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장 창궁용검회
1
포구에는 많은 무사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모두 창궁용검회의 무사들임에 그 위세는 두말
할 것 없이 높았다.
그들은 원을 형성해 한 사내를 둘러쌌다.
원의 중심점에 선 한 사내.
사내의 모습은 가히 꼴불견이 아닐 수 없었다.
술은 얼마나 취했는지 숨을 내쉴 때마다 썩은 술냄새를 푹푹! 발하고 머리는 봉두난발(蓬頭
亂髮)에 걸친 의복은 또한 누렇게 때가 찌든 허름한 것으로 꼬락서니가 거지 중에도 그런
상거지가 없었다.
그러나 봉두난발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시커먼 얼굴, 그 얼굴을 자세히 본다면 더할 나
위없이 준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그렇다. 그는 다름아닌 백무옥이었다.
백무옥의 걸음은 갈지자(之),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배에 오르고자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막는 것은 창궁용검회의 무사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이런 더러운 거지가 군산에
가야할 이유가 성립이 되지 않았다.
백무옥은 그들이 계속 가로막자 화가 나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것봐! 그대들은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막는거냐?"
한 무사가 같잖다는 듯이 냉소를 던졌다.
"흥! 거지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사라지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백무옥은 그들의 태도에 분노했는지 눈을 번뜩거렸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머지않아 창궁용검회에서 적어도 총순찰까지 승진할 몸이시다. 너희
들이 나를 막는 것은 실수를 하는 것이라고...... 커억!"
그가 트림을 할 때마다 무사들은 코를 움켜쥐어야만 했다. 그의 입에서 풍기는 술냄새에 비
하면 똥냄새는 차라리 구수했다.
"어이구! 이거 소인이 몰라 뵈었습니다."
"술취한 주정뱅이 총순찰님."
무사들은 대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 대소 뒤로 그들의 두 눈에선 무서운 한광(寒光)이 번
뜩였다.
"이 배가 어떤 배인 줄 알고 주정뱅이 주제에 오르려고 하느냐?"
"썩 꺼지지 않으면 치도곤(治盜棍)을 내리겠다."
그러나 무사들의 싸늘한 으름장에도 백무옥은 막무가내였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나를 막는다면 네놈들은 결코 성치못할 것이다."
짝!
백무옥은 난데없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무사의 뺨을 후려쳤다.
"이...... 이 주정뱅이 놈이......?"
무사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웬 떨거지가 창궁용검회를 모르고 시비를 걸고 있다 생각하여
참았으나 더 이상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런 놈은 따끔하게 혼을 내주어야 한다."
누군가 외치자 동조의 말이 터져나왔다.
"다시는 창궁용검회에 술기운을 빌어 시비를 걸지 못하게 만들어버려."
대여섯 명의 무사들이 주먹을 움켜쥐고 백무옥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그들의 주먹과 발길질이 백무옥을 향해 떨어질 찰나였다.
"물러나라! 대체 무슨 일이냐?"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는 근엄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타난 사람은 관무허와 그의 딸 관약빙이었다.
무사들은 대내총관의 부녀를 보자 일제히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들 가운데 수뇌
로 보이는 자가 나서며 보고했다.
"글쎄 기막힌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만취한 백무옥을 가리켰다.
"저자는 자신이 회에서 정중히 초대를 받았고 관소저의 약혼자라고 거짓말을 하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저런 떨거지는 혼을 내어 쫓아버려 다시는 입에 망발을 담지 못하도록 해야 합
니다."
관씨 부녀는 백무옥을 바라보았다.
관무허는 어이없는 표정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의 내심은 누구도 모르는 것이었다.
'복수를 완수한 것을 축하한다, 십구호!'
순간적으로 그의 몸에서 뿜어져나온 엄청난 기도! 그것은 과거 백무옥에게 살인명령을 내렸
던 살주라는 인물이 내뿜었던 기도와 다름이 없었다.
관약빙은 백무옥을 바라본 순간 넋이 빠져버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저 따위 주정뱅이가 나의 약혼자......?'
준수함을 떠나 진정 사내다운 사내가 자신에게 간절히 청혼을 해도 받아줄까 말까인데......
저런 더러운 거지의 입에서 자신의 아름다운 이름이 마구 씹일 줄이야. 기회만 주어졌다면
한 칼에 백무옥을 베고 싶은 심정이었다.
관무허는 백무옥에게 다가갔다.
"이름이 뭔가?"
칼날처럼 날카로운 안광이었다. 그러나 만취한 채 흐릿한 백무옥의 눈은 그 무서운 안광을
고스란히 받아 넘겼다.
"크크, 드디어 나를 안내할 분께서 나타나셨구려."
그는 여전히 비틀거렸다.
"소생의 이름은 무검서생(無劍書生) 방무군(方武君)이외다. 귀하께서 바로......."
"그렇네."
관무허는 말을 잘랐다.
"본인이 바로 그대의 선친 구주십자검 방대승과 막역지우인 관무허이네. 이곳에서 대내총관
직을 맡고 있지. 자네를 이곳으로 초청한 사람이기도 하구."
백무옥은 묘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보니 관백부(關伯父)이시군요, 소질의 인사를......."
백무옥은 인사를 하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쿵!
그러나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였음인지 앞으로 고꾸라졌다.
"우우욱......!"
쓰러진 그의 입에서는 그동안 입에 쳐넣었던 오물들이 꾸역꾸역 쏟아져 나왔다.
