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구호 제2권
지은이: 사마달
- 차 례 -
제 11 장 영웅무반, 그리고 창천영웅
제 12 장 대남아(大男兒)!
제 13 장 최후의 살인명령
제 14 장 피에는 피
제 15 장 피가 마른다는 의미
제 16 장 남김없이 모조리
제 17 장 창궁용검회
제 18 장 매화상인
제 19 장 비폭검환
제 20 장 폭풍의 조짐
제 11 장 영웅무반, 그리고 창천영웅
1
백무옥이 떠났어도 생사의축은 난향의 뛰어난 의술로 인해 그런대로 별 무리없이 돌아갔다.
동이 터오기 시작하는 이른 아침.
퍼억...... 퍽!
막리격은 언제나 그렇듯 아침부터 도끼질하기에 바빴다. 일자로 세워진 장작은 힘들이지 않
고 내려치는 도끼에 비명을 지르며 한 순간 두 동강이 났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문득 막리격은 도끼질을 멈췄다.
'헛......!'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감각은 속일 수 없었다.
'고수!'
느껴지는 세 개의 커다란 기도, 그것은 고수만이 가질 수 있는 기운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쉬익―!
세 줄기 바람이 불었다. 다음 순간 세 명의 노인이 그의 전면으로 먼지처럼 떨어져 내렸다.
백염(白髥)을 길게 늘어뜨린 팔순 정도 되어 보이는 노인들이었다. 정광을 발하는 눈, 툭 불
거져 나온 태양혈, 한눈에 보아도 고수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막리격은 도끼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정기로와 보이는 눈빛을 볼 때 세 노인은 마도인
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는 일은 항상 있는 법, 그도 그것에 대한 대비를 해야만
했다.
"무슨 일로 이곳을 찾으셨소?"
한 노인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생사의축이 바로 이곳인가?"
"그렇소만......."
노인은 막리격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대가 야수낭객 막리격인가? 얼마전에 생사낭중에게 굴복해 종이 되었다던?"
자존심을 긁었다. 그러나 그것이 수치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막리격은 항상 백무옥 같은 주인을 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렇소."
뒤쪽의 한 노인이 말을 받았다.
"소문이 맞군. 생사낭중...... 병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주어 달리 활불이라 불리는 자, 또한 그
대같은 고수를 굴복시킨 것으로 보아 숨은 고수임이 틀림없다."
앞쪽의 노인은 막리격을 바라보며 물었다.
"생사낭중은 이곳에 있는가?"
막리격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들을 살폈다.
"지금은 출타중이시오."
"언제쯤 돌아오는가?"
"모르오. 한 달이 걸릴 지 일년이 걸릴 지......."
앞선 노인이 뒤쪽의 두 노인에게 고개를 돌리며 눈짓을 보냈다. 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군. 부인이라도 데려가는 수밖에."
막리격의 얼굴이 구겨졌다.
"뭣이, 감히 주모님을......? 네놈들의 정체는 무엇이냐?"
막리격은 노성을 터뜨렸다. 도끼를 든 것은 어떤 경우에도 난향을 내어 줄 수 없다는 뜻이
었다.
앞선 노인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 침착이라는 것은 막리격을 안중에도 안둔다는 것이다.
"이 야수는 내가 맡을테니 그대들은 그의 부인을 데려오시오!"
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막리격은 발끈하며 도끼를 휘둘렀다.
"어딜! 이놈들 내가 여기 있는 이상 움직일 생각은 버려라!"
"네 놈의 상대는 바로 나다!"
노인은 양손을 휘두르며 막리격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막리격은 황급히 노인의 공격을 피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바로 그 찰나의 순간 두 노인은 막리격의 저지선을 벗어나 난향의 처소로 빠르게 날아갔다.
"허헉......! 이놈들 생사의축이 네놈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거늘...... 우리를 핍박하다니......!"
막리격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핏발선 그의 눈은 살기로 점철되었다.
휘잉......!
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흡혈낭마도법!
비록 칼로 시전한 것이 아니어서 느리긴 했으나 도끼가 주는 육중한 무게는 능히 산 하나를
가르고도 남았다.
노인은 흠칫 뒤로 물러서며 막리격의 도끼를 피했다.
"흠......!"
막리격은 침음성을 토했다. 노인이 도끼를 피하면서 자연스럽게 앞으로 다가오더니 한 손을
뻗어 도끼날을 잡아버린 것이다.
"놈! 네놈은 내 상대가 아니다!"
