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는 일찍부터 물산이 풍부하여
토착부호들이 많아 전통문화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우리 전통문화가 성행.
또한 역사적으로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
그래서, 교방 설치를 관 주도로 문화 전파,
가무가 발달되었고, 많은 명창이 배출되었다.
진주는 신라시대부터
서부 경상남도 중심지.
문무왕 5년(685)에 거열주로 자리 잡은 이후
'고려 ~조선'시대. 일제강점기인 1925년까지
'감영, 선화당, 도청' 설치된지 500년이 넘는다.
진주교방에 관한 기록은 진주목사를 지냈던
정현석(鄭顯奭 : 재임기간 1867~1870) 찬한
『교방가요(敎坊歌謠)』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총목(總目)과
무(舞)로
나뉜다.
총목은 우조(羽調)·
계면(界面)·잡가(雜歌)
시조(時調) 부분으로 구분.
무는 육화대(六花隊)·연화대(蓮花臺)·헌선도(獻仙桃)·
고무(鼓舞)·포구락(抱毬樂)· 검무(劍舞) 선락(船樂)·
항장무(項莊舞)· 의암가무(義巖歌舞)·아박무(牙拍舞)·
향발무(響鈸舞)·황창무(黃昌舞)·처용무(處容舞)·승무(僧舞).
각 지방의 감영에 설치되었던
교방과 관기(官妓)에 관한 제도는
1905년 일제시대 제도개혁으로 폐지.
.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진주에는
이름난 소리광대들이 공연하고 머물면서
소리공부를 하고 가르치는 활동의 주 무대.
일제강점 말기에 들어서면서 사회변화와
서구문물 유입으로 전통소리는점차 흥미를
잃어가게 되고 마침내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할 만큼이나 쇠퇴.
진주지역은 진주권번을 통해 배워 익힌
기생들이 소리 보다는., 무용에 뜻을 두어
2011년 현재 10개 무형문화재 중 4종목이 춤
진주권번 출신 김수악 만 구음을 구사.
판소리는 아니지만 근근히 소리의 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근년 진주 출신 고춘자가
'전주대사습'에서 판소리로 대상을 차지하여
소리고장 진주에서 맥을 이어가려 애쓰고 있다.
진주 남강.,유등축제
'진주 기생의 흔적을 찾아서'.,논개
진주 논개(論介), 평양 계월향(桂月香).
‘남 진주, 북 평양’란 말이 회자될 정도로
진주의 풍류와 멋은 그 명성이 높았던 고장.
그리하여, '조선의 기녀' 하면
“일강계(一江界), 이평양(二平壤),
삼진주(三晋州)” 말이 나오게 되었다.
1910년 1월 7일자 『경남일보』에 위암 장지연(張志淵)은
진주 정경과 문화를 노래한 진양잡영(晋陽雜詠) 14수를 연재.
“풍부한 물산(풍산, 豊産), 아름답고 요염한 기녀(연기, 娟妓),
무성한 대나무(죽승, 竹蠅)를 진양삼절(晋陽三節)”이라고 했다.
이능화(李能和) -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
“지방에 따라 나름의 특색이 있었는데, 평양기생이 그 숫자나
기예에서 가장 으뜸이었고, 그 다음이 진주기생으로 나와 있다.
의절 논개 말고도 역대 진주기생으로는 승이교(勝二喬)·계향(桂香)
난향(蘭香)·매화(梅花), 진양의 옥선(玉仙) 등이 빼어난 명기(名妓)들”
진주에는 기생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하고 있는데,
조선해어화사 등에 ‘진주기생’에 대한 기록들이 보인다.
월정화(月精花)는 기록 상에 나타나는., 진주 최초 기녀.
당시 진주 사록(司錄) 벼슬 위제만(魏齊萬)을 유혹.
그의 부인을 결국 울화병으로 죽게 만든 장본인이다.
사록은 당시 진주 행정의 실무 책임자라고 보면 된다.
'고려사' 권71권 악지
“월정화는 진주 기녀이다.
