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문묘의 은행나무
공자(B.C. 551~479)가 고향 곡부의 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을 행단(杏壇)이라고 한다.
그러나 행단을 어떤 이는 살구나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은행나무라고 하여 오늘날까지도 시비가
가려지지 않고 있다.
자전에서조차도 행(杏)자를 ‘살구나무’라고도 하고 ‘은행나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행단을 은행나무라고 보는 사람이 다수다. 맹사성의 맹씨행단(사적 제109호)이
그렇고 대사성 윤탁(1472~1534)은 1519년(중종 14) 성균관 명륜당 앞에 은행나무를 심고 문행
(文杏)이라 불렀다.
건국이념이 유교였던 조선은 유학(儒學)을 보급하기 위하여 건국 초부터 각 고을에 향교(鄕校)를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향교 관리 책임이 있는 수령들은 향교에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다.
오래 사는 나무인데다, 수관(樹冠)이 크고, 단풍이 아름다우며, 병충해(病蟲害)의 피해가 덜하고,
잎에서 추출된 물질은 혈액순환개선제로 쓰이는 등 약성도 높아 성인(聖人) 공자(孔子)를 제사
(祭祀) 지내고, 유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에 어울리는 나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반면 은행나무가 행단이 아니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은행나무가 아닌 살구나무가 행단이라는
설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서 다양하게 제기돼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강희맹(1424~1483), 이수광(1563~1628), 정약용(1762~
1836) 등이 행단이 은행나무가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다산 정약용은 <아언각비>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잘못 알아 공자의 사당 뒤에 은행나무를 심어
행단(杏壇)을 상징하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일본인 나까무라 고이치(中村公一)는 저서인 <꽃의 중국문화사>에서 행단이 ‘살구나무’라 했다.
중국에서는 살구나무 꽃을 급제화(及第花)라고 부른다. 살구꽃이 급제를 상징하는 꽃으로
불러지게 된 것은 당나라의 과거제도와 관련이 있다.
합격자 명단을 음력 2월에 발표하고 이때 수도 장안은 살구꽃이 피는 때이자 합격자들을 위한
대규모의 연회(宴會)가 도성 제일의 명승지인 곡강지(曲江池)에서, 2차 연회는 곡강을 건너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핀 행원(杏園)에서 펼쳐졌다. 이 연회를 일러 곡강연(曲江宴) 또는
행연(杏宴)이라고 했다.
공묘의 행단(杏壇)은 공자 생존 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산동성
곡부현에 있는 공자의 구택(舊宅)을 방문하여 그 기념으로 교수당(敎授堂) 남은 터에 전(殿)을
세웠는데 훗날 송나라 건흥(乾興) 연간(1022년)에 대전(大殿)을 뒤로 옮기고 그 자리에 기와를
쌓아올려 단을 만들고 주위에 살구나무를 심은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 후 금(金)나라 학사 당회영(堂懷英)이 그곳을 찾아 행단(杏壇)이라는 비(碑)를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 두 가지 학설이 존재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은행나무가 행단이 맞는 것 같다.
살아 있는 화석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은행나무는 병충해에 강하고 수령이 오래 가고 넓은
그늘을 만들어 주어 은행나무 아래서 봄부터 가을까지 공부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어 준다.
여기에 은행나무를 행단으로 보는 시각에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