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0회,
나민희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입을 적신다.
그러고 나서 남편의 얼굴을 바라본다.
“내가 당신을 속인 일이 있습니다.”
“뭐라고?
당신이 나를 속인 일이 있다고?”
“네!
그것도 아주 오랜 세월동안 속여 왔지요.“
”말도 안 돼!
당신은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잖소?“
박주혁은 아내의 말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얼마나 아내를 믿으며 사랑하면서 살아온 세월이던가?
그런 아내가 자신을 속이는 일이 있다는 것이 절대로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지 않은 박주혁의 마음이다.
“내가 오랜 세월 당신과 가족들을 속이면서 한 사람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 그런 것이야 속이는 것도 아니고 말을 하지 않고서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두려움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그 사람을 도와주려고 처음부터 마음을 먹은 것을 아닙니다.
허나, 나도 어찌 하다 보니 절대로 외면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지요.“
”그런 일은 얼마든지 해도 좋은 것이 아니겠소?“
”그 사람도 처음부터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다 자신도 모르는 순간부터 그런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들었지만 깨닫지 못하고 모든 것을 다 잃을 때까지 헤어 나오질 못했지요.
남편도 아이들도 집고 그리고 친정가족들로 모두 다 잃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그 깊은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던 것이지요.“
”잠간만!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오?
설마 그 여자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여보!
윤서 아빠!
바로 아이들 생모이야기입니다.
당신에게 오랜 세월 속이면서 돌봐주고 있었습니다.“
”뭐요?
어떻게 당신이 그런 일을?“
박주혁은 다시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린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사람이다.
잊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왜 하필이면 아내가 그런 사람을 돌봐주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나도 이렇게 오랜 세월을 아이들 생모를 돌봐주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지요.
세상을 살아오다 보니 내가 원하지 않았던 그리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나를 잡고 있을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더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그것을 절대로 안 되는 일이오.
그 여자가 죽던 살든 우리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오.“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더 들으세요.
나도 절대로 마음이 좋아서 한 일은 아니었지요.
허지만 우리 윤서나 민서가 나중에라도 생모가 비참하게 살고 있다거나 그렇게 참혹하게 살다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얼마나 우리 아들들이 상처를 받겠어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윤서나 민서나 제 어미를 얼마나 미워하고 증오하고 있는지 아시오?“
”핏줄입니다.
아무리 미워하고 증오한다고 해도 그 뱃속에서 나온 핏줄입니다.
하늘이 맺어준 천륜인데 그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어요?
당신은 모릅니다.
그 아이들 마음 한구석에 생모에 대한 미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바로 그리움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 아들들이 그럴 리가 없소.
엄마라면 오직 당신뿐인 아들들이라는 것을 모르시오?“
“네, 내가 윤서와 민서 엄마라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나 생모에 대한 은혜를 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아이들은 하늘이 변한다고 해도 신숙진이 배 아파서 낳은 아들들입니다.
당신하고는 다른 피로 맺어진 인연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
박주혁은 아내의 말에 할 말을 찾지 못한다.
“지금 그 사람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그건 무슨 말이오?”
“살려보려고 수많은 노력을 했지요.
살아서 조금이나마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는데...........“
”심한 병이라도 걸렸었소?“
”네!
그랬지요.
그런 험하고 치욕스러운 삶을 살았는데 어찌 병이 나질 않겠어요?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더욱 깊은 수렁에 빠져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무수한 구타와 능욕을 당하면서도 임금착취까지 당하며 지내야 했어요.
노예도 아마 그보다는 나았을 겁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 여자에 대해서 그리 소상하게 알 수가 있었소?“
나민희는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차근차근 해 나간다.
김수빈을 통해서 모든 사실을 알았고 김수빈을 통해서 도와 줄 수 있었던 모든 것을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한다.
박주혁은 그런 아내의 말을 아무런 말도 없이 그대로 듣는다.