고약한 냄새를 접어두고라도 정녕 어이가 없는 광경이었다.
'저자가 대내총관께서 초청한 인물이라고......?'
'구주십자검 방대승이라면 상당한 이름을 날리는 명숙이거늘 저 따위 망나니 아들을 두었단
말인가?'
단순히 주정뱅이가 아닌 백무옥의 신분을 알았을 때 무사들은 경악보다는 구주십자검 방대
승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쓰러진 채 기절한 백무옥을 바라보는 관약빙, 그녀의 안색은 너무나 창백해 한 줌의 생기도
없는 밀납인형 같았다.
그런 그녀의 눈망울엔 실망을 넘어선 분노마저 어리고 있었다.
'저 따위 놈이 나의 약혼자라니...... 저런 자와 평생을 보내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나으
리라.'
그녀가 백무옥의 더러움과 천박함에 치를 떨고 있을 때, 관무허는 무사들에게 명을 내리고
있었다.
"저 아이를 배에 태워 침상에 눕혀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무사들은 고개를 숙이며 백무옥은 업어들었다.
관무허는 딸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숨 푹자고 나면 정신이 깨어날 것이다. 그때 할 이야기가 많겠지."
관약빙은 부질없는 입술만 잘근 깨물 뿐이었다.
관무허는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십구호, 너의 방식은 언제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구나. 처음에 너의 그런 모습은 군웅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겠지. 그러나 그런 모습이 계속되다 보면 군웅들이 너를 기피하겠지.
그러다 보면 네가 잊혀질테고...... 그때가 바로 네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기가
되겠지. 흐흐...... 나는 진정 똑똑한 사위를 둔 것인가?'
일자살맹의 살주, 그의 진정한 정체는 바로 창궁용검회의 대내총관 청청일태성 관무허였다.
* * *
창궁거선의 선실.
침상에 누워있던 백무옥은 흘낏 선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의 육감은 자신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드디어 시작되는군.'
백무옥의 눈빛, 만취한 술주정뱅이의 흐릿한 눈빛은 온데간데 없고 암울한 색으로 변해 있
었다.
그가 가는 곳, 목적지가 어디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한 거인(巨人)을 죽이기
위한 대계(大計)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주판알을 튕겨 보아도 답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다.
암살 가능성은 일할, 살아돌아올 생존률은 전무!
하지만 복수가 끝난 이상 이젠 삶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그들이 나에게 십오 년 간의 한을 풀게 해준 이상 이것이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마
지막 도리가 되리라!'
2
군산.
창궁용검회가 자리잡자 입회한 무사들 사이에선 달리 창궁도(蒼穹島)로도 불리운다.
창궁용검회는 섬 전체에 자리잡고 있었다.
천연적인 지세를 이용, 높이 오장에 거의 육십 리가 넘는 방대한 성벽을 구축하여 천험의
요새(要塞)로 변했다.
마치 섬 전체가 하나의 성(城)이랄까?
원래부터 이처럼 웅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십오 년 전 암흑마황부를 궤멸킨 후 조금씩 세월
이 흐르면서 점점 인원이 불어났고 그에 따라 성곽을 넓히고 건물을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
렀다.
때문에 건물들이 질서정연하지 않고 제멋대로 늘어선 형태였다.
그러나 그 구조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어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바로 그런 점이 더욱 이곳의
힘을 느끼게 한다.
성의 외곽에서 경계를 서는 말단무사들까지 하나같이 호방하고 늠연한 기세를 지니고 있었
다.
그들이 걸친 옷은 황의(黃衣), 이곳의 신분고하는 무공과 품계로 나뉘어졌다.
황의무사 위로는 회의(灰衣)무사들이었다.
그들은 내성(內城)을 지킨다.
회의 위로는 청의(靑衣), 자의(紫衣), 백의(白衣), 금의(金衣), 흑의(黑衣)로 이어진다.
모두 일곱단계의 품위로 나뉘어져 비록 서열의 구분은 있으나 창궁용검회의 일원이 되었다
는 점에서 무사들은 모두 긍지와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 * *
창궁도에 도착한 백무옥은 후문을 이용하여 창궁용검회로 들어섰다. 아직 그는 창궁용검회
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었기에 정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성 안으로 들어선 백무옥은 성의 웅장함에 내심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옆에는 관씨부녀가 따르고 있었다.
그는 아직 취기가 남아있는지 게슴츠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크크, 이곳이 백도의 하늘이라는 창궁용검회로군."
"그렇다네."
관무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정식일원이 아니기 때문에 정문을 통과할 자격이 없네. 정문으로 통과할 자격을 갖
추게 될지는 오직 자네의 능력에 달려있네."
그의 표정은 자못 걱정스러웠다.
"염려마십시오. 저는 지금까지 부친께 사사받은 무공을 새외에서 부단히 연마해 왔습니다.
이곳에서 제왕같은 신분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백무옥은 호기롭게 가슴을 내밀었다.
"푸하하하......! 드디어 내가 왔다. 창궁이여, 너를 내 가슴에 품으리라. 모두가 나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나를 경배하리라!"
자신감이 지나치면 오만한 법이었다. 지금의 백무옥은 오만하다 못해 방자했다.
관약빙은 꼴도 보기 싫은 듯 그를 외면했다.
'아버님은 어쩌자고 저런 무식하고 더러운 자를 약혼자로 삼으셨단 말인가? 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저자에게 시집가지 않겠다.'
그녀의 결심은 확고해졌다.
