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44
9월10일 [한가위/연중 제23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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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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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오, 거두어가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또다시 추석입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면서 경제적, 심리적 어려움이 크신 분들도 많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 친지들 가운데서 바이러스 여파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분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걸맞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관대한 나눔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또한 나누지 않고 베풀지 않는 부자를 향해 엄중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사실 재물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은 우리 삶을 불편하게 만들고,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하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부여하신 능력과 달란트를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정직하고 깨끗하게 부(富)를 축척할 필요가 있습니다. 재산이 어느 정도 있어야 봉사활동도 할 수 있고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재물에 대한 과도한 욕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전 생애를 오직 재산 축척에만 몰두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전노처럼 돈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재물을 하느님의 위치에 올려놓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물은 때로 마약과도 같아서 우리 인간의 오관 기능을 마비시키고 판단 능력을 파괴시킵니다. 그래서 결국 재물은 우리를 거룩함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장해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속을 가장 잘 대표하는 재물이 우리 영혼에 끼치는 이런 악영향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재물을 지혜롭게 잘 사용할 것을 강하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준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복음 12장 20절)
따지고 보니 그렇습니다. 냉혹하지만 진리입니다.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오, 거두어가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축복도 주시지만 고통도 주십니다. 생명도 주시지만 죽음도 주십니다.
사실 얼마만큼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우리의 생애는 덧없이 시들고, 우리는 무대 뒤로 사라져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때 우리가 모아두었던 재산은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그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쌓아온 재물이 아니라 우리가 이웃과 세상,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헌했던 나눔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행하고 있는 소리 없는 나눔 그것은 하느님께서 가장 기쁘게 받으실 봉헌인 것입니다.
매일 우리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의 재물에 죽고,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자존심에 죽고, 나만의 영역에 죽고, 내 울타리에 죽을 때, 우리의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잘 왔노라’ 하시며 우리를 환영하실 것입니다.
누구나가 다 고상한 죽음, 남 보기에 민망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합니다. 더 나아가서 고귀한 죽음, 향기로운 죽음, 이웃들의 뇌리에 강한 긍정적인 각인을 하는 죽음을 맞이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그런 죽음은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매일 부단히 죽는 사람들, 매일 자아 포기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는 사람들, 부단히 자기 혁신을 위한 아픔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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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눔으로 관계의 빈곤을 넘어라>
얼마 전에 교구청에 장례미사가 있어 갔다가 오산성당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서울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아보았습니다. 어떤 보험회사의 어여쁜 아가씨 음성이었습니다.
저는 보험은 관심 없다고 말하고 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5천 원짜리 상품권이 당첨되었으니 꼭 이메일을 확인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보험 상품 한 가지만 설명을 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러실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단 들어보시고 결정하시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미 많은 보험을 들어놓아 더 이상 보험이 필요 없는 사람처럼 생각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 달에 3만 5천원을 내면 다른 보험이 들어있어도 상관없이 모든 질병의 모든 병원비가 지원되고 나중에 원금도 되돌려주고 사망하게 되면 2억 5천이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20년만 부으면 평생 혜택을 볼 수 있고, 특별히 이미 보험을 가입한 사람들도 다른 보험 가입 여부에 상관없이 돈이 지급되기 때문에 보험이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드는 아주 좋은 상품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워낙 설득력 있게 설명해 주어서 제가 사제가 아니었으면 아마 그 보험을 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의료비가 제가 속해 있는 곳에서 다 나온다고 설명을 해 주고 좋은 보험이기는 하지만 저에게는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분이 이렇게 좋은 것을 왜 들지 않느냐고 의아해 하기에, 그냥 “저는 보험을 들지 않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이 미래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보험을 하나도 안 들고 사시는 분이 있느냐고 매우 신기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을 이해시키기 위해 제가 천주교 신부라고 신분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그 분도 매우 끈질기게 개신교 전도사님들도 그 보험에 많이 가입했다고 하면서 성직자들도 미래에 대비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저는 전도사분들은 가족들이 있으니 보험이 필요하지만 저희 같은 사람은 혼자 살기에 보험이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돈이 있어도 쓸 데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부모님을 잡고 늘어졌습니다. 제가 죽으면 2억 5천이 부모님께 가게 되는데도 들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제가 죽기를 바라는 것처럼 부모님까지 잡고 늘어지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모든 것을 하느님 뜻에 맡기고 살기 때문에 부모님도 주님께서 잘 보살펴 주실 것이고, 그런 돈이 없어도 저희 부모님은 부족함 없이 잘 사시고 계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이런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는 사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참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으로 그 자매와의 대화를 마쳤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가위 미사 때마다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보게 됩니다. 부자는 소출을 많이 거두어서 더 큰 장고에다 곡식과 재물을 모아놓으려고 하지만 사실 오늘이 그 부자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부자는 이미 남들보다 재물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왜 더 많은 재물을 모아두려고 하는 것일까요?
