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동지>(26회) 열세 번째 시간여행 2016년 5월 10일, 미여스님과 만났던 날 밤에 동지에게 다시 시간여행 기회가 찾아왔다. 그가 과거의 몸속으로 스며 들어간 사실을 인지한 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을 때 벽시계는 11시 28분을 가리켰다. 지난번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단 1초의 시간이 아쉬웠던 그는 옥상 외벽의 계단을 단숨에 뛰어내려 현관문 대신 안채를 둘러싼 낮은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시간을 단축할 필요도 있었지만, 지선이 모르게 다녀오고도 싶었다. 맨발이었고 시계를 집어 들지도 않았다. 이마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서늘한 촉감으로 보아 팔 년 전의 몸뚱이를 끌고 가는 것이 분명했다. 현실로 되돌아오기 전에 이 몸뚱이를 재희 앞에 데려다 놓아야 했으므로 그는 전속력으로 광화문광장을 향해 뛰었다. 북인사마당을 왼쪽으로 돌아 우정국 교차로 두 개와 경복궁 교차 -277- |
로를 건너며 신호등 따위는 무시했다. 광화문교차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돌 때 비에 젖은 돌바닥에 미끄러져 앞으로 두 바퀴를 돌아서 일어나 다시 달렸다. 세종대로는 전쟁을 치른 것 같은 흔적들이 흩어져 있었다. 저만치 세종대왕 동상이 보였다. 만약 동상 주변에 재희가 보이지 않으면 바로 동상 뒤편 계단을 내려가리라 재빠르게 계산했다. 그때 대략 백 미터쯤 떨어져 보이는 세종대왕 동상 뒤에서 재희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지하 시설에서 나와 세종문화회관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동상 뒤편의 지하 계단을 막 올라 온 등산모는 재희의 뒤 30미터쯤에서 재희를 따라가고 있었다. 동지는 ‘재희야!’라고 크게 불렀다. 재희에게 자기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재희를 부르는 소리가 성대를 빠져나가는 순간에 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동시에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재희를 부르는 소리는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몸의 떨림에 흡수되어 거품처럼 가라앉고 말았다.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이 이전과는 매우 달랐다. 지금까지는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가 자잘하게 부서져 암흑의 구멍으로 빨려 들어갈 때 자신은 뒤에서 당기는 강한 힘에 이끌려 현실로 돌아왔었지만, 이번은 그런 식으로 바로 돌아오지 못했다. 모든 존재가 흔들리는 순간 동지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강력한 진동을 느꼈고 그 충격으로 인해 잠깐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278- |
자신의 몸이 낙엽처럼 어딘가로 휩쓸려 가고 있었다. 다른 모든 존재들과 함께 그 암흑의 구멍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는 막연한 느낌을 받은 것 말고는 생각을 하거나 기억을 더듬어 낼 수가 없었다. 휩쓸림이 멈추었을 때야 그것이 깊은 수렁 속으로의 추락이란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동지는 미끄럽고 가파른 벽을 더듬어 언덕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덕마루에 다다르기 전에 도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미끄러지면 다시 기어오르고 다시 미끄러지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기를 반복했는지는 알수 없었으나 어느 순간 아래로부터 알 수 없는 힘이 떠밀어 올렸다. 그 힘을 빌려 언덕마루에 가까스로 올라왔다는 안도감이 듦과 동시에 번쩍 눈이 떠졌다. 2016년의 현실로 돌아온 것이었다. 가까이에 동해와 현서가 보였고 벽시계는 막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수렁 속에서의 일을 생각해 보려고 해도 갈피가 잡히지 않고 머릿속이 어지럽기만 했다. 수렁 속에서 보낸 시간의 길이마저 도무지 가늠되지 않았다. ‘육신을 떠났던 정신 현상이 되돌아와 육신과 결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문득 미여스님의 말이 떠올랐다. 동지는 다른 무엇보다 재희가 궁금했다. 재희를 불렀던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가지는 -279- |