막리격이 주춤하는 순간 노인의 좌수가 다시 뻗어와 막리격의 몸을 격타했다.
타다다닥......!
"크헉......!"
막리격은 상처입은 야수의 신음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다. 노인이 몸의 혈도
를 점혈한 것이다.
"나쁜 뜻은 없었다. 생사낭중은 우리 백팔무반(百八武班)의 한 명으로 임명된터...... 영광으로
알아라!"
"백팔무반이 어느 개뼈다귀 이름이냐?"
막리격이 승복하지 못하고 버럭 노성을 터뜨릴 때였다.
휘익......!
난향의 처소로 날아갔던 두 명의 노인이 날아왔다.
척......!
지면에 착지한 한 명의 노인의 어깨 위에는 난향이 혈도가 제압당한 채 얹혀있었다.
"주...... 주모님!"
막리격이 피를 토할 것 같은 외침을 토했다. 모든 것이 한 순간이었다. 막리격이 제압되고
난향을 납치하기까지는, 막리격은 경악에 앞서 차라리 어이가 없었다.
막리격을 제압했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걱정 할 것 없다. 생사낭중이 우리를 찾아온다면 돌려 줄터, 그가 돌아오면 이 첩지를 전해
라."
노인은 품 속에서 한 장의 첩지를 꺼내 막리격에게 던졌다.
"삼 일 만 고생한다면 자동적으로 혈도가 풀릴 것이다."
노인이 몸을 돌려 허공으로 솟구쳐오르자 나머지 두 명의 노인도 그를 따랐다.
혈도가 제압된 막리격은 울분을 참지 못했다.
"크으......! 영웅무반! 이놈들 두고보자. 나를 살려둔 대가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마."
강호에 새로운 풍운이 일기 시작했다.
영웅무반!
이 생소한 집단에서 파견된 절정 고수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이며 왜? 난향을 납치하면서까
지 백무옥이 영웅무반으로 찾아오길 강요하는가?
2
야수적인 본능을 지닌 사내, 막리격.
그는 어려서부터 늑대의 젖을 먹고 야수들의 틈에서 자라왔다.
때문에 야수적인 기질과 본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강호가 좁다하고 종횡무진(縱橫無盡) 누볐던 그도 이렇게 한 번에 많은 거리를 뛰어다닌 적
은 없었다.
장안에서 서장까지 다시 서장에서 중원 곳곳의 산을 누비며 한시도 쉴틈없이 뛰어다녔다.
컹...... 컹!
그의 뒤를 쫓는 것은 세 마리의 늑대였다.
보통 늑대보다 두 배의 크기는 될 듯싶은 늑대는 시퍼렇게 날이선 검처럼 예리한 느낌을 주
었다.
이름하여 삼낭왕(三狼王)이라 불리는 늑대였다.
놈들은 특이한 습성을 가졌다.
늑대들은 무리를 지어 산다. 그 무리는 가장 힘센 한 마리의 늑대가 우두머리가 되어 이끄
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그런데 막리격의 뒤를 쫓고 있는 세 마리의 늑대, 그 늑대들은 세 마리가 공동으로 무리를
이끈다.
실제로 많은 강호인들의 눈에 늑대 세 마리가 무리를 이끄는 것이 목격되어 그것은 기정 사
실화 된 얘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었다.
놈들도 늑대인 바 가장 힘센 늑대가 그들을 이끈다.
그 늑대가 바로 야수적인 본능을 지닌 사내, 바로 막리격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모르는 것이
리라.
과거 늑대무리와 혈전을 벌일 때, 늑대들 마저도 그의 흉폭함에 굴복해 그의 말을 따르게
된 것이다.
"힘내자, 이제 다와간다."
막리격이 외치며 달리자 늑대들은 알아들었다는 듯 더욱 세차게 산길을 헤쳐나갔다.
그런 막리격의 손에는 백무옥이 평소에 입었던 백의(白衣)가 들려져 있었다.
* * *
첩첩산중(疊疊山中).
그야말로 하늘이 손바닥만하게 올려다 보이는 깊고 험준한 산곡이었다. 이쯤되면 방향도 헤
아리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 험난한 산 속에서 혼자 천길 절벽을 기어오르는 자가 있었다.
백무옥이었다.
나는 새도 넘나들기 어려운 이 험악한 절벽,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절벽과 첨예(尖銳) 한 산
봉 정상을 오가며 약초를 캐고 있었다.
그것은 정상적인 인간이 할 노릇이 아니었다.
