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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오늘은 글이 좀 길어질거 같은데 내일 숙제는 다 한거야? 아참, 토요일이구나...
좌우당간, 오늘은 6월 9일... 무려 20년전인 1987년 6월 9일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 해볼까...
내가 그때 몇살이었는지 말하면 너희들은 "우앗 지기님이 아즈씨잖아!!" 이럴까봐 그건 못밝히겠다.
암튼, 당시 지기는 영웅본색 등 홍콩 르느와르에 빠지는 한편으로 매일 시를 5편씩 쓰는 문학소년...
물론, 중딩때부터 강력한 헤비메틀에 빠져있던 나는 스피드메틀에 대한 버닝이 시작되고...
그러나, 당시 사회에 눈이 뜨게 된 계기는 어느 대학생 선배가 전해준 한장의 종이...
대학생이 읽어야 할 필독서 100권 리스트... 그중 50%는 읽다가 걸리면 경찰에 끌려가는 그런 책...
하하 지금은 그 책들 거의 다 누구나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당시엔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는 시내를 걷다가보면 대학생 형아들의 가방을 경찰들이 열어서
마치 중학교 학생부 선생님이 담배검사하듯이 가방안을 검사하곤 했단다. ㅎㅎㅎ
책을 구하러 다니다 보면 고딩인 내가 이런 책을 구하러 다닌다고 서점 아저씨들이 화냈지.
"대학생놈들이 지들이 책을 갖고 다니면 걸리니까 어린 고딩을 책 사오라고 부려먹다니!!"
그 책중의 하나였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무려 이 책을 읽고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중학교 1학년인 모 이웃님의 리뷰로그를 보고... 정말 이젠 세상이 바뀐게 실감났다고 할까 ^^;;
암튼, 나를 속이는 세상을 넘어 누구보다 강하고 정의롭고 싶어서 무섭게 책을 읽던 그 당시...
1987년... 6월 9일... 한 어린 대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단다.
그래, 오늘 나는 20년전 오늘, 1987년 6월 9일에 대해서 너희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단다.
특히, 박종철과 이한열을 모르고... 87년 이전에는 태어나지 않은 어린 너희들에게 말이야.
글이 길어도 지기같이 바쁜사람이 쓴건데 그 정성을 봐서라도 우리 읽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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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읽는데 음악은 바꿔주는게 좋을거 같아서 올렸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을 그리워하던 어두웠던 그 시절...
1987년의 시작...
유신정권까지 이어가면서 대통령을 또 해먹으려다가 비명에 쓰러져간 박정희 대통령... 그 혼란의 시기에 12.12. 구테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제 5 공화국은 이전 박정희 군사정권과의 차별화를 둬야했어. "대통령은 단 한번뿐이야" 그래서 대통령 단임제로 시작된 그의 임기는 딱 한번 8년뿐... 87년까지 그의 대통령 임기는 정해졌단다. 광주를 군화로 휩쓸고 삼청교육대로 끌고가 패대는등 지금으론 상상이 안되는 인권이 유린당하던 전두환 정권의 제 5 공화국... 어느새 세월은 흘러 드디어 차기 대통령 선거를 앞둔 87년이 드디어 시작되었단다...
1987년 1월 14일...