아무리 부자라고 하더라도 불명확한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직도 부족하기 때문에 참으로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것입니다. 재벌 가에서 재산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저는 그들도 가난해보입니다. 아직도 돈이 부족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우리 책상 서랍을 열어봅시다. 혹은 책장이나 옷장을 열어봅시다. 1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봅시다.
아마 상당히 많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미래에도 사용될 확률이 매우 적습니다. 만약 그것들을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그 사람들이 매우 감사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냥 ‘혹시’라는 생각 하나 때문에 나도 사용하지 않고, 꼭 필요한 사람들도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어리석은 부자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미래를 위해 비축해 두다가 자신도 사용하지 못하고 남들을 위해 좋은 일도 한 번 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미래에 대해 그렇게 불안해하고 자꾸 더 가지려고만 하는 것일까요? 이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사람도 나의 미래를 완전히 책임져줄 수 없음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빈곤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즉 물질적인 빈곤감의 근본적 원인은 관계의 빈곤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삭빠른 청지기의 비유에서 오히려 재물을 사용하여 관계의 빈곤을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관계의 빈곤은 상대를 위해 나의 소유를 나누어가질 때 해결됩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와 공유하시고, 우리도 하느님께 우리가 가진 것을 봉헌합니다. 모든 관계는 자신의 것을 나눌 때 이루어집니다.
저는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바칠 수 있어야 더 가까운 관계인 것을 알았으면서도, 요즘 하느님께 저의 시간 중 졸린 시간만을 바쳐서 성체조배 하면서도 자주 졸았던 것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아마 상당히 많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미래에도 사용될 확률이 매우 적습니다. 만약 그것들을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그 사람들이 매우 감사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냥 ‘혹시’라는 생각 하나 때문에 나도 사용하지 않고, 꼭 필요한 사람들도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어리석은 부자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미래를 위해 비축해 두다가 자신도 사용하지 못하고 남들을 위해 좋은 일도 한 번 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미래에 대해 그렇게 불안해하고 자꾸 더 가지려고만 하는 것일까요? 이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사람도 나의 미래를 완전히 책임져줄 수 없음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빈곤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즉 물질적인 빈곤감의 근본적 원인은 관계의 빈곤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삭빠른 청지기의 비유에서 오히려 재물을 사용하여 관계의 빈곤을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관계의 빈곤은 상대를 위해 나의 소유를 나누어가질 때 해결됩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와 공유하시고, 우리도 하느님께 우리가 가진 것을 봉헌합니다. 모든 관계는 자신의 것을 나눌 때 이루어집니다.
저는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바칠 수 있어야 더 가까운 관계인 것을 알았으면서도, 요즘 하느님께 저의 시간 중 졸린 시간만을 바쳐서 성체조배 하면서도 자주 졸았던 것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만약 오늘 같은 명절 때 자녀들이 부모에게 오면서 손에 아무 것도 들고 오지 않았다면 아무래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관계는 주는 것이 없이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일해서 번 돈을 하나도 가져다주지 않는 남편이 아내와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까요?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나눔으로써 관계의 빈곤을 극복하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밑천인 것입니다.
오늘같이 풍요로운 한가위 날 감사할 줄 압시다. 감사해서 하느님께 봉헌하고 이웃과 나눌 줄 압시다. 물질로 관계의 풍요로움을 창출합시다.
물질을 위해 관계의 빈곤을 초래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악은 관계의 빈곤함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한가위의 의미는 풍요한 재물을 이용해 관계의 풍요로움을 창조하는 때여야 하는 것입니다. 풍요로운 한가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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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오늘은 ‘한 가위’입니다. 더 쉽게 다가오는 말은 ‘추석’입니다. 멀리 타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추석이면 ‘선물’을 준비해서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심부름은 주로 제가 했습니다. 고모님 댁, 외할머니 댁에 선물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이렇게 서로 나누는 것을 ‘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제가 되면서 추석이면 가족들이 모여 함께 가정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어머니에게 가정 미사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조상들을 위해서 연도를 바치고, 준비한 음식을 나누면서 추석의 밤은 깊어갔습니다. 이젠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멀리 타향에 있으니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추석을 지낼 수는 없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서 연도를 바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2년 전에 하느님 품으로 가신 어머니의 기일입니다. 추석 ‘둥근달’처럼 넉넉하고, 풍요로운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서품기념일에 동창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한 것이 제게는 ‘추석선물’과 같았습니다. 강론을 대신해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랜 시간 군종사제로 있었던 동창은 지난 31년 본인의 뜻대로 지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예기치 않게 군종사제가 되었고,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20년 가까이 군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단순한 군대에 있었기에 사제생활을 더욱 충실하게 했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저의 서품성구를 나누었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가 저의 서품성구입니다. 지난 31년 땀과 노력으로 결실을 맺기 보다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처럼 남에게 기대면서 열매만 얻으려고 했던 것 같았습니다. 병원에서 사목하는 동창은 언제나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교우들과 따뜻한 정을 나누는 것에는 인색했다고 하였습니다. 지친 몸을 의지하고, 머물 수 있는 곳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다들 아쉬움과 후회를 이야기했지만 돌아보면 감사한 일들이 참 많았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추석을 지내는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주신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내게 주신 모든 은혜는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재화를 쌓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주의하십시오. 모든 탐욕을 경계하십시오. 아무리 부유하더라고 사람의 생명은 그 재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그러합니다.” 경주의 최부자 집 이야기는 우리가 어디에 재화를 쌓아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산은 1년에 1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푸근한 마음을 갖게 한 후 보내라. 가문에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 이웃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오늘 제2 독서는 우리가 누려야 할 천상의 영원한 안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은 이들은 행복하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한가위 보름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여러 가지이듯이,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서게 될 때도 여러 가지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사람들의 유형을 3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려고 마음은 먹지만 전혀 실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욕심대로 살고,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를 주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하느님의 뜻과 계명에 따라 살겠다고 다짐을 하다가도 곧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입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의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자갈밭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사람입니다. 작심삼일인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지점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 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고난과 고통을 받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업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행한 선행, 나눔, 희생,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밝게 비치는 둥근 달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한 한가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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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2,15-21 :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그 동안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또한 우리에게 생명을 얻고, 생명의 길을 가도록 신앙을 전해주시고, 이 땅을 물려주신 조상들의, 또 친지들의 영혼들을 위해 이 자리에 함께 모였다.