못했지만, 혹시라도 재희가 동지의 작은 기척이라도 들었다면 하는 작은 희망은 마음 속에 있었다. 동지는 거실로 들어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재희의 요양병원을 향해 걸었다. 걸어가는 동안 팔 년 전에 경험했던 오늘의 기억이 조심스러운 붓질로 땅속의 유물을 가려내듯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찾아낸 기억은 이랬다. 팔 년 전 그는 광화문광장에서 정신을 차린 뒤 그 자리에서 잠깐 멍하니 섰다가 다시 인사동길로 돌아왔다. 나갈 때 지선이 몰랐으므로 북인사마당에서 그녀가 기다릴 일도 없었다. 그는 두 번씩이나 지선에게 황당한 모습을 보이기가 민망해서 외부 계단과 옥상을 통해 조용히 침실로 돌아왔다. 그런 기억들이 지금까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다가 팔 년 후 오늘 그 일을 시도한 뒤에야 되살아난 것이다. 지난 1월 19일, 처음 팔 년 전의 몸으로 들어갔을 때는 광화문광장에서 정신을 차리고부터 인사동길로 돌아온 과정과 북인사마당에서 지선을 만났던 일들을 팔 년 전 당시에 기억했었다. 하지만 두 번째인 오늘은 그런 일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팔 년 동안 모른 채 지나왔었는데, 오늘 그 일을 실행에 옮기고 나서야 비로소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280- |
병실에는 재희 혼자 누워있었다. 흰색 벽에는 병실 창틀 위로 올라온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창문 밖의 나뭇가지들은 검은 수초처럼 흔들렸다. 아마 바람이 불고, 하늘 어딘가에는 달이 떴을 터였다. 재희는 미동도 없이 누워있고, 보일 듯 말듯 이어지는 호흡만이 살아있는 사람임을 알게 했다. 장기기증 예정일까지는 15일이 남아있었다. 동지는 의자를 끌어서 침대 곁에 앉았다. ‘재희야, 우린 이렇게 헤어질 수밖에 없는 걸까?’ 재희가 스르르 일어났다. (이젠 받아들여야 해요, 오빠.) ‘너를 보내고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오빠, 너무 괴로워 말아요. 그리고 우리 다음 생에서 꼭 다시 만나요.) ‘아! 신은 왜 너와 나에게 이토록 가혹한 걸까?’ 동지는 벌떡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재희도 따라 일어나 뒤에서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신이 있다면 대답해 주세요! 무엇 때문에 저희를 이토록 괴롭히십니까? 제발 재희를 되돌려줘요.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당신도 죽어버리든가!’ 동지의 부르짖음은 입 밖으로 나오는 대신 그의 몸속에서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재희는 그의 마음속 부르짖음을 들었다. 달빛을 머금은 하늘은 깊은 암청색으로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281- |
하늘은 그가 수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항해했던 명상의 바다와 닮아있었다. 명상의 바다는 그가 몸으로 체득하여 아는 단 하나의 진실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던 어느 때부터 동지는 그 깊고 신비한 빛깔 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명상의 바다를 유영하며 동지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기도했다. ‘신이시여, 도와주십시오. 재희를 살려주십시오. 운명이 재희를 포기하더라도 저는 재희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명상에서 깨어난 동지는 병상 침대로 돌아와 재희의 손을 끌어 잡고 손등에 이마를 얹었다. ‘재희야, 나는 줄곧 내가 너를 포기하지 않는 한은 반드시 길이 있으리라 믿었었어. 그런데 이젠 자꾸만 그 믿음이 무너지려고 해.’ (아!) 재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재희야,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네가 가르쳐 줄 수는 없겠니?’ (아, 오빠는 이제 나를 잊어야 해요. 당장은 어려워도 언젠가는 잊힐 거예요.) ‘아, 재희야! 아무리 생각해도 너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겠어!’ 동지는 재희의 손등에 이마를 얹은 채 오래 생각했다. 이튿날, 동지는 옥상 쉼터에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282- |