'나는 창궁비연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미를 다투고 있거늘...... 만일 저자가 나를 차지하려
한다면 자결할 수밖에 없으리라.'
언뜻 사슴의 그것같이 커다란 그녀의 눈망울에 살기가 스쳤다.
그녀가 내심 살의를 일으키기 있을 때였다.
스윽!
난데없는 하나의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백무옥이 그녀의 팔을 잡은 것이다.
"소문대로 약빙소저는 다시없는 미인이오."
"......!"
"머지않아 지아비가 될 나의 팔짱을 끼는 것이 마땅하오. 사천의 법도는 관대하여 팔짱을
끼는 것은 큰 흠이 아니외다."
관약빙은 기겁을 하며 손을 내리쳤다.
"놓아라, 이 음적!"
그녀의 날카로운 수도에 한 팔을 격중당한 백무옥은 비틀거리며 밀려났다.
"음적이라고?"
그의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져 있었다.
"처음 만난 지아비에게 너무 심한 모욕이군. 이래뵈도 머지 않아 강호제일인이 될 지아비이
거늘......."
그녀의 인내심이 한 순간 분노로 폭발했다.
"네놈이 그런 위치에 오른다면 내손에 장을 지지고 자결을 하겠다. 죽어도 너같이 천박하고
무식한 자에게 시집갈 수 없으니 똑바로 알아라."
그녀는 옥수(玉手)를 들어 그의 뺨을 갈겼다.
짝!
백무옥의 고개가 경쾌한 음향과 함께 홱! 돌아갔다.
백무옥이 얼굴을 감싸쥐고 비틀거릴 때, 관약빙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휑하니 몸을 돌려 사
라졌다.
관무허는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딸자식을 잘못 가르친 탓이니 자네가 이해하게."
"그런 말씀 마십시오."
백무옥은 두 손을 저었다.
"생선과 여자란 가시가 있어야 제맛입니다. 가시없는 여자를 꺾는 것은 싱거운 일이지요."
관무허는 미간을 모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오해는 마십시오."
백무옥은 말이 잘못나왔다 싶은 표정으로 짐짓 호기롭게 웃었다.
"프하하하...... 자고로 호색(好色)해야 정부라 하지 않습니까?"
3
날이 선 칼을 연상시키는 두 쌍의 예리한 눈빛이 오래전부터 백무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성곽의 망루(望樓) 위, 두 남녀가 서있었다.
가히 용봉(龍鳳)이 무색할 정도로 절륜한 미모를 자랑하는 두 사람, 그들은 다름아닌 용검공
자 냉조린과 창궁비연 초류화였다.
창궁용검회에서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로 불리우는 그들, 냉조린은 이미 부순찰에서 총순찰
로 내정되었다는 소문마저 돌고 있었다.
그런 그의 출세는 곧 회주의 자리에 오를 날도 머지않으리라는 것이 무사들의 판단이었다.
초류화는 회주(會主)의 손녀로 소군사(小軍師)로 불릴 만큼 지혜가 뛰어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의 백미는 아름다운 자태였다.
근래 검회에서 마도세력의 발호를 막고 악도들을 처단하기 위해 하나의 독자적인 세력을 만
들었다.
창궁의혈대(蒼穹義血隊)!
모두 혈기 왕성한 일당백의 젊은 무사들로 결성된 이 세력의 수뇌로 이들 두 남녀가 전격적
으로 발탁되었다.
결론은 하나다. 이제 이 두 사람이 창궁용검회의 실질적인 수뇌가 된 것이다.
냉조린은 백무옥의 모습을 보고 비웃음을 흘렸다.
"저 자가 고월미녀 관약빙의 약혼자 무검서생 방무근 이외다."
초류화는 오연하게 백무옥을 바라볼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도도했다. 게다가 그녀는 독선적이고 아집적인 일면이 있었다. 사내들은 그런 그녀의 그림자
도 밟지 못할 지경이었다.
냉조린 역시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그 오만함도 초류화 앞에서는 언제
나 한 수 양보해야 했다.
그가 남몰래 초류화를 사랑하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그녀에게 양보하며 환심을 사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관약빙은 도도하고 오만하기가 다시 없거늘 어이하여 저런 파락호와 혼약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소."
초류화가 반응을 보였다.
"그녀 자신의 뜻은 아닐 거예요."
"허면......?"
냉조린은 흠칫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녀의 부친인 대내총관 때문일 거예요."
냉조린의 눈빛에 기광이 스쳤다.
"관총관은 매사에 신중하고 지략이 뛰어난 인물인데, 하지만 이번 일은 그의 실수인 것 같
소. 그러나 전혀오판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은 지금까지 실패한 적이 없다
는 것이오."
초류화가 몸을 돌렸다.
"분명 무슨 목적이 있어 이곳에 온 자일 거예요."
냉조린은 눈을 치켜떴다.
"무슨 말이오?"
"다만 관약빙의 약혼자라는 신분과 회에 가입하기 위해 들어오지는 않은 것 같아요. 무검서
생이란 자에게서는 작위적인 냄새가 나요. 철저하게 저 자를 감시하도록 지시를 내려야 합
니다."
초류화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냉조린의 눈에 야릇한 빛이 떠올랐다.
'근래 들어 웬 떨거지 같은 자들이 계속 입회하는군. 초류화가 최근에 들어온 그놈에게 꽤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다. 제길 황금밖에 없는 그놈에게 호감을 갖다니!'
휘이이잉......!
