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과 가뭄으로 온 나라가 쩍쩍 갈라지는 6월의 토요일 하루,
아침부터 잔뜩 찌푸려 있던 하늘에서 마침내 비가 내리는 늦은 오후에 길을 나선다.
원래 계획은 지인의 매실농원에 들러 매실도 따고, 이제 막 제 몸을 드러내 익어가는
자두도 좀 구경할까 했었는데, 오늘따라 농원에 손님이 많이 왔다 해서 예정에 없던 길을 나선다.
팔공산 언저리에 자리잡은 지인의 도자공방에 들러 이쁜 다기에 끓여 내는 차 한잔 마신 후
비오는 팔공산 경치나 감상하려고 전화했더니, 그 집 주인장이 오늘 고향 간다 한다.
이래저래 오늘은 누구를 만나러 갈 형편은 아닌가 보다 포기하고 평소 가 보고 싶었던 곳으로 네비를 찍는다.
한번도 가 본적은 없지만 언젠가 한번은 가 보고 싶었던 곳. 군위 화본마을이다.
몇년전, 입소문이 조금씩 나더니 KBS 1박2일팀의 촬영 후 유명해진 곳으로 작은 농촌마을,
폐교된 중학교에 50년대에서 8,90년대 사이의 추억의 물건들을 전시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중부지역은 오전부터 비가 내린다 했는데, 대구는 출발하는 오후 4시경까지도 얼굴만 잔뜩 찌푸리고
있더니 차를 몰고 고속도로로 올라 서자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찬 비가 차창을 때린다.
그래도 차의 지붕을 울리는 빗소리와, 커다랗게 틀어 놓은 음악소리를 들으면서
빗줄기로 인해 흐릿해진 시골풍경을 따라 운전하는 기분은 상큼하다.
1시간 남짓 차를 달려 화본역에 도착한다. 하루 6편만 운행한다는 중앙선에 위치한 작은 간이역이지만,
전국의 아름다운 간이역 중 하나로 뽑힐 정도로 호젓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역이다.
역사에서 구내로 들어가려면 500원짜리 입장권을 끊어서 들어가야 한다.
비에 젖은 역사와 화본역을 노래한 시비를 지난 곳에는 폐차된 여객차를 개조한 레일카페가 있다.
비가 내리고, 늦은 오후라 그런지 주인은 어딜 가고 "CLOSED"란 팻말만 빗물 흐릿한 차장에 저 혼자 쓸쓸하다.
예전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했다는 급수탑이 철길 건너 외로이 비를 맞으며 서 있다.
내부에도 들어가 볼 수도 있다 한다. 그 속에 남겨진 낙서도 볼 수 있다지만 여기서 발길을 돌린다.
6시까지 입장이 가능한 "엄마아빠 어렸을 적에"라는 추억의 공간을 구경해야 하기 때문이다.
폐교된 산성중학교를 개조하여 만든 곳인데, 하릴없이 종일을 허비하고 늦게 도착한 게으른 구경꾼은 맘이 급하다.
입장료는 2,000원으로, 추억의 볼거리 외에 운동장 한 편에 유아들이 탈만한 놀이기구 등이 있지만 조악하다.
매표소 옆으로 허기를 해결할 먹거리를 파는 곳도 몇군데 있지만 오늘은 다들 쉬는지 허전한 모습이다.
운동장 연단에는 교장선생님의 모습은 뵈질 않고 피노키오가 비를 맞으며 오가는 손님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매표소에서 표를 팔고 건물 입구에서 마을 사람들이 표를 수거한다. 아마 마을주민들의 소득을 고려한 듯 하다.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건 한장의 영화포스터다.
"미워도 다시 한번".... 1980년작으로 되어 있지만 아마 예전의 원작을 리메이크한 영화인듯 하다.
내 기억은 더 멀리 오래 이 영화에 닿아 있다. 1968년, 내 나이 여덟살에 처음으로 개봉한 이 영화를 보고
얼마나 울었던지 눈이 퉁퉁 부었던 기억이 있다. 성인 연기자들 보다 아역배우로 나왔던 '김정훈'의 눈물 연기에
더 흠뻑 빠졌던 기억도 난다. 아이가 없는 집의 유부남이 우연히 한 처녀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사내아이가 남자의 집에서 양육되면서 생기는 갈등과 아픔을 다룬 멜로물이었다.
지금 같으면 어느 일간지 한쪽 귀퉁이도 차지하지 못할 줄거리지만 당시로서는 장안의 화제였던 영화다.
요즘 아이들은 '하드'라는 단어를 모른다. '하드'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아마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연상할게다.
지금은 아이스크림으로 통칭되는 '하드'는 그 시절 여름이면 우리들을 유혹하는 가장 대표적인 먹거리였다.
'하드'라고 불리기 전에는 '아이스케끼'라고도 했었고, 그걸 파는 사람들이 '아이스케끼'를 외치고 다녔다.
그 하드를 담아 놓고 팔던 '하드통'앞에서 용돈으로 하드를 사먹던 어린시절의 어느 여름날을 떠올린다.
그 기억만큼이나 이 곳에 남아 있는 하드통은 낡고 색이 바랬지만 그 어느 여름날의 기억만큼은 너무나 선연하다.
그 시절, 남학생들은 새카만 교복에, 머리를 빡빡 밀고서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학교에 다녔다.
교련수업이 있던 날에는 교련복을 입고 등교를 했고 간혹 지각이거나 복장이 불량한 날은 월담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선생님에게 걸려 혼이 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모든 풍경들이 술자리에서 다시 없을 안주거리가 된다.
지금은 '슈퍼'나 '편의점'으로 통칭되지만 예전에는 '구멍가게'라고 불리웠던 잡화점.
