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말 한국과 베트남의 국교가 수립된 이래 양국관계는 전체영역에서 발전하였고 1990년대 말에는 양국이 교역순위에서 4번째 국가가 될 정도로 경제협력은 급성장하였다. 정치, 외교, 군사, 과학기술, 교육 부문에서의 협력관계도 괄목할 만한 정도로 나아졌고 최근에는 문화 영역에서 활발한 교류를 보이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베트남에서 한류(lan song Han Quoc)이다.
얼마 전 한 인터넷 기사가 베트남 당국이 그 동안 양국 간의 문화교류가 일방적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시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통상에 제재를 가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고 보도하였다. 주(駐) 베트남 한국대사관에 사실여부를 확인한 결과, 올해 초 베트남에서 개최된 한류관련 세미나에서 나온 의견에 대한 기자의 추측이 가져온 오보임이 밝혀졌다.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베트남 학에 오랫동안 매진한 필자는 베트남의 문화가 국내에 충분히 소개되지 않고 있음에 동감하며 우리 대중이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직․간접적인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었다.
한 나라의 문화를 한 두 단어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만약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베트남 문화는 서로 다른 문화가 혼합된 가운데 정제(整齊)된 문화이다. 베트남 문화는 세계적인 문화가 충돌하면서 형성된 문화이다. 지리 문화적으로 베트남은 북쪽의 중국 문화와 서남쪽의 인도 문화의 접변 지역에 위치한다. 외부적 영향으로 이 양대 문화는 베트남 민족 문화의 형성에 크게 작용하였다. 중국의 경우, 서기전 2세기부터 베트남을 식민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불교와 유교식 종교와 사회사상을 전하였고 주자가례와 세시풍속 등 각종 생활 관습과 의식주와 관련된 규범을 통해 작은 중국을 만들어냈다. 인도의 경우, 해로를 통해 일찍이 기원을 전후하여 베트남 중부에 자신의 문화를 전래시켰다. 짬 빠(Champa 占城)라는 힌두문명에 기초한 국가는 12세기까지 존립하면서 베트남에 힌두 및 이슬람 사상과 건축물 양식을 남겨주었다.
비록 상당한 영향을 받았지만, 베트남 문화는 결코 외래문화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는 않았다. 외래문화가 도래하기 전에 베트남에는 이미 자기 문화를 형성하였었다. 선사시대에 해당하는 서기전 700년 전 당시 베트남인은 동 썬(Dong Son) 문화라는 독특한 문화를 지녔다.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베트남인이 만든 청동고(Bronze Drum)는 표면과 옆면에 새겨진 생활상과 부조기술로 볼 때 상당한 수준의 문명을 지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청동고는 당시 오늘날 베트남 전역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필리핀에서까지 발견되었음을 볼 때 당시 베트남은 인접지역은 물론 동남아시아까지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 형성 및 발달의 경험을 바탕으로 베트남인은 중국과 인도 문화라는 거대한 도전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자연 환경적, 경제적, 역사적, 사회적 요인은 베트남 문화를 더욱 복잡하고 다양하게 하였다. 베트남은 북단에서 남단까지 약 1,650km 에 달하는 긴 영토를 갖고 있고 기후적으로는 북부 아열대, 남부는 열대 몬순 기후에 해당한다. 국토의 대부분 산악지대로 크고 작은 산봉우리(嶺)가 북부, 중부, 남부로 국토를 나누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동쪽의 산악지대, 평야지대, 서쪽의 해안지대에 주민들이 정착해 삶의 터전을 내렸다. 이 같은 자연 환경적 요인은 각 지역의 베트남인들로 하여금 친환경적 의식주 문화를 형성토록 하였다. 그 결과, 해발 3,000 미터의 북부 산악 고지대의 차가운 기후에 속에서 사는 주민의 주택과 복장은 남부 해안지대의 무더운 날씨에서 사는 어민과는 완전히 다르게 되었다.
베트남에 거주하는 54개 소수민족은 역사적으로 자신의 전통문화를 계승, 보존함에 따라 국가적으로는 다소 분열적이면서도 풍요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언어 계통적으로 보면, 중국․티벳어족에 속하고 인종적으로는 북방의 몽골로이드와 남방의 말레이족이 결합되는데 여기에 자신들의 고유한 민간 신앙, 관혼상제, 가정교육과 언어를 지키려는 노력은 베트남 문화의 지역별, 인종별, 언어별 차별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산악지대 소수 민족의 화전, 수렵 및 채집 경제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평야지대의 농업 문화는 여전히 대도시 주민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해안지대의 어민들 사이에서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해양 문화는 베트남 문화가 지닌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의 습합(習合) 또는 혼용과정을 설명해 준다.
