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러코스트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정재율]
목이 자주 돌아가는 사람이 있어
좋은 것을 먼저 보려고
그와 나는 나란히 벤치에 앉아 있다
그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돌아가는 것들을 본다
날아가는 구름들
빵 뒤로 삐져나온 야채를 다시 넣는 동안
유모차를 끌고 가던 손도
풍선을 꼭 쥐고 가던 뒷모습도
모두 다
줄을 서고 있다
재밌는 것이 도대체 뭔지 알 수 없지만
슬러시를 한꺼번에 먹으면
머리가 핑 돌고
흔들리는 수목 사이로
새들이 보인다
이곳이 놀이동산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빵 부스러기를 쪼아 먹고 있다
그와 함께
놀이기구를 타고 싶었지만
도대체 놀이기구를 타지 않을 거면 왜 왔는지 묻고 싶었지만
나는 그를 빤히 쳐다 본다
그가 입가에 묻은 소스를 털어 내고
남은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여기 장미가 유독 예쁘다고
지금이 아니면 못 본다고 말한다
장미를 보려고 여기까지 온 그를 위해
나는 카메라를 켜고
사진 속 얼굴이 평소와 다르긴 하다고
이곳의 장미는 정말 뭔가 다르다고
출구에서 막 나온 사람들이
정원 입구로 달려 간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풍경 앞에서
360도 돌아가는 놀이기구처럼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그가 돌아간다
이리저리 놓친 것들을 본다
저기 좀 봐 봐
집에 갈 시간이 되어도
그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
목을 제자리에 맞추려고
-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 민음사, 2022
이별의 알고리즘 [이미산]
다시 온 여름과
다시 떠날 여름 사이
매미가 있다
최선을 다했어요 고백하는
울음이 있다
장미꽃이 가시줄기 위에서 발그레 웃을 때
손가락을 모으는 장미
잠 속으로 이동하는 한 줌의 웃음
한 줌의 붉음
만 개의 뒤편엔
헛간을 채우는 그 여름의 민낯들
이별은
초라해진 최선 같아
중얼거리는 허물 같아
울지 않아도 뜨거운 여름
슬프지 않아도 아름다운 울음
이별 후기로 남겨지는
매미라는 이명(耳鳴)
- 궁금했던 모든 당신, 여우난골, 2022
환대 [조말선]
당신은 뒷모습이 없고 둥근 아치형입니다 나는 한 번도 누군가의 아들이 되어본 적이 없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식사 때면 오른손을 사용하느라 눈에 띄지도 않고 살인을 저질렀을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발과 저 발을 번갈아 사용하는 산책과 달리 들리지 않는 사실을 말할 생각은 없어요 쌍욕이 튀어나올지도 모르거든요 그렇게 안 보인다는 말은 지겹도록 들었으니 진심으로 대해주시겠습니까 긴 아치를 지나갈 때는 환영받는 기분입니다 목구멍으로 꿀꺽 넘긴 굳은 빵조각을 다시 내뱉을 생각이 없는 내 식도가 떠올랐거든요 대체로 건강한 육체를 가졌지만 오빠라는 말은 들어보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은 경청하기 위해 태어난 귀 같군요 이 경우에는 침묵이 악덕이므로 오른손과 왼손을 마주치려 합니다 오른발과 왼발을 동시에 구르며 답례를 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바로 당신을 돌보러 온 자가 틀림없지만 누가 누구를 돌보게 될지 지켜봐야 합니다 두 팔을 옆으로 쭉 뻗어 올려서 당신은 둥근 아치형입니다 능소화처럼 매달린 빨간 귀들이 쫑긋거리며 윙크하느라 나는 별꼴이라는 표정을 감출 수 없습니다 밤이 이슥하도록 꺼지지 않을 것 같은 능소화가 그런 당신을 켜 둘 참이군요 당신이 하는 접대에 당신이 즐거워하는 표정을 하고… 언니, 라고 부르는 게 제일 어렵습니다 선생 말고도 다른 호칭이 있을 겁니다 아, 지금 삼키는 알약은 비타민제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당신의 눈동자가 능소화처럼 빨갛습니다 오늘 밤 당신은 잘 생각이 없어 보이고요 내가 잠들기 전까지 돌볼 자는 누구입니까 나는 잠깐 잃어버린 우산을 생각하다가 잠들 겁니다 초대장처럼 오른손을 내밀었지만 당신은 줄곧 두 팔을 들고 있어서 언제 악수할까요
-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문학동네, 2022
침묵의 미로 [신철규]
통화 중에 금방 전화할게, 하고 전화를 끊은 네가
다시 전화를 하지 않는다
