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1일 연중 제 24주일 루카 15,1-32.
-류해욱 신부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여러분들, 오늘 독서와 복음 잘 들으셨습니까? 제가 확인해 볼까요? 여러분들이 들으신 두 독서와 복음의 공통된 주제는 무엇입니까? 용서라고요? 회개라고요? 아니, 사랑이라고요? 네, 용서와 회심, 사랑 모두 맞는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해할 때, 보다 정확한 답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바로 용서이시고 우리를 회심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며 사랑이신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제 1독서는 탈출기의 말씀으로 모세와의 대화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당신 야훼 하느님을 저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상으로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크게 화가 나셨습니다. 진노하셨습니다. 그들의 영도자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산으로 간 사이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우 상으로 섬기는 죄를 범했습니다. 하여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그러자 모세가 애원합니다.
“주님, 어찌하여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십니까? 너희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약속의 땅을 주시 겠다고 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이렇게 모세는 하느님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기를 띠셨던 하느님 께서 모세의 간청에 노기를 푸시고 재앙을 거두십니다. 제1 독서는 용서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제 2독서는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 서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오로가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자비롭게 대하시고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믿음과 사랑 을 풍성히 베풀어 주셨는지를 들려줍니다. 바오로는 그때는 자기가 믿음이 없어 모르고 한 일이었기 때문에 하느 님께서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셨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바오로는 이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게 됩니다.
자기를 첫째가는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인간은 자기를 죄인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 크신 사랑 앞에 인간은 작아지는 겁니다. 왜 나는 당신 앞 에만 서면 작아지는가? 라는 노래가 있지요. 김수환 추기경님이 그 노래를 좋아하셨어요.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 사랑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겁니다. 대 데레사도 자기를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오로는 죄인 중에서 가장 큰 죄인인 자기를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이 큰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고 고백하며 영원한 왕이시며 오직 한 분 뿐이시 고 영원하신 하느님께 영예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 비유는 모두 하느님이 누구이신 지에 대해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잃었던 양의 비유를 통해 예수 께서는 하느님을 잃었던 양을 찾은 목자에 비유하시면서 우리가 비록 당신의 이끄심을 따르지 않고 길을 잃고 헤매다가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잃었던 은전의 비유를 통해서도 하느님을 한 닢의 은전을 찾기 위해서도 등불을 켜고 집안을 온통 쓸며 그 돈을 찾기까지 샅샅이 다 뒤지는 열정을 보이는 여인에게 비유하면서 그 은전을 찾으면 기뻐서 자기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함께 기쁨을 나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이신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 참으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피정, 즉, 하느님 안에 깊이 머물면서 침묵을 지키면서 기도하는 피정의 체험이 있으신 분들은 아마 모두 이 비유를 묵상하신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피정에서 뺄 수 없는 단골 주제입니다.
독일 예수회원으로 한국에 와서 강연회를 했던 빌리 람베르트라는 신부님이 쓰신 ‘오라 그리고 가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신부님이 그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신부님이 이렇게 질문을 한답니다. 이 비유 이야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이라는 문장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독일 성경 번역과 우리말 성경 번역이 다르니까, 조금 다른 뉘앙스를 주지만, 의미는 같겠지요. 여러분들 조금 전에 들었는데 기억하시고 계십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말로는 “그가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 도 멀리 있을 때에 아버지는 그를 보고”에 이어지는 말이 무엇입니까?
“... 그리고 그에게 달려가...”“...그리고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등등의 말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대답 들입니다. 그런데 정확한 답은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입니다. 공동번역은 “측은한 생각이 들어”로 옮긴 것으로 기억합니다. 영어로는 “and was deeply moved.” 보다 정확하게 직역을 한 번역은 “and had compassion.”입니다. ‘측은히 여겼다.’ ‘깊은 연민을 느꼈다,’ ‘측은지심’은 곧 자비심, 사랑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은 인간을 측은히 여기시는 분,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둘째 아들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사랑이신 아버지 하느님을 등지고 떠났던 삶, 죄의 삶, 타락과 죄 의 결과는 소외와 고통이었지요. 소외와 고통을 체험했을 때야 비로소 인간은 사랑이신 아버지 하느님께로 향하 게 됩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아무런 질책을 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십니다. 아니, 오히려 멀리서부터 기다리고 계시다가 버선발로 뛰어나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한편 우리의 모습은 바로 큰아들입니다. 그는 돌아온 동생은 반기기는 고사하고 아버지가 잔치를 벌였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지요. 아버지가 나가서 달래자, 큰아들인 자기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주지 않았는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준다고 불평하면서 투덜거립 니다. 겉으로 볼 때 그는 착실한 아들이지요.