앞서 약간 소개하였지만 베트남은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으로 인해 역사 속에서 많은 외침을 받았다. 외부 침략세력이 지배하는 동안 수행했던 각종 동화정책과 식민문화의 파급효과는 베트남 문화의 순수성을 희석시키는 한편, 동서양의 문화적 특성을 내포하는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초기 부족국가 형성기 때부터 북방에서 유입된 중국 문화가 남쪽에서 올라온 인도 문화 외에도 베트남은 중국 운남(雲南)성 지역에서 존립하였던 난 짜오(Nan Chao) 국의 따이(Tai) 족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내려오면서 이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문화 전이를 경험해야만 했다. 특히 이들이 베트남, 라오, 시암, 크메르, 미얀마 지역에 내려와 토착민과의 뒤섞이는 과정을 통해 정착한 이후에도 각기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동족간의 교류를 계속 함에 따라 해당국의 문화가 베트남에까지 유입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근현대에 접어들어서는 서양의 문화가 베트남에 전래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와 미국과의 정치 군사적 갈등관계를 통해 이루어졌다. 16세기부터 선교사를 통해 일찍이 서양의 종교 사상을 전파하였던 프랑스는 현재 베트남인이 쓰고 있는 문자를 개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중반이후부터는 군사, 행정, 교육, 사회 영역에서 이전까지 베트남인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문화를 들여왔다. 특히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던 코친차이나(Cochinchina) 지역, 그 중에서도 사이공(Sai Gon)은 '동양의 파리'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프랑스의 문화가 형식과 내용면에서 압도하였던 곳이다. 이 지역은 다른 서양인에게도 결코 생소하지 않았고 20세기 중반이후부터는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하면서 물질주의, 쾌락주의, 낭만주의의 표상이 되기도 하였다.
역사적, 경제적, 지리적, 자연 환경적 요인에 의해 복잡하게 구성된 베트남 문화의 특성의 의식주 문화에서 베어난다. 사회 내 지배계층 혹은 일부 상류계층이 각종 의례를 포함한 공식적인 행사에 참가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베트남인은 의복은 그들의 기후와 경제 활동을 고려하여 매우 실용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열대지역의 전형적인 농업 사회인 베트남에서 대중은 농사일에 편한 복장을 착용하였다. 18세기 프랑스인을 비롯한 서양인의 사진이나 그림 속에 나타나는 베트남 남성은 마치 씨름 선수가 메는 샅바 식으로 국부를 가리는 것으로 의복을 대신하였고 여성의 경우, 아오 뜨 턴(ao tu than)이라고 해서 상의는 비키니 수영복에다 하의는 치마를 두르는 정도였다. 이렇듯 간단하지만 엉성한 복장은 중국의 지배 기간 중 중국관리가 중국인처럼 치마대신에 바지를 착용하라는 명령을 어기면서 지켜온 민족 자존심을 지키고자 그대로 보존하다가 이후 프랑스 식민지배기를 거치면서 서양의 복식을 반영한 전문가가 중국 상해의 복식과 후에 왕실의 복식을 가미하여 오늘날의 아오 자이(ao dai)를 만들어냈다.
