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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바키아6 - 아침에 일어나 거리를 걸어서 브라티슬라바 시내를 구경하다!
어제 2022년 5월 8일 헝가리 비셰그라드 Visegrád 에서 체코 프라하행 기차를 타고 슬로바키아 의
수도 브라티슬라바 에 도착해 호텔을 찾아 체크인을 한후 걸어서 왕궁과 분수대 를 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시가지를 가로 질러 언덕에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서는 오른쪽에 성벽을 따라
걸어서 산정 에 우뚝 서 있는 브라티슬라바 성 Bratislavsky Hrad 을 구경했습니다.
5월 9일 새벽에 잠이 깨어 호텔 방의 창으로 밖을 보니 마침 동이 터 오는지라 시시 각각으로 변하는
하늘을 보면서 여명(黎明) 을 몸으로 느끼고는...... 호텔을 나와 걸어서 시가지를 구경합니다.
아침 이른 시간인지 거리에는 차도 적고 사람들도 별로 보이지 않아 조용한데...... 성 마르틴 성당 Dom sv.
Martina 은 이른 아침이라 문이 닫혀있고 미할라 문 Michalska Brina 을 지나 구시가지로 접어듭니다.
어느 광장에 이르렀는데... 여긴 조각상 들이 많은지라 살펴보니 용사가 칼을 칼집에서 빼려는듯한
동상이며 건너편에는 수도사 들인양 놀란 눈으로 지켜보는 모습의 동상이 인상적 입니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신안군의 비금도, 도초도, 노대도, 안좌도에는 제임스 터렐, 올라푸르 엘리아손,
앤터니 곰리 등 세계적인 작가의 설치 미술 작품이 들어서는 ‘예술섬 프로젝트’ 가 진행
중이라는데... 비금도 명사십리 주변 바닷가에 영국을 대표하는 설치 미술가 곰리 의 작품이 들어섭니다.
미국 설치미술가 터렐 은 노대도에 화성과 목성의 소리 를 채집해 색상으로 보여주는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며
‘수국축제’ 로 유명한 도초도에는 덴마크 출신 세계적 설치 미술가 엘리아손 의 작품이 들어선다고 합니다.
내년 말까지 연꽃을 닮은 지형의 중심에 수국을 형상화한 엘리아손의 미술관 이 들어서고,
주변은 계절마다 다양한 빛깔의 경관 농업으로 ‘대지의 미술관’ 을 형성하게 되며
안좌도엔 일본의 야나기 유키노리가 설계한 물에 떠 있는 ‘플로팅 뮤지엄’ 이 들어선다네요?
비금도 에서 한불간의 첫 만남 을 연구한 교수는 피에르 에마뉘엘 루 파리 7대학
교수로 그는 프랑스 외무부 고문서관에서 샤를르 드 몽타니 영사의 보고서
를 찾아내고, 몽타니 영사가 조선에서 가져온 도자기 술병 도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는 2012년 펴낸 ‘십자가, 고래, 대포 (La Croix, La Baleine, Et Le Canon)’ 책에서 19세기 중엽 한불관계
초기 프랑스의 대조선 정책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는데 피에르 에마뉘엘 루 교수 와의 인터뷰 입니다.
― 신안 비금도 사건을 연구하시게 된 계기는.
“2005년 프랑스 파리 이날코대학 한국학과 석사과정을 다닐때 초기 한불 관계와 외교수립 과정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지도교수는 ‘병인양요’ 를 중심으로 연구해보라고 조언해줬다. 교수님이 한불 수교 가
병인양요만으로 이뤄졌다고 볼수 없다. 그 전후로 뭔가 여러가지 한불간의 접촉 이 있지 않았겠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1840~50년대 한국 관련 문헌을 다 뒤져봐야 새로운 해석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랑스 외무부 고문서관, 해무부 고문서관, 파리 외방전교회에 수없이 찾아가 자료를 찾아
봤다. 흥미롭게도 제가 파리 외무부 고문서관 에서 가장 먼저 요청한 자료가 바로 비금도 관련 자료였다.