같은 종류의 약초를 캐고자 가까운 곳에 있는 약초를 두고 아슬아슬한 절벽 꼭대기를 필사
적으로 오를 필요는 없었다.
천길 낭떨어지도 개의치 않고 내려가는 그의 모습은 죽기로 작정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무
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자결할 명분이 없어 우연한 사고로 자신의 생을 마감해버리려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일
것이다.
그가 걸친 것은 옷이라 할 수 없었다.
온통 찢기고 헤어져 누더기 조각과 같았다.
머리는 완전히 풀어 헤쳐진 봉두난발(蓬頭亂髮)이요, 얼굴은 땀과 흙먼지로 뒤덮혀 제대로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더욱이 온 몸 여기저기에선 찢기고 긁힌 상처들로 피가 마르지 않았
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눈은 무섭게 번들거렸다.
무언가를 찾으려 하는 눈빛은 결코 아니었다. 무언가를 잊기 위해 발악하는 눈빛이 그럴 것
이다.
여명이 터오는 검푸레한 안개 속에서도 그는 반 미친 야수처럼 절벽 위며 계곡 속을 헤집고
다녔다.
그것이 그의 하루의 시작이었고, 자신의 몸을 학대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심
마(心魔)와의 처절한 싸움이었다.
* * *
암동(暗洞) 속.
어느 야수가 파헤쳐 놓은 듯싶은 비좁은 동굴 속이었다.
하늘은 온통 시커먼 구름을 휘몰고 물러나는 어둠의 뒤켠으로 불그레한 기운이 조금씩 짙어
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엄숙하게 정좌한 백무옥의 모습은 마치 석상(石像)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몸은 몸 밖으로 분출하는 용암같은 열기로 인해 온통 흥건한 땀으로 적셔
져 있었다.
불끈거리는 힘줄은 이따금 그의 팔뚝과 목줄기로 돌출되었다.
순간 폭발할 듯한 무서운 경련이 그의 몸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분출을 앞둔 화산처
럼 격렬한 떨림이었다.
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동시에 울혈로 시뻘겋게 달구어졌다가 푸르죽죽하게 죽
어갔다.
백무옥은 꽈악!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대로 장원에 돌아갈 수 없다. 백색마마공의 기운이 나를 장악하고 있다...... 그것을 내 의
지로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백색마마공의 기운, 그것이 그를 이 깊은 산중을 헤매게 하는 이유였다.
그는 지금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도저히 억제할 수 없이 수시로 들끓어 오르는 기운, 음욕과 살기와의 싸움이었다.
그것은 시도 때도 없이 떠올랐다.
아무리 필사적으로 짓누르려해도 그의 뇌리를 휩쓸며 넘나들었다.
'이겨내야 한다......! 이겨내지 못하면 나는 악마가 된다.'
지금껏 이토록 처절한 싸움을 한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상대로 한 싸움은 어렵지 않다.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악해 한 순간 쳐죽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상대로 한 싸움은 그렇지 않았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요, 급기야 자신이 죽어야 끝날 수 있는 싸움이었다. 또한 죽는다 해도
자기 자신을 이긴 것이 아닌 싸움을 회피한 실패작의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의 허벅지며 온 몸은 참혹한 피멍으로 얼룩져 있었다.
색욕이 치밀어 오를 때마다 살점을 집어 뜯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음욕은 사라지지 않았다. 온갖의 무공구결을 떠올려도 그것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기를 쓸수록, 오히려 더욱 생생해질 뿐이었다.
'오오...... 신이시여!'
이 산중에 틀어박혀 그는 얼마나 신을 부르짖었는지 모른다.
그런 후에 여지 없이 자기최면(自己催眠)을 걸었다.
모든 것을 망각해야 한다고...... 악마의 마공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려야 한다고.......
그가 이 산야에 머문 지 보름째.
그는 이미 자신을 절제하기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환희성라마가 어이해 그토록 많은 여인들을 필요로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도 엄청난 색욕의 번뇌에 시달렸을 것이다. 지금의 자신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넘겨준 뒤 한 줌 먼지가 되어 허공을 떠다닐 것이다.
백무옥은 자유롭게 평화의 안식처를 찾아 허공을 떠돌고 있을 환희성라마가 어쩌면 부러운
지도 몰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백무옥은 흥건하게 젖은 땀 속에서 문득 눈을 떴다. 돌연 암동 밖으로부
터 모발이 곤두설 듯한 야수적인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이 깊은 산중에 누가......?'