경찰아찌들은 수배중이던 운동권 리더인 학생의 소재를 찾기 위해 함께 써클활동을 하던 후배인 서울대생 박종철을 끌고갔단다. 붙잡아간 박종철군 역시 운동권 학생었거든. 연행된 뒤 여러가지 고문들을 한 모양이야... 그런 각종 고문을 당하던 중, 물고문을 당하다가 죽었단다. 불쌍한 만 스무살짜리 청년이... 그리고 경찰은 기자회견을 열어서 그가 조사를 받던 중 심장이 놀라서 갑자기 죽었다고 발표했단다. 이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말하길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를 했어. 근데 아무리 어루운 세상에도 양심을 가진 사람이 있기마련... 숨진 박종철을 최초로 검안한 황적준 박사는 박군이 쇼크사로 숨진 게 아니라 고문에 의해 숨졌다고 양심선언을 하고 결국 고문에 참가한 경찰 두 명이 체포되었단다. 당시로선 대단한, 한마디로 목숨을 건 양심선언이었단다. 국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겉으로 까놓고 표현을 하진 못했지만 "정말 우리나라가 민주화된 나라가 아니구나" 다들 그렇게 느꼈겠지... 그리고 조용히 이 사건은 무마되는 듯...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호헌조치>를 발표했단다. 즉, 제 5공화국 헌법을 고치지 않고 그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했단다. 음... 이 헌법대로 대통령을 뽑는건 "간접선거" 방법이란다. 즉,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어떻게 뽑힌거냐 하면 간략히 쉽게 설명하자면 각 동네에서 투표권을 가진 사람을 그 동네의 대표라고 뽑은 뒤, 그사람들이 모여서 소위 "국민의 대표네" 하구서 한군데 체육관에 모여서 투표를 하는거야. 당시 대통령 후보는 전두환 뿐이었고 그야말로 만장일치 추대~ 북한의 김정일이 국방위원장 되는거와 그다지 다를게 없는 그런방법이거든. 암튼, 헌법을 고쳐서 국민들의 직접선거를 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웃끼지 마라. 담번 대통령도 체육관에서 뽑는거야!" 뭐 이런 쐐기를 박는 발표를 한거가 바로 호헌조치(헌법을 안바꾸겠다는 공표) 이거거든. 그러니 국민가지고 장난하나... 세상이 시끄럽지. 이렇게되면 대통령 선거를 하나마나 또 짜고치는 고스톱 아니겠어? 비록 공식화 되진 않았지만... 민정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는 군복벗고 민주정의당 대표로 쨘~ 하고 앉아있는 노태우라는건 다들 알고 있었거든...
1987년 5월 18일...
이날 전국을 뒤집어놓는 엄청난 발표가 나왔단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은 지난 1월의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은 사건을 무마시키기 위해 국민을 기만한 조직적 사기였고, 고문에 참여한 경찰이 이미 구속된 둘이 아니라 총 다섯 명이었다고 발표했단다. 즉, 양심선언이 이루어지자 국민들의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그냥 두명 경찰이 희생양이 되어서 감옥에 가고, 그렇게 좀 지나면 닭머리 머리나쁜 국민들을 잊어버리고 잠잠해지겠지... 이런거였던거야. 근데 생각해봐. 박종철군을 고문해서 죽인죄로 감옥에 간 경찰들은 지들은 희생양으로 감옥에 갖혀있는데 생각해보니 이거 억울했겠지. 그래서 감옥에서 맨날 징징거렸고... 그걸 우연히도 그들 옆 방에 수감된 이부영씨(현 국회의원)에게 사건전모 를 털어놓았단다. 이부영은 이 사실을 평소 알고 지내던 교도관을 통해 감옥 밖으로 알리게 되어 이 발표를 통해 세상에 전모가 밝혀지게 된거야. 으아 국민들이 열받았어. 장난하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급한대로 당시 치안본부장(현재의 경찰청장)이 짤렸고... 고문에 참가한 다른 경찰들도 추가로 구속했지만... 국민들은 더이상 참기 어려운거야... 일제시대도 아닌데!! 꽃같이 젊은 나이의 청년을 물고문으로 죽여놓고 이자식들이 장난하나...
1987년 6월 9일...
이날 약 천여명의 연세대학교 학생들은 국민평화대행진(6·10대회)을 하루 앞두고 집회를 하고 있었어. 당시 시국대회네 이런걸 하려면 경찰들이 학교를 뺑 둘러싸고 원천봉쇄를 하고있는 모습이 흔했는데 내일 있을 집회에 출정하기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를 마친 뒤, 학생들은 정문 앞으로 나와서 둘러싸고 있는 경찰을 향해 시위를 했단다. 당시엔 시위라고 하면 그냥 노래부르고 구호(당시 대표적인 구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정도가 아니라 다들 과격했어. 보도블록 깨서 던져대는건 기본이고 무려 화염병이 화끈하게 날라다녔지. 그리고 경찰쪽에서도 짤없이 최루탄 쏘아대면서 잡아다 패댔고... 아무튼 이날 시위를 하던 중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한열군이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어. 피를 흘리며 친구의 품에서 쓰러지는 그의 사진은 위에서 다들 봤겠지만... 이한열군의 이 사진 한장은... 정말 터지기 직전인 폭탄의 뇌관에 불을 붙이는 형국이 되었단다. 왜냐하면 바로 얼마전, 꽃다운 나이의 한 젊은이가 경찰에게 물고문을 당해 죽은 박종철군의 고문 치사 사건의 진실이 밝혀졌고, 그 엄청난 충격이 채 가시기 전에... 또 다시 발생한 이 엄청난 사건에 국민들 모두에게 대단한 충격을 주었단다.
1987년 6월 10일...