나는 전화기 옆에서 서성대다가
열없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책상 모서리를 송끝으로 따라가다가
다시 전화기를 본다
검은 액정 화면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약속이 있고 시간을 어기지 않기 위해 이제는 씻어
야 하지만 전화가
오지 않는다 양치질하는 동안에도 전화가 오지
않는다 입가에 치약 거품을 묻힌 채 전화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샤워기를 틀기까지 또 몇 초간 기다린다
미지근한 기다림이 계속된다
수도꼭지를 돌리니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떨어지고
비누칠을 하기까지 몇 분간 나는 덩그러니 욕조에 서 있
었다
교통사고라도 난 걸까
노트북에 커피라도 쏟은 걸까
행인에게 갑작스럽게 폭행을 당한 건 아닐까
피가 흥건한 단도가 햇빛 가득한 보도 위에 반짝이고 있다
샤워를 마치고 젖은 몸으로 욕실화를 신은 순간
다시 전화가 온다
미끄러운 손가락으로 간신히 전화기를 부여잡는다
무슨 일이야? 큰일이라도 난 거야?
아니야 그냥 전화했어.
담장에 장미가 많이 피었어.
거울 속에 눈물이 가득 차 쏟아질 것 같다
붉게 달아오른 피가 온몸에 장미 문신을 그려놓는다
빠져나가지 못한 그을음이 목구멍을 가득 메운다
- 심장보다 높이, 창비, 2022
꽃바구니 [나희덕]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이 꽃들의 화음을.
너무도 작은 오아시스에
너무도 많은 꽃들이 허리를 꽂은
한 바구니의 신음을.
대지를 잃어버린 꽃들은 이제 같은 시간을 살지요.
서로 뿌리가 다른 같은 시간을.
향기롭게, 때로는 악취를 풍기며
바구니에서 떨어져내리는 꽃들이 있네요.
물에 젖은 오아시스를 거절하고
고요히 시들어가는 꽃들,
그들은 망각의 달콤함을 알고 있지요.
하지만 꽃바구니에는 생기로운 꽃들이 더 많아요.
하루가 한 생애인 듯 이 꽃들 속에 숨어
나도 잠시 피어나고 싶군요.
수줍게 꽃잎을 열듯 다시 웃어보고도 싶군요.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 야생사과, 창비, 2009
시의 가족 [박노식]
전남 화순군 한천면 영외嶺外의 가천마을은 아픈 별들
이 내려와 둥지를 틀고 또 하늘이 가까워서 맑은 눈을 감
출 수 없듯, 고운 부부의 미담美談 한 자락을 여기에 담아
볼까 합니다
사랑은 이미 가슴 속에서 공명처럼 일렁이므로 ······ 그
리하여, 나는 미끄러져 가겠습니다
Bee Gees의 화음과 곡조가 고스란히 스며 있는 최선우
여사의 눈빛은 화가이고, 혼자 노는 고양이를 애써 불러
들여 털을 쓰다듬고 눈을 맞추는 남편 이기완 님은 전직
폴리스입니다
부부가 애정으로 꾸며놓은 대문은 붉은 장미로 아치를
긋고 담장은 철따라 피어나는 계절 꽃을 심어서 길손을
세우기 일쑤랍니다
그리고 정성이 닿은 텃밭은 작물이 아니라 거의 정물화
수준이어서 그 집을 방문할 때는 한 폭의 그림 속을 거닐
듯 즐겁기만 하지요
화가의 눈빛과 폴리스의 손길이 일군 조화로운 일상이
나에게 산문 한 문장과 또는 시 한 소절을 건네주기도 하
는데
어느 가을날 오후에 늦은 점심을 초대받아 그 정물화
한 편에 마련된 파라솔 아래에서 셋이 식사를 했지만, 식
탁이 어찌나 그림 같은지 수저는 들었으나 젓가락을 집기
가 아주 곤란해져버렸지요
그 차려놓은 흰 접시 안의 화려하고 고운 찬들을 무턱
대고 헤집을 수가 없어서 슬그머니 가장자리의 배추 겉절
이를 들어 입속으로 가져오려다 그만 입술에 걸려 낭패한
얼굴이 되어버렸지요
그렇다고 멋없이 손등으로 지울 수도 없는 맵시 있는
자리인지라 식사가 끝날 때까지 모른 체하며 입술 언저리
에 핀 꽃을 조심히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습지요
그렇게 그날 밤을 보내고 첫 닭이 우는 시각에 깨어나
이 시 한 수를 얻었답니다
이처럼 옆집 부부는 간혹 나에게 영감을 주기도 하지요
알고 보면 이웃이 다 시의 가족인 셈이죠
- 마음 밖의 풍경, 달아실, 2022
산책 [임승유]
돌아와서 보니
사람이 있다. 어디서 본 사람이다. 사람은 살아 있고
움직이다가 안 움직이기도 하니까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물 한 잔 드려요? 물어본다. 꺾어 온 장미를 화병에 꽂
으며 아까 소리 들었죠. 문이 쾅 하고 닫혀서 깜짝 놀랐
잖아요. 뒤돌아보면 사람이 있고
바람이 불고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을 받아 의자에 앉는다. 오늘 같
은 날은 다시 안 오겠지. 오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면서
창틀의 높이를 생각하면서
사람이 되는 것이다.