프랑스 외무부 고문서관에서 19세기 중엽 조선 관련 자료는 주로 중국 문서철 이나 일본
문서철 에 포함돼 있다. 프랑스 영사나 외교관들이 중국, 일본에 주재해 있었고
조선에 주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50년대 중국 상하이 영사관 자료를 뒤지는데,
가장 먼저 비금도에 난파했던 ‘나르발(Narval) 호’ 사건 관련 문건이 나왔다. 행운이었다.”
―그전에도 비금도 에 프랑스 배가 난파 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나?
“전혀 몰랐다. 상하이 영사관 문서를 보다가 처음 알게 됐다.”
―나주 목사가 선물했던 도자기 술병이 프랑스 세브르 국립도자기박물관 에 있었다는 건 알았나?
“그때는 몰랐다. 2012년에 19세기 중엽 프랑스 대조선 정책 연구를 주제로한 석사논문을 개편해 프랑스에서
‘십자가, 고래, 대포 (La Croix, La Baleine, Et Le Canon)’ 라는 책을 펴냈다. 책을 낼때만해도 도자기 존재
를 몰랐다. 그런데 2015년 프랑스 세브르국립도자기 박물관에서 열린 한국관련 전시회 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당시 19~20세기 한국 도자기와 물품이 전시됐었다. 몽티니 영사 는 1856년 잠깐 프랑스로 돌아왔는데,
본국에 전달했던 물품 중에 비금도에서 가져온 술병 이 포함돼 있었다. 이 도자기는 창고에 수장돼
있었는데, 이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냥 평범한 옹기병이라고
생각하고 지나가는데, 저만 그 앞에서 10분 이상 바라보았다. 이 병의 가치 를 알고 있었기 때문 이다.”
―몽티니 영사가 비금도에 가게 된 과정은.
“1851년 4월 2일 29명이 탄 나르발호가 비금도에 난파 됐다. 프랑스 선원 29명은 조선 정부가 외국인
(프랑스인)을 체포하거나, 처형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었다. 9명의 선원들이 작은 고래잡이용 배 를
타고 다시 황해를 건너 상하이로 가서, 프랑스 영사관에 구조요청을 했다. 선원들은 몽티니 영사에게
‘포경선 나르발호가 조선 땅에서 난파했는데, 우리 20명의 선원들이 아직 남아 있다. 구해달라’ 고 말했다.
몽티니 영사 는 바로 다음날 배를 구해 영사관 통역관 1명, 영국 상인 1명, 포경 선원의
친척 1명, 나르발호 선원 5명, 중국인 20여 명 등 총 30명 정도를 태우고
비금도 로 향했다. 배는 ‘록샤(Lorcha)’ 라고 불리던 중국과 서양 스타일이 혼합된 배였다.
그런데 문제는 몽티니 영사를 비롯한 프랑스 사람들은 비금도 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
난파된 배에서 돌아온 9명의 선원들이 비금도를 ‘티오상(Tio-sang)’ 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한국어의 발음을 생각하면 조선을 ‘됴선’ 이라고 표기한다. 그래서 ‘됴선’ 을 들리는 대로
‘티오상(Tio-sang)’ 이라고 한 것이다. 포경선 선원들이 비금도에 난파한
직후 ‘여기가 어디냐’ 고 물었더니, 비금도 사람들이 ‘조선이다. 조선 땅이다’ 라고 대답한 것이다.
상하이에서 출발한 몽티니 영사는 처음에 제주도 서남쪽 대정 해안 에 도착했다. 이 곳은 1627년
벨테브레 나 1653년 ‘하멜표류기’ 를 쓴 네덜란드 상인 하멜 이 표류했던 지점과 거의
비슷하다. 중국 상해에서 배를 타고 가면 해류와 바람 때문에 항상 제주도에 먼저 도착한다고 한다.
