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아니하며,
2. 오로지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시1:1,2)
1 Happy are those
who reject the advice of evil people,
who do not follow the example of sinners
or join those who have no use for God.
2 Instead, they find joy in obeying the Law of the Lord,
and they study it day and night.
소망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두고 복이 있다고 할까?
부자는 삶이 즐거웠습니다.
날마다 행복했습니다.
오늘은 동창 데려와서 잔치 베풀었는데 내일은 갑장들 불러다 잔치를 베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래는 여유 있는 친구들과 외국으로 여행 떠날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을 원망할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을 찬양만 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사로는 눈뜨면 어김없이 부잣집 대문 앞까지 기어갔습니다.
거기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빵조각을 잡는 순간 개가 덥썩 손을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고름이 잡히더니 상처에 구더기가 기어다녔습니다.
평소에도 맥이 없었으니 그 날 그가 땅에 엎드려 잠든 줄로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부잣집의 상 앞에서 그는 죽어있었습니다.
종들이 그를 가마니에 싸서 야산에 묻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로를 보면서 혀를 껄껄 찼습니다.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인가?
본인의 죄 때문인가?
하나님 계시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지 나사로가 눈을 떴을 때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었습니다.
부자는 장수했습니다.
그에게는 그런 상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죽음만큼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조금 늦었을 뿐입니다.
부자는 눈뜨면 잔치 자리였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눈 떠보니 거기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과거의 삶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에게 부탁했습니다.
나사로를 살려서 형제들에게 보내달라고 한 것입니다.
세상 잔치 자리를 제 소망으로 삼았다가는 내 꼴이 된다고 형제들에게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소망의 주소지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염두에도 없던 사람들을 향해 요한은 경고했습니다.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10.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3:10)
가뭄이 와도 시내 덕에 이 땅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힐 수 있어서 그것을 두고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궁극적으로 심판을 이겨내고 나사로가 있는 곳에 함께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이 없는 자는 부자가 가는 곳을 가게 될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받을 그 때에 얼굴을 들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들의 모임에 들어서지 못한다.
6.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시1:5,6)
복이 있는 사람의 여부는 의인의 회중에 드는 구원의 여부를 이릅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자리에 갈지 혹은 부자의 자리에 갈 지 그것은 당장 여러분의 현재의 삶의 태도가 결정합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아니하며,
1 Happy are those
who reject the advice of evil people,
who do not follow the example of sinners
or join those who have no use for God.
2. 오로지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2 Instead, they find joy in obeying the Law of the Lord,
and they study it day and night.
교회 마당 여기저기에 풀들이 자라납니다.
그래서 오다가다 그것의 뿌리를 땅에서 뽑아냅니다.
흙과 뿌리가 분리되었다는 것은 그것의 죽음을 뜻합니다.
이렇게 뿌리를 뽑아두어도 그것이 여지없이 살아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의 뿌리가 땅에 닿은 경우입니다.
몇 년 전에 도라지 씨를 사다가 여기저기 뿌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모종을 했습니다.
발아 된 것을 보고 그것을 땅에 옮겨 심었습니다.
그 손톱만한 것의 뿌리를 흙에 묻어두는 일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흙과 뿌리의 접촉 여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떨어져야 할 대상이 있고 또 반드시 서로 하나 되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아니하며,
1 Happy are those
who reject the advice of evil people,
who do not follow the example of sinners
or join those who have no use for God.
그러므로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 옆에 내 의자를 가져다 놓는 것은 파멸을 보장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냄새만 나도 그 자리를 피하는 사람입니다.
2. 오로지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2 Instead, they find joy in obeying the Law of the Lord,
and they study it day and night.
말씀이라면 붙어있는 것을 넘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우고, 듣고, 읽고, 묵상하고.......
그 율법의 말씀이 그 대상입니다.
말씀대로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66권의 성경 말씀입니다.
말씀을 위장하는 사이비한 것이 너무 많아서 하는 말씀입니다.
앞뒤로 몸을 흔들면서 성경이 아닌 어디서 들려왔다는 소리를 두고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드럼치고 열광하는 감정에 쌓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과는 상관도 없이 해대는 목사들의 설교도 아닙니다.
엄청난 과거에도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라고 재판관을 세워두었더니 하나님의 율례를 제 사욕을 위해 사용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0. 악한 재판장이 주님과 사귈 수 있습니까? 율례를 빌미로 재난을 만드는 자가 주님과 어울릴 수 있습니까?(시94:20)
그 사람들은 율법을 내세우더니 엉뚱하게 재앙을 만들었습니다.
껍데기는 분명히 하나님의 재판관인데 속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속은 것입니다.
뉴스에서 보듯이 압색이 사욕을 채우기 위한 정치 보복의 방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나는 뉴스를 보면서 판검사들 공무원들이 저런 썩어빠진 자들이었구나 실감 했습니다.
공적인 의무감이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재판관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재판관 목사들의 말보다 먼저 66권의 율법의 말씀을 읽으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지금 바로 그 일을 하고 계십니까?
철저한 긍정과 부정!
믿음
네 명이 중풍병든 친구를 들것에 들고 예수님께서 갔습니다.
그들은 몰려든 인파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을 네 명이 들었으니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또 사람을 실었으니 얼마나 조심해야겠습니까?
그들이 가다 보니 지붕으로 올라가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지붕을 뚫고 환자를 예수님께 달아 내렸습니다.
