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선생들만 감을 잡지 못하고 있을 뿐 전학온지 며칠만에 나는 1학년 뿐 아니라 2,3학년 전체의 판도를 바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기, 나 모르겠어?"
처음보는 녀석이 아는 체를 해왔다.
"나, 김승태야. 부산에서 장평중학교 다닐때 2학년때 같은반이었는데..."
김승태?
작은 녀석이었다.
까까머리에 금테 안경을 낀 전형적인 범생 스티일이었다.
"3학년때도 같은 반이었는데...너 동아고로 배정 받았었지? 나 대동고로 갔다가 얼마전에 전학왔어."
아마 부산에서는 이런 녀석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리가 없었다.
지레 벽을 치고 나같은 놈에게 감히 말을 걸어 올 엄두조차 못낼 것이다.
그런데..이 녀석...서울이라고 이러는 건가?
아니었다.
승태란 녀석은 그 왜소함 덕분에 이른바 왕따,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뒷줄에 앉은 녀석들은 만만한 승태를 가지고 꽤 놀았던 것이다.
승태에겐 엄청난 스트레스였고 차마 집에가서 말을 꺼내지 못하고 꾹꾹 삼키며 학교 생활을 계속해 왔다.
그러다가, 자신을 괴롭히던 놈들을 한번에 날려버리는 나를 보고 괜히 친한척 하고 있는 것이었다.
즉, '난 이정우와 친하다..날 건드리면 정우가 이제 너희들을 가만두지 않을거다'라는 다분히 전시적이고 계산적인 접근이었다.
"승태?"
녀석은 환하게 웃었다.
반가움의 표시라고 하기엔 지나칠 정도였다.
"모르겠는데?"
녀석의 표정은 금새 실망으로 가득찼다.
"그...래?"
녀석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돌아섰다.
"야!"
"응?"
힘없이 돌아보는 승태를 향해 난 거드름을 피웠다.
"너혼자 이겨내."
승태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멍청한놈...보긴 뭘봐? 난 너같은 놈 보호해 주는덴 흥미없어.
"할말 더 있냐?"
"아니"
승태는 맨 앞줄에 있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자존심이 상했을까..?
상관 없었다.
저런 답답한 놈들은 피곤하기만 하다..
3교시후 난 화장실에 갔다.
복도에서 아이들이 알아보고 알아서 내길을 터주었다.
겁에 질린 표정..눈치보는 태도..
2년전부터 날보는 아이들의 눈빛은 항상 그랬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데 밖이 소란스러웠다.
복도로 나온 내눈에 어딘가로 뛰어가는 아이들이 보였다.
싸움이라도 난 것일까?
학교에서 아이들의 표정이 저렇게 밝고 신나 있다면 필시 피터지는 싸움판을 공짜로 구경할 때인 것이다.
그런데...
뛰어가는 방향이 이상했다.
우리반이 아닌가?
창가에는 이미 구경꾼들로 가득했다.
"야 머리좀 치춰."
내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날 힐끔본 앞에 있던 놈이 자리를 내주었다.
내눈에는 교실안 광경이 들어왔지만 안에서는 삐죽삐죽 솟아있는 머리통 때문에 날 볼수없는 구도였다.
나 구경꾼이 되어 우리반 교실안을 바라보았다.
안에는 승태가 있었다.
뭘 잘못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안경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승태의 앞에는 나에게 처음으로 달려들었던 태한이와 날 옥상으로 안내했던 정현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세명이 더 버티고 서서는 승태와 대치하고 있었다.
태한이의 손에는 운동화가 들려 있었는데 그것은 승태것이었다.
태한이는 습관적으로 말을 할때마다 운동화로 승태의 머리통, 얼굴을 탁탁 치고 있었다.
"야이새끼야, 너 간땡이 부었지? 이정우한테 꼬리를 쳐?"
태한이는 운동화로 승태의 뺨을 툭툭 쳐 댔다.