얼마 안있어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암동으로 들어섰다.
그 찰나의 순간 백무옥의 손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움직였다.
전보다 두 배는 빠른 반응이었다.
그러나 백무옥의 손은 상대의 심장을 파고들려는 순간 멈추고 말았다.
"너...... 너는......!"
야수적인 기질을 풍기는 상대는 바로 짐승이 아닌 막리격이었다.
백무옥은 손을 거두며 나직하게 말했다.
"어이해 이곳까지?"
막리격은 감격어린 표정으로 그에게 넙죽 절을 했다.
"주인님을 찾아 새외까지...... 십수만 리를 헤맸습니다."
백무옥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리격의 손에 들려져 있는 자신의 옷과, 또 뒤쪽에서 서성거리는 세 마리의 거대한 늑대들
그것만으로도 그는 모든 상황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막리격은 늑대들과 함께 자신의 냄새를 쫓아 이곳까지 찾아 온것이었다.
백무옥의 뇌리에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막리격이 수십만 리나 헤매며 자신을 찾을
이유라고는 생사의축에 위급한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생사의축에 무슨 일이라도?"
막리격은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머리를 조아렸다.
"속하를 죽여 주십시오."
그는 머리를 길게 내밀었다. 빨리 죽여달라는 뜻이었다.
"무슨 일인지 알고나 죽여야 할게 아니냐?"
"주모님을...... 주모님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백무옥의 얼굴이 굳어졌다.
"주인님의 명을 이행하지 못했으니 자결로써 사죄를......."
막리격이 바닥에 머리를 세차게 내려칠 찰나 백무옥의 손이 움직여 그것을 막았다.
"사연을 말하고 죽어도 늦지 않다."
막리격은 통분(痛忿)을 금치 못하며 입을 열었다.
"주모님이 괴무리들에게 납치되셨습니다."
"......!"
"놈들은 하나같이 가공할 무예를 지닌 자들로...... 속하는 죽음으로써 끝까지 맞서려 했으나
놈들은 저를 살려두며 속하에게 첩지 하나를 주고 사라졌습니다."
그는 품 속에서 꼬깃꼬깃하게 접은 첩지를 내밀었다. 그동안 막리격이 깊이 간직하느라 손
떼를 묻힌 첩지였다.
― 생사낭중 보아라.
네가 없어 부인을 대신 데려간다.
부인을 찾고 싶으면 영웅장(英雄莊)으로 와라.
영웅무반(英雄武盤) 서(書).
'이런 집단도 있었는가?'
영웅무반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막리격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도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분개(憤慨)하고 있는 것이다.
백무옥은 내심 생각했다.
'강호에서 막리격을 당해낼 자는 극히 드물다. 그런 막리격이 혀를 내두를 정도라면......?'
그들의 실력이 가공할 정도란 뜻이 된다.
막리격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주인님...... 제가 주모님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손을 써보았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대신......
그 자들의 영웅장이 어디 있는가를 알아냈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무옥의 말이 이어졌다.
"가자."
그 순간 백무옥의 몸은 이미 이십여 장 밖으로 쏘아졌다.
3
십만대산(十萬大山)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남방에 자리 잡은 거악(巨嶽).
북방의 태행산(太行山)이 가공스러운 산세로 중원을 압도한다면 십만대산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산세로 대지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십만대산의 깊은 산중.
사방이 절경이 뛰어난 산봉들로 둘러싸여 있는 중앙에는 상당히 넓은 분지에 고루거각(高樓
巨閣)들이 늘어 서 있었다.
경계를 서는, 아니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
엄중한 경계가 없어도 외부인이 그 장원에 출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변의 엄청나게 깔려 있는 기관매복과 진식들만으로도 이곳은 나는 새도 출입의 허용이 않
되는 철옹성(鐵瓮城)인 것이다.
오늘 밤따라 달빛조차 자취를 감추었다.
하늘은 먹빛인 채 구름에 뒤덮혀 있고, 이따금 밤바람만이 한 차례식 장원을 훑고 지나갈
뿐 사위는 더없이 적막하고 고요했다.
― 그들은 최근에 강호에 등장한 집단입니다.
근자에 들어 수많은 황금을 뿌리며 강호에서 뛰어난 인재들을 포섭해 들이고 있습니다.
영웅무반을 이끄는 자는 창천영웅(蒼天英雄)이라 불리는 자로 그에 대하여 알려진 것이라고
는 전무하다 할 수 있습니다.