베트남, 특히 하노이를 포함한 북부 지역에 살다보면 우리가 쉽게 예상치 못한 베트남인의 복식을 보게 되는데 여름철의 긴 바지 및 긴 소매상의와 겨울철의 가죽잠바와 코트이다. 일 년 내내 섭씨 29도를 유지하는 남부 호 찌 민시(구 사이공시)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없고, 베트남을 무더위의 남국으로 상상했던 외국인에게는 다소 의아스럽지만 그것은 이미 베트남인 일상이 되어 버렸다. 아랍인이 디시다샤(Dishdasha)나 아바야(abayah)를 착용하는 원리와 마찬가지로 여름철 뙤약볕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고 찌는 듯 한 열기를 막기 위해 착용한 이 복장은 팔을 모두 가리는 긴 장갑과 진한 선글라스에 손수건으로 만든 삼각 마스크를 착용해야 비로소 한 세트가 된다. 현지에 출장을 가는 우리 바이어에게 베트남 파트너와 비즈니스 미팅에 입고 나갈 복장은 인천공항을 나설 때까지도 신경을 자극하지만 노이 바이(Noi Bay)공항이나 떤 썬 녓(Tan Son Nhat) 공항에 내려 시내도 들어서면서 와이셔츠에 넥타이만 매고 다니는 샐러리맨들을 보면서 곧 안심을 하게 된다. 한국을 방문하는 베트남인의 쇼핑 품목가운데 가족 잠바는 필수항목인데 겨울철에 높은 습도를 나타내는 기후가 북서풍이 불면서 체감온도를 더 떨어뜨리고 오토바이가 주요 교통수단인 이들에게 맞바람이 불어 닥칠 때면 '뼈를 깎는' 추위에 견디기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재미있다.
전통적으로 농업사회인 베트남에서 쌀, 야채,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이 주식을 이루었다. 쌀은 1930년대 이미 베트남은 세계 3대 쌀 수출국에 포함된 이후로 계속해서 대표적인 작물이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급격히 줄어든 쌀 생산량은 1990년대에 전 국민의 식량을 위한 자급자족을 이루었고 그 결과 베트남은 현재 태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쌀 수출국이 되었다. 농업을 주업으로 하다 보니 토지는 농민의 재산 중 가장 비중이 컸는데 농사에 사용한 소 역시 매우 소중히 여겨 봉건시대부터 소를 잡아먹는 행위를 금하는 법률을 따로 제정했던 때문인지 베트남인에게 소고기는 인기가 별로 없다. 반면에 돼지고기와 닭고기는 베트남 식단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돼지는 전통 사회로부터 촌락의 각종 의례나 집안의 경조사 때 기본 식단에서 빠진 적이 없을 정도로 보편적이었으며 닭고기는 오리와 칠면조 등과 함께 베트남이 인류사가운데 최초로 가금류를 사육한 동남아시아 국가 중 한 나라였던 이후로 대표적인 고기가 되었다. 전국적으로 약 3,200km 이상의 해안선을 지닌 베트남에서 생선은 매우 흔한 음식이다. 게다가 수많은 농업용수를 위해 파놓은 연못에서 양식하는 민물생선까지 합하면 베트남인들은 어렵지 않게 생선을 먹을 수 있었다.
비록 쌀이 풍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베트남인이 아침 식사를 길거리에서 퍼(pho 쌀국수)로 대신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고충과 편리성을 위한 선택이었다. 최근에 들어서야 냉장고가 가정에 보급되었지만 전통적으로 날씨는 무더웠으나 따로 냉장시설을 갖추지 못했던 전통 가정은 부엌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던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시장이나 동네 꽌 안(quan an 館食 간이음식점)에서 아침을 해결하는 것이 여러 면에서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쌀이 풍부함에 따라 퍼이외도 분(bun 粉)이라는 얇은 국수가 분 짜(bun cha)와 분 보 후(bun bo Hue)에 등의 음식에 들어가고, 쏘이(xoi)라는 바나나 잎에 싸서 찐 찰밥과 바인 꾸온(banh cuon)이나 고이 꾸온 (goi cuon)등 쌀로 만든 쌈이 애용된다. 베트남 음식에서 야채는 결코 빠지는 일이 없다. 베트남인이 야채를 즐기는 데는 전통적으로 농업을 주로 하면서 집주변에 밭을 가꾸어 쉽게 경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 등 지방이 많은 음식을 섭취하면서 이를 중화시키려는 음양학적 배려도 담겨 있었다. 특히 베트남은 수많은 향초를 즐겨 먹는 것으로 유명한 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지방기가 많은 음식을 섭취할 때 입맛을 자극하고 혈액순환을 돕기 위한 삶의 지혜로 보인다.