아이들 과자부스러기에서 라면, 소주, 음료수까지 모든게 존재했던 그런 곳.
진열대 맨 위에 놓인 금복주소주 대병을 아버지가 다 비운 날에는 그 빈병을 가져다 주고 먹던 달짝한 과자의 맛과
우리네 서민 곁을 지켰던 예전의 풍경들은 이제 자본의 위세에 밀려 동네 골목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번쩍이는 진열대와 넓은 주차공간을 갖춘 쾌적한 환경의 슈퍼 앞에서 늙수구레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흐르는 시간과 함께 지키던 구멍가게는 세월의 뒤안길로 서민들의 애환을 안고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자본 앞에서 자꾸만 작아지고, 그 자본을 위해 한낱 부속품으로 전락해 가는 우리들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나무전봇대.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까만 콜타르 칠을 해 놓았었다.
가끔은 길에서 친구들과 장난을 치다 그 전봇대의 콜타르가 옷에 묻어서 잘 지워지지 않아 애먹은 적도 있었다.
TV가 귀하던 시절, 아폴로 11호가 최초로 달에 내리던 장면을, 인기연속극 '여로'를, 홍수환의 칠전팔기
챔피언 전을 우리는 길거리 전파상 앞에서 구경하면서 때론 환호하곤, 때론 탄식을 하곤 했었다.
만화방에서 돈을 내고 만화 대신 TV의 '주말의명화'를 보기도 했고, 바리깡으로 머리를 까까머리로 밀기도 했다.
그 이발소 한켠에는 늘 비슷한 문구의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뭐 대개는 이런 투의 글이거나 폭포가 있는 풍경화 따위였다.
사실 대구라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똥장군'을 보면서 자라지는 않았다. 다만 어릴 때 어른들 한테 들었던
"똥장군 사이소"란 말을 내 애들 키울 때도 자주 하면서 키웠다. 애들을 모로 업어서 돌리며 "똥장군 사이소"
라며 놀아 주었다. 집에 돌아와 사진을 보면서 다 큰 딸아이에게 "똥장군 사이소" 해보려다 허리가 나갈뻔 했다.
이제는 일부 가정이나 가게에서만 사용하는 연탄을 팔던 연탄가게와 연탄을 배달하던 리어카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가게 유리창에는 국번이 한자리인 전화번호가 보인다.
지금은 누구나 휴대폰을 들고 다니기에 유선전화조차 점차 사라져 가는 현실과 비교하면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스위치만 누르면 불이 붙는 가스렌지도 이제는 고가의 전기렌지에 점차 밀리는 시대에 가정집 부엌에 놓인
곤로(풍로)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석유(등유)를 원료로 사용했던 곤로는 당시 연탄화덕을 대신해 각 가정의
음식조리를 책임졌었다. 석유곤로의 심지에 성냥불을 붙이면 검은 연기가 올라오면서 석유내음이 났었다.
그리고는 요즘의 가스렌지 불처럼 파란 불꽃이 둥근 곤로에 가득 올라와 안정적으로 요리를 할 수 있었다.
그 곤로에 양은냄비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 맛을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검은 그을음의 연기와 함께.
사각어름을 올려 놓고 어름을 깎아서 빙수를 만들어 먹던 예전의 빙수기, 동그란 딱지, 빨간 우체통,
그리고 어느날 예감처럼 찾아온 첫사랑, 그녀로 인한 불면의 밤마다 찾아갔던 동네 가게 앞의 공중전화통.
깊은 심호흡 후에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돌리면 마법처럼 들려오던 그녀의 목소리와 한없이 떨리기만 하던 가슴.
공중전화는 그렇게 그리움이었고, 기쁨이었고, 어느날의 아픔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품었던 청춘이었다.
"10원이요, 20원이요....." 선생님의 말씀따라 퉁기던 주판알. 그리고 머리 속에서 돌아가던 숫자들....암산들.
책상 옆 가지런히 가방을 걸어 놓고 수업을 했다. 때론 시험시간에는 가방으로 책상을 양분하여 가리기도 했었다.
'휴전선'이란 단어 대신에 '38선'이란 어휘를 사용했던 시절. 반공이 국시였던 시절.
그리고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끝까지 외워야 했던 시절.
정권이 추구하는 이념이 교육의 전반을 지배하고, 국민들의 생각마져도 교육을 통해
오직 하나로 묶으려 했던 시절이 존재했었다. 하지만 그런 엄혹한 시절 속에서도 우리는 조금씩 자랐다.
그리고 가장 친근하고 그리운 겨울 교실의 모습이다. 교탁 옆에 풍금이 자리하고,
교실 한 가운데에 조개탄 난로가 있었다. 그 난로 위에는 늘 쇠로 만든 사각도시락들이 빼곡히 올려져 있다.
맨 아래 도시락은 눌러붙기도 하기에 가끔 도시락의 위치를 서로 바꿔 주기도 했었다.
지금은 흔하디 흔한 계란프라이 하나가 도시락에 들어가 있으면 모두가 많이들 부러워 하던 시절이다.
걸상에 앉아보니 이렇게 작고 낮았었나 싶다. 우리들 키가 훌쩍 자라 나무책걸상이 이리 작고 남루해 보이지만
우리들의 기억은 결코 초라하지도 키가 작지도 않다. 늘 그 자리에 커다란 키로 우뚝 서 있다.
화본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일연선사가 삼국유사를 집필했다는 인각사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짧은 빗속의 나들이가 남겨 준 긴 여운을 주꾸미볶음과 막걸리 한잔으로 마무리한다.
그 막걸리잔 속에 이제는 다시 돌아 갈 수 없는 우리들 빛나던 유년과 청춘의 푸르렀던 기억들을 타서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