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쯤 전에 토평동에 선정비가 있다는 자료를 보고 찾으러 갔었는데 헤매다니기만 하다가 못 찾고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또 찾으러 갔습니다. 토평동 3069-1번지라는 것만 가지고는 참 힘들더군요. 어찌 됐든 찾았습니다.
찾아가는 길 ; 토평공업단지 가는 길(도로변 건너편에 제주감협유통센터와 신호등이 있음)로 들어서서 서쪽으로 난 500m 가면 서귀포시장애인복지회관 가는 길로 들어섭니다. 서쪽으로 700여m 가다가 북서쪽으로 길이 휘어진 다음 ‘청재설헌농장’ 간판이 세워진 '인정오름로102번지' 과수원 철문을 통과하여 안에 작업로로 약 50m쯤 가서 오른(東)쪽으로 보면 공동묘지가 있고 돌담에서 동쪽 30m 정도 되는 곳 소나무숲 사이에 있습니다.
찾아서 보니까
윤구동선정비, 송두옥선정비만 있는 줄 알았는데 육군중령홍서훈순직비, 경위변시윤순직비, 경위허행민순직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더군요.
우선 가운데 있는 비석 윤구동선정비입니다.
비문 ; 牧使尹公九東善政碑 飢天之災 飽公之德
(굶주림은 하늘의 재앙이오 배부름은 공의 덕일세)
가경이십삼년 삼월 일(가경23년은 순조18년, 1818)
비석 위에 있는 돌(가첨석)이 균형에 맞지 않을 정도로 큽니다.
특이한 것은 이 비석의 가첨석(위의 지붕 모양)은 다른 돌을 얹어 놓은 것이 아니라 비석과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송두옥선정비
전면에는 邑侯宋公斗玉善政碑라 새겼으며
‘千金自當 公何未慕’(천금을 스스로 부담했으니 공을 어찌 사모하지 않으랴)
‘百堵晏然 民且願羨’(모든 집들이 편안하고 백성들도 또한 우러른다)라고 새겼습니다.
(번역 김태국)
비석의 좌측에는 광서십칠년팔월일(光緖十七年八月日)이라 하여 고종 28년(1881) 8월에 세운 것입니다.
읍후 송두옥은 1880년대에 정의군수를 지낸 사람입니다.
그의 업적으로는
‘각리적비전 연름식리 갑오춘 이소미일백석진민 향장이세찬 존본식리 성전수보개와’
(各里籍費錢 捐廩殖利 甲午春 以小米一百石賑民 鄕將吏歲饌 存本殖利 聖殿修補改瓦)라 하여
각 마을의 호적 작성을 위한 비용으로 관아에서 주는 녹을 덜어서 이자를 놓았고
고종31년(1894) 봄에는 좁쌀 1백 섬으로 백성을 구휼했는가 하면
향 장리의 설날에 차려서 대접하는 음식으로 이자를 놓아 그 돈으로 성전(향교)의 기와를 보수하였다고 합니다.
(2001 西歸浦市誌 570~571쪽)
각 마을에 쓰이는 돈을 기록하고 (녹미, 구호미 ??)을 출연하여 이자를 놓게 하여
고종31년(1894) 봄에는 좁쌀 1백 섬으로 백성을 구휼했는가 하면
향에서는 관리의 歲饌(歲儀: 설날 보내는 선물)을 가지고 본전은 보존하며 이자를 놓아 그 돈으로 성전(향교)의 기와를 보수하였다고 합니다.(번역 김태국)
이 선정비는 다른 비석에 비해 2배 이상 커서 성인의 키만큼 큽니다.
그 다음은 순직연대순으로 볼 때 경위 두 분의 순직비입니다.
변시윤, 허행민 경위라고 되어 있는데 순직해서 두 계급 특진되었을 테니까 원래 계급은 순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문은 직접 읽어 보시면 되겠고,
1950년 9월 15일에 비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제주신보 1958년 10월 29일 자에 토비공로자 명단이라고 해서 두 분의 명단이 나란히 나오더군요.
경위 변시윤(邊時胤)-유가족 김사아(金四兒)
경위 허행민(許行玟)-유가족 임유생(任酉生)
그 이상은 모르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희생됐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어딘가 있을 텐데 아직 조사를 못했습니다.
일단 제주보훈청에 알아봐 달라고 전화는 해 두었습니다.