예상대로 전두환대통령은 차기 대통령후보로 민주정의당 대표인 노태우를 지명했고 (아까 설명했듯이 체육관 대통령인데 후보가 되면 대통령 된거나 마찬가지잖아;;) 이날도 길거리에선 시국대회가 경찰봉쇄 속에서 열렸단다. 대학생과 시민들 '호헌철폐' 외치며 격렬하게 시위를 했으나 밤이 되면서 시위대는 경찰에게 밀리기 시작했고... 밀려가다가 마지막으로 명동성당으로 피신한 이들은 명동성당 안에서 농성을 시작했어. 카톨릭 성당의 건물은 로마 카톨릭 교구청에 소유된 건물이기 때문에 그걸 확 부시고 들어가서 뒤집어버리기엔 좀 국제적인 눈치가 보여서... 그래서 경찰들도 함부로 명동성당안에 들어가지 못하기도 했고... 더이상 쫒겨갈 수 없는 그들에게 자리를 몰래 내어준 성당측의 또다른 응원속에... 점차 농성에 참여하는 시민, 학생들은 자꾸자꾸 늘어가게 되었단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민주화를 이루게 된 유월항쟁의 시작, 6월 10일이란다.
명동성당 앞 바리케이트
1987년 6월 항쟁...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결국 진실이 밝혀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과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 두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이 쓰러진 사건으로 인해 당시 전두환 정권은 더이상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고 할까... 피 끓는 젊은이들, 학생들의 시위는 분노한 온 국민들의 응원 아래 6월동안 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전국으로 퍼저나갔단다. 6월의 여름의 날씨가 날로 뜨거워지면서 더더욱 뜨거워진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 전국 33개 도시에서 하루 100만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이는 등 6월 항쟁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자, 시국 수습을 위해 결국 6월 29일에 차기 대통령후보이자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었던 노태우가 대통령 선거의 직선제 개헌을 발표하게 되었지. 바로 이것이 6·29선언인거야. 두 젊은이의 목숨뿐 아니라 온 국민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해서 얻어낸 약속... 87년에 있을 전두환 다음의 차기 대통령 선거는 국민들의 손으로 직접 투표해서 뽑게 된거란다. 만세!!
1987년 7월 9일...
결국 쓰러진 이한열군은 일어나지 못하고... 7월 5일... 결국 뇌 손상으로 심폐기능이 정지되면서 죽었단다. 민주국민장으로 치루어진 영결식에는 학생, 시민, 정치인과 재야단체 회원 등 총 7만여 명이 참석하였고, 시신은 광주 망월 동 5·18묘역에 묻혔단다. 사실 이때 난 "아, 이제 김대중과 김영삼이 저렇게 손을 잡고 함께 걷는다면... 차기 정권은 민주화정권이 들어서겠구나!!" 하고 기쁘게 이들의 행진을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결국 절대로 그들이 합쳐질 수 없는 떼거리 집단임을 오랜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1987년 12월...
온국민들이 열망하던 대통령 직선제 선거가 치루어졌지만...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 암울한 군사정권들 밑에서 눈치빠르게 타협하며 살아남는법만 배운, 그리고 온 국민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해서 직선제의 기회가 주어지자 다가올 권력에 눈이 먼 떼거리 민주세력들의 욕심들 때문에... 야권에서는 단일화된 후보를 내지 못했고... 결국 국민들의 열망의 표는 김영삼과 김대중으로 갈리게 되었단다. 대통령 선거 결과: 1위 노태우 2위 김영삼 3위 김대중 4위 김종필... 그렇게 1987년은 저물었지.
그리고...
1987년 숨진 이한열과 박종철은 14년 만인 2001년에야 권위주의 정권에 항거하다 숨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되어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했단다.
마지막으로...
작년 여름... <청년이 바로 서야 조국이 바로 선다>는 신념하게
자신이 믿는 정의를 위해 그들의 목숨도 아깝지 않았던...
그 뜨거운 피를 주체하지 못해 거리에서 목터지게 민주화를 외쳐댔던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Poetic Scenery에 올렸던 시
아버님 말씀 (정희성)... 이 시를 꼭 읽어보길 권한다.
http://blog.naver.com/vanziggy/50006634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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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슬퍼요ㅜ 저기 영결식에 있엇던 목사님두 돌아가셧다고 들었어요...
동영상보고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요 .다시한번 민주주의를 외치고싶어지네요!
맞아요,서울에서 직장생활 할때 최루탄 냄새,눈을 못 뜰정도로....민주주의를 힘들게 찾아냈는데....또 다시 뺏길까봐 무서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