초유의 범죄 행위 2016년 5월 22일, 장기기증 예정일의 3일 전에 재희는 S종합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동안 필요한 검사는 마친 상태였다. 기증할 장기는 심장, 간, 폐, 신장, 각막이며 기증 대상자는 모두 여섯 명이 선정되었다. 그중 심장을 이식받기로 한 환자는 재희와 같은 병원에 있었고, 나머지 다섯은 각자의 해당 병원에서 대기했다. 남은 이틀 사이에는 재희의 친구와 제자들이 그녀와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을 갖기로 하였고, 24일 오후에는 재희 모녀가 다녔던 성당의 신부님과 교우들이 병원을 방문하여 병자성사를 할 예정이었다. 재희를 병원으로 옮긴 이튿날, 5월 23일 오후 7시경, 사설 구급차 한 대가 S종합병원 정문을 빠져나왔다. 구급차는 주택가 골목을 -283- |
벗어나 창경궁로에서 우회전하기 위해 잠시 멈칫거렸다. 그때 조수석에 앉은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청년이 운전기사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자 기사는 사이렌을 울리며 차들의 흐름 속으로 밀고 들어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구급차는 창경궁로에서 북쪽을 향해 달렸다. 구급차 안에는 환자를 실은 침대가 놓였고 침대 곁에는 흰색 가운을 입은 남자 의사와 역시 흰색 가운 차림의 여자 간호사 둘이 앉아있었다. 구급차는 작은 언덕을 넘어 거침없이 달려 혜화동 로터리를 직선으로 통과한 뒤 동소문로에 접어들었다. 구급차가 달리는 동안 여자 간호사 중 한 사람이 가운을 벗었다. 마스크와 검정색 동그란 뿔테 안경까지 벗어서 가방 속에 꾸겨 넣었다. 지선이었다. 구급차는 내부순환로를 거쳐 북부간선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중랑천을 건너기 전에 오른쪽의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 분가량 뒤에 골목에서 돌아 나와 다시 북부간선도로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사이렌은 울리지 않았다. 잠시 후, 구급차가 들어갔던 골목과 한 블록 이웃한 골목에서 십육인 승 봉고차 한 대가 나와 북부간선도로에 진입했다. 젊고 우람한 체격의 청년이 운전하는 봉고차는 구급차가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미끄러져 갔다. 봉고차는 내부를 개조한 듯 가운데에 간이침대가 놓였고, 침대에는 환자로 보이는 깡마른 여자가 누워있었다. 침대 곁에는 조금 전 구급차에 탔던 남자 의사와 두 간호사 중 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봉고 -284- |
차는 중랑천을 지난 뒤에 남쪽으로 방향을 꺾어 구리암사대교를 건너 서울양양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병원에서 환자가 사라진 사실을 알았을 때는 환자를 실은 봉고차가 북한강을 건너 가평휴게소를 지날 무렵이었다. 병원 관계자들은 환자가 사라진 사실을 확인한 뒤에도 한참 동안 영문을 몰라 우왕좌왕만 할 뿐, 환자가 누군가에 의해 병원 밖으로 실려 나갔다는 데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담당 의사가 환자의 어머니에게 전화하여 환자가 외부로 유출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귀띔받고서야 병실과 병원 복도에 설치된 CCTV를 확인하고, 병원 관계자가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환자가 실종된 사실을 확인한 후 수배령을 내렸을 때는 저녁 10시가 가까웠다. 병원과 시내 곳곳의 CCTV를 추적하여 자정 무렵에 문제의 구급차를 찾았으나, 오십 대로 보이는 구급차 운전기사는 사라진 환자를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조수석에 앉았던 청년이 요구하는 대로 중랑천이 가까운 어느 주택가의 골목으로 들어가 환자를 내려준 뒤에 바로 구급차를 몰고 돌아온 것이 그가 한 일의 전부였다. 환자를 내린 골목에서 그들이 환자를 어디로 옮겼는지를 구급차 기사는 몰랐다. 그에게서 경찰이 얻어낸 단서는 그 젊은 청년의 체격이 우람하고 잘생겼다는 인상착의뿐이었다. 경찰이 인사동길의 ‘일묵서예’를 찾아온 때는 자정이 가까운 시간 -285- |
