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동묘지로 더 잘알려진 망우리추모공원은 검색을 해봐도 아직은 망우리공동묘지로 검색을 해야 더 많이 나온다.
이곳은 묘지답사로 처음 찾아왔었지만 그 후에도 풍수답사를 위해 몇번 더왔었고 아차산, 용마산 등산을 할때는
일부러 항상 이곳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해 그다지 낯설지 않은 곳이 되었다. 금년 봄에는 이곳에 계신 애국지사 묘를
제대로 답사하기 위해 준비를 하여 묘지답사를 했는데 그래도 누락된 묘역들이 있었고, 풀이 우거져 묘역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얼마전 추석성묘가 끝난 뒤에 다시한번 찾았다.
이곳은 다른 곳과 달리 먼저 다녀오신 분들이 묘역의 위치를 비교적 잘 표시해주어서 뒤에 가는 저와같은 사람들이
편히 다녀올 수 있어서 감사를 드리고 싶다.(네이버블로그 기분좋은나무공간 참조)
그래도 아직도 애매한 묘역위치가 많아 이번에 망우리 공원묘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특별히 특집으로 만들어 본다.
본 내용은 답사순서를 따라가며 묘 위치를 중심으로 설명할 예정이다. 지도의 번호에 맞게 아래에 묘를 설명하며
묘 번호나 묘주인공의 이름을 클릭하면 바로가기 될 수 있도록 준비할 예정이다.
개별 묘의 위치를 가능한한 자세히 위치를 올릴 것이며 내용은 수시로 보강하여 마무리를 지을 예정이다.
망우리공원
망우리공원은 1933년 2월 2일자 동아일보 “미아리 공동묘지가 조만간 가득 찰 것에 대비하여 경기도 망우리의 임야 70여 만 평을 경성부의 공동묘지로 결정하였다.” , 1935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 “이태원의 공동묘지를 택지화하기 위하여 37,000餘基 중 연고자가 있는 묘는 망우리로 이장하고 무연고 묘는 신사리(新寺里)에서 화장하기로 하였다.”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망우리 망우산을 1933년부터 서울시의 공동묘지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40년이 지난 1973년 3월 25일에는 28,500여기의 분묘가 가득차 더 이상의 묘지 쓰는 것이 금지된 이후 현재는 이장과 납골을 장려하면서 2005년 9월말 현재 17,041基가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줄어들 전망이다. 이 시기에 도산 안창호, 고하 송진우, 명창 임방울, 애국지사 조종완, 박찬익, 백대진 등의 묘소도 이장하여 국립묘지와 사립공원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1992년 2월에는 이곳에 안장되어 있는 방정환, 오세창, 한용운, 조봉암, 지석영, 문명훤, 장덕수 등 7명의 연보비를 중랑구에서 산책로를 중심으로 조성했으며, 1998년 2월에는 추가로 박인환, 문일평, 서병호, 서동일, 오재영, 서광조, 유상규, 오긍선 등 8명에 대한 연보비가 추가로 5.2km의 산책로에 조성하였다. 그 동안 망우리 공원에는 3.1독립운동을 주도했던 萬海 한용운 등을 비롯한 17인의 유명인사가 안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각 언론사 인명록 및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중심으로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장묘문화센터의 고인 검색을 통해 묘역을 확인하고 현장 답사를 통해 소설가 계용묵을 비롯한 10인의 유명인사가 추가로 안장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서울시 중랑구청 홈페이지에서 인용>
망우산 일대 83만 2,800㎡의 공간에 조성된 묘지공원이다. 1933년 5월 27일부터 공동묘지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1973년 3월에 2만 8,500여 기의 분묘가 가득 찼다. 이장과 납골을 장려한 결과 2005년 9월 기준으로 1만 7,041기의 묘가 남아 있다. 한용운, 오세창, 서동일 등 독립운동가들과 방정환, 이중섭, 박인환 등 17인의 유명인사가 잠들어 있으며, 안창호 선생의 묘도 이장되기 전에는 이곳에 있었다. 산책과 조깅을 즐길 수 있는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5.2km의 산책로 곳곳에 15인의 연보비가 놓여 있다.