사록 위제만이 그에게 매혹되었다.
그래서 그의 부인이 울분으로 그만 죽었다.
진주 고을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부인이 살았을 때 서로 친애하지 않았던
사록이 여색에 미친듯이 미혹됨을 풍자한 것이다.
月精花 晋州妓也
司錄魏齊萬惑之
令夫人憂恚而死
邑人追言 夫人在時
不相親愛 以刺其狂惑也
그리고, 진주 사람들이 '월정화'
노래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애석하게도 노래는 전하지 않는다.
진주 사람들이 위제만의 부인을 추모하고
위제만의 허랑방탕한 생활을 풍자하기 위해
불렀다는 월정화 고려가요 내용은 알 길 없으나,
진주난봉가 내용과 흡사한 면이 많을듯 추정된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월정화의 이야기가
'진주난봉가' 설화배경과 유사한듯 보인다.
고려사 ‘월정화’이야기는 이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임하필기(林下筆記) 등
조선시대 기록들에도
나타난다.
옛날 경상우도 중심지였던 진주지방에
전해오는 ‘선비와 기녀’이야기가 있다.
'강혼의 로맨스'라는 전설이다.
목계(木溪) 강혼(姜渾 :1464~519)은 젊은 시절
아리따운 관기와 한때 사랑을 불태운 일이 있다.
강혼이 기녀와 사랑에 빠졌을때 진주목사가 부임.
새로 온 목사가 기녀들을 일일이 점고하는데,
강혼의 연인이 목사 눈에 들어 수청들게 되었다.
강혼은 사랑하는 기녀를 속절없이 빼앗기게 되었다.
관기였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강혼은 북받쳐 오르는 분함과 연정을
주체할 수 없어 수청을 들러 가는 기녀의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시를 소매에 써주었다.
기녀는 그 저고리를 갈아입을 생각마저 잊고
신관목사 방으로 들자 목사는 연유를 물었다.
소매의 시 작자가 누구냐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기녀는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가 없었고,
급기야는 잡아들이라는 호통이 떨어졌다.
강혼이 붙들려오자 기녀는 말할 것도 없고
아전들은 큰변이 났다며 몸둘 바를 몰라했다.
사또는 뜻밖에도 주안상을 준비케 하고
백면서생 강혼을 맞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사또는 기생의 소맷자락에 쓰인 시를 보고
그의 글재주와 호기에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그리고 수청을 들 뻔한 기생도
되돌려 주고자 작정한 것이다.
강혼은 1464년(세조 10) 진주 월아산 아래 출생
본관은 진주, 자는 사호(士浩), 호는 목계(木溪).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 14년(1483) 생원시 장원.
성종 17년 식년문과 급제하여 홍문관 춘추관 벼슬.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유배.
얼마 뒤 풀려나 문장과 시로써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도승지.
영의정 유순의 주선으로 반정(反正)에 참여.
그 공으로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
3등에 진천군(晋川君)에 봉해졌고 그뒤 좌승지를 거쳐
대제학, 공조판서가 되었고, 중종 7년(1512) 한성부 판윤.
뒤이어 우찬성 판충추부사를 역임.
시문에 뛰어나 김일손(金馹孫)에 버금갈
정도로 당대에 이름떨쳤다. 시호 문간(文簡).
강혼이 기생의 소매에 써준 시.,증주기(贈州妓)
高牙大纛三軍帥 목사는 삼군을 통솔하는 장군 같은데
黃卷靑燈一布衣 나는 한낱 글 읽는 선비에 불과 하네
方寸分明涇渭在 마음속에는 좋고 싫음이 분명할 텐데
不知丹粉爲誰施 몸 단장은 진정 누구를 위해 할까
강혼은 기녀가 마음속으로는 자기를 좋아하지만,
목사의 권세에 못 이겨 수청들러 가는 것으로 여겨
한편의 시를 기생의 소매에 써준 것이.,증주기(贈州妓)
.......삼일 만세 의거.,진주기생들...............