이었다. 경찰은 병원 복도 CCTV에 찍힌 간호사 중 한 사람으로 지선을 의심했지만, 지선은 병원에서 환자가 빠져나갔던 시간에 어떤 남자를 만나 데이트를 즐긴 빈틈없는 알리바이를 제시했다. 언론은 초유의 환자 실종 사건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주요 일간지마다 사회면의 머리기사 자리를 차지하였고, 지상파와 종편도 일제히 주요 뉴스로 다루었다. 동지와 재희의 행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음성의 조락헌에도 그들의 흔적은 없었다. 희경뿐만 아니라 진국과 인경도 환자가 병원을 떠나 장시간 지탱하지 못할 것이라며 하루속히 그들을 찾아달라며 경찰에 하소연했다. 스승이 자리를 비운 며칠 뒤부터 제자들은 수련실에 모여 수련을 지속했다. 현서는 밀폐된 공간에서 용학과 단둘이 있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세 제자의 수련 시간은 동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오후 시간에 맞춰졌다. 이 년 전 그 일이 있었던 후 현서가 용학을 대하는 태도는 무관심 일변도였다. 그녀가 먼저 용학에게 말을 거는 경우는 스승의 지시를 전달하는 일 따위를 빼면 찾아보기 어려웠음은 물론이고, 그와 단둘이 있거나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상황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런 중에도 용학은 전처럼 함께 수련을 계속했다. 주의 깊게 둘 사이를 관찰하지 않는 한 남들이 보기에 크게 달라진 점은 없어 보였다. 용학은 변함없이 현서의 주변을 맴돌았고 현서는 변함없이 -286- |
수련에 전념할 뿐이었다. 둘 사이의 불편한 관계에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는 스승이 떠난 얼마 후부터였다. 둘 사이를 갈라놓은 사건이 발생한 지 이 년이란 시간이 흐르기도 했지만, 스승의 부재에 따른 허전함도 현서의 마음에 틈을 만드는 데 한몫한 듯했다. 스승이 자리를 비운 얼마 뒤에 둘은 수련을 마치고 인사동의 찻집에서 이 년 만에 함께 차를 마셨다. 그간 용학이 현서의 냉랭한 태도에도 입을 꾹 다물고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에 자리 잡은 일종의 자신감 때문이기도 했다. 이 년 전에 그녀와 나누었던 사랑의 행위는, 그녀가 불가항력인 상태에서 일방적인 행위였지만, 적어도 그가 느끼기에는 그녀의 벗은 몸은 순종적이었고 친밀했다. 그는 그렇게 기억했다. 그런 기억이 그녀가 그에게 보였던 과장된(그가 생각하기에) 냉혹함이라든지 무시하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의 냉철한 계산 속에 자신감이나 확신 같은 것을 심어주었다. 수련 중에도 그는 자주 그녀의 수련복 속을 상상했다. 수련을 마친 뒤에는 안국역에서, 현서는 경복궁역 방향으로 용학은 종로3가역 방향으로 갈라져 갔다. 용학은 언제나 그녀가 먼저 전철을 타고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선을 피한 채 전철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둘의 생각은 각기 달랐다. 현서는 그에게 징벌적 모욕을 안긴다고 생각하며 그가 지독한 열패감으로 괴로워하기를 -287- |
기대했지만, 용학은 그녀가 기대하는 만큼의 열패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녀를 태운 전동차가 컴컴한 동굴 속으로 꼬리를 감출 때까지 그는 양악의 근육을 자극하는 미소를 숨긴 채 그녀의 벗은 몸을 떠올리며 호주머니 속에서 꿈틀대는 페니스를 지그시 누르곤 했다. 동지는 강원도 양양의 바닷가 펜션모텔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현서가, 지선이 준비해 준 의약품과 동지의 생활용품 가방을 들고, 스승과 재희가 머무는 펜션모텔을 다녀온 뒤였다. 현서는 그곳에서 이틀을 묵은 뒤 서울로 돌아왔고, 그 하루 뒤에 경찰이 그곳을 급습했다. 현서는 용학에게 일말의 의심을 가졌다. “스승님이 계셨던 곳을 경찰이 어떻게 알았을까, 그에 대해 할 말이 없어?”라고 묻는 현서에게, 용학은 경찰이 그동안 현서와 자기를 미행한 것이 틀림없다며 강하게 부인했다. 현서는 구급차에 탔던 간호사 중 하나임이 확인되었고, 용학은 구급차의 조수석에 앉았던 청년으로 밝혀졌으나 두 사람은 불구속으로 입건 되었다. 구급차에 탔던 또 한 사람의 간호사에 대해서는 스승과 제자가 함께 입을 다물었고, 강원도 해안의 펜션모텔에 고용되었던 전직 간호사는 무고함을 진술하여 혐의를 벗었다. 재희는 본래의 요양병원으로 돌아왔다. 희경과 미여가 남부구치소의 면회실에서 동지를 만났다. 계절은 유월 -288- |