베트남인들은 농업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면서 식사 예절을 중시하게 되었다. 전통적 습관에다 훗날 서양식 문화가 어느 정도 전래되면서 밥은 개인 그릇에 담기보다는 큰 그릇에서 먹을 만큼 덜어 먹는 문화가 자리를 잡게 되었고 윗사람이나 손님에게 먼저 덜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개인 공기와 수저는 먼지를 닦아내기 위해 냅킨으로 닦는데 윗사람과 손님에 대해서는 먼저 닦아서 주는 것도 예절에 속한다. 베트남 쌀은 찰기가 덜 해서 우리처럼 젓가락으로 뜰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식사 예절과는 달리 밥그릇을 입에 대고 젓가락을 사용하여 입에 밀어 넣는 식으로 먹는다. 과거에는 식사 때 소리를 크게 낼수록 부의 상징으로 여겼으나 얼마 전부터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음식을 씹는 소리는 내지 않는다. 도시에서는 양식과 외식 문화도 정착하였다. 프랑스 식민 지배를 겪으면서 생활화된 외식문화를 위해 다양한 종류의 식당과 음식도 생겨났다. 농촌의 전통 음식과는 달리 새로운 음식은 더욱 다양한 조미료, 향초, 식재료가 사용된다. 포크와 나이프의 사용과 전채, 주식, 후식의 코스 요리, 코냑과 와인에 대한 이해가 폭 넓게 보급되었다.
의복과 식사 못지않게 베트남의 주택 문화는 자연 및 인문 지리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반영한다. 우선 베트남의 가옥은 지역별, 지형별, 종족별로 다양하다. 산악지역에는 냐 산(nha san)이라는 오두막 혹은 판잣집 형식의 주택이 있는데 대부분은 채집과 수렵을 하고 3세대 이상의 대가족이 집단 주거를 하는 소수 민족의 가옥이다. 이는 열대지역 주민들의 대표적인 형식이기도 한 데 짐승, 해충, 습기를 피하기 위해 높게 세운 기둥위에 지은 집이다. 한편 평야지대에는 지표면위에 지은 전형적인 농촌 가옥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농사에 필수적인 집단 노동력을 담보하기 위해 하나의 촌락은 경작지 가운데 대나무로 쌓은 울타리 안에 50~100가구가 군집하였고 각 가정은 우리의 전통 농가와 마찬가지로 3~4개의 방에 부엌, 곡간, 창고, 가축우리, 우물 등을 갖고 있다. 한편 도시의 가옥은 좀 더 특이하다. 장사를 목적으로 많은 주민이 밀집한 결과, 각 주택의 전면은 폭이 제한되었고 높이와 길이는 자유로웠다. 1층은 습기로 인해 주거 시설보다는 장사를 위한 좌판을 깔거나 창고로 이용하였고 2층 이상이 주거 공간이었다. 수많은 강가에는 수상 가옥이 지어졌다. 농수로를 따라 세워진 이 가옥들은 산악지대의 오두막과 형식은 유사하였다. 해안의 도서지역에는 해상가옥이 세워졌는데 이들은 주로 어민이었으나 육지로부터 탈출한 범죄자도 있었다. 이들은 조각배에 살림을 차려 어업 활동을 하고 수확물을 해안에서 거래하며 안전한 항구나 섬에서 휴식을 취했다. 한편 한 가구에 해당하는 배가 서로 모여 묶어 놓은 해상 촌락도 있었는데 여기에는 학교와 어민들을 위한 관청 뿐만 아니라 시장도 형성하고 있었다.
열대 몬순 지역에 해당하는 베트남에는 더위를 이기기 위한 건축 양식이 발달했다. 일단 각 층의 높이는 평균 4m 이상이며 1층을 더 높게 짓는 것이 상식이다. 프랑스와 미국의 점령 및 주둔을 겪으면서 실링팬과 채광 창문은 서양 건축물의 채취를 나타냈고 겨울에도 실내 벽의 위쪽에 환기를 위한 창 또는 구멍을 열어두는 방식은 습기로 인한 건강 피해를 실감하게 한다. 농촌 및 산악 지역이 대부분 좌식 생활 습관을 지니는 반면에 도시지역은 입식 문화가 보편화되어 침대, 소파, 식탁이 가정마다 구비되어 있다. 요약하면, 베트남의 의식주 문화는 비록 베트남 문화 자체가 역사적, 지정학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경제적, 자연 환경적 요인에 의해 특징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베트남인의 대인 관계가 갖는 한 특징은 공동체문화와 개인문화가 공존하고, 수직적 질서와 수평적 질서가 함께 나타난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베트남 농촌 사회는 수많은 홍수, 가뭄에 시달렸고 새로운 농지를 개간하거나 둑을 쌓기 위해서는 개인이나 친족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모내기와 추수 등의 농사일을 차치하고서라도 잇단 외침세력에 맞서 촌락과 국가를 지키는 데에는 집단공동체의 협력을 생사를 결정짓는 중대한 요인이었다. 우리나라나 일본에서도 공히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베트남의 경우 뭉치면 강하지는 결속력은 어떤 민족에 비해 뒤지지 않는데 이를 환언하면,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한 개인의 희생과 의무가 사회생활의 최우선적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나 집단노동에 절대적인 공동체를 위한 규범은 일단 난리가 해결되고 가정으로 돌아오게 되면 개인적인 것으로 완전히 모습을 바꾼다. 베트남에서 가부장적 가족 관계는 장자 상속 또는 말자 상속이든지 부모가 생존해 있을 때 재산이 분배되고, 핵가족 중심의 소가족 제도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개인 문화 또한 동등한 수준에서 발달하였다.