-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2020
애프터 [안미옥]
밤이 깊다
이제 들어가자
네 앞에서 발길을 돌리며
밤이 깊다는 건 무엇일까 생각한다
나는 반복하고 끝내지 못하고
서랍장을 모두 열었다
숲에서 숲까지 가는 길을 모른다
밤에는 시소를 타야지
솟아오르는 일과
가라앉는 일의 깊이를 알게 될 때
빛은 제 몸을 비틀어
직선의 몸을 갖게 되었다
직선으로 깨지게 되었다
파편으로
빛을 경험하는 일처럼
도달한다는 것이
산산조각 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뛰어간다
나는 넘어간다
사람이 사람을 향해 복을 빌어주는 일을 배워서
너의 시간을 축복해야지
네가 어딘가에 도달할 때까지
너의 흰 재의 시간
마른 장미의 시간을
- 힌트 없음, 현대문학, 2020
대성당 [신용목]
서 있다.
곧 종소리가 날아올 것이다.
손 흔들려고,
미리 끊어둔 표가 있는 것처럼 네가 있는 곳으로 날아가
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장미꽃처럼 해가 진다.
서 있다.
장미넝쿨처럼 노을이
번지고, 곧 종소리가 날아올 것이다. 내 몸속에, 뭉쳐진 가
시들이 붉게 켜지면······
이런 고백.
핏줄은 바람에 뽑혀 나뒹굴다 외진 웅덩이에 빠져버린 장
미넝쿨처럼
몸속에 던져져 있다, 어쩌면 종소리처럼. 아직 떨어지지
않은 장미꽃처럼
심장은 박혀 있다. 어쩌면 종처럼,
서 있을게.
장미 다발을 건네며······
시간이 길을 잃어버린 곳에서 그날의 우리는 추억이라는
교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겠지.
술병을 쓰러뜨리며,
여기는 스무 살 같아. 같이 살지 않아도 괜찮아,
스무 살인 곳에선.
말한다.
종소리보다 크게 그리는 화가는 없는데, 성당 천장에 그
려진 장미 넝쿨은 좀 달라서
한번 일어났던 일이 마음 속에서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나
고 일어나고······
어떤 고백은 한 적도 없는데 끝난 적도 없다.
서 있으면
종소리가 날아와 내 몸속에서 나를 건져간다.