우리 조상들은 오늘 추석을 지내면서 일 년 동안 제 때에 비를 주시고, 태양을 비추어 주시어 오곡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 주심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또 조상들의 은덕을 기억하면서 제사를 지내온 분들이다. 그리하여 이 날은 모두가 넉넉한 마음으로 술과 음식을 서로 나누며 지냈던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는 고향을 찾아 부모님께로 많은 분들이 가기도 했지만, 또한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이때를 기해서 자리를 함께 한 가족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그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더욱 가족들 간에 화목한 사랑의 성가정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이렇게 서로 가족들이 만나는 것은 기쁘고도 감사하여야 할 일이다. 그러니 우리도 언제나 감사드리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하루 동안의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고, 한 주간을 마치면서 주일미사를 봉헌하면서 감사드리고, 한 달을 감사하면서 지난 날 모두를 감사드릴 수 있는, 그래서 오늘 추석,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더 잘 살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이렇게 지나간 모든 것에 감사드리면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형제들, 은인들과 친척들 모두를 기억해 드릴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신앙 안에 우리의 모든 형제였던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일에 있어 감사드리는 마음을 갖고,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기로 하여야 하겠다.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찬미와 영광을 바칠 수 있을 때,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신앙생활도 할 수 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에서도 먼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도록 하면서 그 외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더불어 주실 것을 믿으며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진 바를 이웃과 나누며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다짐하는 오늘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쁨이 넘치는 한가위가 되도록 하자.
오늘 복음에서 이 부자가 왜 ‘어리석은 자’가 되었는가? 세상의 재물이 모든 것이라고 믿었던 때문이다. 자기의 재산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다. 그 순간에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영적으로 파산을 했다고 하셨으며, 하느님의 눈에는 그가 전혀 부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큰 비극은 육체적 죽음보다도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 무엇이건 좋은 것이다. 주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옛 성인은 재물이란 것이 ‘사용하는’데 있는 것이지, ‘소유하는’데 있지 않다고 하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주님의 은혜,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돌아가신 조상들과 부모 형제 친척 은인들이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시도록 기도하자. 또한 지난 1년간의 모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지금 우리와 함께 이 참 제사를 봉헌하지 못하며, 이 기쁨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도 기억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면 잠깐 머리 숙여 눈을 감고, 그분들을 위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각자 기도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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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가족과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식과 사랑을 나누는 한가위에, 교회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노고를 축복하시고 손수 풍성한 결실을 내주셨음에 감사드리며(제1독서 참조), 세상에서 고생한 의인들을 그분께서 수확하여 거두시는 심판의 때를 선포합니다.(제2독서 참조)
오늘 복음은 그러한 하느님의 심판을 합당하게 준비하는 삶에 관한 가르침(루카 12,1-13,9 참조)입니다. 부자의 속마음에는 유독 ‘모으다’(17.18절)와 ‘쌓아 두다’(19절) 같은 표현들이 가득합니다. 자신이 거둔 소출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감사의 마음은커녕, 그 재산에 기대어 안심하고 즐길 생각뿐입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하느님도, 나눔을 실천할 이웃도 없습니다. 더 벌어서 계속 더 큰 곳간을 짓고 그것을 채우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린 탐욕은 인간의 영혼을 좀먹는 가장 큰 유혹이며 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부자를 “어리석은 자”,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꾸짖으십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줄지 않는 보물을 쌓으라고 자주 말하면서(루카 12,33; 16,9; 18,22 참조), 그 방법으로 이웃에 대한 자선을 제시합니다. 한편 잠언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주님께 꾸어 드리는 이, 그분께서 그의 선행을 갚아 주신다.”(19,17) 모을 줄만 알고 통장에 찍힌 금액에서 만족과 안정을 찾는 세속적인 부자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믿음 그리고 이웃을 향한 나눔과 자선을 통하여 가진 것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하느님 나라의 부자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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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찬우 요셉 신부님]
<감사와 나눔의 한가위>
즐거운 한가위 명절을 맞이하여 교우님들의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예부터 땀 흘려 일한 후 얻게 되는 오곡백과는 농민들에게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서 가을의 결실을 맺도록 태양빛과 비를 내려주신 하늘에 감사드리고, 또한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신 조상님들께도 감사드리며, 서로 노동으로 도와준 이웃들과 감사와 기쁨을 나누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명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부모 형제를 찾고 조상님들께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하늘에 감사하고 조상님과 부모형제에게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근본을 잊지 않는 인간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모든 감사의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새로운 감사할 일을 불러온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 마음속에는 감사하는 마음과 아울러 고향에 대한 원초적인 향수를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낳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과 조상님이 사셨던 곳 혹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곳은 마음의 고향이 됩니다. 추석명절 고향을 찾는 마음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고향인 하느님 안에서 참 생명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될 미래의 시간도 희망해야 합니다.