1919년 진주 남강 변에서 “왜놈들 물러가라”
진주기생조합 소속 기생들이었다. 기생조합은
나라가 망할 무렵 교방이 해체되자 교방의 노기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것으로, 뒤에 권번으로 그 맥이 이어진다.
진주기생조합 소속 기생들은
그당시 진주교방 맥을 이은 것.
1919년 3월 19일 한금화(韓錦花)를 비롯 진주기생들이
태극기를 선두로 촉석루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일본 경찰이 진주기생 6인을 붙잡아 구금하였는데
한금화는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자락에 혈서를 썼다.
“기쁘다,
삼천리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
진주기생들의 만세의거 사실은
당시 『매일신보』에 실려 있다.
1919. 3. 25 ‘기생이 앞서서
형세 자못 불온’이라는 기사.
“십구일은 진주기생의 한떼가 구한국 국기를 휘두르고
이에 참가한 노소여자가 많이 뒤를 따라 진행하였으나
주모자 여섯 명의 검속으로 해산되었는데, 지금 불온한
기세가 진주에 충만하여 각처에 모여 있다더라.” 적혀 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 있네
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 있네
- 진주기생 산홍 -
논개는 왜장을 안고 몸을 날려
천추에 꽃다운 이름을 남겼건만,
자신은 일없는 세상에 태어나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나 놀고 있음을 한탄.
영변에서
망향가 부른
진주기녀 채란
1924년 민족시인 김소월(金素月)은
오랜 방황 끝에 고향 영변으로 돌아와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돌보면서 소일
오랜만의 귀향이었지만
실의와 좌절이 컸던 탓인지
마음의 안정을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영변에 머물며 마음을 안정시키던 중.
김소월은 영변에서 기녀 채란을 만난다.
진주기생 채란은 어릴 때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가 집을 나가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개가할 밑천을
장만하려고 딸 채란을 전라도 행상에게 팔았다.
전라도 행상에게 팔린 채란은
팔도를 떠돌다 급기야는 남으로
홍콩, 북으로 다이렌, 텐진에 이른다.
기구한 운명으로 멀리 외국으로 떠돌다
어찌어찌 평안북도 영변 땅에 오게 됐고,
소월을 만났지만 고향 생각에 잠못이룬다.
채란은 멀리 남쪽 고향 진주 땅을 바라보며
처연한 목소리로 '팔베개의 노래'를 부른다.
이때 김소월은 문득 담을 사이에 두고 골목길
저편에서 들려오는 슬프고 절절한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듣고 채록하여
'팔베개 노래조(調)' 민요시를 지었다.
지금 전하는 것은 김소월의 시밖에 없으므로
채란의 노래는 알 수 없으나 소월의 시와 같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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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논개제
2016년 논개제.
평양기생학교
평양기생
조선시대.,진주성
논개의 순국
논개 묘.
논개 사당
진주기생.
남강을 따라 지수면 승내리와 대평면 내평리
석기산포지에서 구석기 유물이, 진주인근 지역
수곡면·금산면·금곡면·대평면에서 신석기 유물이,
유곡동(진주), 대평면·집현면에서 청동기시대 유물.
이러한 유적으로 보아 진주지역에서는 적어도
BC 2000년경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42년경 가야시대에는 가야연맹의 고령가야로 추정되고,
삼국시대 후기 백제영역 거열성으로 불리다가 신라에 병합.
685년(신문왕 5) 9주정비 때, 거열주를 청주(菁州)로 고치고
총관을 두고 757년(경덕왕 16) 청주를 강주(康州)로 개칭하였다.
799년(소성왕 1)강주를 다시 청주로 개칭했고
825년(헌덕왕 17) 강주로 고치고 강주도독을 둔다.
936년(태조 19) 후백제 신검이 항복해 고려에 영속되고,
940년 강주를 진주로 개칭. 983년(성종 2)에 진주목이 설치.
995년 5월 12목을 13절도사로 개정하면서
진주정해군절도사(晋州定海軍節度使)로 개칭,
9월 전국 10도로 나누는데 산남도에 영속되었다.