그리고는 운동화 끝을 승태의 입술에 밀어붙였다.
"입 안벌려?"
"어쭈..아가리에 힘주네. 너 많이 컸다? 응?"
승태는 지금 시범 케이스로 걸려든 것이었다.
태한이네 입장에서 승태의 시도는 불순한 반역이었다.
단순히 말을 안듣고 버팅기는 정도라면 아무도 없느 곳으로 끌고가서 위협하면 그만이지만 이번 경우는 차제에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제2, 제3의 승태가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구경꾼들 앞에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이다.
승태가 운이 없다면 운이 없을까...
어쨌든 이모습을 본 아이들은 태한이네 등을 칠 엄두를 못낼 것이다.
"이새끼가..야."
어이없다는 헛웃음을 친 태한이는 운동화로 승태의 머리를 탁하고 쳤다.
한번이 아니었다.
탁 탁 탁 탁
계속될수록 강도는 세어졌고 속도도 빨라졌다.
"이새끼가 말같지가 않나..."
정현이가 숙인 승태의 고개를 손가락으로 치켜세웠다.
승태의 눈에 눈물이 고인것 같았다.
"이새끼야. 우리말 무슨 말인지 알지? 응? 짜면 넘어갈 것 같냐?"
"퉤. 재수없게 어디서 질질 짜?"
태한이는 운동화 밑창에 가래침을 뱉고서는 승태의 얼굴에 문질러댔다.
승태...멍청한 놈...
결국 하는대로 돌아오는 것이다.
동정할 필요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속 한가운데가 막혀 답답한 기분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
'승태야..이자식아..'
난 어느새 마음속으로 승태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순간...!
"지겨워..."
"뭐?"
"지겨워..너희들..."
이건..?
'승태야!'
난 막힌 가슴속이 뚫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새끼가 진짜 미쳤나?"
태한이가 사정없이 승태의 복부에 발길질을 했다.
"억-"
나는 승태가 대견스러웠다.
'잘했다. 승태야. 이제 내 차례다.'
"야. 비켜."
난 문앞에서 구경할려고 바둥대는 아이들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은 찔끔거리며 모세의 기적처럼 나의 통로를 활짝 열어 주었다.
4.
갈라진 아이들 너머로 다섯 녀석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정현과 태한은 같은 반이지만 다른 세녀석은 다른반에서 원정 온것 같았다.
"뭐야? 정의의 사자? 풋-."
태한이가 날 비꼬았지만 마음속으론 날 두려워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미 태한이는 내 적수가 아니다.
"승태 놔줘."
"개폼 잡지마라. 이 개자식아."
태한이가 빽 고함을 질렀다.
다른 녀석들도 싸울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섣불리 달려들진 못하고 있었다.
다만 정현이만이 언젠가 옥상에서 날 노려보듯이 눈을 치뜨고 있었다.
윤정현...자세는 인정해 주어야 겠군...실력은 모르지만...
일순...
정적이 흘렀다.
딩동댕딩동댕~~~~
종소리!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교무실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3분은 걸린다. 맞장이라면 사양하지 않겠다."
난 한발 앞으로 나가며 녀석들을 둘러 보았다.
"훗..나도 그러고 싶다만 애들이 교실까지 가기가 멀어서..."
다른반에서 온 애들이 뚜벅뚜벅 내곁을 스쳐갔다.
"너 운좋은 줄 알아."
"야!"
난 녀석들을 불러 세웠다.
"오늘 빚은 반드시 돌려 주겠다."
녀석들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창가에서 여지껏 구경하던 놈들이 자기 교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정현과 태한도 자기자리에 앉았다.
승태는 가래침에 범벅이 된 얼굴을 휴지로 닦아내고 있었다.
상황은 평상시의 모습을 찾은 듯했다.
그러나...
폭풍전야라고 했던가...
난 승태를 보았다.