<두산백과에서 인용>
망우추모공원은 망우산 일대 83만2,800평방미터의 공간에 조성된 묘지공원입니다. 1933년 5월27일 부터 공동묘지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1973년 3월에 2만8,500여 기의 분묘로 가득 찾다. 이후로는 더이상 묘를 쓸수가 없었고, 그동안 이장과 납골을 장려한 결과 2005년 9월에는 1만7,041기가 남았으며 특히 중랑구에서 공원화사업의 일환으로 이장비(80만원)를 지원하면서 이장이 대폭 증가 하여 2012년 8월31일 기준으로 8,539기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금년부터 중랑구청에서는 예산부족으로 이장비를 지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중랑구 "사색의 길"로 지정되어 산책과 조깅을 즐길수 있는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4.7km의 산책로 곳곳에 15인의 연보비가 놓여있어 역사의 장이 되기도 합니다.
<블로그 기분좋은 나무공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미지정
망우리 공원묘지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산69-1번지일대(구리시 일부 포함)
중랑구청,구리시청
망우리고개 망우동 유래
망우동의 동명은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시의 경계되는 망우고개가 있기 때문에 붙여졌습니다. 망우고개라는 명칭은 조선초부터 불리워져 왔으며, 조선시대 이래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으로 있다가 일제 강점기 때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로 개칭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편입되었습니다. 편입된 후에도 동대문구 망우출장소에서 1968년 1월 1일(조례 제491호)까지 행정을 담당하였습니다. 망우동은 경기도, 강원도 방면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으로서 망우리고개와 공동묘지가 있는 험준한 지형 때문에 예부터 수도방어의 요충지였습니다. 공동묘지와 고개로 널리 알려져있지만 도로확장 및 구획정리사업 후 교통이 편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신흥주택가와 교육지구로 변모하였습니다. 망우동의 동쪽으로는 망우산(281m)의 능선을 경계로 경기도 구리시와 인접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면목동에 맞닿아 있으며, 서쪽으로는 상봉동과 경계를 짓고 북서쪽으로는 신내동과 접해 있습니다.
<서울시 중랑구청 동명유래에서 인용>
풍수를 중요시했던 태조는 무학대사, 하륜 등으로 하여금 자신의 음택(陰宅)을 물색하게까지 했다. 양주 땅 검암산 밑에 좋은 음택 자리가 있다는 전갈을 받은 태조는 그곳으로 왕림한다. 청룡, 백호 두 산줄기가 너른 벌판을 감싸안은 아늑한 명당은 돌도 별로 없는 옥토였다. 결국 태조는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의 뜻대로 이 명당에 묻혀 건원릉(健元陵)이 마련되고 그 후에도 능이 여럿 들어서 '서울 동쪽의 9릉'이라 해서 동구릉(東九陵)이 되었다. 좋은 신후지지를 정한 태조는 만족했다.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망우리고개에 올라서서 자신의 음택이 될 자리를 바라보고 혼자 말하듯이 한 마디 했다. "이제야 근심을 잊겠노라." 근심(憂)을 잊겠다(忘)는 뜻의 이 한 마디 말은 결국 망우(忘憂)라는 지명을 낳았고, 이것이 고개이름과 동리 이름으로 붙여진 것이다.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에서 인용>
▼ 중랑구 사색의 길 책자에 나오는 지도
▼ 책자에 나오는 망우리 묘지 유명인사 묘역.. 이 중에서 몇분은 국립묘지로 이장을 했다.
망우리공동묘지로 더 잘알려진 망우리추모공원은 검색을 해봐도 아직은 망우리공동묘지로 검색을 해야 더 많이 나온다.