한 줄기 바람이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욕망과 야망이 찐득하게 묻어있는 그의
눈빛은 변화가 없었다.
'어림없다! 그 자를 베어서라도 반드시 초류화를 나의 여인으로 만들리라. 반드시......!'
"오늘부터 자네가 지낼 장소이네."
백무옥은 관무허의 뒤를 따라 하나의 전각으로 들어섰다.
"자네는 아직 외부인이니만치 명이 있을 때까지 어떠한 경우라도 밖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하게."
관무허는 백무옥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백무옥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저 미소...... 왜인가? 처음 봄에도 불구하고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관무허는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부족한 것은 없을 것이네. 시녀가 시중을 들어줄 것이니 부탁할 일이 있다면 시녀를 통해
하도록...... 차후 연락하겠네."
그는 당부를 끝내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백무옥은 히죽! 웃었다.
'팔자에도 없는 고월미녀의 약혼자라.......'
그는 밀지를 떠올렸다.
― 무검서생 방무군으로 행동하라.
모든 것은 대내총관인 관무허의 지시에 따를 것, 그는 살맹의 일원으로 오래 전에 창궁용검
회에 투입된 자이다.
창궁용검회에서 그의 딸인 고월미녀와 정혼한 신분으로 지내게 될 것이다. 창궁대협 초우령
은 의심이 많은 자이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너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게 될지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도록......!
백무옥은 서서히 공력을 끌어 올려 이목을 집중시켰다.
'전각 위 주위에 여섯, 그리고 내부에 넷, 누가 명했는지 알 수 없으나 뛰어난 고수들이 나
를 감시하고 있다.'
백무옥은 청각을 진동시키는 숨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살맹의 저력은 대단하다. 관무허 같은 자를 백도맹의 밀정으로 심어 놓다니...... 그렇다면
창궁용검회와 살맹이 같은 조직체라 추측한 나의 추리는 잘못되었단 말인가?'
추측을 벗어난 살인명령은 그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는 잠시 후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 어차피 창궁대협만 제거한다면 모든 것을 알게 되겠지.'
4
창궁용검회의 성외곽을 따라 동쪽의 맨 끝자락.
이곳에 비동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어두운 암동 속.
공기 한 점 통할 것 같지 않은 사방이 꽉 막힌 암동에도 인기척이 있었다.
"콜록...... 콜록!"
노인의 기침소리였다.
어둠의 한켠에 자리잡은 휘장이 쳐져있는 하나의 침상, 그리고 휘장에 비치는 검은 그림자
가 밭은 기침을 토해냈다.
그때였다.
스스슷......!
한 개의 그림자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더니 침상 앞에 공경(恭敬)하게 부복했다.
"속하 관무허입니다."
무릎을 꿇은 자는 창궁용검회의 대내총관 관무허였다.
"그는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휘장 안의 노인은 한동안 숨을 고르다가 침음성을 내뱉았다.
"음......."
관무허는 머리를 조아렸다.
"맹주 진정 그를 죽이실 생각이십니까?"
노인의 메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그 아이와 본좌. 둘 중 한 명은 죽는다. 본좌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관무허는 내심 의혹에 휩싸였다.
'어이하여...... 그를 중용하실 생각이시면서 그에게 그런 시련을 내리신단 말인가?'
노인의 음성이 다시 흘러나왔다.
"궁금한가?"
"헛......!"
관무허는 전율을 금치 못했다.
'나의 의혹을 읽으셨단 말인가?'
관무허는 몸이 떨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맹주. 어이하여 십구호에게 그런 시련을 주시는지 소인의 세 근 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단단한 땅에 심은 나무라 할지라도 어린 나무는 한 줄기 바람에도 쉬이 꺾인다. 그 바람을
이겨내고, 더욱 거칠은 폭풍우를 견뎌내야지만 뿌리를 내리고 완전한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말씀은......?"
"시련을 이겨내는 자만이, 다음에 닥치는 더 큰 시련도 극복할 수 있다. 콜록......!"
관무허는 노인의 기침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깊은 뜻인 줄 아오나...... 더욱 쉬운 방법이......."
노인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살주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나의 이 방법에는 변함이 없고 또한 훗날 나의 판단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평가될 것이다."
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후 관무허가 그 침묵을 깼다.
"언제쯤 십구호를 보실 생각이신지?"
"서두를 것 없다. 어차피 맹도 검회도, 그 아이의 손에 떨어질 터. 그 아이가 검회의 모든
것을 파악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관무허는 머리를 조아렸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 때 휘장 안에서 노인의 메마른 음성이 다시 들렸다.
"능한천이라는 아이가 요즘 선풍을 일으킨다지?"
"예, 그는 거금상각의 각주로 검회에 군자금을......."
노인의 음성이 관무허의 말을 잘랐다.
"알고 있다. 허나, 살주는 그 아이를 주시해야 한다."
"그 말씀은......?"
"느낌이 좋지 않다."
관무허는 내심 의구심을 느꼈다. 그도 능한천을 본적이 있었다. 그는 능한천을 본 순간 냉조
린보다도 더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백무옥을 만난 이후에
보았던 사람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마음 속으로 평가한 사람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스스슷......!
그가 한 줄기 연기로 화해 사라지자마자 노인은 참았던 기침을 토해냈다.
"쿨록......쿨록! 십구호 너는 꼭 시련을 이겨내리라 믿는다."
5
청운루(靑雲樓)는 백무옥이 거처하는 전각이었다.