몽티니 영사는 제주도에서 ‘티오상 이 어딘 줄 아냐? 난파한 프랑스 배 를 보았는가?’
라고 물었다. 사람들은 모른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래서 몽티니는
다시 배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고.... 며칠 있다가 전라도 신안의 다도해 에 도착했다.
몽티니는 신안의 섬 하나하나를 뒤지면서 난파된 선원들을 봤느냐 수소문했고, 마침내 비금도에서
선원들을 발견 했다. 상해에서 출발한지 거의 2주일 만이었다. 비금도가 큰 섬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든 현지 주민들과 관료들이 찾아와 구경하게 되고, 만나게 됐다. 몽티니 영사는
5월 1일에 비금도에 도착하고, 5월 3일에 상해로 돌아갔다. 사실은 사흘도 안되는 짧은 방문 이었다.”
―몽티니는 한국인들과 어떻게 의사소통 을 했나.
“몽티니는 통역관을 데리고 갔지만, 그들은 중국어 만 할 줄 알았지 한국어를 몰랐다.
대화를 할 때는 주로 그림이나 필담 으로 했다.” ( 중국과 한국, 일본 및
베트남의 공용어는 한자 이고 한문이 통용 되었으니 의사소통에 불편은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어떻게 기록돼 있나.
“몽티니 영사 보고서는 프랑스 외무부 장관 에게 보낸 것이다. ‘4월 중순에 포경선 선원이
상해에 도착했고, 제가 아주 용감하게 조선땅에 가서 선원들을 구조해 왔다’
라는 내용이다. 관련 한국측 자료도 있다. 나주목사가 한양으로 보낸 장계 같은 것이다.
한국측 자료를 보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뭐하러 왔는지도 몰랐고, 그냥 이국인(異國人) 이라고 표현한다.
고래잡이 어선이라는 점도 잘 몰랐다. 다만 조선은 난파한 이국인들이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계속 이야기하니까, 이 사람들을 중국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배 2척 이 필요하다는 장계를 조정으로 올렸다.
한양의 조선 조정에서는 비변사 회의를 열어 ‘이국인들에게 배를 마련해서 돌려보내라’ 는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조정에서 이런 결정을 내린 날에 몽티니가 비금도에 도착했다. 그래서 조선에서
배를 마련하기 전에 몽티니가 타고 온 배를 타고 29명의 선원들 이 다시 상해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1851년에 영국 잡지 에서도 비금도 사건 관련 기사가 실렸다. 당시 상하이에서
발행된 ‘더 노스 차이나 헤럴드 (The North-China Herald)’ 라는 영문 잡지가 있었다.
몽티니 영사랑 배를 타고 비금도에 같이 간 영국 상인이 아주 길게 연재한 글이다.
비금도 사건 관련 기록은 프랑스 외교문서, 영국 잡지 기사, 조선의 공식문서로 남아 있다.”
―양국이 샴페인과 막걸리 를 마시고 만찬하게 된 과정은?
“몽티니 영사와 나주 목사는 5월 2일에 만나서 선원들과 관료들이 함께 식사를 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가 조선인들에게 샴페인을 주었고, 조선인들도 술을 가져왔다고 한다.
지난 5월2일 프랑스에서 행사가 있었는데 ‘샴페인과 막걸리의 만남’ 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몽티니 보고서를
보면 ‘샴페인과 와인, 리큐어 (Liqueurs Fortes)’ 표현이 나온다. 또한 선원 50여명이 각자 음식이 차려진
작은 테이블(소반) 앞에 앉았고, 사이로 많은 한국인들이 항아리에 든 술을 잔에 따라주며 마셨다고 돼 있다.”
―술은 몇 병이나 마셨나.
“19세기 다른 서양인들이 쓴 조선 관련 보고서를 보면 ‘조선인들은 고래처럼 술을 마신다’ 라는 기록이 있다.