가을 추수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삶의 결실을 맺고 참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지니게 될 새로운 생명의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장차 우리가 가 있을 먼 미래로부터 현실을 바라볼 때 물질적인 현실에 사로잡혀 고생하는 우리 삶도 새로운 시야를 갖고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희망 없는 삶과 세상 탐욕에 사로잡힌 삶에 대해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개한 한 부유한 사람은 많은 재산을 잘 비축함으로써 삶의 안전을 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그날 밤 그의 목숨을 하느님께서 거두어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스스로 보장할 수 없으니 허락된 하루하루의 시간에 감사드리며 자기만을 위해 살지 말고 서로 베풀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번 명절 하느님과 조상님, 부모 형제들에게 감사드리며 이웃과 서로 사랑과 정을 나누고 아울러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관심과 사랑이 나누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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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진양 베드로 신부님]
즐거운 한가위 명절 보내고 계십니까? 한가위 속담에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윗날만 같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가위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기에 많은 음식을 장만해서 잘 먹고, 즐거운 놀이를 하며 지내게 되므로 늘 이 날만 같았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때에는 배불리 먹지 못하고, 일에만 시달렸던 백성들의 소망을 대변했던 말이었다고도 합니다. 또한, 송편을 빚어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풍성한 한가위 명절에 자신들만 챙겼던 것이 아니라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해주신 하느님과 조상님들께도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한가위 명절을 맞아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제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맺은 결실은 전부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들입니다.
물론 내가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주변의 도움과 하느님의 도우심이 더 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한가위 명절에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우리 가족들과 조상님들께도 감사를 드리면서 위령미사를 봉헌합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가 태어나고 이만큼 살 수 있게 된 것은 나 혼자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닙니다. 조상님과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부자를 보면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나는 언제나 저런 말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나온 부자에게서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면 감사드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곡식과 재물이 많았던 부자의 창고에 감사하는 마음까지 쌓아두고 있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겠지만 그럴 시간까지는 없었나 봅니다. 만약에 부자가 자신의 삶에 만족했었다면 하느님께서 목숨을 거두시기까지 자신의 재물에 집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에 만족한 사람이 진정으로 감사할 줄 압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인색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부자가 자신의 재물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었다면 하느님께서 조금 더 이 세상에 있도록 허락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세상은 점점 발전하지만, 아직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생활에서도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가위 명절만이라도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윗날만 같아라.’라는 마음으로 하느님과 조상님들께 감사를 드리시는 풍성한 명절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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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백성수 시몬 신부님]
<“감사” “기억” “친교”>