관무허가 안내하여 머물도록 선처한 이곳은 화려함은 없었으나 지내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관무옥은 짐짓 불만을 토하였다.
"내가 이런 돼지 소굴 같은 곳에서 지내야 한단 말인가?"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몹시 억울하다는 기색이었다.
그가 불평을 토하며 안으로 들어설 때 십육칠 세 가량 된 듯한 두 명의 시비가 허리를 숙이
며 그를 맞이하였다.
"소십랑(小十娘)과 궁란(宮蘭)이라 하옵니다."
"오늘부터 공자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가차없이 질책을 내려 주십시오,
공자님."
그녀들이 절을 하고 일어서자 백무옥이 야릇한 눈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며 불쑥 물었다.
"너희들, 처녀냐?"
"예에?"
"그, 그 무슨 망측스런 말씀을......."
두 시비는 놀라며 얼굴을 홍시처럼 붉혔다.
그녀들이 부끄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모습에 백무옥은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핫! 나는 원래 계집에 이력이 난 처지거니와 풋내기 계집들은 신선하기는 해도 재미
가 떨어지는지라 눈길을 주지않는다.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는
것이 영 피곤할 것 같구나. 너희들의 모습을 보니 말이다."
웃음의 여운을 끌며 백무옥은 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뒤이어 그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나 들어와 나의 등을 밀어라, 목욕을 해야겠다."
두 명의 시비가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목욕하고 난 다음에는 술을 한잔 마시는 것이 제격이니 한 사람은 주안상을 준비해 둬라."
소십랑과 궁란은 어이없다 못해 넋이 나간 표정들이었다.
소십랑이 먼저 고개를 떨구었다. 한심스럽다는 한 마디가 그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무검서생 방무군이란 자의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익히 알고 있지만 저리도 천박하고 저속
한 자 일줄이야......."
"아아, 고월미녀 관아가씨로 말하면 다시없는 고아한 분이거늘 어찌 저리도 천박한 자가 약
혼자로......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어......."
궁란은 고개를 저었다.
여인들은 첫눈의 느낌을 강하게 받아들인다.
그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들이 모셔야할 상전으로 인해 한 마디로 자신들이 앞으로 얼마나 피곤하게 될지 짐작하
고도 남게하는 인상을 첫대면에 느낀 것이다.
"왕(王)...... 소(小)...... 군(君)...... 길을 떠나네. 고향이나...... 십팔만리 머나― 먼길, 흉노땅으
로―!"
욕탕의 백무옥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삼대미녀의 하나였다는 왕소군. 그녀가 환관(宦官)의 미움을 사 흉노에게 공녀로 바쳐져 이
역만리 먼길로 떠난다는 슬픈 노래를 걸칙한 가락으로 뽑아내고 있었다.
장단을 맞추듯 그의 손은 물을 첨벙거렸다. 가히 풍류공자라 할 뛰어난 가창(歌唱)으로 사람
을 감탄케할 기막힌 노래솜씨였다.
'노래만큼이나 인간성도 뛰어나면 좋으련만.......'
궁란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 그녀는 벌거벗은 백무옥의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백무옥은 싫다는 그녀에게 막무가내로 등을 밀도록 강요한 것이다. 상전의 명을 거역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들어온 궁란이었다.
노래를 부르던 백무옥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쯧쯧, 머지않아 사내를 받아들여야 할텐데 그렇게 쑥맥처럼 굴어서야 어찌하려고...... 오늘
부터 내가 너에게 어떻게 사내를 모셔야 하는지 교육을 시켜주마."
말과 함께 그는 덥석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맛―!"
기겁한 궁란은 화들짝 놀라며 그의 손을 뿌리치고 욕실 밖으로 도망쳤다.
"하하하! 귀여운 계집이로구나."
백무옥은 넉살좋게 대소를 터뜨렸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혼자 목욕을 했다. 그런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크크크...... 나를 감시하는 자들, 판단에 혼란이 많으리라.'
지금의 그의 행동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백무옥, 오늘 따라 유난히 쓰게 느껴지는 술이었다.
이미 궁란이 욕탕에서 혼이 난 후였는지라 그가 술시중을 들라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그녀
들은 기겁을 하며 도망친 상황이었다.
"제길......."
두어 잔 비우던 백무옥은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술은 계집을 끼고 마셔야 제맛인데 궁상맞게 이게 무슨 꼴인가."
백무옥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룻밤 객고를 달랠 계집을 찾아봐야겠군."
그는 성큼 밖으로 나갔다. 남의 시선은 전혀 아랑곳 없다는 발걸음이었다.
몸을 감추었던 소십랑과 궁란은 어느틈엔가 모습을 나타내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막아
섰다.
"대내총관께서 검회출입을 삼가하라 하셨습니다."
"부디 상공께서 자제를 하셔야......."
백무옥이 말을 잘랐다.
"나는 머지않아 이곳에서 만인 위에 군림할 인물이거늘. 그리고 관약빙의 약혼자인데 바깥
구경하는 것을 두고 누가 시비를 건단 말이냐?"
눈을 부릅뜨는 백무옥을 보며 두 시비는 움찔 물러섰다. 오만하거니와 그 사나운 기세를 말
릴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백무옥은 꺼릴 것 없다는 듯 청운루를 벗어났다.
그는 창궁용검회의 성내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성내는 아름다우면서도 장엄했고 도처에는 연무장이 수 없이 세워져 있었다.
섬의 풍경과 어우러져 세워진 장소이기에 가히 절경이라 할 수 있는 운치가 있었다.
