저녁 식사가 길어지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쾌활함을 회복했지만, 그녀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낯선 사람과 사교적이 되기까지는 여러 끼의 저녁 식사를 같이 할 필요가 있었다.
그 다음 사람은 다행히도 외국인에게 그런 강한 혐오감을 보이지 않아, 나는 잠시 행복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호기심은 두려움보다 강했고, 게다가 그녀는 이미 그 문제에 대해 약간의 경험이 있었다. 적당히 처녀다운 거부감을 보인 후, 그녀는 내 옆에 앉도록 이끌려 수줍게 잔치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왔다. 이 매력적인 사람들은 밝은 분홍색, 파란색, 보라색, 녹색 등 가장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재질은 주로 비단이고, 외투와 모자는 털로 다듬었다. 그들의 머리는 그들의 옷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아름다운 소박함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곧장 뒤로 쓸어 넘겨 닿은 후 끈으로 묶어 올렸는데, 그 뒤로 은으로 된 크고 두꺼운 핀이 질러 있었다. 그들은 이 핀을 꽤 자랑스러워했다. 그것은 길이가 6인치이고 지름이 1/3인치 정도였는데, 끝은 여전히 크다. 그들의 검은 머리칼에 효과적으로 빛났다. 그들의 옷은 위는 짧고 꽉끼며, 아래는 긴 치마였다. 치마와 머리 장식의 효과를 합치면 일본 여성이나 심지어 중국 여성들보다 훨씬 더 유럽적인 외모를 연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측면에서 그들은 여성의 전형과 확연히 달랐다. 그들의 허리는 어떤 신비로운 이유로 겨드랑이와 수평을 이루었다고 생각되는데, 이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그들의 몸매에 큰 손상이었다. 그러나 망가짐에도 불구하고 묘한 아름다움이 남아 있었다. 그 처녀들은 조선의 노래하는 처녀들이었다.
이제, 여악은 극동의 한 단체다. 그 단어만 보아서는 무슨 사람인지 잘 모른다. 계급을 과대 포장하는 일본에서 그들은 ”기생”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재주가 많은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이고,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들의 의무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들이 하는 일은 노래하고, 놀고, 이야기하고, 시시덕거리고 일반적으로 가능한 한 유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이 구성하는 사회는 조선의 유일한 여성사회다. 일본 여성들은 서구 사상에 영향을 받기 전까지 몇몇 궁녀들을 제외하고는 결코 남자들의 동반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가장 좁은 의미에서 아내, 어머니, 그리고 가정부였다. 이러한 여성사회의 결핍을 공급하기 위해 기생이 존재하게 되었다. 기생은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친 후, 항상, 기생만 제외하고 오직 남자들만 모인 연회를 더 재미있게 만드는데 일생을 바치는 전문 연예인이다. 그런 단체는 인기가 많아서, 도쿄의 한구(區)의 기생들의 수는 수백 명이다.
조선에서는 직업 교양이 훨씬 덜하다. 서울에는 기생이 20-30명 정도 밖에 없고, 일본인 사촌만큼 뛰어난 존재는 아니다. 숫자 자체가 작다는 것은 개인의 우수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가 있다면 양만큼 질을 자극할 것이다. 하지만 서울은 큰 도시임에도 풍요로운 도시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관리들만이 종종 사치를 감당할 수 있다.
도화, 매화, 장미, 월선, 향란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처녀 꽃다발이 각 남자가 꽃을 가질 수 있도록 흩어지자, 하인들이 다시 잔을 채우며 기쁨의 물줄기가 두 배로 흘러내렸다. 여자들은 유별나게 개인적인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를 보냈다. 미인들의 노래는 슬펐다. 음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8분 음표는 애처롭게 흐느끼는 것처럼 들렸다. 이들 기생의 가장 눈에 띄고 매력적인 특징은 온화함과 섬세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들은 기생도 조선도 아닌 모든 극동 여성들의 특징들이다. 극동 여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일본인 사촌들처럼 자그마했다. 손발이 상당히 작고, 일본인과는 달리 머리도 작다.
그들의 발은 자연 그대로인 것 같았다. 타타르인들은 여성의 발을 전족으로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한편, 우리는, 다양한 고기를 먹은 후, 조선에 알려지지 않은 양고기가 아니라, 무엇이 나오나 에 관심을 가졌다. 커다란 알갱이에 갈색으로 구워 꿀과 함께 먹는 반죽으로 일본의 ”모치”와 비슷하며, 밀로부터 만드는 빵부터 면류에 이르는 많은 식품의 가장 흔한 대체품이다. 기이하게도, 일본인들은 단품으로 16세기 포르투갈인들의 유산인 스폰지 케이크를 먹는데, 아직도 일본인들의 입에서 발음할 수 있는 만큼의 포르투갈어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물론 이것은 조선에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은 꿀로 유명한데, 색깔도 다양하고 종류도 다양하다. 그것은 항상 벌집에서 짜내 제공된다.