백무옥은 막리격이 알아낸 정보를 머릿속에 되새기며 내심 생각했다.
'연륜이나 경험으로 치자면 나는 햇병아리 일개 의원에 불과하다. 그토록 황금이 많은 자들
이라면 천하에 내노라 하는 명의 들을 수도 없이 불러다 쓸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 그는 명의로 알려진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장안 일대에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어 활불이라는 칭송만이 있을 뿐이었
다.
그들은 백무옥을 알고 부를 수 있는 타당한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난향을 납
치까지 하면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백무옥은 장원으로 몸을 날렸다. 어차피 그들을 만나면 의문은 자연스럽게 풀어질테니.
"일보 이상 떨어지면 안된다."
막리격은 고개를 끄덕이며 백무옥의 뒤를 바짝 쫓아 몸을 날렸다.
기관은 발동되지 않았다.
그런 기관은 백무옥의 움직임에 아무 지장도 주지 않았다.
과거 그것보다 더한 기관진식이며 함정을 능수능란하게 돌파했던 그였다. 현재 그의 발목을
붙들 수 있는 기관진식이라는 것은 없다고 보아야 했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에는 두 사람의 몸은 이미 장원 안으로 침투한 후였다.
막리격이 전음으로 말했다.
'휴우...... 주인님이 아니었다면 기관진식을 헤치고 이렇게 간단하게 들어올 수는 없었을 것
입니다.'
그는 주위를 거만하게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는 주인님 덕을 보았지만 냄새를 맡는 건 제가 천하제일입니다."
백무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중에 있는 자신을 찾아낸 막리격이었다. 하물며 이런 장원에
잡혀 있는 난향을 찾는 일은 그에게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주모님이 어디 계시는지 제가 찾아 내겠습니다."
막리격은 민첩하게 앞장섰다. 흡사 한 줄기 바람처럼 빠른 몸놀림이었다.
백무옥도 그를 따라 빠르게 몸을 날렸다. 그는 그런 와중에도 장원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매서운 눈초리들을 감지할 수 있었다. 비록 자신들은 발각되지 않았지만 좀처럼 볼 수 없은
절정고수들의 눈초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와호잠룡(臥虎潛龍)의 요새...... 대체 영웅무반의 능력이 어느정도 길래 이토록 뛰
어난 고수들이 은잠(隱潛)해 있단 말인가?'
난향의 체취와 기운을 기억해 그녀를 찾아가고 있는 막리격의 움직임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렇게 일다경(一茶頃)정도 흘렀을 때였다.
'저곳입니다.'
막리격은 하나의 전각 앞에서 멈칫거리며 전음을 날렸다.
막리격이 가리킨 건물은 이 곳에 있는 많은 전각들 중 가장 크고 웅대한 군청색 건물이었
다.
막리격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이곳이 확실합니다."
백무옥은 혹시 모를 암습에 대비해 주변의 분위기를 살폈다. 아무런 움직임도,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전각 안으로 몸을 날리려 할 때였다.
휘익......! 펑!
빛이 번쩍이며 느닷없이 허공으로 폭죽이 터져 올랐다. 동시에 사위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전각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 나오고 있었다.
백무옥과 막리격은 흠칫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때였다.
짝! 짝! 짝!
박수소리와 함께 침착한 음성이 어둠 속을 갈랐다.
"뉘신지 모르되 야밤에 본원(本園)을 방문해 주신 것을 환영하외다!"
백무옥의 표정은 이런 위기 속에서도 무심했다.
'실수다. 경비가 허술하다는 것을 느꼈을 때부터 상대는 우리의 침입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챘어야 했다.'
4
어림잡아 백여 명이 넘는 무사들이 청색전각에서 한 사람을 에워싸고 걸어나왔다.
하나같이 불쑥 튀어나온 태양혈을 접어두고라도 백무옥이 그들의 존재를 감지 못했다는 점
만으로도 절정고수라 불리기에 충분한 인물들이었다.
백무옥의 메마른 시선은 그들이 에워싼 중앙의 한 사람에게 가 있었다. 그가 박수를 친 자
였다.
크지 않은 몸집에 포진한 고수들에 비해 턱없이 어려 보이는 자였다.
스물 둘 셋이나 되었을까?
청색 두건을 둘러 머리를 단정하게 묶었고, 이목구비는 조각을 해놓은 듯 뚜렷한 윤곽을 갖
춰 흡사 여인과 같은 아름다움마저 느끼게 하는 사내였다. 또한 일신에 후광처럼 드리워진
고고한 기도는 감히 범접치 못할 위엄(威嚴)을 준다.