이곳은 묘지답사로 처음 찾아왔었지만 그 후에도 풍수답사를 위해 몇번 더왔었고 아차산, 용마산 등산을 할때는
일부러 항상 이곳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해 그다지 낯설지 않은 곳이 되었다. 금년 봄에는 이곳에 계신 애국지사 묘를
제대로 답사하기 위해 준비를 하여 묘지답사를 했는데 그래도 누락된 묘역들이 있었고, 풀이 우거져 묘역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얼마전 추석성묘가 끝난 뒤에 다시한번 찾았다.
이곳은 다른 곳과 달리 먼저 다녀오신 분들이 묘역의 위치를 비교적 잘 표시해주어서 뒤에 가는 저와같은 사람들이
편히 다녀올 수 있어서 감사를 드리고 싶다.(네이버블로그 기분좋은나무공간 참조)
그래도 아직도 애매한 묘역위치가 많아 이번에 망우리 공원묘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특별히 특집으로 만들어 본다.
본 내용은 답사순서를 따라가며 묘 위치를 중심으로 설명할 예정이다. 지도의 번호에 맞게 아래에 묘를 설명하며
묘 번호나 묘주인공의 이름을 클릭하면 바로가기 될 수 있도록 준비할 예정이다.
개별 묘의 위치를 가능한한 자세히 위치를 올릴 것이며 내용은 수시로 보강하여 마무리를 지을 예정이다.
망우리공원
망우리공원은 1933년 2월 2일자 동아일보 “미아리 공동묘지가 조만간 가득 찰 것에 대비하여 경기도 망우리의 임야 70여 만 평을 경성부의 공동묘지로 결정하였다.” , 1935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 “이태원의 공동묘지를 택지화하기 위하여 37,000餘基 중 연고자가 있는 묘는 망우리로 이장하고 무연고 묘는 신사리(新寺里)에서 화장하기로 하였다.”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망우리 망우산을 1933년부터 서울시의 공동묘지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40년이 지난 1973년 3월 25일에는 28,500여기의 분묘가 가득차 더 이상의 묘지 쓰는 것이 금지된 이후 현재는 이장과 납골을 장려하면서 2005년 9월말 현재 17,041基가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줄어들 전망이다. 이 시기에 도산 안창호, 고하 송진우, 명창 임방울, 애국지사 조종완, 박찬익, 백대진 등의 묘소도 이장하여 국립묘지와 사립공원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1992년 2월에는 이곳에 안장되어 있는 방정환, 오세창, 한용운, 조봉암, 지석영, 문명훤, 장덕수 등 7명의 연보비를 중랑구에서 산책로를 중심으로 조성했으며, 1998년 2월에는 추가로 박인환, 문일평, 서병호, 서동일, 오재영, 서광조, 유상규, 오긍선 등 8명에 대한 연보비가 추가로 5.2km의 산책로에 조성하였다. 그 동안 망우리 공원에는 3.1독립운동을 주도했던 萬海 한용운 등을 비롯한 17인의 유명인사가 안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각 언론사 인명록 및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중심으로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장묘문화센터의 고인 검색을 통해 묘역을 확인하고 현장 답사를 통해 소설가 계용묵을 비롯한 10인의 유명인사가 추가로 안장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서울시 중랑구청 홈페이지에서 인용>
망우산 일대 83만 2,800㎡의 공간에 조성된 묘지공원이다. 1933년 5월 27일부터 공동묘지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1973년 3월에 2만 8,500여 기의 분묘가 가득 찼다. 이장과 납골을 장려한 결과 2005년 9월 기준으로 1만 7,041기의 묘가 남아 있다. 한용운, 오세창, 서동일 등 독립운동가들과 방정환, 이중섭, 박인환 등 17인의 유명인사가 잠들어 있으며, 안창호 선생의 묘도 이장되기 전에는 이곳에 있었다. 산책과 조깅을 즐길 수 있는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5.2km의 산책로 곳곳에 15인의 연보비가 놓여 있다.