-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문학동네, 2021
안부 [송찬호]
그대여, 내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사이렌 소리를 듣고
멀리 나를 찾아온대도
이번 생은 그른 것 같다
피는 벌써 칼을 버리고
어두운 골목으로 달아나버리고 없다
그대여 , 내 그토록 오래 변치 않을 불후를 사랑했느니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 아래
붉은 저녁이 오누나
장미를 사랑한 당나귀*가
등에 한 짐 장미를 지고 지나가누나
* 사석원의 그림
- 분홍나막신, 문학과 지성사, 2021
입술의 형식 [정채원]
거꾸로 매달려 말라가는 꽃과
꽃병 속에 발을 담근 채
서서히 곯아가는 꽃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목이 타들어가는 입술 속에서
촉촉이 젖는 주름투성이 입술이
열렸다가 다시 닫힌다
거꾸로 매달려 말라가는 것은
제 침묵의 형식을 지키려는 것
까마득한 봄을 그녀는
꽃잎 하나도 떨구지 않은 채
그대로 박제하는 중이다
목젖이 보일 때까지 흐드러지게 웃어본 장미가
꽃병 속에서 하루하루 발가락이 검어지는 동안
입술이 떨어져나가는 동안
아직 향기를 기억하는 바람 속에
꽃잎의 웅얼거림이 환청처럼 밀려오고 밀려가고
방부 처리된 시간을 한아름 안고
병상에 누운 그녀에게
막 피어나는 장미를 한 다발 들고 온 딸
죽은 꽃병을 비우고
차가운 물을 가득 채운다
입술의 지문은 나선형으로 구부러진
계단을 말없이 올라간다
-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문학동네, 2019
페르시아 장미 [장선희]
1.
페르시아 성문을 보았나
무너진 벽면에 쐐기문자가 박혀있네
하늘 한 편이 역사서 페이지마냥 접혀 있네 성문에 찍힌 무수한 말발굽, 말갈기처럼 나부끼네 올리브 열매를 빻던 맷돌 같은 사내들, 화살도 막아낼 듯 단단했던 함성은 어디로 갔을까
장미는 피었지 긴 회랑을 따라 수백 그루 피었지 시간의 이끼조차 끼지 않았지 앵무새는 하루종일 떠들었지 몇 개의 태양이 주술사 표정을 지었으며 필경사들 변방 소식에 고꾸라지기도 했지 모래의 시간, 천지사방을 진군했네 삼나무 숲이 붉게 물들었네
2.
바닷물의 흐름을 읽지 못한다면 아내의 젖무덤에 묻힐 수 없네 전사들 바람의 흐름을 눈치채야 했다네 황금물고기가 그려진 그 성문을 기억하나, 철옹성의 위협을 안고 있는 그 성문 아래 황금술잔을 쥐던 손들, 청동단검을 얻고서야 비로소 사내가 됐다네
염탐꾼은 새의 눈을 갖고 있지 망루에 오른 병사들의 눈빛, 마침내 달빛에 젖고 말겠지 뿔피리는 이제 그만,
집 지킴이는 노예가 아니라 거위라지
돌고래들이 궁궐 벽면에서 펄쩍 뛰고 있네
전진, 전진... 파르티아로
고향은 멀어만 가고, 보병들의 군홧발 속에 파묻힌 모래성
3.
왕의 길은 피로 물들었지 원형 무덤을 파면 하얀 뼈가 누워있네
누대의 갑옷을 벗어 던진 조각상 부서진 갑옷에 얼룩진 피의 함성
아가멤논의 황금가면을 술잔처럼 치켜들어보네
폐허 속에서도 아이들은 자라고 은화는 야자나무 가로수 지나 성벽까지 뿌려졌지 굶주린 사자 구릉을 넘는 순간에도 갈대로 물고기를 만들었지 용감한 아가멤논을 닮고픈 아이들 빈 칼집으로 전쟁영웅이 되기도 했네
어여쁜 왕비의 눈물 가난한 백성을 구원할 수 없다지 탑에 갇힌 왕비들의 눈물이 메마른 땅에 거름이 될 수 있기를
4.
