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내문
지난 9월25일 임관50주 기념 회고록 ‘대열 반세기여정’의 발간경과 2차 보고에서 밝힌 대로, 11월1일 부터는 발간예정 책자 본문 중 이미 홈피에 올려 공개된 목차와 연보,각 병과별 약사, 동호회 및 지역포럼 약사, 개별 회고 기고문 외에 편집진이 작성한 일부를, 관련 도표와 사진들은 생략한 상태로, 대열 홈피에 올려 공유하도록 합니다.
오늘 내용이 어느 위치에 수록되는지를 알 수 있도록 그 앞에 책자의 항목표시도 함께 올립니다. 아울러 회고록에 사용한 사진들을 재편집한 동영상도 함께 올리고, 책자에 수록하지는 않았지만, 자료로 수집했던 과거 사진들도 틈틈이 올립니다. -편집진-
< '대열반세기 여정' 본문 소개 4-생도대생활: 특활 구보 하훈>
▣ 제1부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 생도대 생활과 주요훈련
◇ 특별 활동
생도들은 매주 수요일 오후 다양한 특별 활동인 문화체육활동에 참여했다. 이는 생도들 개인의 취미 및 특기 개발을 통해 학술과 체력을 연마하고 품성을 함양하여 정예장교로서 필요한 인격도야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화체육활동을 통해 갈고 닦은 멋과 재능은 화랑제 기간에 마련되는 각종 전시회 및 발표회, 대학 동아리 부서와의 교류 기회를 통해 발휘할 수 있었다.
종목별로 보면, 학술 분야에 방송부 편집부 과학부 정경부 변론부 전사부 영어부 일어부, 문화예술 분야에 서도부 미술부 합창부 현악부 기악부 연극부 사진부 편집부 방송부, 체육 분야에 축구부 럭비부 배구부 농구부 야구부 정구부 역도부 태권도부 유도부 권투부 검도부 승마부 골프부 사교부 산악부 배드민턴부 펜싱부 검도부 사격부 등에서, 각각 활동했다.
◇ 무장구보
무장구보는 군대의 전략적이든 전술적이든 이동 및 기동의 기본수단이어서 생도생활 내내 지속되고 강조되었던 훈련의 하나였다.
평상시 매주 월요일 17시를 기해 시행한 하기식 직후의 완전군장 구보와 (때로 훈련목적의 단독군장 구보도) 하기군사훈련 기간의 학과출장 및 교장 이동을 위한 단독군장 구보가 주종을 이루었다.
평시는 학교에서 묵동교 삼거리 왕복의 단거리, 공릉동의 당시 서울공대 왕복의 중거리, 중랑교 지점 한독약품 왕복 및 퇴계원방향 망우리 신내동 갈매리를 돌아오는 장거리를 뛰었다.
단·중거리일 경우는 주로 완전군장이고, 장거리일 경우는 단독군장이었는데. 완전군장의 경우는 무겁지만 소총을 어깨에 메고 저속구보여서 편했고, 단독군장의 경우는 장거리인데다 앞에 총 자세에 속도를 더 내니 훨씬 힘들었던 걸로 기억된다.
생도 1학년 때 처음 접한 하기군사훈련 기간의 구보도 인상에 남는다. 하훈 소대장 생도가 구보를 엄청 강조해 끊임없이 구보를 하게 했다. 군대의 공격 시나 다음 전장으로 이동할 때 기동성이 핵심적으로 중요한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데, 보병의 경우는 그 기동의 수단이 곧 구보라고 강조하는 전술 교리는 이해했지만, 낙오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데 덜컥 겁이 났었다. 생도대를 떠나 세탁소로 오르는 길목에 비석이 하나 있었다. 구보하다 죽은 선배생도를 추모하는 비석이었다. 그 생도는 비록 죽었지만 낙오하지 않으려고 입에 면도날을 물고 뛰었었다는 비장한 일화를 남기고 있어, 우리 후배들에게 준 교훈은 가히 공포적인 것이었다.
그 교훈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남긴다.