술고래다. 아마도 비금도에서도 술을 많이 마셨을 것이다. 몽티니 영사는 보고서에서 ‘il est rare de
voir des hommes boire comme les Corens’ (한국인들 처럼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은 볼 수 없다).
ils sont passionns pour les vins et surtout les spiritueux (한국인들은 와인과 독주에 대한 열정이
넘쳐난다). 조선의 상관(관료) 들은 자기들이 술을 마실 뿐 아니라, 하인들에게도 술을 주고
가져가도록 했다‘ 고 썼다. 그날 몇시간 동안 그림같은(pittoresque) 만찬 을 즐긴 것으로 기록돼 있다.”
―술을 마시고 난 뒤 분위기는 어땠나.
“19세기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의 다른 기록을 보면 ‘조선인들은 처음엔 우리랑 얘기를
안하려고 했는데, 술을 가져다 주니까 서로 말이 통하며 일이 잘 풀렸다’ 는 기록이 있다.
비금도에서 현지 관료들은 몽티니가 조선과 통상 요구를 하거나 선교 를 하러 온 게 아니고,
‘사람들을 구하러 왔다’ 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아마 더 쉽게 대화 하게 됐다.
그래서 몽티니가 5월 1일 비금도에 도착하고, 다음날인 2일 저녁에 술을 마시게 됐다.
이게 마지막 만찬이었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화려한 송별파티 였다.”
―당시는 천주교 박해로 프랑스 신부들을 죽이기도 했는데 왜 그냥 순순히 추방하고 중국으로 다시 돌려보냈나.
“19세기 서양인들은 조선 앞바다에서 난파하게 되면, 200여년전 ‘하멜표류기’ 의 주인공인 하멜 처럼 감옥
에 갇히고, 유배 생활을 하거나, 선교사들처럼 처형당해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몽티니도
그런 선입견 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빨리 한국에 가서 조선에 난파한 우리 선원들을 구해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조선 왕조 이전, 아마 고려시대 이전 부터도 조선(중국, 일본, 동남아) 엔 ‘표류민
송환제도’ 가 있었다. 외국 표류민이 발견되면 잘 대접해서 보호한 뒤 다시 본국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제도다. 조선 후기에도 해마다 신안 앞바다에는 중국이나 일본,
서양에서 온 배가 난파하거나 표류하는 사람이 많았고, 대부분 표류민들을 본국 으로 돌려보냈다.
(1627년 물을 구하기 위해 제주도에 상륙한 벨테브레 와 1653년 표류해 억류된 하멜은 예외 에 속합니다)
서양인들도 마찬가지다. 1840~50년대에는 조선 앞바다에는 나르발호 뿐만 아니라 수백척의 서양
고래잡이 포경선 이 활동했다. 당시 가끔 포경선이 조선의 앞바다에 난파하거나 표류하면,
정부에서 그 사람들을 돌려보낸 것으로 나온다. 당시 서양의 상선이 표류할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만약 서양인이 통상이나 선교 를 하러 왔다고 말하면 당연히 쉽지 않았다. 조선왕조
실록에서 서양인들은 두가지로 불렸다. 먼저 통상이나 선교를 하러 온 서양인을
‘양적, 양추’ 라고 부른다. 서양 오랑캐 라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사람은 입항을 거절 한다.
그러나 포경 선원이라든가 표류 하는 서양인들은 그냥 ‘이양선(異樣船) 을 타고 온 이국인(異國人)’
이라고 불렀다. 이국인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말이 아니고 중성적인 표현이다. 잘 대접해
주고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몽티니는 천주교 선교사가 아니었다. 그는
나주 목사나 현지 관리에게 천주교 관련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냥 사람들을 구하러 왔다고 말했다.”
―당시 조선 앞바다에 서양의 포경선은 얼마나 많이 왔었나.