<두산백과에서 인용>
망우추모공원은 망우산 일대 83만2,800평방미터의 공간에 조성된 묘지공원입니다. 1933년 5월27일 부터 공동묘지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1973년 3월에 2만8,500여 기의 분묘로 가득 찾다. 이후로는 더이상 묘를 쓸수가 없었고, 그동안 이장과 납골을 장려한 결과 2005년 9월에는 1만7,041기가 남았으며 특히 중랑구에서 공원화사업의 일환으로 이장비(80만원)를 지원하면서 이장이 대폭 증가 하여 2012년 8월31일 기준으로 8,539기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금년부터 중랑구청에서는 예산부족으로 이장비를 지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중랑구 "사색의 길"로 지정되어 산책과 조깅을 즐길수 있는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4.7km의 산책로 곳곳에 15인의 연보비가 놓여있어 역사의 장이 되기도 합니다.
<블로그 기분좋은 나무공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미지정
망우리 공원묘지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산69-1번지일대(구리시 일부 포함)
중랑구청,구리시청
망우리고개 망우동 유래
망우동의 동명은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시의 경계되는 망우고개가 있기 때문에 붙여졌습니다. 망우고개라는 명칭은 조선초부터 불리워져 왔으며, 조선시대 이래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으로 있다가 일제 강점기 때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로 개칭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편입되었습니다. 편입된 후에도 동대문구 망우출장소에서 1968년 1월 1일(조례 제491호)까지 행정을 담당하였습니다. 망우동은 경기도, 강원도 방면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으로서 망우리고개와 공동묘지가 있는 험준한 지형 때문에 예부터 수도방어의 요충지였습니다. 공동묘지와 고개로 널리 알려져있지만 도로확장 및 구획정리사업 후 교통이 편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신흥주택가와 교육지구로 변모하였습니다. 망우동의 동쪽으로는 망우산(281m)의 능선을 경계로 경기도 구리시와 인접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면목동에 맞닿아 있으며, 서쪽으로는 상봉동과 경계를 짓고 북서쪽으로는 신내동과 접해 있습니다.
<서울시 중랑구청 동명유래에서 인용>
풍수를 중요시했던 태조는 무학대사, 하륜 등으로 하여금 자신의 음택(陰宅)을 물색하게까지 했다. 양주 땅 검암산 밑에 좋은 음택 자리가 있다는 전갈을 받은 태조는 그곳으로 왕림한다. 청룡, 백호 두 산줄기가 너른 벌판을 감싸안은 아늑한 명당은 돌도 별로 없는 옥토였다. 결국 태조는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의 뜻대로 이 명당에 묻혀 건원릉(健元陵)이 마련되고 그 후에도 능이 여럿 들어서 '서울 동쪽의 9릉'이라 해서 동구릉(東九陵)이 되었다. 좋은 신후지지를 정한 태조는 만족했다.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망우리고개에 올라서서 자신의 음택이 될 자리를 바라보고 혼자 말하듯이 한 마디 했다. "이제야 근심을 잊겠노라." 근심(憂)을 잊겠다(忘)는 뜻의 이 한 마디 말은 결국 망우(忘憂)라는 지명을 낳았고, 이것이 고개이름과 동리 이름으로 붙여진 것이다.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에서 인용>
▼ 중랑구 사색의 길 책자에 나오는 지도
▼ 책자에 나오는 망우리 묘지 유명인사 묘역.. 이 중에서 몇분은 국립묘지로 이장을 했다.
첫댓글 광나루님께서 망우리공원묘지 포스팅중 제게 제일 잘 되었다고 칭찬을 받아서 나홀로에 함께 공유하고자 올립니다.ㅎㅎ
닐리리아님께서 만드신 망우리 권역 묘역 지도 등 내용이 누구나 쉽게 찾아 갈 수 있도록 자세하게 만드셔서 저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잘 정리가 되었다고 하여 보니 정말 베리굳입니다...
감사합니다. 한 분이라도 정보를 이용할 수 있다면 좋은 거겠죠?ㅎㅎ
눈에 쏙
고맙습니다... 오래전에 작성해 놓은 건데 나홀로에 올렸더니 사람들이 알아봐주네요..ㅎㅎ 다른 것도 올려봐야 겠어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