약간 유약해 보이는 몸이 다소 흠일 뿐,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사내였다.
백무옥을 바라보는 청년의 눈빛은 차갑고 치밀했다.
성격과 행동에 빈틈이 없다는 증거다.
백무옥은 내심 생각했다.
'한 사람의 호위무사가 저렇게 많다는 것은 저자가 창천영웅란 뜻. 의외다. 저렇듯 젊은 인
물이 창천영웅이라니.......'
이때 청년을 둘러싸고 있던 인물 중 맨 앞선 계피학발(鷄皮鶴髮)의 노인의 입이 달싹였다.
청년에게 전음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청년은 다소 흠칫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가 바로 생사낭중이라는 인물인가?"
막리격이 손가락으로 노인을 가리키며 다급하게 말했다.
"바로 저 늙은이가 주모님을 납치해 간 무리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노인은 노호(怒號)를 터뜨렸다.
"발칙한 자! 뉘 안전이라고 감히 뻣뻣이 섰는게냐? 어서 예를 취하지 못할까?"
점입가경(漸入佳境)이 따로 없었다.
납치한 사람을 찾으러온 사람에게 먼저 예를 취하라니...... 그렇지 않아도 분노한 막리격의
눈에 시뻘건 핏발이 섰다.
청년은 노인을 가볍게 제지했다.
"놔두시오. 강호인들은 원래 허리가 뻣뻣한 법이오."
청년이 말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백여 명에 이르는 무사들이 그림자처럼 그의 곁으로 좁혀 들었다.
완벽한 호위였다.
한 눈에 보아도 한치의 허(虛)를 보이지 않는 호위였다.
호위무사들의 모습에 백무옥은 의구심이 솟구쳤다.
'목숨을 걸고도 남을 듯한 비장함, 더하여 하늘을 대해는 듯한 숭엄함까지. 창천영웅이란 자
가 어떤 인물이기에......?'
이때 청년이 입을 열었다.
"생사낭중, 그대가 뛰어난 무공까지 지닌 줄은 몰랐군. 영웅무반의 일원이 됨에 있어서는 금
상첨화(錦上添花)다."
백무옥은 묵묵히 청년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엔 자객의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놈이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일 때 일수에 제압해 그를 인질로 삼는 방법밖에 없었다.
청년의 말은 계속 되었다.
"본인이 바로 영웅무반의 수반(首班) 창천영웅이다. 도합 백팔 인의 영웅을 모아 영웅무반을
만들고자 하는 바, 그 중 일원으로 선택된 것을 축하하노라."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었다.
좋게 처리할 수도 있는 일을 왜 사람을 납치까지 하면서 크게 벌여놓았는가?
'내가 거부할 것을 알고 미리 난향을 납치해왔단 말인가?'
백무옥은 지극히 간결하게 말했다.
"부인을 돌려주시오."
이곳에 들어온 목적은 그것 뿐 더 이상 어떤 일에도 관여하고 싶지 않은 그였다.
"시험을 통과한다면 돌려주겠노라."
"시험......?"
"가보면 알 것이다."
청년이 몸을 돌리기가 무섭게 호위무사들이 그림자처럼 그를 에워싸며 움직였다.
백무옥은 하는 수 없이 그들 뒤를 따랐다.
칼자루는 상대가 쥐고 있었다. 난향을 돌려받기 위해선 저들의 제안을 무작정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휘황찬란하게 꾸며진 실내는 흡사 여인의 방처럼 은은한 향기가 배어 나왔다.
한쪽에 마련된 침상에는 늙은 노인 한 명이 누워 있었다.
청년은 손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본좌의 삼대비위(三大臂衛) 가운데 한 사람이고 어릴 때부터 글을 가르친 양부(養父)
와 같은 인물이다."
백무옥은 노인을 살펴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었다.
청년은 실내 한쪽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의문에 괴질에 걸려 너를 부른 것이다. 그를 치료하는 것으로 너에 대한 시험을 대신하겠
다."
괜한 시비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
그들은 적어도 마도의 인물이 아니었다. 이정도 세력의 마도집단이면 일자살맹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백무옥은 병이든 노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노인의 쭈글쭈글한 얼굴은 온통 자흑색이었다. 게다가 얼굴 곳곳에 피고름이 맺혀 있는 처
참한 몰골이었다.