이런 일에 익숙한 탓일까...
녀석은 어느새 안정을 찾은 듯 했다.
방과 후...
빈가방을 챙겨든 내게 정현이 다가왔다.
"오늘 좀 보자."
"또 내가 널 따라가야 하나?"
"이번엔 널 그냥 보내진 않을거다. 그때는 학교여서 일 커질까봐 그랬던 거지만 이번엔 달라."
나는 잠시 생각을 했다.
"인범이형이 직접 상대해 줄거다."
인범이
그 때 옥상난간에서 담배피며 개폼잡던 녀석인가..?
어차피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찍힌 이상 내 존재를 확실히 인식시켜야 했다.
난 너같은 놈들이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걸 분명히 해두어야 하는 것이다.
"맞장인가?"
"그래. 네가 남자라면 피하진 않겠지?"
"너같은 놈 입에서 남자를 말하다니...양아치새끼가.."
정현은 눈빛이 달라지며 내 멱살을 잡아 올렸다.
"뭐가 어째? 다시 말해봐."
"이거 놔."
난 조용히 그러나 위압적으로 말했다.
"인범이형 몫이니 손대지 않는 거다. 부산촌놈."
녀석은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정현이는 앞장섰다.
교실안에서 몇몇은 야간자습을, 몇몇은 학원에 간다고 가방을 싸고 있었다.
문득 승태와 난 눈이 마주쳤다.
승태는 학원에 갈 채비를 하던 중이었다.
난 미소를 보냈다.
하지만 녀석은 뭐가 불만인지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외면하는 것이었다.
녀석....
학교근방에 이런 곳이 있는줄은 몰랐다.
철거하다 방치되었는지 공사하다 그만두었는지 뼈대만 남은 시멘트건물이 꽤 을씨년스러웠다.
"왔냐?"
어둠속에서 열댓명이 나타났다.
"나 김인범이다. 반갑다."
짐작대로 인범은 옥상에서 폼잡던 그 녀석이었다.
"이 애들을 맡고 있지."
녀석은 그러면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한대 할래?"
"사양한다."
어느새 열댓명이 주욱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도망갈까봐?"
"아니. 링을 만드는 거지. 너하고는 분명히 해둬야 할게 있으니까.."
난 가방을 내려 놓았다.
"담배 ?뻬?."
"아아..성급하긴..내말부터 들어라."
"또 스카우트냐?"
난 고개를 반쯤 적히고 한껏 목소리를 깔았다.
"넌 솔직히 탐나. 너같은 그릇은 본적이 없거든."
"그래서?"
그렇게 말하며 난 주먹을 쥐고 있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은데..어때?"
"훗...웃기는군."
"사장님이 말했지. 남자에겐 두갈래 길이 있다고..."
사장? 조직에서 미래를 보고 키우는 애들인가?
"하나는 출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정의 가장이 되는 것이라고."
이녀석 무슨말을 하려는 거지?
"가장이 되는건 아무나 할수있어. 하지만 출세는 그릇이 달라야 한다. 또 출세에도 두가지 길이 있지. 머리고 하는 것과 몸으로 하는 것?,,아냐..정정당당하게 하는것과 부당하게 하는 것이다."
난 주먹을 풀고 팔짱을 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나라에서 출세한 사람중에 정정당당히 출세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 아무도 없을껄.."
"서론이 길군.."
"넌 출세할 수 있다. 남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생활을 마음껏 즐길 수 있지. 학력? 필요없어. 정말로 그 놈이 세상에 난 그릇 크기만큼 가져가는 곳이 있지. 진짜 능력주위야. 너에게 시시한 주먹잡이를 하라는게 아니다. 어차피 너도 공부로 클놈은 아니잖아? 넌 타고난 그릇이 다르다. 널 초대하는거다."
난 순간적으로 이녀석의 말에 끌리고 있었다.
인범은 말을 이었다.