제주경찰청 자료에 의하면(2011년 2월 21일 통화)
두 분은 <4283(1950)년 9월 15일 서귀면 서호리 '드렁궤' 지경에서 공비와 교전중 순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주시 99곡쪽에 있는 충혼묘지에도 비석이 있다고 합니다.
끝으로 육군중령 홍서훈순직비입니다.
故陸軍中領洪瑞勳殉職之碑는 큰 글씨이고
왼쪽에 陸軍二中李仁鎬 陸軍下士尹德烈라는 작은 글씨가 있습니다.
뒤에는 檀紀四二八五年五月二十二日 故洪瑞勳 中領이 陸一訓第五宿營地區隊長으로서
强兵育成과 國軍이 母胎第一訓練所 發展을 爲하여 獻身努力하다가 初志를 一貫치 못하고
哀惜이도 殉職하였음으로 故人의 英靈을 追慕하고 業績을 받드러
陸軍 第一訓練所 全將兵이 이곳예 故人을 哀悼하는 뜻으로 建立한 것임.
檀紀四二八七年三月十六日 陸軍第一訓練所 將兵 一同이라는 글씨가 있습니다.
어디에서 무슨 일로 순직했는지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아서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 질문을 올려 봤습니다.
자유게시판은 믿을 게 못 되더군요.
며칠이 지나도 답이 없어서 2011년 2월 15일 국가보훈처에 전화(02-2020-5097)로 알아보니 홍서훈 중령에 관한 자료가 없다고 해요.
유가족이 있는 경우에만 '보훈'한다는 겁니다.
그럼 지금까지는 아니라도 앞으로 그 분의 후손이 나타났을 때 뭘 가지고 기다아니다를 판단할 건가요? 이럴 수가?
암튼 국방부에 자료가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2011년 2월 16일 국방부(02-748-1111)에 문의했더니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검색해서 읽어 주더군요. 참 다행입니다.
홍서훈 중령의 군번은 10743번이며
평북 출신 홍석희의 아들로 거주지는 강원도였다고 합니다.
1953년 5월 22일 08:15에 서귀면 서귀리 관사에서 출근하던 중 暴雨大水(폭우로 갑자기 불어난 큰 물)에 의해 순직했다는 것입니다.
(혼자 생각했습니다. 어느 내창인지는 모르지만 제주도 내창의 특성을 잘 모르고
세월공사가 되어 있는 내창을 무리하게 건너다가 차가 휩쓸려 버렸구나.)
이인호 이등중사(현계급 병장)는 운전원으로 추정된다고 대답했고,
윤덕렬 하사(현계급 상병)는 직책을 모르겠다고 하는데 저의 생각으로는 전령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봅니다.
세 분 모두 현충원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맨 위에 올린 사진에서는 다섯기의 비석이 모두 보입니다만
처음에 찾아냈을 때에는 가시덤불, 잡목으로 가려져서 도저히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홍중령순직비 왼쪽에 비석을 세웠던 좌대만 남은 게 하나 더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이 비석들이 한 줄로 나란히 맞추어 세워져 있는데 길이 아닌 곳에 숨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처음 세운 비석과 마지막 세운 비석은 140년의 차이가 납니다.
그 14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곳은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는 길이었다는 말이죠.
어떤 과정을 거쳐서 폐도가 되고 그 주변은 공동묘지로 변했는지가 궁금해집니다.
이렇게 관리를 하지 않고 내버리면 언젠가는 누군가가 없애 버릴 겁니다.
실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금 화북주공 자리에도 경찰순직비 4기가 있었습니다. 시멘트로 단까지 마련했고요.
주공단지 북쪽 시내버스정류소에서 60~70m 남쪽 지점이었습니다.
'대권지길'이라고 해서 일주도로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농로가 있었거든요. 그 길 서쪽 가에 있었죠.
화북주공 공사할 때 현장감독에게 이 비석들 중요한 거니까 절대 함부로 버리지 말고 잘 보존해 달라고 부탁을 해 뒀습니다.
공사가 끝나니까 없어졌더군요.
저의 권한으로는 누구에게 책임추궁할 수도 없고 그 때 책임자를 만나려고 애를 쓰며 돌아다닐 여유도 없고 그냥 속만 앓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중에 보니 동화초등학교 남쪽에 작은공원이 있는데
거기에 같은 내용의 비석이 새로 제작되어 세워져 있는 겁니다.