이때 영(營)이 설치되었으며 1171년(명종 1)경상주도
진협주도(晋陜州道)로 양분되며 진협주도에 영속되었다.
1186년 통합된 경상주도에 영속.
1204년(신종 7)경상주도가 경진안동도
(慶晋安東道)로 개칭되었고 1298년(충렬왕 24)
경진안동도가 경상진안도(慶尙晋安道)로 개칭되었다.
1314년(충숙왕 1) 경상도로 개칭되고
1379년(우왕 5) 진주성이 축성되었다.
1392년(태조 1)진주를 진양이라 하고 태조현비의 내향이므로
목을 높여서 진양대도호부라 개칭, 진양대도호부사를 두었다.
1402년(태종 2)진양을 진주로 고치고 대도호부를 목으로 개칭.
1466년(세조 12) 지방조직으로 진주에 경상도우부 진주진관을 두었다.
1519년(중종 14)경상도를 좌·우도로 나누고 진주목은 경상우도에 영속.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김시민 이하 3,800여 장졸들이
3만의 왜군을 맞아 전군 몰살, 결국 승리, 진주성대첩으로 기록.
1635년(인조 13) 종래 4면 111리의 진주목 방리를 4면 62리로 통폐합.
1832년(순조 32)진주목읍지가 완성되었고
1862년(철종 13)에는 진주민란이 발생하였다.
1895년(고종 32)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나누는 가운데 진주는 진주부의 영(營)이 설치되어
관찰사를 두고 진주목은 진주군으로 군수를 두었다.
.......................진주시....................
경남 남서부 남강 유역 넓은 충적지에 논.
평거동 일대는 과수· 화훼 재배 중심지이다.
진주성, 촉석루· 창렬사·호국사 등의 문화유적.
진양호 일대는 도시공원으로 지정.
면적 712.95㎢, 인구 344,426(2015).
삼한시대 소국 고순시국이 이곳에 비정되고 있으며,
이어 가야의 영역이었다가 신라 거타주가 설치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685년(신문왕 5)에 청주로 고쳐졌고,
757년(경덕왕 16)에는 9주의 하나인 강주도독부가 되었다.
고려초 강주(진주)로 개칭했으며,
983년(성종 2) 진주목이 되었다.
조선초 1392년(태조 1)에 진양대도호부가 되었다가
1402년(태종 2) 진주목으로 환원되어 조선시대 유지.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일본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진주가 정치적·경제적·행정적인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요지임이 확인됨에 따라 1603년(선조 36)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이 창원에서 진주로 옮겨왔다.
진주의 별호는
진강·청주·진산.
지방제도 개정때 1896년 진주군
경상남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다.
1925년 이곳 경상남도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되고
부산이 성장되면서 진주는 예전의 지위를 잃어갔다.
그러나 여전히 경남 서부 중심으로서 역할.
1931년 진주면이 읍으로, 1949년에는 진주시.
19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진양군과 진주시 통합.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 진주시가 되었으며
2013년 금산면 갈전리·속사리 일부, 문산읍 소문리,
호탄동 일부를 통합해 충무공동으로 신설했으며,
상봉동동과 상봉서동이 상봉동으로 합동되었다.
상평동의 상평산업단지는 2015년
노후산단 재생사업지구로 선정되었으며
주거·상업 가능한 복합용지로 재배치 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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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진양호 선착장 부근에 남인수의 노래비가 있다.
'남인수 고향' 진주에서는 매년 남인수 가요제가 열린다.
남인수(1918~1962) 는 경남 진주가 배출한 전설적인 가수.
18세 강문수는 남인수 예명으로 가요계 기린아가 된다.
남인수 공연 때마다 권번 기생들이 보낸.,인력거가 즐비.
공연이 끝날 때마다 진주 권번에서 남인수 모시기 쟁탈전.
.
전국공연 발길 닫는 곳마다
버선발로 달려나왔던.,기생들
칙사 대접으로 환대 받은.,남인수.