그 여자가 어떻게 살아왔든 자신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생각을 하며 듣고 있지만 듣는 순간에 화도 나고 마음도 아파온다.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한 인생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떻게 그런 올가미에 걸려서 모진 고통을 받으며 견디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조금은 안됐다는 생각과 함께 불쌍하다는 마음이 든다.
“여보!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아이들 생모의 과거를 용서했다고는 했지만 당신 몸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지요.
늘 냉랭하고 차갑게 대했기에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했던 것입니다.
때 마침 그런 사람에게 악마의 손길이 뻗쳤던 것은 운명이랄까요?
그런 쇠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지요.“
“.............................”
“다 지난 옛날이야기지만 용서를 했으니 조금만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더라면 그런 사이비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네!
이것을 내가 내 남편과 내 아들에게 간절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늦기 전에 찾아가주십시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겠소?“
”아들들을 생각해서라도 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래도 당신 아들을 둘씩이나 낳아준 여인입니다.
아무리 사랑이 없다고 해도 잠시나마 좋았을 때가 있었을 것이고 당신 아들들을 낳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여인이 아니었다면 지금 윤서와 민서가 있었겠습니까?“
”생각을 해 보겠소.
갑작스러운 일이라 나도 당황하고 있소,
“그러세요.
그러나 결코 시간이 길지 않습니다.
박사님의 말씀을 길어야 일주일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길어야 그렇다는 말이지요. 내일이 될지 오늘 밤이라도 떠날지 모르는 일이고요.“
”............................“
나민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기로 한다.
남편 역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집으로 가야겠지요?
저녁은 집에 가서 먹어요.”
나민희가 몸을 일으킨다.
박주혁 역시 아무런 말도 없이 몸을 일으키며 카페를 나선다.
이제 나민희는 또 다시 이 힘들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간다.
아들인 윤서가 집에 와서 막 저녁식사를 하려는 참이다.
“이제 저녁을 먹니?”
“어머님 저녁은요?”
은지가 부모님을 보며 묻는다.
"우리 밥도 먹을 수 있니?“
“네!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올 테니 준비해 줄래?“
부부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다.
박주혁은 모든 행동을 하면서 아무런 말도 없다.
식사자리가 조금은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다.
윤서는 아빠와 엄마의 표정을 살피며 밥을 먹는다.
뭔가 무거운 공기가 흐르면서 두 분 사이가 너무나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아직 부부싸움이라고는 하지 않으셨던 부모님이시다.
너무나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면서 제대로 저녁을 먹을 수가 없다.
“아범아!
편안한 마음으로 어서 밥을 먹으렴!
우리가 싸움을 한 것처럼 보이지?“
”네!
그런 일이 없이 사시는 엄마와 아빠라서..............“
“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자.
당신도 그런 표정을 풀고 식사를 하세요.“
그러나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는다.
은지는 어떤 일인지 알고 있기에 아무런 말도 없이 딸인 유나를 밥을 먹이며 마음이 무겁다.
어린 유나 역시 다른 때와는 달리 투정도 부리지 않고 얌전하게 밥을 먹는다.
그렇게 식사시간이 끝나고 모두 거실로 나온다.
“아범아!”
“네, 엄마!”
무언가 무거운 분위기를 감지하며 엄마를 바라보는 윤서다.
“지금 이런 말 네게는 충격으로 다가오겠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네?
무슨 큰일이라도?”
박주혁은 서재로 들어간 뒤다.
“네 생모에 대한 이야기다.”
“뭐라고요?
난데없이 생모라니요?”
“난데없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동안 오랜 세월을 네 생모를 내가 보살펴왔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윤서는 잠시 가슴이 심하게 뛴다.
다시 생모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면서 두려움과 아픔을 느낀다.
기억에 떠오르는 생모에 대한 두려움이다.
“윤서야!
이제는 오래전에 다 지난 일들이다.