누가 세웠는지 알면 왜 옛 비석이 아니냐, 옛비석은 어디 있느냐를 따져 보고 싶은데....
이런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아야겠지요.
토평동 비석들, 어떻게 하면 보존을 잘할 수 있을지 회원님들의 의견을 모아 봅시다.
첫댓글 화북비석 새로 만들어 세운 것도 우리들 힘으로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장을 탐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을겁니다. 힘을 모으고 비상대첵위원회를 만들어 찾아나서기로 합시다. 그리고 토평비석에 관련하여도 도 문화정책과로 자문을
받아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울 대장님 정말 감사하고 고생하셨습니다.
경찰청에서는 전화통화중(2011년 2월 21일)에 나온 이야기라 아직 담당자 개인의 의견이겠습니다만 비석을 옮겨 가는 쪽을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관리의 편의성을 생각한다면 충혼묘지로 옮겨 놓으면 좋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역사유적은 제 자리에 보존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말씀드렸고요.
다른 비석들과 함께 온전히 보존되기를 희망합니다.
육군중령에 관한 얘기는 읽은 바가 있습니다... 자료를 가지고 있는데, 이분인지 아닌지는 다시 봐야 겠네요... 폭풍이 부는 야밤에 말을 타고 길을 건너다 급류에 휩쓸려 돌아가셨다는 분인것 같은데... 자세한 것은 다시 자료를 찾아봐야겠네요.. 내용이 아주 길어요..
자료 올려 주시면 정말 좋겠습니다. 동일인이지 확인할 수 있게요.
홍서훈중령 맞는거 같아요... 짐정리되는대로 자료 찾아보겠습니다...
사전에 토평동 선정비에 대해 한마디라도 하셨으면 바로 안내해 드렸을 텐데...고생하셨습니다. 두분 선정비는 회장님이 다쓰셨으니까 생략하고 군인 세분모두 사망후 모슬포충혼묘지에 묻히셨다가 1959년도에 국립현충원(서울)에 안장되셨습니다. 송덕비와 위령비가 있는 지역이 지금은 농장 안쪽 공동묘지지역이지만 훈련소 제5숙영지가 법호촌에 있을때까지는 지금의 법호촌에서 지금의 93대대(농장 바로 윘쪽)까지 길이 있었다 합니다. 묘지를 좌우에 두고 잡목이 우거진 곳이 길의 흔적이고 그 흔적은 묘지에서 돌담을 다시 넘어나오면 그 라인에 이어서 삼나무가 청재설헌 찻집이 있는 곳까지 쭉 심어져 있는것을 보셨을 겁니다
순직경찰 허행민경위(당시순경, 앞으로 쓸 다른분들도 1계단 또는 2계단 위의 계급입니다)는 서귀포시 서호동 출신, 변시윤(충혼묘지에는 묘비명이 변시봉으로 쓰여있음)경위는 서귀포시 서홍동출신으로 두분은 서귀포시 서호동에서 1950년 9월 15일 무장대 습격으로 사망하였습니다 .
(지금의 순직비있는 곳이 그 당시에는 영천동을 포함한 그 인근에서는 가장 큰길목이라서 그곳에 순직비를 설치하였습니다)
화북.
문광준 경감은 제주시 도두동출신으로 1948년 12월 5일, 김장하 경위는 오등동출신으로 1948년 4월 3일, 최형락경위는 황해도출신으로 1948년 10월 28일에 화북동에서 각각 무장대습격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임선길경위는 한림 수원출신으로 1948년 4월 12일밤(또는 1일 새벽) 제주읍 화북지경에서 무장대의 은거지를 공격하다가 무장대의공격으로 사망하였습니다.
화북비석은 공사하면서 없에버려 당시 제주경찰서(또는 화북지서)에서 마을에 이럴수가 있냐하여 마을에서 다시 세운것이라하고요.
경찰 어떤분이 답변하셨는지몰라도 대개의 순직경찰이 99곡 또는 출신마을별 충혼묘지에 별도의 비석이 다 있어서 경찰에서는 옮길계획도 관리계획도 없습니다.
마을에서 훼손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이고 마을에서 옮기거나 없에면 그리 되는 것입니다.