‘ 김명수가 동기생을 사지로 몰아넣을 뻔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입교 시 체중이 100kg 넘었던 박영일 동기에게 있어 구보는 늘 지옥상황이었고. 일행 중 낙오 발생은 연대책임의 엄정한 단체 책벌기압이 따르는 만큼 곁에서 함께 뛰며 철모도 배낭도 받아 짊어지면서 낙오하지 말라 소리 지르며 함께 뛰었는데. 그 더운 여름철 낙오하는 김준배도 억지로 끌고 뛰어 들어오는데 면회소 언덕을 올라오자마자 쓰러져 의무대로 실려 갔고, 김준배 군장을 중대 호실에 챙겨다 두고, 중대원들과 걱정돼 가보니, 얼음을 가득 채운 큰 물통 속 고무튜브에 혼미한 상태로 들어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쇼크사 직전이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본 김명수는 김준배를 죽일 뻔 했던 것이어서 얼마나 미안했던지~~.’
이렇게 무장구보는 생도시절 내내 1학년 시절이든 훈련이 잔뜩 됐다는 4학년 시절이든 늘 힘들었던 훈련이었다.
◇ 하기군사훈련
일반대학의 교육과 비교되는 육사 교육의 특징은 군인정신과 장교의 책무를 다하는 실전 같은 군사훈련이었고, 주로 매년 실시하는 하계 군사훈련으로 이루어졌으며, 교수부 생활 1학기가 끝나면 여름 하기휴가를 마치고 귀대한 후 바로 하기군사훈련에 돌입했다.
그 하기(=하계) 군사훈련은 기본전투기술과 소부대 전투 지휘능력 및 병 지도능력 구비를 목표로 6~8주간 실시했다.
학년별 수준과 과목 특성을 고려해 상급생도와 학교 자체 교관들에 의한 병 기본훈련과 전국 병과학교 및 광주 전투병과교육사령부, 보병학교 화순 동복유격대 및 김포 공수특전여단에서의 위탁교육을 병행해 실시했다.
생도 1,2학년 시절엔 소총에서부터 화염방사기까지의 각종 화기학 및 각개 전투 등 병사 기본훈련과 분대장 수행능력 배양 등 소부대 전투기술 숙달에 주안해, 상급생도 및 학교 자체교관에 의해 학교 인근 불암산 갈매리 퇴계원 사릉 일대에서 주야간 분·소대 공방 훈련을 실시했다. 생도 1학년 시절엔 부산 수영만으로 해양훈련을 가기도 했다.
1학년은 강철부대 지옥 훈련도 체험했다. 기억에 남는 단상으로는 사격 불합격자의 비참함, 각개전투 시 달려드는 곤충과의 사투, 소낙비 속의 빗물 국밥, 개스 실 고통, 수영만 해양 훈련과 석빙고 아이스크림, 4학년 하훈 근무생도와 부교관의 강압 등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2학년 하훈에서 떠오르는 단상으로는 비오는 날 사릉 야외훈련장에서 야간 경계 시 ‘과연 처녀귀신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집중연구의 시간이었다.
이 기간 훈련보다 더 힘들었던 것이 하기군사훈련 이후 개최되는 3군 사관학교 체육대회 응원연습이었다, 덕분에 일부 동기생은 수기부로 활약하면서 일찍이 행운의 사교댄스 실력도 쌓았고, 일반 생도들은 폴카와 팝송 등 명곡 노래 배울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지만, 수없이 반복되는 카드섹션 훈련에서 단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전체를 망치게 하는 과오의 대가로 바로 이어질, ‘불려가 혼쭐나는 기합’에 시달리는 고역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생도 3학년 시절엔 김해 공병, 진해 해사, 대전 통신, 광주 보병 등 병과학교 순회교육을 가짐으로써 제 병과 통합작전의 기본을 배우고, 마지막 화순동복 유격훈련장에서 기초체력단련 및 지리산일대 과거 빨치산활동 지역에서의 정찰훈련을 참아냄으로써 정규 장교유격훈련 수료의 자격을 표시하는 휘장까지 받았다. 이 유격훈련은 전 해인 1968년 1.21 청와대 기습까지 시도한 북한군 특수부대의 고도로 훈련된 특수전 역량에 놀라 그에 대응하기 위해, 그해 처음 26기부터 생도들에게 부과됐던 정규유격훈련의 일환으로 치러진 것이었다. 따라서 강도 높기 유명한 훈련이란 점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니 유격훈련과정에서 고생하고 극복하며 힘들었던, 다양하게 얽힌 에피소드는 지금 꺼내도 무궁무진하다 할 것이다.