일 년 내내 아버지를 도와 뼈 빠지게 일하고 아버지에게 순종하면서 살았지요. 그러나 그는 그것을 기쁘게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의무로서 했던 것이고 내면에는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나의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 ‘저 아들’이라고 합니다. 원문을 보면 ‘여기 있는 당신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말 번역 에는 이것이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원문을 정확히 옮기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not my brother, but this son of yours’입니다. 동생을 동생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는 동생이 아버지의 돈을 창녀들에게 빠져 다 탕진해 버렸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소문으로이거나 추측이겠지요. 아직 만나서 사실을 들어보지도 않고 그냥 소문이나 추측으로 단정 해서 말합니다. 우리도 어떤 것에 대해 즐겨 그렇게 하지 않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사실 더욱 서글픈 것은 그가 내내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아무 것도 베풀지 않았다고 느끼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낳아주고 길러주고 보살펴 준 부모의 은혜를 전혀 헤아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우리네 모습 아닙 니까? 천만에 말씀이라고요? 서울 시민이 다 함께 소리를 지르면 뭐가 됩니까? 천만의 말씀이 됩니다.
여러분들,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요? 제발,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큰 아들에게 그 아버지는 왜 하실 말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다만, “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라고 하십니다.
‘너의 아우’라고 정정해 주시며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온 셈이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것이다.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느냐고 하시며 함께 기쁨을 나누고 즐기자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참으로 기뻐하시는 분, 그리고 우리도 당신의 그 기쁨을 함께 나누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도 아들을 다시 만나기까지는 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아들이 힘들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가 어디에 계십니까? 문밖에 서서 아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버지도 아들 이 돌아오기까지 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까지 우리는 생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는 순간이 새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나가고 그분을 만나려고 할 때, 그분,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미 한 발을 우리를 향해 내딛 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껴안았습니다. 다시 사랑받는 아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를 할 때 얻게 되는 아름다운 은총입니다. 우리가 회심을 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됩니다.
오늘 제 2 독서로 듣는 사도 바오로처럼 자신을 죄인이라고 깨달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 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는 회심한 것을 증거로 보여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도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먼저 사랑이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를 기다리십니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래 전에 쓴 제 졸시로 강론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아들에게
“제 몫의 재산을 나누어 주십시오” 네 몫을 요구했던 내 아들아, 이제 곧 내 곁을 떠나겠구나 생각하며 집 떠난 후 겪게 될 너의 고생이 내 눈에는 이미 훤히 보였지만 난 너를 붙잡을 수가 없었구나. 스스로 깨닫지 않고서야 막을 수 없으니 말없이 너를 보낼 수밖에.
하지만 아들아, 난 믿고 있었다. 네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그 믿음 하나로 날마다 대문 밖에서 너를 기다리며 기쁘게 너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아들아, 오늘 마침내 다시 돌아왔구나. 거친 얼굴 지친 발걸음 남루한 옷차림 난 달려 나가 너를 연민으로 품었고 기쁨의 눈물로 입을 맞추었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진심으로 뉘우치는 너의 목소리 너는 참 아들이 되어 돌아왔구나. 내 믿음이 헛되지 않았구나.
아들아, 너의 고생이 헛되지 않도록 잊지 말아라 자유는 떠남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임을 고생을 통한 깨달음을 기억하여라 진정한 자유는 네 마음속에 있음을
[류해욱 요셉 신부님/예수회, 피정 영성 지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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