말로 접어들어 장마철이었지만 서울은 아직 비 같지 않은 비가 오락가락할 뿐이었고 날씨는 후텁지근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동지가 희경에게 용서를 빌었다. “덕분에 재희는 아직 살아있고.” 희경이 말했다. “지내기에는 어떤가요?” 미여가 물었다. “저는 여기나 밖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재희가 걱정될 뿐이죠.”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이 안에서도 여전히 그 시간여행이란 걸 시도 하겠지요?”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는 있습니다. 명상 수련 중에 우연히 찾아올 뿐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렇지만 한 가지만은 꼭 당부하고 싶어요.” “····” “그 기회가 찾아오더라도 과거의 육신에 들어가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건 매우 위험하니까요.” 희경이 고개를 들어 미여를 보았다. 그때 동지가 희경에게 말했다. “어머니, 재희를 제게 조금만 더 맡겨주십시오. 부탁입니다.” 희경은 동지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희경이 말했다. “미여가 한 말, 조금은 섭섭하네.” 화난 말투는 아니었으나 섭섭한 마음이 묻어났다. 미여는 희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289- |
“알아, 하지만 자칫 동지까지 잃을 수도 있어.” “둘 다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할까, 과거를 바꾼다는 거?” 매정한 말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말해두는 편이 좋다고 미여는 생각했다. “동지는 가능하다고 말해!” 희경은 자신도 모르게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둘은 시선을 앞 유리 쪽에 둔 채 말을 이어갔다. “그건 너도 믿지는 않았잖아. 그 말을 믿었다면····” “동지가 그랬어. 몇 번 시도했었고, 별일 없이 돌아왔다고.” “시간을 늘리려고 노력하거든. 그건 매우 위험해!” 희경은 짧게 숨을 고르며 한 호흡만큼 생각을 가두었다가 ‘결국 사람은 다르지 않아, 그렇지?’라며 설핏 웃었다. 며칠 후, 진국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전화를 받았다. 동지가 의식을 잃어 남부구치소에서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로 후송했다는 전언이었다. 진국은 낡은 쏘나타 승용차의 옆자리에 인경을 태우고 병원이 있는 광명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차 안에서 인경이 전화로 희경과 지선에게 알렸다. 인경의 전화를 받은 지선은 현서를 전화로 불렀고, 현서는 곧바로 택시를 타고 달려와 지선과 합류했다. 지선은 자신의 제네시스 승용차에 현서와 동해를 태우고 광 -290- |
명으로 달려갔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도 서울의 도로는 적잖이 붐볐다. 마포대교를 건너 경인로에 접어들면서 교통량은 줄어들어서 안양천로로 꺾어 들고부터는 차량 동행이 뜸했다. 인경과 지선이 광명의 종합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뒤 곧이어 희경과 미여 스님이 도착했다. 대략 반 시간 뒤에 진국 부부가 사색이 된 얼굴로 나타났다. 동지는 두부 손상 등의 외상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CT나 MRI 촬영은 생략한 채 먼저 혈액을 채취하여 혈당 및 전해질과 약물 반응 등을 검사 중이었고, 뇌파 검사는 이미 마친 상태였다. 혈액 검사와 뇌파 검사 결과 의학적으로는 별다른 이상 소견이 나타나지 않자, 응급실 당직 의사는 어딘가로 전화를 한 후 고개를 갸웃거리며 CT와 MRI 촬영을 준비했다. 그 외에도 갑상샘 기능 등의 내분비 장애와 외부 독소 유입 등에 대해 추가 검사를 준비했다. 의사는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의 경우 응급처치 시간을 놓치게 되면 코마로 이어질 위험성이 높다고 했다. 동지의 경우 구치소 의료실에서 적시에 응급처치하여 병원으로 이송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동지는 몇 시간째 혼수상태가 지속되었고,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도록 혼수상태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현서와 동해는 스승의 곁에 앉아 조용히 스승의 전신을 주물렀다. 시간이 흐르고 두 제자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 -291- |