불사의 군대가 되는 비결은 낙타의 콧김에 도망가지 않는 것
전령들 주머니 속 따끈한 은화를 떠올리며 길을 달렸네
매의 머릴 가진 호루스처럼 눈 맑은 사람만이 가난한 시간을 버텼네
화살처럼 날아오던 ‘기억하라’던 말
청동장미처럼 지지 않았던 그 말
한순간 길을 잃게 했던 전쟁터를 떠올려보네
새들이 솟구치고 모래시계는 멈추고
세기를 건너 계속되는 전쟁
가슴과 팔에 창과 방패를 이식했던 병사여
벽과 벽 사이 무너진 페르시아 성문을 본 적 있는가
- 크리스탈 사막, 현대시, 2020
저녁이 와서 당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권현형]
종소리는 잘 빠져들게 되는 음악
받지 못한 편지의 아타까운 말줄임표
저녁과 저녁 사이
성북구의 성당 앞을 지나가다가
운 좋게 종소리를 들었다
요사이 쌓인 죄가 녹아 없어지는 순간
흰 눈가루를 타고 어깨에 내려앉는 종소리와 함께
가까이 있는 심장과 함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나의 죄를 내가 용서해도 된다면
지금 생각나는 사람을 맘껏 생각할 것이다
아직 쫓기는 꿈을 꾸는 것은
수렵의 본능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따뜻함을 믿는 것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셔도 어머니 역할을 해주신다는
믿음을 가엾은 인류는 여전히 갖고 있다
백오십 년된 식물 채집 표본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오늘의 할 일은 다 했다
머나먼 베를린의 벼룩시장에서 구한 식물 채집 표본은
색감이 엷어져 있다
빛을 파묻고 시간에서 마른 장미 냄새가 나다니
다행이다, 언젠가 내게서 마른 장미 냄새가 날 수 있다니
부드러운 후각의 저녁이 와서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9년 12월호
시詩가 떠있다 [송재학]
에즈라 파운드의 묘역인 산미켈레섬은 붉은색 담장
이 있고 측백나무가 있고 내가 경배하는 땅이지만, 섬의
그림자만 밟고 말았다 산미켈레섬의 낮달이자 초승달
을 압정에 박힌 시로 기억하는 나에게, 글썽이는 섬에게,
낮달과 그림자는 자꾸 여위고 있다 기억을 삼킨 몇십 년
뒤의 산미켈레섬 전체가 낮달 안에서 말라가는 것을 미
리 보았다 물의 혓바닥이 있기에 숨죽인 달그림자도 있
다 나는 시라는 부러진 늑골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 낮달
의 입과 눈, 속에 발목이 있어서 내 입술이 닿았다 은박
지의 명암을 가진 낮달은 내 시선을 거두어 간다 흘러내
리는 속삭임을 어쩌지 못해 봉제선을 남기고 꿰매버린
달의 두상은 모든 얼굴과 닮았다 초승달의 눈썹을 뼈라
고 가리키는 게 내가 아니라 울음이나 웃음이라면, 시는
한 번도 부력을 사용하지 않았던 질문을 가진 입이다 처
음 말하기 위해 굳은 입술이 열릴 때, 시는 핏덩이를 잉
크로 사용해야만 했다 지의류가 번지는 낮달의 무늬에
는 산미켈레섬과 내가 나란히 누워 있다 시든 장미와 내
발자국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물의 오후에
나는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두개골 일부를 낮달에 착, 떼
어놓고 왔는지 편두통이 조금 가시었다 시가 낮달처럼
떠 있다
- 슬프다 풀 끗혜 이슬, 문학과지성사, 2019
'어느날 장미는 선인장처럼 [이응준]
어떤 자를 영원히 용서해서는 안되겠다고 마음먹은
1월의 눈 내리는 정오
나는 모래내다방 구석에 혼자 앉아 창 밖 거리를 내려다본다
여기 분위기는 왜 꼭 80년대 같을까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던 병실에서의 날들을 생각한다
내가 밀어주던 훨체어와 내가 읽어주던 성경구절들과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해줄 수없었던
약냄새 지워지지 않는 시절
기왕이면 깨끗하고 조용한 침대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결국에 당신과 나는
저 햇살처럼 상하기 쉬운 시간의 부스러기가
고통이 지나가다 우리에게 남긴 전부임을 깨달으며
불안하다 추억, 불길하다 또 그 얼굴
그렇게 속삭이고 말 텐데 나는
너무 오래
목마를 수 있어 그늘진 심장을 가진 선인장으로 지내왔고
제 아름다움에 지쳐 일찍 시드는 장미조차도 경멸했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장미보다는 선인장이 되길 원했다는
쓸쓸한 자랑으로
숨어 있는 우물 따위엔 기대고 싶지 않았다는
괴로운 혼자말로
사막에서도 힘센 낙타처럼
모래내다방에서 1월의 눈 내리는 정오를
툭툭 털고 일어나며
어떤 자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기로 한다
- 낙타와의 장거리 경주, 세계사, 2002
백만 송이 장미 [서수자]
친구의 남편 49재에 참석했다
기나긴 염불이 끝나고 독송집을 읽었다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
아 나도 죽어도 괜찮겠네
돌아오는 버스에서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가 흘러나왔다
아까 읽은 독송집이 떠올랐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미움에도 정량이 있는 건지 죄명이 너무 많아 당신은 무죄
나는 더 이상 아낄 것도 줄 것도 없이
내 인생의 백만 송이 장미 아낌없이 주어야 하리
모두가 떠날지라도 그러나 사랑은 계속될 거야
당신은 심장이 잠깐씩 멈춘다고 했다
어떤 슬픔이 몰려와 서로 외면하며 말이 없었다
솔로 구두를 털고 바닥을 탁탁 치며 당신은 나갔다
아파트 창문에 서서 납작하게 걸어가는 한 사내가
사라질 때까지 내려다보았다
사내가 없는 곳에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장미가 떨어지고 있었다
- 아주 낮은 소리, 천년의시작, 2018
기억 속 폭풍 [이희중]
길을 더 찾지 못한
젊은 날 사랑이
주고받은 장미 다발이나 과꽃 다발과 함께
다 시들어
도, 버려지지 않는 것은
그게 영문을 다 알기 어려운 폭풍, 그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소용돌이가 다 잦아들지 않고
기억의 다락 어딘가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게 일시 정지한, 그래서 영원한
폭풍,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다.