한가위! 어릴 때의 추억은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온 가족이 모여 송편 빚고, 오랜만에 친인척을 만나 함께 성묘 다니고, 때로는 새 옷도 얻어 입었던 그저 즐거운 날로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랜만에 친인척을 만나도 어릴 때 같지 않고 송편을 먹어도 그때 맛이 아니다. 그리고 조상들의 주검 앞에 자신의 죽음이 비춰지는 엄숙한 성묘 시간이 되고 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좋은 날, 한가위입니다. 모든 가정에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가득히 내리시길 빕니다. 한가위의 정신은 “감사”와 “기억” 그리고 “친교”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 생명을 자신의 살과 피, 그리고 뼈로 지금의 우리가 있도록 해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파스카 사건을 기억하면서 민족의 정체를 지키며 살듯이, 우리는 조상님들이 남겨주신 정신들을 기억하며 오늘을 사는 데에 또 다른 힘과 지표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가족친지들과 함께 하는 만찬을 통한 친교가 새롭고도 풍요한 관계를 이루는 소중한 은총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감사” 와 “기억” 그리고 “친교”의 구체적 표현이 바로 제사(미사)와 성묘입니다. 그러므로 가벼운 이유로 함께하지 않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제사(미사)와 성묘를 미리 앞당겨 지내버리는 모습은 하느님과 조상님들께 정말 죄스런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재화에 목숨을 맡기지 말고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 맡기면서 세상을 살라고 하십니다. 노후를 위해 지금 재화를 부지런히 모으고, 그 모은 재물에 마음 흐믓해하는 사이에 우리의 몸은 늙고 병들어서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한가위는 하느님과 조상님들 사이에서 생명과 죽음을 묵상하고, 다가올 우리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을 향하는 새로운 깨달음의 명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오늘 한가위는 하느님과 조상님들을 위한 날이 되고 우리에게는 은총의 날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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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곳간>
루카 12,15-21 (탐욕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하느님의 곳간>
거둔 것은 많은데
모아 둘 데가 없어
고민하는 사람아
그대 곁에는 늘
여전히 빈 곳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그대의 좁아진 곳간을
굳이 힘들여 헐어 내고
애써 다시 지으려는가
그럴 정성이라면
그대 곁의 빈 곳간들에
차곡차곡 모으시게나
나의 곳간 너의 곳간
어디 따로 있겠는가
모두 하느님의 곳간인 게지
하느님께서
그대의 곳간에서 빼내어
다른 곳간으로 옮기시기 전에
그대가 몸소 기쁘게
나의 곳간 너의 곳간 허물어
골고루 채우시게나
그대가
당신이 하실 일을 알아서 하니
하느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나
그대가
벗들의 빈 곳간을 채워주니
벗들은 또 얼마나 기뻐하겠나
그대 덕분에
하느님도 벗들도 모두 기뻐하니
그대도 마냥 기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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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과 감사의 풍요로움>
고유의 명절 추석이다. 선물이 오가고 온 가족이 모여 음식을 먹으며 ‘마음의 풍요’를 느끼는 때이다. 선물을 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선물을 주는 것이다. 감사와 고마움의 마음을 담아 전하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선물이다. 계산적이지 않다.
그러나 되돌아올 것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선물의 의미를 잃고 호의를 사기 위한 뇌물이 된다. 이 명절에, 받는 사람에게 선물의 의미가 잘 전달되어서 서로 기쁨을 나누길 희망해 본다. 만약 뜻하지 않게 어울리지 않는 선물을 전달했다면 받는 사람의 기분도 선물을 주는 사람의 기대와 달리 불편함을 주는 셈이 될 것이다. 의미 있는 선물을 통해 서로 간 만남의 깊이를 더했으면 좋겠다.
코로나19의 팬데믹에 이은 초강력 태풍 ‘힌남노’로 인해 만남의 기쁨을 누리기에 안타까움이 있지만, 조상과의 만남, 부모와 자녀의 만남, 친지와의 만남이 소중하고, 만남 그 자체가 서로에게 큰 선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백화점, 마트, 온라인 몰 등에서 다채로운 선물세트를 경쟁적으로 선보이고 있는데 음식이나 과일을 주고받는 유형의 선물보다는, 각종 상품권, 모발일 식사권 등 무형의 선물을 선호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형적인 물질보다는 마음을 주고받으며 사랑과 감사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이다.
필자는 한 할머니의 선물을 잊지 못하는데 네잎클로버이다. 기초생활수급자인 할머니께서는 작은 컨테이너를 숙소로 사용하고 계셨는데 시들지 않게 하려고 물이 담긴 작은 컵에 네잎클로버를 담아오셨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드릴 것은 없고, 좋은 일 생기라고 가져왔소.” 할머니의 속마음을 생각하며 그만 울컥하였다. 얼마 후 커다란 보따리 하나를 들고 오셨는데 ‘둥굴레’였다. “무엇인가 드리고 싶은데 돈은 없고, 들에 나가서 뜯어다가 정성껏 말렸다”며 “맛이 달고 구수해 숭늉이나 누룽지 같으니 자주 끓여 드시오” 하셨다.
결정적인 한 마디에 제가 박장대소하였는데 “요즘 머리가 많이 빠지신 것 같은데 이것을 끓여 먹으면 머리가 난대요. 그러니 이 할머니 생각해서 꼭 챙겨 드시오”. 필자는 머리가 많이 빠져 있었다. 필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할머니의 모두를 받았다.
요즘 대통령께서 추석 선물을 하였다고 한다. “어렵고 힘든 시기이지만 희망이 보름달처럼 환하게 우리를 비출 것”이라는 내용의 카드가 담겨있단다. 그런데 “윤 대통령 추석 선물 팝니다.” 중고가 최고 00원이라고 중고시장에서 판매한다니 진정한 선물의 의미는 찾아보기 힘들다.
“권세가에게는 비위를 맞추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친구다.”(잠언19,6) 사랑과 정성이 담긴 귀한 선물을 기억하고 나도 그런 선물이 되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행복을 나누어 주면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 퍼져나가고 스며들듯이 선물도 다르지 않다. 받는 이에게 기쁨이 되고 이웃에게 흘러나간다. 감사의 마음으로 선물이 되어주는 순간 받는 사람도 아무런 조건 없이 다른 이의 선물이 되어준다.