군인순직비도 이미 국립묘지에 안장된경우 이전 것은 군에서 관리하지 않습니다.
"화북비석은 공사하면서 없에버려 당시 제주경찰서(또는 화북지서)에서 마을에 이럴수가 있냐하여 마을에서 다시 세운것"이라는 내용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현재 화북에는 지서가 없는데 어느 때인지? 아니면 경찰서에서 비석의 소재를 알고 있었는데 없어진 다음에야 항의했다는 건가요?
또 없애 버린 주체가 마을이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화북주공 대규모 공사가 시작된 다음에는 마을에서 일부러 그 비석을 없애려고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없에버린 주체는 마을이 아닙니다. 공사간 그냥 없어진 것이지요. 솔직히 말하면 아무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비석을 없엤다고 항의한 것도 아닙니다. 글에도 썼지만 4.3당시 153명 전사경찰관은 심의를 거쳐 충혼묘지등에 다시 비석이 세워지고 안장이 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 세워진것에 대하여는 공식적인 의견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당시 화북지역을 관할하던 삼양파출소에서 이렇게 없앨수 있냐고 관내유지에게 이야기 했더니 고맙게도 화북마을에서 어딘가 공원에 다시 세웠다 한겁니다.
우리들이야 오리지날이 더 가치있다하지만 삐까번쩍 새것이 더 가치있다 하여 지금도 여기저기 끊임없이 改碑합니다.
문제는 원비석의 소재인데 그걸 알 방법이 없네요. 어디 묻어 버렸는지 아니면 깨부셔 버렸을까요?
아마 ...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마 깨졌거나 공사폐자재와 같이 뭍혔을 겁니다.
선정비나 공덕비는 문화재차원이니 도에다 이야기하면 좋은 답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도에서 정비한다면 선정비를 다른데로 옮기던지, 주변 순직비부터 치우던지 하면서 정비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김장하(金章河)는 화북지서(구 화북농협 자리에 있었음)에 근무하던 순경으로서 화북 중동네 민가에 세들어 살고 있었는데 서기1948년 4월 3일 새벽 집에서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부부가 함께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김 순경의 출신은 4.3은 말한다에는 육지 출신이고 처는 거로 마을 출신 현(玄)씨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등동 출신이라는 자료는 어디서 보신 건지요?
이 때 지서 안에서는 숙직하던 사환 이시성이 지서의 전소와 함께 불에 타 숨졌다고 합니다.
4.3당일 무장대는 대략 350명에서 400명 규모로 제주 도내(島內) 14개 경찰지서를 기습공격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4.3당일에 경찰관 사망 10명, 경찰관 부상 4명, 경찰관 가족 사망 3명의 인명피해를 입었고 재산피해로는 경찰지서 완전 소각 1동, 경찰지서 반 소각 2동, 경찰지서 반 파괴 3동이라 합니다. 무장대측에서는 4명이 죽었고 4명이 붙잡힌 바 있습니다. 4.3당일 무장대의 기습공격으로 사망한 경찰관 10명중 2명은 제가 명단을 모르고 8명에 대해 돌아가신곳과 그 출신지를 적어보겠습니다.
함덕지서에서 강성언(제주 연동출신)
외도동에서 선우중태(평북출신)
한라산에서 김영부(안덕서광출신)
서광리에서 김치호(안덕서광출신)
화북지서에서 김장하 (오등동출신 1926년 3월생)
한림리에서 김록만 (함남출신)
보성리에서 이무웅 (경남출신)
남원지서에서 고일수 (성읍출신)
이 명단중 김장하에 대해서 선생님은 4.3은 말한다 2권 제3편의 기록을 참조하셨을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개인의 기억보다는 공기관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보아 순직자들의 출신지와 사망지. 사망일시는 경우회자료를 참고하였습니다.
경우회에서는 1958년 10월 제주도지방경찰청(인사)에서 작성한 「전사자 및 순직자 명단」과 1990년 10월 및 2000년 12월 발행한 「제주경찰사」, 1982년부터 1983년 2월 5일까지 자체 조사한 「전사 및 순직자 명단」과
「전사·순직·상의·사망 경찰관 실태부」를 기초자료로 하여 제주경찰서, 서귀포경찰서, 제주보훈지청에 조회하고 실사 확인하여 순직자들의 성명, 출생지, 출생연도, 전사일, 전사지를 확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