길었던 조선의 만찬도 끝이 난다. 찬란하게 붉은 음료로 끝난다. 그것은 진홍색의 배즙에 잣을 띄운 형태다. 석양이나 가을처럼 붉다. 우리는 틈나는 대로 이 과즙을 홀짝홀짝 마셨고, 동시에 웅장한 중앙 과일 탑을 파괴 했다. 잔치가 끝난 후, 우리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수행원들은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이 봉사는 말 그대로 불필요한 사치였다. 담뱃대는 약 1야드 길이였다. 그것은 겨우 가능성의 범위 안에 있었다. 즉, 팔을 뻗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스스로 담뱃대에 불을 붙일 수 있다. 실현 가능하더라도 가장 편한 팔 뻗침이었다.
가장 기분 좋은 방법은 빨부리를 내밀면서 방의 다른 쪽 끝에 있는 누군가를 찾아 성냥불을 붙이게 하는 것이다. 이 경우 하인이 불을 붙여 빨아서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예의다. 비위가 약한 나는 항상 이것을 꺼려했다. 나는 담뱃대를 잡을 때마다 그 예식을 포기했다. 담뱃대는 가느다란 대나무로 만들어졌고, 담배통은 청동으로 빨부리는 놋으로 만들고 은도금으로 마감하였다. 형태는 같지만, 일본 것에 비해 훨씬 길다. 특히 마음에 드는 것은 담배통이 훨씬 커서 재를 떨고 담배를 채워 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우리 생각에, 담배를 다시 채우는 일은 일본사람들의 즐거움을 망치는 작업이다. 일본인들이 그 일에 그렇게 능숙하지 않다면 그것은 또한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할 것이다.
흡연은 조선에서 일본처럼 흔한 일이다. 즉, 모든 사람이 담배를 피운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은 어느 나라든 너무나 예외적인 일이기 때문에, 예 들어 일본에서 손님에게 보이는 최초의 관심으로 "타바코본” 즉, 재떨이 등이 있는 나무 상자를 돌렸을 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예외 없이 둘러대기를 안타깝게도, 담배를 배우지 못한 촌뜨기라서 죄송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평상시처럼 식후 사이 시간 동안, 여악들은 춤을 출 준비를 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벗은 것 같지 않게 여러 벌의 윗옷을 벗었다. 그들의 놀라울 정도로 똑 같은 옷을 많이 껴입어서 양파 껍질처럼 계속 벗었다. 눈앞에서 옷을 다 벗었는데 예전의 옷차림과 다름없다.(여기서 덧붙이자면, 조선인은 자기 사람들을 꼼꼼하게 보살피고, 이웃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출에 대한 무관심에 충격을 받는 사람들이다.) 준비를 마친 뒤, 그 중 한명이 바닥에 끌리지 않게 긴 치마를 걷어 올리고 이슬람교 춤을 추는 수도승의 자세를 취한 뒤, 팔을 수평으로 뻗은 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녀 자신의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그녀의 의도는 딴 데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한 방향으로 돌 수 있는지를 시도하는 대신, 그녀는 곧 그 동작을 뒤집었고, 심지어 다른 자세로 변화시켰다. 그 후 또 한 명이 합류해 전진, 후퇴, 반 무언극과 같은 온갖 동작을 펼치면서 계속 돌았다. 내가본 춤 중에 가장 느린 춤이었다. 약간의 음악이 곁들여졌고, 또 다른 기생의 노래에 고무되었다. 춤 이름을 팽
이춤 이라 부르면 좋을 것 같다.
조선 춤을 처음 접해본 경험으로 나에게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운 좋게도, 나는 그 후에 많은 다른 사람들의 매우 인상적인 춤을 보았다. 특히 일종의 군대식 춤이 그랬다.
짧은 오후가 저물고 관리들을 위한 등불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다. 이별의 표시였다. 조선의 회식은 밤이 아니라 낮에 벌어진다. 인공적인 빛은 이제 막 시작된 새로운 밤의 전조라기보다는 지나간 낮의 황혼이다. 우리는 모두 집에 갈 준비를 했다. 3피트 높이의 등불이 그 광경에 적지 않게 일조 했다. 안에 있는 촛불은 관직에 따라 밝은 붉은색이나 녹색, 또는 두 색이 반반으로 된 천으로 덮여 있었다. 이것들은 연회장에 둥글게 서서 칙칙한 빛깔을 내뿜거나 뜰로 운반되어 흔들렸다. 우리는 하나씩 가마를 불러 안으로 들어간 다음 - 수행원들이 많아서 가마 그 자체가 하나의 행렬이었다. - 골짜기를 내려가 집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