“한 사람이 신께 빌었다. 쌀 항아리를 채워주시고, 과일 광주리를 채워주시고, 고기 상자를 채워주시라고. 하도 졸라대는 통에 신은 허락해 주고 말았다.
그런데 쌀 항아리와 과일 광주리와 고기 상자를 주워 담으면 담는 대로 커지게끔 만들었다. 그 사람이 쌀 항아리 앞으로 가면 쌀이 저절로 생겼다. 쌀 항아리에 쌀을 퍼담는 그는 신이 났다. 한참 쌀을 담다 보면 쌀 항아리는 커지는데 고기 상자가 그대로인 게 그는 불만이었다.
이번에는 고기 상자 앞에 섰다. 이내 고기가 저절로 생겼다. 고기를 집어넣는 대로 고기 상자 또한 커졌다.
하나 과일 광주리가 그대로인 게 그는 또 불만이었다.... 번갈아 쌀 항아리와 고기 상자와 과일 광주리를 채우다 보니 어느덧 죽는 날이 다가왔다. 그제야 그는 문득 깨달았다. 게걸스러운 거지가 되어 살아온 자기 삶을. 그는 신에게 항의하였다. ‘어찌 이렇게 거지인 채로 살아오게 하였습니까?’ 신이 대답하였다. ‘그건 내 탓이 아니라 순전히 네 탓이다. 꽉 차지 않아도 만족할 줄 알았으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 아니냐’.”(정채봉)
추석 명절에 음식이나 과일, 고기보다는 스스로 서로에게 마음의 선물이 되어주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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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불교 경전에 나오는 안수정동이란 우화가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달려드는 코끼리를 피해 도망치던 중에 우물을 만났습니다. 등나무 줄기를 붙잡고 우물 아래에 내려가자 바닥에 뱀들이 가득한 것이 아닙니까? 머리 위를 올려보니 설상가상으로 흰 쥐와 검은 쥐가 나무줄기를 갉아 먹는 중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갈등하고 있을 때, 머리 위로 무엇인가가 떨어졌습니다. 손가락을 찍어 맛을 보니 달콤한 꿀입니다. 이 남자는 죽을 위기에 처한 것도 잊고 정신없이 꿀만 받아먹었습니다.
이 남자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 상태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냥 꿀만 받아먹다가 의지하고 있던 나무줄기가 끊어져 우물 바닥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살 가능성은 어디에 있을까요? 줄을 타고 올라가 코끼리와 싸우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꿀만 받아먹을 사람은 없겠지요. 그런데 이 우화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 모습을 빗대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겠습니까? 달콤한 꿀과 같은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다가 죽겠습니까? 아니면 나의 의지와 능력을 키워나가면서 위험이 있어도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기껏 돈 벌라는 것일까요? 기껏 세상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라는 것일까요? 분명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후,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활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가위 미사를 봉헌합니다. 우리의 옛 조상님들은 한 해를 마무리해가는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 그 절정에 자리한 팔월 한가위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잘되었든 못되었든 간에,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것은 조상님 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미사를 봉헌하면서 사랑을 쏟아부어 주시는 하느님께, 그리고 지금 여기 있게끔 해주신 조상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감사의 마음과 함께, 우리도 언젠가는 갈 수밖에 없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지금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즉,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주는 것에 온 힘을 쏟는 삶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에 온 힘을 쏟을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도 ‘참 좋은’ 모습의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한가위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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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참으로 살 수 있을까요?>
-꿈, 찬양, 기억, 사랑-
“뿌릴 씨를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단 안고 환호하며 돌어오리라.”(시편 126.8)
이번 추석은 참 행복했고 의미 깊게 생각됩니다. 뜻밖에 많은 고마운, 사랑하는 지인들에게 추석선물로 두개의 동영상을 선물했기 때문입니다. 10년이 지나서야 진가를 발견한 동영상의 선물입니다.
하나는 요셉수도원과 역사를 함께한 13년전 제 60세 환갑기념 동영상이고 하나는 10년전 요셉수도원 설립25주년 기념 감사제 행사시 정원에서 있었던 작은 음악회때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시와 수녀복장을 한 우리 수사님들의 율동을 곁들인 노래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시 낭독에 전율했다는 반응이었고, 당시 수녀복을 입고 노래하며 춤추는 수사님들 모습에 얼마나 웃었는지 아마 이런 구경은 다시 없을 것이라는 반응이었습니다. 바로 최원장 수사님이 제작 편집한 2개의 동영상을 추석 선물로 보냈고 반응도 좋았습니다. 저 역시 앞으로도 가끔 보며 정체성을 새롭게 할 수 있겠습니다.
“신부님, 훌륭한 앨범 반갑게 보았습니다. 신부님은 요셉수도원의 살아 있는 역사이십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시고 은총의 여정 되시길 빕니다. 신부님, 한가위 명절 즐겁고 행복한 시간 되세요.”
“수도원의 역사이신 신부님! 동영상을 보니 가슴 뭉클합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건강하시길, 항상 기도드립니다. 즐거운 추석 명절 지내셔요.”