백무옥은 몇군데 진맥(診脈)을 짚었다.
'임독양맥 가운데 각기 하나의 혈도가 막혀있다.'
그의 의술로써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미세한 지흔이 혈도 위에 나 있다는 것
이었다.
손을 뗀 백무옥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진짜 나를 시험하려 하는군."
"......!"
의자에 앉아있던 청년의 미간이 가늘게 꿈틀했다.
"이 사람은 아픈게 아니라 스스로 혈도를 폐쇄하여 아픈 체했고, 또한 독을 뿌려 피고름이
나오게 위장한 것이오."
순간 청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 역시 신의(神醫)라는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었도다!"
그는 침상을 향해 말했다.
"그만 일어나시오. 백호무왕(白虎武王), 수고했소이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침상 위의 노인이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혈도를 풀고 품
속에서 약을 꺼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어 청년에게 정중하게 절을 하고 밖으로 사라졌다.
백무옥은 청년을 응시했다.
"이젠 부인을 돌려주시오."
청년은 한 동안 묵묵히 그를 바라보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충성을 맹세한다면 부인을 무사히 돌려주겠다."
백무옥의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맺혔다.
"위협이오?"
"현실을 직시해라, 칼자루는 본좌의 손에 있다."
백무옥은 내심 염두를 굴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다. 청년을 둘러싼 호위무사들의 검만 피할 수 있다면 간단히 청년을 제압
할 수 있었다.
'검이 뽑혀지기 전에 놈을 제압하면 가능한 일!'
한 달 전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그의 몸에는 환희성라마가 주입시킨 내공과 백색
마마공이라는 절세무공이 있었다.
시험할 가치는 있었다. 어차피 일할의 성공확률에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 자객이 아니었던
가?
청년이 말했다.
"본좌의 수하들은 하나같이 모두 일당 천의 고수, 너를 제압코자 했다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그것은 백무옥 자신도 인정하는 바였다.
실내에서 청년을 호위하고 있는 무사는 이십여 명, 그 중 누구 하나도 백무옥 자신이 장담
할 수 없을 만큼 절정 고수임이 틀림없었다.
청년은 단호하게 말했다.
"영웅무반의 일원이 되고자 맹세하고 본좌에게 예를 취하라. 그렇다면 네 부인을 만나게 해
주겠다."
백무옥은 호흡을 조절했다.
"영웅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곧 부귀영화가 보장됨을 말하는 것......."
"거절한다면?"
그 말에 청년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이어 그의 입술 끝에서 싸늘한 냉소가 피어올랐다.
"이곳에서 뼈를 묻을 수밖에 없다!"
백무옥은 천천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
"이곳의 비밀은 감히 누구도 가지고 나갈 수 없다."
청년은 손을 들어 올렸다.
"손이 내려지는 순간, 네 부인은 죽게 될 것이다."
돌연 백무옥이 희미하게 웃었다.
청년이 반문했다.
"왜 웃지? 네 부인을 죽인다고 했거늘......?"
이내 청년의 입에서 가느다란 외마디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그가 마주한 백무옥의 눈.
백무옥의 눈이 돌연 모든 영혼을 하얗게 얼려 버릴 듯한 투명한 백색으로 변한 것이다.
의문을 남기는 시선, 그것은 머리의 판단을 더디게 하는 것, 그만큼 동작이 늦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대신할 목숨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슷......!
순간 백무옥의 몸이 움직였다. 아니 움직였다 싶은 순간 이미 삼장이나 미끄러져 들었다.
"암습이다!"
"막아랏!"
이십여 명의 무사들의 반응은 빨랐다. 번개같이 발검(拔劍)한 순간 백무옥을 향해 수십차례
검을 내리그었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엄청나게 늦어 있었다.
분명 그들은 백무옥을 향해 엄청난 기세로 검을 내리그었지만, 그러나 그 순간 백무옥의 몸
은 한 줄기 연기처럼 꺼져 버렸다.
동시에 희고 투명해 보이는 손 하나가 어느새 청년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기가막힌 일이었다.
무사들은 눈 앞의 정경에 넋이 빠진 얼굴이었다.
적지 않은 생을 살고 적지 않은 격전을 치러 보았던 그들도 지금껏 이런 상황을 본 적이 없
었다.
더욱이 저런 인물이 강호에 존재한다는 말조차 들어보지도 못했다.
백무옥이 냉소를 날렸다.
"무공이 강한 것과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너는 나를 너무 과소
평가 했다."