그리고 생모가 없었다면 너와 민서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미움도 증오도 사랑이고 그리움이다.
하물며 너에게 피와 살을 주신 분이다.
마지막 가는 길 편안하게 보내주는 것이 살아 있는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엄마의 마음을 알아주겠니?“
”솔직히 이제 와서 생모의 소식을 듣게 된다는 것이 원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대로 잊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그래, 왜 그 마음을 모르겠니?
그러나 어쩌겠니?
부모자식이란 피로 맺어진 사이고 하늘이 정해준 천륜인 것을 누가 부정할 수가 있을 것이냐?
그저 잠시면 된다.
다시 보고 싶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운명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마음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그러나 늦지 않았으면 한다.
어쩌면 오늘 밤이라도 떠날지 모르는 사람이니까!“
윤서는 많은 충격을 받는다.
증오스럽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생모에 대한 끔찍스러운 이야기들을 듣고 나니 가슴이 멍해져 온다.
“바보같이 왜 그렇게 살았어?
우리 모두 버리고 선택을 한 길이었으면 제대로 잘 살았어야 했잖아!“
아내가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나오는 윤서의 말이다.
그리고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아내 은지는 그런 남편을 모른 척 내버려둔다.
얼마나 마음이 아플 것인가?
윤서는 밤을 새운다.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생모에 대해서 그 어떤 말을 들어도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것인지 화가 난다.
엄마의 말대로 천륜이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가슴 깊은 저 속에 자신도 모르게 그래도 생모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렇게 밤을 새우고 나서 가족은 다시 마주 앉는다.
박주혁 역시 한 숨 잠을 자지 못한 모습이다.
“어차피 만나야 할 운명이라면 늦기 전에 만나는 것이 좋겠지.
윤서도 마음의 준비가 되었니?“
”.............네!
마지막 가시는 길 편안하게 가시게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오냐!
지금이라도 가보자.
미룬다고 해서 별다른 방법이 없는 일이니!
참으로 질긴 인연이구나!“
“은지야!”
나민희는 며느리를 부른다.
“네, 어머님!”
“너도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갔으면 싶은데 어떻게 할래?”
“네!
함께 가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고맙다.
항상 너의 그 깊은 마음이 엄마는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구나!“
그렇게 온 가족이 신숙진의 병실 앞에 선다.
오늘은 다행히 신숙진의 상태가 많이 좋아 보인다.
기분도 다른 날 같지 않고 좋아 보이고 생기가 돈다.
신숙진의 병실을 지키고 있는 정명자다.
“어때?
기분이 많이 좋아 보이는데 이렇게 일어나 앉아 있어도 괜찮아?”
“언니!
이렇게라도 일어나 앉아 있으니 기운이 나는 것만 같아요.
그리고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고요.
그때 노크소리가 나면서 나민희가 살며시 들어온다.
“어서 와요!”
신숙진이 반가움을 나타내면서 반긴다.
“이렇게 일어나 앉아 있어도 될 만큼 좋아졌네요.”
“네! 모두 다 윤서엄마 덕분입니다.”
“누가 왔는지 아세요?”
“네?”
신숙진은 문 쪽을 바라보다 멈칫해진다.
들어오는 사람이 누구던가?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의 남편이 아닌가?
박주혁 또한 병실을 들어서면서 신숙진의 모습을 보지만 몰라볼 정도로 변해있는 모습에 발길이 멈칫해진다.
사람의 몰골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야윈 모습에서 그 옛날의 아이들 엄마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여..........여보!”
박주혁은 가까이 다가간다.
“신숙진이 맞소?”
“네! 바로 접니다.
당신에게 못되게 굴고 염치없었던 숙진입니다.“
숙진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린다.
뒤따라 들어온 윤서 역시 그 옛날 엄마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어 당황한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다.
다가가고 싶지 않은 생모의 모습에서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이다.
그런 윤서를 바라보는 신숙진은 아들인지를 알아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