메시지가 고맙고 새삼 수도원의 살아 있는 역사가 되어 힌결같이 잘 살아야 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요즘 만나는 분마다 양상은 다르지만 다 힘든 환경속에서도 믿음으로 충실히 살아가는 분들로부터 참 많이 배우고 깨달음을 얻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무엇으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입니다. 수도자들이 수도원에 온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to do)’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to be)’ 왔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그리스도교적 인간의 본래 모습에 대한 오직 한 문장, 아니 오직 한마디로만 표현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처럼 완전해야, 거룩해야, 자비로워야 합니다. 저절로 어떻게 이렇게 참으로 살 수 있겠나? 자문하게 되며 그대로 오늘 한가위 추석날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첫째, 꿈입니다.
꿈이자 비전, 희망입니다. 셋인 듯 하나 결국은 하나입니다. 꿈이, 비전이, 희망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이고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꿈만은, 비전만은, 희망만은 늘 생생해야 합니다. 이들이야 말로 살게 하는 힘이요, 안주하지 않고, 타락하지 않고, 탐욕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역동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원천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 복음의 주인공 어리석은 부자는 이런 꿈이, 비전이, 희망이 전무했습니다.
과연 여러분에게 꿈은, 비전은, 희망은 무엇입니까? 답은 하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입니다. 궁극의 꿈이자 비전, 희망은 하느님 하나뿐입니다. 오늘 한가위 추석 미사시 아름다운 입당송, 본기도, 화답송 후렴이 한결같이 하느님이 우리의 모두임을 입증합니다.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하느님,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는 하느님, 해와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어 저희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조상을 공경하며 가족과 이웃과 화목하여,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하느님,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
제1독서 요엘 예언서의 말씀도 퍽이나 흥겹고 고무적입니다. 바로 오늘 가을철 한가위 추석에도 잘 어울립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타작 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참으로 창조시기(9.1-10.4)에 바치는 ‘우리의 지구를 위한 기도’가, ‘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가, 구체적으로 ‘생태적 회개’가 참으로 절실하고 절박하게 와닿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둘째, 찬양입니다.
하느님을 찬미, 찬양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흠숭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잊고 지내는 하느님 찬양과 흠숭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의 불행이나 비극은 하느님을 잊음에서 기인합니다. 하느님을 잊을 때 정처없는 방황이요 뿌리없는 표류의 삶이요 불안과 두려움에 포위된 삶입니다. 우리 사람만이, 그리스도인들만이 지닌 특권의 축복이 하느님 찬양이요 흠숭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본능적 응답이 바로 감사와 찬양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감사와 찬양의 양날개를 달고 하느님 창공을 날게 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시간입니다. 찬미, 찬양의 기쁨으로, 맛으로, 재미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승들입니다.
찬미의 기쁨, 찬미의 맛은 그대로 하느님의 기쁨, 하느님의 맛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수도승은 찬미의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이런 하느님 찬미의 기쁨이 없다면 삭막한 광야 인생 어떻게 살아 낼 수 있을런지요? 제1독서 요엘서의 요엘 예언자는 우리 모두 하느님을 찬양할 것을 권고합니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어제 저녁 시편 성무일도시 흥겹게 노래했던, 제가 좋아하는 시편135장 두 구절도 생각납니다. 읽는 것 보다는 그레고리안곡으로 부르기에 흥겨움도 배가됩니다.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라, 주님의 종들아 찬양들하라.”
“이스라엘의 집안들아, 주님을 찬양하라, 그 이름 노래하라 꽃다우신 이름을”
바로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에게는 하느님과의 소통인 기도가, 찬미와 찬양의 기도가 없었습니다. 탐욕으로 인해 완전히 하늘문이 닫혔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재산이 아닌 하느님께 달려 있는 사람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경계한 이런 탐욕의 무지의 병에 대한 예방제이자 치유제가 바로 하느님 찬양입니다. 찬미와 찬양의 하느님 맛만이 세상맛, 돈맛을 잊게 합니다.
셋째, 기억입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 두 개 기억할 것은 하느님과 죽음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하십니다.” 인생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요약하면, 일년사계 일년으로 요약하면 강물처럼 흐르는 인생여정에 죽음도 머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참삶을 살 수 있습니다. 늘 말씀드리는 바, 제 경우는 하루로 요약하면 오후 4시, 일년으로 하면 초겨울쯤 될 것입니다. 죽음을 까맣게 잊고 자족하는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경고가 오늘날 부자들도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악몽에 시달리던 구두쇠 스쿠르지 영감이 잠깬후 회개한 것같이 이 어리석은 부자도 이런 충격적 은총의 꿈에 잠깨어 회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정말 죽음 이후의 심판을 상기한다면 이렇게 땅에 보물을 쌓는 어리석은 행위는 멈출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 요한 묵시록도 종말후의 구원과 심판을 예고합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이어 종말의 구원과 심판이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죽음과 동시에 구원과 심판이요, 그리 멀지 않습니다.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장면입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그러자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땅 위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셨습니다.”
넷째, 사랑입니다.