백무옥은 연신 감탄과 웃음을 터뜨렸다.
"창궁용검회가 아름다운 곳이라 하더니 그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군. 이 아름다운 곳도 머지
않아 내가 지배하게 되리라."
그가 짐짓 호기를 부릴 때였다.
스스...... 슷!
돌연 자의를 걸친 장한 둘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삼십대 중반의 무사들로 제법 근육질의 탄탄한 몸을 가진 고수들이었다.
두 사람은 백무옥에게 깊이 허리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무검서생 방소협이신지요?"
"당신을 초청한 분이 있소."
백무옥은 눈에 이채를 떠올리며 거드름을 피웠다.
"나의 이름이 벌써 이렇게 유명해지다니...... 하지만 누군지 용무가 있다면 나에게 직접 찾아
오라고 전해라."
두 무사의 안색이 굳어졌다. 분노를 억지로 누르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이곳의 부순찰이신 용검공자이시오."
"초청에 정중히 응하는 것이 향후의 신상에 이로울 것이오."
말은 정중했으나 다분히 위협적이었다.
'그 친구에게 약간의 빚이 있지.'
백무옥은 짐짓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초청에 응하지."
두 명의 무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회심의 미소가 그들의 입가에 맺혔다.
'그러면 그렇지. 네놈이 용검공자의 명호를 듣고도 객기를 부릴 수는 없겠지.'
그들은 백무옥에게 따라오라고 말하고는 앞장 서 안내했다.
백무옥은 미묘한 미소를 머금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용검공자 냉조린.
그가 무엇 때문에 백무옥을 초청한 것인가.
6
부순찰전(副巡察殿)은 위세(威勢)를 자랑하듯 화려하고 넓은 거처였다.
냉조린의 부순찰이라는 지위는 대단한 것이었다.
짧은 역사의 창궁용검회이었지만 어떤 단체이든간에 냉조린의 나이로 부순찰의 지위에 오른
자는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백도맹을 이끌어갈 차기 후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고 공공연히 소문
이 날 정도이다.
그러한 자부심 때문일까?
그의 긍지와 오만함은 천하인이 익히 알고 있을 정도였다.
또한 그의 지위와 권위에 걸맞게 무공도 대단했다.
소문으로는 뛰어난 그의 재질에 감탄하여 백도의 팔대명숙이 그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었다
고 알려졌다.
한 마디로 그는 행운아요, 강호의 젊은 영웅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의 거처로 백무옥이 두 무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서고 있었다.
화원(花園)은 가히 절경이었다.
기암괴석(奇巖怪石)이나 가산(假山) 따위가 꾸며지고, 그 사이로 온갖의 꽃과 나무가 아름다
움을 더하듯 가꾸어져 있었다.
가히 인공미의 극치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아름다움에 부조화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 있었다.
용검공자 냉조린이 검을 가슴에 품은 채 화원 가운데 오연히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그의 앞에는 쇠사슬에 묶인 삼십여 명의 무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유구국(琉球國) 무사차림의 죄수들이었다.
그때였다.
따당...... 땅, 따당!
냉조린은 그들의 쇠사슬을 풀어주며 장도를 하나씩 던져주었다.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음인가?
유구국 무사들은 의혹을 떠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냉조린은 싸늘한 미소를 던졌다.
"너희들은 머지않아 본보기로 모두 처형될 자들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유구국 무사들의 시선이 냉조린을 뚫어질 듯 쳐다봤다.
"너희들 가운데 나를 기습공격하여 베거나 상처를 입히는 자가 있다면 나의 이름으로 약속
하건대 살려주겠다. 너희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니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
다."
유구국 무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런 그들의 눈은 어느새 야수의 눈처럼 번들거렸다.
원래 그들은 중원에 들어와 살인방화를 일삼으며 약탈을 자행하다가 창궁용검회의 의혈대에
게 잡혀온 왜구들이었다.
머지않아 본보기로 처형될 자들로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죽음 뿐이었다.
한데 살아남을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한 가닥 희망이 생겼는데 어찌 눈빛이 변하지 않으
랴?
냉조린은 그들의 눈에 살기와 희망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냉소를 머금었다.
"가산이나 화원 속에 숨어 나를 공격하는 것이 성공할 보다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스스스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들은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그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단 한 번의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 그것은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그들의 행동은 빠르고
은밀했다.
냉조린은 주위를 한 바퀴 쓱! 훑어보았다.
찰나의 순간 그의 눈빛이 야릇하게 번뜩였다.
두 사람의 무사와 백무옥이 입구에 서 있음을 본 것이다.
냉조린은 오만한 미소를 떠올리며 품 속에서 검은 천을 꺼냈다.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눈을 스스로 가렸다.
만용이라고 하기에는 자신감이 넘치는 행동이었다.
백무옥이 흥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볼 때 냉조린은 가슴에 품고 있던 삼척의 용검(龍劍)을
쥐며 걸음을 떼어놓았다.
파앗!
그가 채 이장을 나아가기도 전에 돌연 나무 속에서 시퍼런 섬광이 대기를 갈랐다.
섬광은 장도에서 뿜어지는 도기(刀氣)로 냉조린을 무자비하게 난자할 듯싶었다.
졸지의 기습이라 빠른 데다 냉조린은 눈까지 가린 상태였다. 어찌 그 일검을 피할 수 있겠
는가?
그러나 그보다 더 빠른 것은 냉조린의 검이었다.
스윽......!