동남아시아 만달라 (Mandala) 사회의 특성은 베트남에서도 나타난다. 천년 이상 중국의 오랜 지배를 받았음에도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베트남인은 유교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수직적인 위계질서보다는 수평적 관계를 선호한다. 조직에서의 상하관계는 인정되지만 최고지도자만을 절대적인 복종과 상의하달은 이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대신에 아랫사람을 포용하는 인격, 경륜을 갖춘 지도자를 존중하고 따르는 상하관계가 태생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다 프랑스 식민지배기를 통해 베트남에 유입된 인권 존중, 자유 평등, 민주 사상 등은 동남아시아 사회에서 보기 드문 개인주의 인격 형성을 가져왔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베트남 대중에게 다가선 공산주의 계급 혁명 의식 또한 수직적 사회질서보다는 수평적 동지 관계가 자리 잡는 데에 탄력을 가져다주었다.
그럼에도 베트남인의 직장 문화는 여전히 전형적인 농업사회에서의 대인 관계를 여전히 많이 따르고 있다. 베트남 직원의 근무 태도는 성격이 급한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점이 많다. 우선 외모 상으로 베트남인은 '멋'을 따진다지만 생머리를 길게 내리워 근무할 때 불편을 겪는 여직원이나 일을 안 한 사람인 체하기 위해 새끼손톱을 구부러질 때까지 기르는 남직원은 비위생적으로 비춰진다. 업무 수행 속도로 보면, 단순한 일도 시간을 지체하여 답답한 인상을 주는 것이 다반사이다. 그럼에도 출퇴근이나 점심시간은 정확히 지켜줄 것을 요구할 때면 같은 회사 직원임을 의심하도록 한다. 업무 수행 방식을 놓고 볼 때, 이들은 부서 간 토의나 협력을 통해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도 대단한 비밀인양 혼자서 이기적으로 붙들고 있다가 결국 시기를 놓쳐 일을 망친다. 업무상 잘못에 대해 지적하거나 시정을 요구하면 자신의 실수를 시인하고 곧바로 시정하는 대신, 자기 행위에 대한 핑계나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급기야는 겸연쩍은 웃음인지 조소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애매한 표정까지 짓는다.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조금의 불이익이라도 받을 때는 지체 없이 노동 착취이자 비인격적 대우를 내세워 단체 행동에 들어가려 한다. 이 모든 근무 행태는 봉건체제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 과도기에 들어선 베트남이 내포하는 근본적인 한계이자 1986년 이후 전면적인 사회개혁에 착수한 도이 머이 쇄신 정책이 갖는 문제점이다. 그러나 주로 전통적 농업사회에서 집단공동체 생활 속에서 생겨난 타성이자 생존을 위한 고육지책인 베트남인의 이러한 소극적인 면은 지난 수 천 년 간 경험하고 발전시켜온 그들의 문화접변력을 놓고 볼 때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오늘날의 베트남 문화는 외래문화와 민족문화, 공동체문화와 개인문화, 전통문화와 현대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복합문화이다. 오랜 시간동안 자기 것과 남의 것, 낡은 것과 새 것 사이에서 베트남인은 자신만의 혼합주의와 접변력을 통해 최선을 추구해 온 경험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첫댓글 베트남 문화가 좀 갑갑한 점도 있지만 그들의 문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다른 문화가 혼합된 가운데 정제된 문화라는 말이 딱 맞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