이웃 사람 사랑에, 피조물 사랑을 더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무한한 무절제한 탐욕으로 지구가 중병을 앓고 있으며 인류의 미래도 불확실합니다. 탐욕으로 땅에 보물을 쌓는 모으는, 쌓는, 채우는 ‘소유의 삶’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소유를 나누는, 덜어 내는, 비우는 자발적 가난의 ‘존재의 삶’에 충실하자는 것입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 바로 생태적 회개의 본질적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사람 이웃만 아니라 피조물 이웃도 돌보고 함께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요셉 수도원에 몸담고 사는 피조물 형제자매도 참 무수히 많습니다. 다섯 마리 개들뿐 아니라, 많은 새끼 고양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어미 고양이들도 여럿이고 배농사에 막심한 피해를 주는 까마귀, 까치들이 많습니다.
너무 피해가 심해 형제라 부르고 싶지 않지만 하느님의 배려로 먹고 살 수 있을만큼의 수확은 있으리라 믿습니다. 까마귀, 까치만이 아니라 우거진 숲 덕분에 이름 모를 새도 참 많습니다.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수직의 하늘문에 이어 이웃을 향한 수평의 문도 완전히 닫혔습니다. 자기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의 모습이니 실상 이런 고립단절이 지옥입니다. 땅에 보물을 쌓고 흡족해 하는 부자의 기도가 아닌 독백을 들어보세요.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러고 나서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정말 죽음을 기억했더라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랑의 나눔과 섬김의 삶에 전념했더라면 이런 땅에 보물을 쌓는 어리석은 삶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이런 부자는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요즘 제 즐거움은 산책중 맑게 흐르는 불암산 계곡물 구경입니다. 언젠가는 마르겠지만 마음의 계곡물은 늘 맑게 노래하며 흘렀으면 좋겠습니다. 늘 하느님 꿈을 지니고, 찬양의 삶, 죽음을 기억하는 삶,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랑의 나눔과 섬김의 삶에 한결같이 충실할 때 이런 맑게 흐르는 시냇물같은 인생 여정일 것입니다. 매일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땅은 당신이 내신 열매로 가득하옵니다. 당신은 땅에서 양식을 거두게 하시고, 인간의 마음 흥겹게 하는 술을 주시나이다.”(시편104,13-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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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오늘은 조상님들을 기억하고 가족과 이웃들이 함께 사랑과 정을 나누는 '한가위 명절'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크고 둥근 보름달만큼이나 조상님들을 생각하고, 가족과 이웃을 생각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크고 둥글게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사랑과 정(情)이 함께하는 추석 명절 잘 보내시길 기도합니다.
추석 명절에 들려오는 복음(루카12,15-21)은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탐욕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인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약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이 세상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보다 앞서 가신 우리 조상님들의 모습을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된 사실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12,20)
분명하게 확인된 사실을 망각하면서 한없는 탐욕을 부리는 자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고생 끝에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묵시14,13)
추석 명절인 오늘 우리는 조상님들을 기억하며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들은 합동위령미사를 드립니다. 모두가 조상님들이 베풀어 주신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드리면서,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살아있는 우리도 장차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지금부터 잘 준비합시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맞이하게 될지 모를 죽음을 기억하면서, 그 죽음을 늘 깨어 준비합시다!
준비의 가장 큰 걸림돌인 탐욕을 내려놓고, 창고에 쌓아 둔 것들이 가난한 이들과 필요한 곳으로 잘 전해져서 더불어 함께 넉넉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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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0f5aT6EfxZ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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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 15)
잠시 멈춰
추석 보름달을
바라보자.
세상이 바뀌어도
생명의 고향은
항시 존재한다.
추석명절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다.
삶의 의미는
생명의 기쁨이다.
생명의 기쁨은
모두가 하나같이
소중한 생명의
기쁨들이다.
사람의 삶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생명 존중은
생명 중심이다.
생명이 있기에
행복과
여러 가치들을
추구하며 살 수 있다.
다시 우리의 삶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깨닫는 시간이다.
생명의 기쁨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사람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는
기쁨이다.
진정한 사람
정직한 사람으로
사는 기쁨이다.
고향을 고향으로
여길 줄 알며
생명을 생명으로
여길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과 자연이
하느님의
질서 안에서
서로 상생하는
것이다.
욕망이 빚어내는
욕망의 결과물들은
참으로 우리를
아프게한다.
고향을 찾는
추석 명절이
참으로 큰
가슴속 울림이
되는 것은
우리 삶의 역사가
고스란히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기쁨은
마음을 만나는
기쁨이다.
어머니의 모습을
만나고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만나는
마음의
만남이다.
모든 생명은
저마다
고유한 역사가
있다.
가장 소중한
사랑의 마음을
만나는
추석명절이길
기도드린다.
우리의 그리움을
찾고 만나는
시간이다.
사람의 생명은
그리운 마음에
달려 있다.
그리움을 잃어가는
우리들 삶이다.
마음을
되찾아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리운 이들을
그리며 진심으로
기도하는
마음의 고향
마음의 추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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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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