그 집은 지붕이 그대로 뚫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기이한 행위를 두고 믿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아들아,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막2:5)
한 여인이 열두 해 혈루증을 앓았습니다.
물론 병을 고치느라고 가산을 다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마을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도 선뜻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자면 그런 질병을 가진 사람들은 공개된 장소로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장소에서 혈루증 병자로 드러나는 경우 그 녀는 화난 무리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러 가는데 그 하나님의 법을 어겨도 문제가 안 되나?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도와주실까?
그러면 집에서 기도만 하고 앉아있을까?
밤새 고민하다가 변장하고 모자를 뒤집어쓰고 예수님 옷자락 뒤만 만지고 도망가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목숨 걸고 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밤새웠던 고민과 그 위험한 행위를 두고 예수님은 믿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4.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막5:34)
믿음이란 추상명사가 아닙니다.
당시에 예수께 가면 그런 병쯤은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수두룩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 때문에 남의 집 지붕을 뚫어놓은 사람은 그 네 사람 뿐이었습니다.
밤새 고민을 하다가 변장하고 예수님의 옷깃을 만진 사람은 그 여자 혼자 뿐이었습니다.
악은 냄새만 나도 코를 막고 그것에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나?
반대로 말씀이 있으면 들것을 들고 지붕이라도 올라가나?
죽을 각오로 변장하고 풀리지 않는 신학적 모순에 한숨을 쉬면서 옷깃이라도 만지고 도망을 올 것인가?
당장 술꾼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깡패라도 사형수라도 당장에 그 관계가 문제일 뿐입니다.
악이라면 부인하고 말씀이라면 말씀과 아예 하나가 되려는 행위!
명확한 부정과 긍정 행위가 복 있는 사람의 존재를 결정할 뿐입니다.
고재봉이라는 사람은 한 가족을 죽인 사형수였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도 죽을 사람인데 예수님이 자신을 살리셨다는 내용의 전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집사님이 주고간 성경을 읽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녁이 되어 옥에 소등이 되면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불빛에 비추어 가며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찬송하며 사형틀 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사형수가 그 네 명의 친구처럼 또 그 여인처럼 말씀을 향해 담장을 넘고 지붕을 뚫고 옷깃이라도 만지려 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가 사형틀 위를 걸을 때 그의 두 눈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보였던 것입니다.
찬송하면서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재봉처럼 안 되는 이유는 사형수의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시1:3)
여기에서 시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이릅니다.
곁에 심겼다는 것은 오로지 그 말씀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그 율법을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 곁에 심긴 나무는 가뭄이 와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현실을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자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우리 눈에 말씀과 말씀이 마구 부딪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말씀 곁에 태풍이 불고 홍수가 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부딪혔던 사람들은 성경 박사들이었습니다.
들것에 중풍병자를 들고 왔습니다.
네 명의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환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병자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성경 박사들이 예수님께 참람하다고 했습니다.(막2:1-12)
주님은 세리와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들은 죄인과 세리와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막2:13-17)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공격했습니다.(막2:18-22)
제자들이 안식일날 남의 밭의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 일이라면 목사인 나도 이상합니다.
죽어가는 병자를 치료한 것이 아니고.......
주님은 배고픔도 못 참는 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막2:23-28)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치료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막3:1-6)
그 때 예수께 대든 사람들이 악당의 무리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한 사건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혼 문제를 말씀하셨을 때입니다.
먼저 모세의 법과 예수님의 법을 구분하셨습니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이혼장을 써 주고 이혼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적은 모세의 법에 중요한 전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8.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해 준 것이지, 본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마19:8)
모세의 법은 사람들의 완고함이 이미 전제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의 요구는 천국 입장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적분이 필요한데 모세의 법은 곱셈 나눗셈 뺄셈 덧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법을 100% 지키면 중학교는 수석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학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모세의 법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중학교도 못 갈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람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은 전혀 다른 길을 내셨는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실하게(faithfully) 그 약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 법을 완전히 지키심으로 하나님의 의의 요구를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요구하는 의와 인간의 의의 한계!
그 공백을 메꾸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새 말씀이 되셨습니다.
모세의 말씀은 우리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장하는 완전한 의를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완악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덧셈과 뺄셈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의인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는 의의 기준을 충족하신 것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옆에 심기어진 나무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경건한 자들과 부딪히셨을 때 사람들은 말씀과 말씀이 왜 이렇게 부딪히는지 의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모세의 법을 폐기하신 것이냐고도 의심했습니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5:17)
주님은 모세의 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법은 자신의 이런 한계를 스스로 고백하며 완전한 한 예언자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주 너희의 하나님은 너희의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신18:15)
바로 그 예언자가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완성되신 새 말씀이 되신 것입니다.
모세의 법은 예수님의 법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제 모세의 포도주 부대에 우리 신앙을 집어넣어서는 안 됩니다.
22.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가죽 부대를 터뜨려서, 포도주도 가죽 부대도 다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한다."(막2:22)
이혼장을 아내에게 내밀면서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의를 성취하는 모세의 법은 그 의미를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말씀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완고한 자에게 주어진 모세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시는 예수님의 법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곳이 교회입니다.
5.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받을 그 때에 얼굴을 들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들의 모임에 들어서지 못한다.
6.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시1:5,6)
밤낮으로 예수님의 법을 묵상하는 사람은 결국 의인의 모임에 들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