"너의 미래는 뭐지? 공부로 성공하는 거냐? 아닐 걸?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자수성가하는 곳이 여기에 있다. 재능과 열정만 있으면 돼."
인범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나의 미래...?
그랬다.
나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어차피 공부로 성공하기는 틀려먹은 걸 잘 알고 있었다.
인범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우린 어중간한 양아치가 아니야. 진짜 남자들이 모이 곳이다. 결심만 해라. 너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겠다. 우리뒤엔 배경이 있어. 우린 모두 장학금을 받지. 그래서 학교를 다니느 거지.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라는 배려야. 하지만 원한다면, 능만 있다면 대학도 보내줄꺼다. 생각해봐라. 남자로 태어나서 불알 두쪽차고 나와 오직 자신의 타고난 능력으로 출세할 수 있는가를...평범하게 살고 싶나?"
"거절한다면?"
"거절...생각하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정말 거절한다면우리애들 노는데 방해되니까 곱게는 보내지 않겠다."
"방해?"
"우리애들 노는데 더이상 끼어들지 못하게 해주지. 진짜 힘을 보여 주겠다."
그 한마디가 날 거슬렸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날 화나게 한건...
"거절하겠다."
나느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일순...
깊은 정적이 날 휘감아 들었다.
인범이 입에 문 담배를 뱉어 내었다.
"툿-"
"아무도 나서지마."
인범은 아이들에게 한마디하고 교복 윗도리를 벗었다.
"날 이기면 널 건드리지 않겠다."
나는 신중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인범은 내게로 한발 다가왔다.
그리고 긴리치를 이용해 곧장 주먹을 내질렀다.
나는 자세를 낮춰 살짝 피한 다음 아래에서 인범의 턱을 걷어 올렸다.
퍽-.
그리고 연이어 올라가는 탄력을 이용, 점프하며 인범의 턱을 오른발로 격파했다.
빠각-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이 흠칫하고 있었다.
울컥-
인범의 입에서 피가 솟구쳤다.
"너... 같이 빠른 놈은 처음 본다."
나는 여기 있는 모두가 달려든다해도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나의 주먹은 독보적이었다.
그리고 주먹에 관한한 나는 겸손하고 싶지 않았다.
"이 자식.."
인범이 다시 달려왔다.
막무가내였다.
녀석은 날 설교할때의 위풍은 어디다 버렸는지 어리석에 짓쳐오고 있었다.
'대가리가 될 자격이 없다. 넌."
나는 그대로 돌려차기로 인범의 면상에 발을 적중시켰다.
퍼억-
그 순간...
헉...
나는 발목에 통증을 느꼈다.
인범의 얼굴에 미소가 돋아나더니 어느새 칼로 내 발목을 찔러비린 것이다.
'이 녀석이...'
김인범..이정도 남자였나...
순간이었다.
내가 주춤하는 틈에 주위에 있던 녀석들이 어느새 손에손에 칼을 빼들고 있었다.
쉬쉭-
나는 발목이 찔린터라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이것들이...'
"이 새끼야---"
놈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나는 몇몇을 피하며 주먹을 날렸지만 발을 쓰는데 오는 제약은 엄청난 것이었다.
??-.??-.
나는 등과 허리에 다시 칼을 맞았다.
'이건...뚫어야겠다. 정면충돌을 아냐.'
나는 긴장감으로 통증을 극복하며 단한곳을 노렸다.
다앗-
퍼퍼퍽...
원형으로 날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의 한곳이 뚫리며 공간이 나왔다.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무작정 뛰었다.
저멀리 길가가 보였다. 나는 순식간에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 들어섰다.
녀석들도 우르르 날 쫓아왔다.
타다다다다닥.
타다다다다다-----
"꺄악-."
그런 나와 녀석들을 보고 길에 있던 여자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비켜!!"
난 모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통증을 견뎌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미친듯이 소리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