그의 손이 미미하게 움직이는가 싶자 창랑한 금속성이 울렸다. 동시에 검이 용틀임을 하듯
기쾌한 움직임을 보였다.
번쩍―!
그의 용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가 허공을 양단했다.
파아!
뼈와 살이 베어나가는 섬랄한 음향과 함께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동시에 나무 속으로부
터 그림자가 벼락맞은 개구리마냥 번쩍 뛰어올랐다가 이장 밖으로 날아갔다.
"하나!"
냉조린의 차가운 음성이 뒤늦게 울렸다.
파앗!
쐐애애― 액!
두 개의 장도가 그의 좌우 허리를 노리고 무섭게 파고들었다.
유구국의 두 무사가 화원과 암석 뒤에 숨어있다 기습을 가한 것이다.
촤라라랏!
냉조린의 신형이 풍차처럼 기쾌하게 회전했다.
그의 검은 마치 살아있는 독립체처럼 그의 몸과 따로 움직였다. 검은 손의 움직임을 벗어나
허공에서 차가운 광망을 뿌려내며 춤을 추었다.
"크아아악!"
"으웩!"
두 명의 유구국의 무사들이 가랑잎처럼 튕겨나갔다.
"둘, 셋!"
냉조린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검을 잡아 채고 차갑게 외치며 앞으로 쏘아갔다. 그때 또다
른 장도가 그의 옆구리를 쑤시고 들어왔다.
추리리릿! 카아―!
장도는 마치 살아있는 뱀의 혀처럼 무서운 광망을 토해내며 냉조린을 따라 쏘아갔다.
그러나 그들의 장도는 허공을 찔렀을 뿐이다.
"허억......!"
그를 기습했던 유구국 무사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차가운 광망을 토해내는 냉조린의 검이 무섭도록 빠르게 자신들의 목을 향해 쏘아오는 것을
본 것이다.
파파앗!
두 개의 수급이 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넷, 다섯!"
냉조린의 차가운 음성이 분수처럼 허공으로 뿜어져 오른 핏물 사이로 울렸다.
이제 유구국의 무사들은 더 이상 기회를 찾지 않았다.
냉조린이 자신들을 무예를 시험하는 살인도구로 이용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혼신을 다할 뿐이었다.
그러나 냉조린의 입에서는 숫자가 이어졌고 그때마다 번뜩이는 그의 검에 어김없이 한 사람
씩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그것은 광기어린 잔인한 유희(遊戱)이자 살인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백무옥의 안색이 굳어졌다.
참담한 살인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감각살인검(感覺殺人劍)......! 가히 내공이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이르러야 펼칠 수
있는 가공할 검술......!'
냉조린의 그 무서운 살인검예(殺人劍藝). 그것이 백무옥의 심장을 스치듯 차갑게 굳혔다.
감각살인검! 그것은 본능에 의지하는 극상승의 검이었다.
일컬어 야수지검(野獸之劍)이라 하며 야수가 먹이를 노릴 때 감각만을 이용하듯 오직 오감
(五感)만으로 시전하는 검법이다.
감각에 의한 본능으로 죽음을 부르는 검이기에 살인검이라 부른다.
지금까지 냉조린의 나이에 저토록 극상승의 경지에 도달한 자는 없었다.
"서른!"
"크아악―!"
냉조린의 입에서 마지막 숫자가 울리고 그 뒤를 잇는 찢어지는 단말마가 여운을 끌었다.
냉조린은 느릿하게 눈을 가린 천을 벗었다.
살인의 유희는 끝났다.
주위를 뒤덮은 것은 피비린내와 처참한 주검들이었다.
불과 이다경, 차를 두 잔 마실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살아남은 자는 없었다.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유구국의 무사들은 살인유희에 모두 죽은 것
이다.
"화원이 더러워졌군."
주위를 돌아보는 냉조린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죽은 자에 대한 감상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백무옥을 안내했던 두 무사 가운데 하나가 다가가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방공자를 모셔왔습니다."
그제서야 냉조린은 오만한 눈길로 백무옥을 돌아봤다.
"그대가 이번에 검회에 들어왔다는 고월미녀 관약빙의 약혼자인가?"
백무옥은 입가를 묘하게 뒤틀었다.
'자신을 과시하겠다는...... 미리 나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겠다는 의도. 치졸한 과시욕에 잔인
한 손속이로군.'
그는 표정을 바꾸었다.
'그렇게 보이고 싶다면 의도대로 행동해주지.'
백무옥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다가갔다.
"그, 그렇습니다, 용검공자."
다분히 굽실거리는 태도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실망과 함께 거만한 표정을 짓는 냉조린이었다.
백무옥이 다가오자 그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기이하군. 어이하여 그대의 얼굴이 낯이 익지?"
백무옥은 손을 비비듯 맞잡았다.
"과거 공자를 본 적이 있지요."
"나를 본 적이 있다고?"
"육개월 전 난주로 향하는 관도에서였지요. 공자께서는 창궁비연 초소저와 함께 강호에 척
마멸사를 위해 나왔다가 음적 때문에 소생을 오해한 적이 있습니다."
"아. 이제보니 그때의 그......."
비로소 기억난다는 듯 냉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표정이 야릇하게 굳어진다.
백무옥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아, 아니오. 세상 일이 기이하다 싶어서......."
"소생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용검공자를 다시 만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지
라...... 조금 전에 보여주신 감각살인검의 진수는 가히 노화순청에 이른 것으로 아마 다시 보
기 어려울 절예입니다."