-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 문학동네, 2017
장미를 사랑한 이유 [나호열]
꽃이었다고 여겨왔던 것이 잘못이었다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이 고통이었다
슬픔이 깊으면 눈물이 된다
가시가 된다
눈물을 태워본 적이 있는가
한철 불꽃으로 타오르는 장미
불꽃 심연
겹겹이 쌓인 꽃잎을 떼어내듯이
세월을 버리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
처연히 옷을 벗는 그 앞에서 눈을 감는다
마음도, 몸도 다 타버리고 난 후
하늘을 향해 공손히 모은 두 손
나는 장미를 사랑한다
-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시와 시학사, 1999
장미 [안정옥]
흔한 장미 한 송이 놓고 나는 못 본 척했다
이구동성이 시끄러워
생활을 갈팡질팡 잊고 말았다
서로가 할일만 했다
누가 먼저였는지 눈이 딱하고
그의 농염을 본 것은
이미 꽃이 아니었다
알몸으로 벌써 농염이 빠져나간
헐렁한 알몸으로
그의 농염을 몸으로 보았다
여자의 모든 것은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니까요
장미가 그랬다
인간다움이랍니다
장미가 장미가 아닌
절제된 몇 분을 나는 보았다 몇 분은 가버리고
꽃잎은 늘어진 질이 되어 노추가 시작되고
포기해요 내가 말했다
눈뜨고 있는 동안은 사랑이 필요해요 어긋남이 말했다
장미는 고개를 내리고 끝을 냈다
보여줄 것이 없을 때
우리는 가서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거나 한다
유리 속의 꽃들을 보며
그 장미를 찾아보았다
장미는 부활하고
장미로 죽어간다
- 붉은 구두를 신고 어디로 갈까요, 문학동네, 2022
장미의 끝 [김상미]
이루어지지 않은 내 연애 사이로 장미꽃이 진다
세상에 열흘 붉은 꽃은 없다더니 장미꽃이 진다
나는 무작정 아무 차나 타고 내달린다
한여름 땡볕에 산 채로 불타던 장미꽃
그 새빨간 단말마 사이로 한없이 무정한 사람들의 뒷모습이
자동차 바퀴처럼 어디에나 굴러다니는 풍경들을 지나
더 더 무심한 곳으로 더 더 서러운 곳으로
뒤돌아보면 장미의 나날들이란 얼마나 왜소한가!
장미는 장미라서 장미다......로 시작되는 거트루드 스타인의 시처럼
얼마나 건조한가!
아무리 향 좋은 소스를 치고 양념을 섞어도
가슴속에선 폐(肺) 없는 쓴웃음만 날리고
자꾸만 예상을 빗나가는 날씨처럼 변덕스런 집착은
고단하게 차창 밖만 바라보고 바라보고
돌이켜보면 장미의 나날들이란 얼마나 그릇된 관습인가!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지고 납작해질 대로 납작해진
내 심장만 무자비하게 개봉당한 채
나는바라본다, 장미의 끝!
종로에서도 신도림에서도 명동에서도 홍대 앞에서도
끊임없이 밀려드는 로맨스 무리들에게 짓밟혀
놀란 나방떼처럼 뿔뿔이 흩어지는 새빨간 꽃잎들!
어딜 가도 장미는 이미 다 지고 없는데
-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문학동네,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