청년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어...... 어이해 내가 움직일 수 없었지?"
그는 불신에 찬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조금전 너의 그 눈빛은......?"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그는 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호...... 혹시 전설상의 마공인 백색마안을 익히기라도......?"
백무옥은 희미하게 웃었다.
"박학다식(博學多識)하군. 허나 네년은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의자에 앉아있는 청년은 여인이었다.
백무옥의 손이 닿아있는 목에는 남자가 가지고 있어야 할 볼록한 성대(聲帶)가 없었다.
백무옥은 이미 청년이 여자임을 간파하고 백색마안공을 써 그녀의 행동을 제압한 것이었다.
"누구나 자유를 원하지. 나에게 강요하는 자는 누구도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백무옥의 투명한 수도(手刀)에 의해 여인의 가느다란 목에 미세한 혈선이 그어질려
는 찰나였다.
"아...... 안돼요!"
느닷없이 자지러질 듯한 여인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백무옥은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익숙한 음성, 그것은 난향의 음성이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채 부르짖었다.
"안돼요! 그분을 놔주세요."
"난향......."
"상공께서는 그분을 해하시면 않됩니다."
난향은 안타까움에 몸을 떨었다.
백무옥의 얼굴이 굳어졌다.
"오해하지 마세요. 단지...... 저분이 저에게 해를 입힌 것도 없고 또한 너무도 정중하게 대해
주었는지라......."
백무옥은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고 물러났다. 난향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상황이 달라지더
라도 그는 언제든지 그녀를 인질로 잡을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백무옥이 물러나자 호위무사들이 기세등등하게 백무옥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만! 됐다."
남장여인이 가볍게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허나...... 저자는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자로......."
무사 중 한 명이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남장여인을 향해 말했다.
여인의 검미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닥쳐라! 감히 누구의 안전이라고 명령에 토를 다느냐?"
그녀의 위엄서린 말 한 마디에 무사들은 두 말없이 물러났다.
그녀는 서릿발 같은 차가운 눈빛으로 백무옥을 쏘아보았다.
"생사낭중이 이리도 뛰어난 솜씨를 지닌 자인 줄 알았다면 방심하지 않았을테고 다른 방법
으로 그대를 초청했을 것이다."
백무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초식이나 내공으로는 그대가 나를 능가할지 모르오. 허나 어떤 방법을 쓴다해도 결과는 마
찬가지였을 것이오."
남장여인이 반문했다.
"왜?"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소?"
남장여인은 멈칫했다. 이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죽여 보았소."
백무옥은 한 마디 덧붙이고 싶었다.
그것도 나보다 강한 자만을 죽였노라고...... 그들이 죽으면서 했던 한결같았던 말...... 그것은
당신이 방금 한 말과 같은 것이었다고.......
남장여인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명심하시오. 진정으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면, 결코 상대를 경시하는 실수를 해선 않된
다는 것을......."
수단에서나 말에서 모두 참담한 패배를 느낀 남장여인은 상체를 휘청거렸다.
백무옥은 난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나와 내 부인을 핍박한다면 그대의 목은 보장할 수가 없소."
상심에 휩싸인 남장여인은 일언반구(一言半句)도 하지 못했다.
난향은 백무옥을 만류했다.
"저분은 나를 친자매처럼 보살펴 주었어요. 그러니 제발...... 저분의 가슴에 못박는 말씀
은......."
난향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백무옥은 난향을 부축하고 돌아서며 말했다.
"만에 하나 소저께서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자 인술이 필요해서 나를 부른다면 한 번은 돕겠
소. 내 부인을 편히 보살펴준 대가요."
난향은 잠시 돌아서서 남장여인을 향해 공손히 절을 올렸다.
"저는 이제 아쉬운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잠시후 난향이 백무옥을 따라 나가자 막리격이 주춤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오래도록 남장여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강호엔 진정한 사내가 없다고 과신한게 실수였어."
그녀는 패배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꼈다.
"강호에 뜻을 세우는 것보다 저 자를 먼저 꺾는 데 우선의 목표를 두겠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비장하게 내뱉았다.
"생사낭중! 그를 가장 비참하게 패배시키겠노라! 그것만이 이 순간부터 화란(花蘭)의 목표가
될 것이다!"
화란!
달리 황궁제일녀(皇宮第一女) 화란군주(花蘭君主)라 불린다.
그녀는 바로 당금황제의 단 하나 뿐인 누이동생 화란군주였던 것이다.
첫댓글 즐감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