"그대가 감각살인검에 대해 알다니 안목이 대단하군."
냉조린은 거드름을 피웠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백무옥을 응시했다.
"흠, 우연의 일치인가? 그때 만난 그대들 두 사람이 모두 창궁용검회에 입문을 하다니......."
"무슨 뜻인지?"
"의도적으로 숨기려는 것인지 아닌지는 머지않아 알게 되겠지. 좌우간 그때 자네를 구해준
자도 이곳에 들어와 있다네."
'설마 능형이 이 검회에 들어왔단 말인가?'
백무옥은 언뜻 미간을 모았다.
"자네를 구해준 친구라는 그 자......."
냉조린은 냉소를 머금었다.
"거금상각의 각주 능한천이 수개월 전에 이곳에 입문한 것을 자네는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
지."
냉조린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백무옥에게서 무엇인가 알아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능형이 이곳에 들어왔소이까?"
냉조린은 그를 흘겨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급한 일이 있어 떠난 것은 창궁용검회와 연관된 일이었는지...... 대체 능형의 진정
한 의도는 무엇인가!'
백무옥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은 자신의 의혹을 드러내는 한편 자신도 알지 못했다는 뜻을 냉조린에게 보여주는 모습
이기도 했다.
냉조린은 그에게 손짓을 했다.
"하여간 이곳에 왔으니 주인으로서 대접해야겠지."
그거 앞장 서 걷자 백무옥은 그의 뒤를 따랐다.
화원의 한쪽에는 탁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곳의 주인이란 입장과 창궁용검회의 부순찰이란 신분으로 그대의 입회를 환영하는 인사
를 이것으로 겸하겠네."
"저같이 부족한 자에게는 영광일 뿐입니다."
백무옥은 허리를 숙였다.
"앉게."
"그럼......."
냉조린이 자리를 가리키자 백무옥은 황송하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이미 술과 안주는 준비
되어 있었다.
냉조린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피비린내 나는 가운데에서 술을 마시는 것도 별미겠지."
오만함과 자신을 과신하는 어투였다.
백무옥은 그가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 역겨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저같은 풋내기를 초청해주어셔 영광입니다. 아무쪼록 맹에 들어왔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소
생을 이끌어 주시길 바랍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
냉조린은 흐릿한 미소를 떠올렸다.
자신의 연출이 주는 효과에 대한 만족감이랄까?
그는 백무옥이 자신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과 확
신을 가진 것이다.
"듣기로는 관소저가 그대에게 몹시 쌀쌀하다 하던데......."
"그게......."
백무옥은 부끄럽다는 듯이 말꼬리를 흐렸다.
"걱정말게."
냉조린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으며 손을 저었다.
"내 말만 잘 들으면 관소저와 합쳐지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테니까."
"그렇게만 된다면야 어떤 일이라도 따르지요."
백무옥은 허리를 굽실거렸다.
냉조린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일 자네에게 시킬 일이 있으면 부르겠네."
"명령만 내리십시오. 불길 속이라고 마다않겠습니다."
"좋아, 이제 술이나 마시지."
냉조린은 계속 술잔을 비웠다. 자못 호기로운 모습이었으나 사람을 깔보는 오만함에 백무옥
은 내심 얼굴을 찡그렸다.
백무옥은 묵묵히 따라서 술잔을 비웠다.
그의 머리에는 능한천의 모습만 그려지고 있을 뿐이었다.
'능형이 무엇 때문에 창궁용검회에 들어왔을까?'
백무옥은 느낄 수 있었다. 능한천은 거금상각의 각주, 즉 상인 이외에 다른 신분이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본모습을 숨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목적이 무엇인지 그를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그는 냉조린에게 아부어린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뇌리 속의 상념은 그 반대로 치달리고 있
었다.
냉조린은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저런 덜떨어진 자는 대세와 무관하다. 맹 내에서 적지않은 힘을 가진다 해도 나의 적수가
될 수 없는 자이다. 이 방가를 잘 이용하면 거금상각의 각주 능한천을 생각보다 쉽게 제거
할 수 있을지도.......'
그의 눈은 게츠름하게 좁혀졌다.
천성적으로 음모에 능한 자의 전형적인 눈이 바로 그의 눈이었다.
'거금상각주, 네놈은 이곳에 들어온 것이 실수이다. 감히 내가 점찍어 놓은 초류화의 마음을
흔들어 놓다니.......'
백무옥은 나름대로 검회의 정세를 판단했다.
'관약빙은 일단 후계자 싸움에서 밀려난 상태이다. 지금의 후계자 각축은 냉조린과 초류화
로 압축되었지만 최근에 삼자가 부각되면서 냉조린이 불안을 느끼고 있다. 바로 능형이 육
개월 전에 검회에 정식으로 입문하여 가장 짧은 시간에 지위를 신장시키며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야망이 큰 냉조린에게 있어서 능형의 존재가 눈에
가시같을 수밖에 없다.'
그는 짧은 시간 가장 정확하게 대세를 판단하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객의
눈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웠던 그가 아니었던가. 자연스럽게 몸에 밴 자객의 본
능은 공기의 흐름조차 놓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창궁대협, 그는 최근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스스로 사람
을 만나지 않는 바, 대내총관 관무허의 말에 따르면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내가 자격을 갖
추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원을 향해 뛰어오는 가냘픈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방공자."
소십랑이었다.
"누구냐?"
"공자가 가장 기뻐할 분입니다."
"그래?"
백무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