“19세기 포경업은 미국인 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에 유럽의 프랑스, 독일인이었다. 18세기
~19세기 초까지는 주로 대서양 에서 고래잡이를 했다. 그런데 고래가
줄어들자 인도양으로 옮겼고, 1840년대까지 뉴질랜드 부근 남태평양에서 고래를 잡았다.
이후 북태평양 쪽으로 올라가게 된다. 1840~50년대에는 한국 동해와 일본 동쪽의 태평양, 오오츠크해
에서 고래를 많이 잡았다. 한국의 서해 흑산도 인근에서도 고래 를 잡았다. 1840년대와 50년대에는
나르발호 뿐 아니라 다른 서양의 포경선들도 한국과 일본 앞바다에서 표류하는 사건이 많이 발생했다.”
―나발호는 어떤 배였나.
“당시 프랑스 포경선들은 전부 프랑스 북부 항구인 르아브르 에서 출항했다. 당시 한번 고래잡이 출항을 하면
3년 간 전세계를 돌아 귀항 했다. 대서양을 지나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서, 인도양에서 중국, 한국, 일본,
오오츠크해를 지나 태평양 건너 하와이, 남미 칠레를 지난 뒤 다시 대서양을 건너서 르아브르로 돌아왔다.
1849년에 독도를 발견해 ‘리앙쿠르섬’ 이라고 이름붙인 리앙쿠르호도 프랑스 포경선 이다. 리앙쿠르호는
1847년에 르아브르에서 출항해 3년여 동안 세계를 돈 뒤 1850년에 다시 르아브르로 돌아왔다.”
(프랑스 선원들은 독도를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며 리앙쿠르 암초(Rock)로 불렀는데 섬(Island) 이 되려면
밀물때도 드러나고 물 이 있어야 하며 2가구 이상이 주민등록을하고 섬에서 생계유지가 가능 해야 합니다)
―나르발호가 비금도에 난파했던 정확한 장소는 어디인가.
“비금도 서해안 쪽이다. 비변사등록,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등 한국 측 자료를 보면 비금도 서면
율내촌 이라고 나온다. 조선시대 지도와 현재의 지도를 찾아보았지만, 정확한 위치
는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비금도에 가서 현지 주민들과 이야기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비금도에서의 첫 만남이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에서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
하는가. “프랑스와 조선이 수교를 맺기도 전, 프랑스 외교관이 조선 땅에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방문했던 사건 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전에도 조선땅에 들어간 프랑스인은 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비밀리에 입국 했었고, 프랑스 해군장교도 조선 앞바다에 간 적이
있다. 그런데 프랑스 외교관 으로서는 몽티니 영사가 처음이다. 특히 몽티니 영사는
마지막 날에 지역을 관할하는 나주 목사를 만남으로써 공식적으로 양국의 관료가 만나게 됐다.
한국과 프랑스의 첫 만남 이라고 생각할 때는 주로 선교사 박해, 아니면 병인양요 같은 전쟁을 생각
한다. 그래서 한불 관계의 첫만남은 갈등 으로 시작됐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사실은 비금도
포경선의 표류사건을 통해서 한불관계 시작은 갈등보다는 인도주의적인 만남 이었고,
음식과 술이 있는 문화교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비금도 사건이 전쟁이나 박해같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화합의 자리로 끝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후 몽타니 영사의 행보는.
“몽티니 영사는 1851년 이후로 당시 프랑스 황제인 나폴레옹 3세와 외무장관에게 해마다
프랑스와 조선이 수교를 맺어야 한다고 보고서를 보냈다. 프랑스 포경선원과
선교사들의 안전과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을 개항 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는 몽티니 영사의 조선 과의 수교협상 요구를 계속 무시 했다.
당시 나폴레옹 3세나 외무부 장관에게 한반도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주된
관심사는 중국, 일본 이었고, 1850년대 말에는 주로 베트남의 개항 에 관심이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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