단상으로 남는 기억들은 카이젤 수염의 털보 유격대장의 으스스한 인상, 6중대의 모생도에게 사정없이 주먹질하던 유격교관 왕대위의 별난 행동, 지옥 훈련 참호격투, 환자후송 레펠 훈련, 하강훈련과 수직낙하, 선착순 구보 등이 산통(産痛) 이상의 기억으로 남는다.
도피 및 탈출 과정에서 똥통과 섬진강에 빠진 생도, 포로가 된 생도, 낙오해 천은사 자갈밭에서 포복하는 생도 등 자강불식의 성장통을 겪었으며, 화순 동복유격대에서 지리산 노고단과 천은사까지의 유격훈련을 마치고 발사한 우렁찬 구령조정의 통쾌함이 대미를 장식했음을 잊을 수 없다.
생도 4학년 시절 하기 군사훈련은 김포 1공수특전여단에서의 공수기본교육과 철원일대 전방부대 소대장 실습으로 이루어져, 임관 후 직무수행에 필요한 군사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시간이었다.
특히 공수훈련은 우리 27기 대열 동기생이 생도로는 처음 받는 훈련이어서 특기할 사항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피티 체조와 착지훈련, 개구리 복에 진흙을 잔뜩 넣은 채 달리는 오세리 왕복 구보, 한 밤중 팬티바람에 집합돼 항문 밑에 대검 끝날을 세우고 쪼그려 앉아 모기에게 피 빨리며 으스스 공포에 떨던 고행과 야전 변소 똥 치우기 당번 책벌은, 공포감으로 발버둥 치던 막 타워 및 실제 비행기 점프보다도 더 기억에 남는다. 비포장 도로 위로 죽은 개처럼 끌려 다니던 송풍훈련의 기억, 낙하훈련 시 한강에 빠진 오리 신세의 생도, 착지 불량으로 다리가 골절된 환자 생도의 고통, 무엇보다도 성사현 생도가 낙하산줄 말림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아찔한 순간들이 기억으로 남는다.
낙하산 담배말림으로 급강하하면서도 일찍 예비낙하산을 펴지 않아 지상요원들의 애간장을 태우고 착지한 후, 조문환 사령관께 불려가, 왜 안 폈냐? 니, ‘판단해 보니 괜찮겠더라.’고 감히 대들다(?) “누가 너보고 판단하라 했나!” 며 내지른 발길에 조인트 바로 까였던 담대한 성사현은, 그 간(肝)의 크기로 월남 가서 베트콩도 잘 때려잡았다는 후일담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로는 기본공수훈련 제 62기여서 한참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새카만 할아버지뻘이다. 그 덕에 대열 동기생들은 소위 시절부터 특전사 소대장으로 가기도 했고, OAC 중대장 반을 마치고는 막 창설되던 7·9 공수 특전여단 중대장 요원으로 강제 발령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그 덕분(?)에 특수전 사령관 동기생도 배출하게 됐었다. 빛나는 4학년 하기군사훈련이었다.
▷ 1969년 병과학교 순회교육의 단면 (당시 한 생도의 일지)
대열의 3학년 생도시절 1969년의 하기군사훈련은, 7월19일부터 9월1일까지, 김해 공병학교, 진해 해군사관학교, 대전 통신학교, 광주 전투병과사령부의 포병학교와 기갑학교를 순회하고, 이어 화순동복유격대의 산악지역 기초체력단련과 지리산 종주 정찰훈련을 받는 것으로 이뤄졌었다.
그 과정을 한 동기생이 생도일지에 ‘1969년 3학년생도 하기 군사훈련은 참 다채롭고 험난했다!’라며 남겼다. 단편적이지만 인상적인 감상의 기록을 통해 단면을 일별할 수 있다. 일지의 병과순회교육 부분을 쉽게 풀어 올린다.
(이하: 대열 홈피에 기 게재해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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