다. 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의 움직임을 초조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동지는 예의 그 빙벽처럼 미끄러운 언덕을 기어오르다가 미끄러져 내리고 다시 오르고 미끄러지기를 반복했다. 손은 밧줄을 닮은 뭔가를 잡고 있었는데, 그것에 의지하여 언덕을 오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언덕은 그의 힘으로 극복하기에는 지나치게 가파르고 미끄러웠다. 동지는 점점 지쳐갔다. 언덕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세상과의 단절임을 그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가 이 세상에는 없는 행위를 반복하는 언덕 너머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름과 미끄러짐을 반복하였지만, 그 모든 행위는 시간의 흐름에 섞이지 않고 분리된 동작인듯했다. 그는 그가 알고 있는 세상과 완벽하게 유리되었음을 느낌으로 알았다. 존재와의 단절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초조감 따위는 없었다. 다만 오르고 미끄러지는 행위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속하였는지 모르는 가운데 점차 자기라는 존재가 소진 되어 가는 모습이 객관화 되어 갔다. 자신의 존재가 안개 속에서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등댓불처럼 깜박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불이 보이지 않고 편안했다. 깃털같이 가볍고 편안한 공간을 시간 개념이 없는 가운데 유영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위로 떠 오르는 상승감을 느끼는가 싶었는데, 그와 동시에 다시 등댓불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무엇인가 정체 모를 힘이 작용하여 손을 잡아 끌어올렸다. 그리고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제자 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두 손 -292- |
을 가슴 앞에 모은 채 눈을 꼭 감고 있는 미여 스님과 아버지와 어머니와 희경 아주머니의 얼굴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속속 병원으로 들어오는 아침이었다. 구치소 안에서 만난 열네 번째의 시간여행 기회였다. 팔 년 전, 재희가 사고를 당했던 때는 광우병 파동이 막바지로 접어들 때였고, 시위대의 동태는 내란을 연상케 할 만큼 폭력으로 치달아서 세계가 한국의 광화문광장을 지켜보던 때였다. 언론은 재희의 사건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랬었는데 팔 년 후 전대미문의 장기기증자 도피 사건이 발생하자 과거의 사건이 다시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유명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입선한 여성과 대왕고래란 별칭이 붙여진 극 강의 비주얼을 지닌 한 남자 사이의 상상을 초월하는 순애보는 세간의 관심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두 사람에 대한 정보는 극히 부족했다. 그녀의 신춘문예 입선 때의 사진과 남자의 군 복무 때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몇 장만이 포털사이트에 등장했다. 당시의 사건기록이 다시 들춰졌다. 경찰은 왜 이 사건을 끝까지 추적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답해야 했고, 동시에 과거의 사건은 드라마틱하게 재구성되어 전파를 탔다. 세간의 관심은 차츰, ‘동지, 그는 누구인가?’로 옮겨갔지만, 그의 주변 사람들은 좀처럼 그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동지의 제자들도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을 -293- |
피했으며, 훈련하는 모습도 보여주기를 꺼렸다. 다만, 한 집에서 기거하는 지선으로서는 막무가내로 잡아뗄 수만은 없는 노릇이어서 그녀의 입을 통해, 그가 아들을 살려준 은인이란 사실과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가 무극권이라는 무술을 아들에게 전수한다는 정도가 알려졌다. 지하철에서 동해를 구한 일화가 알려지자, 사람들은 어느 청년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일촉즉발의 순간에 어린아이의 생명을 구해냈던 몇 년 전의 뉴스를 소환하고 그에게 열광했다. 무극권의 내력에 대해서는 취재진이 음성 동지의 본가를 찾아가 진국에게서 약간의 정보를 얻어냈다. 중국 땅 랴오닝성에서 온 동지의 스승은 일제 말기에 일경의 감시를 피해 간도로 떠난 한 남자의 손자였다. 경상도 현풍이 고향인 남자는 어린 아들 하나를 데리고 간도로 건너가 유랑민으로 살았는데, 간도에서 산 지 오 년 만에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한반도는 해방을 맞았지만, 잠시 머뭇거리던 사이에 또다시 6.25전쟁이 일어나 돌아올 길이 막혔다. 그 후 며느리를 들여 손자 하나를 얻었으나, 마적 떼에게 아들과 며느리를 잃는 불행한 일을 당한 뒤에 손자 하나만 등에 업고 지금의 랴오닝성 북쪽으로 이주하였다. 그 손자가 동지의 스승인 무성이었다. 선천성 뇌전증을 앓았던 무성은 열 살이 되던 해에 그곳의 한적한 강변에서 홀로 무술을 수련하던 은둔자에게 맡겨졌다. 할아버지가 손자의 손목을 잡고 무술 고수를 찾아간 이유는 그자의 기력으 -294- |
로 손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는데, 그가 무성의 자질을 알아보고 제자로 삼아 무극권을 전수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무성은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유골을 안고 할아버지의 고향을 찾아 한국 땅을 밟았다. 그의 나이 서른 때였다. 서울에 정착한 무성은 운명적으로 갓 태어난 동지를 만났고, 아이가 쫓아다니면서부터 무극권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크면서 동지가 스승에게서 부여받은 책무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무극권을 깊이 수련하여 십성(十成)의 경지를 이루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영민한 인재를 찾아 무극권의 맥을 잇는 것이었다. 진국은 동지가 무성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될 때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며, 운명적인 만남이란 말로 대신했다. 스승은 죽음이 임박하자 어린 제자의 소주천을 뚫어주기 위해 자신의 육신에 남은 마지막 기력까지 소진한 후 죽었다. 스승은 죽기 전에 동지가 이룬 무극권의 성취를 삼성(三成)이라 일러주며, 삼성을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무극권이 아니라 무극무(無極舞)가 된다고 했다. 또 한 가지 스승이 남긴 말은, 결혼하기 전에 꼭 칠성(七成)을 이루어야 한다는 당부였다. 그것은 일찍이 무성이 중국에서 수련할 때 스승이 일러준 계명이었는데, 무성은 죽기 직전에 이를 동지에게 전해주었다. 칠 성의 경지를 이루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동지가 묻자, 스승은 마음이 저절로 깨달아 알게 된다고 말해주었다. -295- |
동지는 인기 연예인 못지않은 대중의 호기심과 선망의 대상이 되어 갔다. 네티즌들은 ‘그는 도피할 인물이 아니다. 사실관계가 다 밝혀진 마당에 구속 수사할 이유가 뭐냐, 당장 석방해야 한다.’고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런 대중의 관심 때문인지 동지는 구치소에 구금된 한 달 만에 구속에서 풀려났다. 그가 풀려나던 날, 구치소 앞에서의 인터뷰 장면은 신문 방송을 포함한 온갖 매체가 앞다투어 보도하였고, 포털사이트에는 ‘환자 도피’, ‘동지’, ‘재희’ ‘대왕고래’, ‘포항 여기자’ 등과 비슷한 한 두 글자만 쳐도 바로 동지와 재희의 사연이 떴다. 동지가 일으킨 의료사상 초유의 범죄 행위에 대한 법원의 조치가 마무리될 무렵 계절은 가을로 넘어가고 있었고, 세간의 관심도 더위가 물러가듯 차츰 식어갔다. 판사는 동지에게 실형을 선고하였으나 형의 집행은 유예했다. 동지가 구치소에서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난 며칠 뒤에 희경은, 미여 스님과 진국 부부의 간곡한 설득을 받아들여, 재희의 장기기증 동의를 철회했다. -296- |
첫댓글 동지가 한바탕 우여곡절의 소용돌이 속에 빠졌다가 다시 희미한 여명처럼 암시를 보여주는군요. 권선징악처럼 행복하고 명쾌한 결말을 기대하면서 크라이막스와 대단원을 기디리고자 합니다.
시간 여행, 무극권, 무극무... 신비주의 이야기를 읽고 있네요. 일대 전환을 하기 위한 숨고르기 과정을 거치고 있는 거지요? 어떤 전환이 이루어지게 될 지 자못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