전국의 어느 기생이
남인수 애인이 되느냐?
그것은 당시 화제거리였다.
가요계 황제로 군림하던 남인수
1943년부터 병마로 시달리는 건강상태.
폐병 와중에도 관중들의 환호 속에 공연을 계속.
1956년 반야월 작사, 박시춘 작곡
<나는 사람이 아니외다>.,금지곡.
1950년대까지 나병 환자가 많았던
영남일대 하천마다 움막촌.,한하운.
손가락이 문들어지고 눈썹까지 빠진 삼십대 문학청년.
방황, 울분, 비통함을 시로 발표했던.,문둥이 시인(詩人)
나는 사람이 아니외다. - (반야월 작사, 박시춘 작곡).
1 절.
하늘도 날 버리고 세상도 날 버리고
돌에도 나무에도 붙일 곳 없는 신세
한강수 푸른물에 던지고 싶은 이목숨
살아서 사람이지 사람이 아니외다
손가락도 발가락도 내것이 아니외다
2 절.
사랑도 날버리고 친구도 날버리고
날 보면 피해가네. 침 뱉고 돌아가네
달리는 철길 위에 깔리고 싶은 이 목숨
이름만 사람이지 사람이 아니외다.
다빠진 두 눈썹도 내것이 아니외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1930년대 가수 이난영씨가 불러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목포의 눈물.'
그녀의 노래비는 목포 유달산공원에 있다.
1959년 박인수 폐병이 악화되자 이난영이 간호를 도맡는다.
이난영이 7 남매를 홀로 키울때 적극 도와 준 은인이었던 그.
이난영은 딸 김시스터스가 미국으로 떠나자 더욱 더 외로웠다.
동양 역사 상 최초로 3딸과 함께
여성 보컬 그룹을 만들었던.,이난영,
남인수가 병상에서 눈감을 때 <황성옛터>를 눈물로 노래한 이난영.
1932년 황성옛터는 일본가요 5음계와 서양식 4박자 트로트와 결합.
뽕짝(동서양 연가를 뒤섞어 만들어 붙여진 이름)의 원조..'황성옛터'.
.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 내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고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잠 못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
어느덧 두 사람은 동료에서 연인 사이가 되었기에 너무나 슬픈 이별.
1962년 6월 그의 장례식에 여자가수는 흰소복, 남자가수는 검은 정장.
'애수의 소야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가요계의 황제 남인수를 보냈다.
애수의 소야곡 -1937년
(이노홍 작사, 박시춘 작곡)
1 절.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누가 불어주나 휘파람 소리
2 절.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못생긴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저 싸늘하고나
3 절.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던고
모두다 흘러가면 뜻없건마는
외로이 느끼면서 우는 이밤을
바람도 문풍지에 애들프고나.
........................
.........................
진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서깊은 기생의 역사를 갖고있다.
진주 기생의 역사는 곧 우리나라 한반도 기생의 역사를 뜻한다.
조선시대 전통사회에서 기생은 연회 유흥을 돋구던 화류계 연예인.
.
즉, 조선시대 관아 소속인 관기들이
곧, 오늘날, 여성 연예인과 같은 존재.
국가 행사 또는 지방 관아 행사를 주도.
원래, 기생은 은나라 창기문화에서 유래되었다.
특히, 당나라에 들어와 창(娼) 자를 사용한.,흔적.
기(妓) 자의 뜻도 현대와 고대 중국과 전혀 다르다.
기(妓)란 '婦人小物也' 뜻풀이를 하면 '놀이개'란 뜻.
娼 또는 妓 명칭은 한나라 이후 倡妓, 女倡, 女妓, 御妓
(1) 은나라 湯왕에서 紂왕까지(BC 1783 - BC 1123)
660년간 무창(巫娼)시대, 즉 일명 종교적 매음 시대.
이 시기를 고대중국 창기 역사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2) 西周에서 東漢이 멸망하기까지(BC 1122 - AD 219)
약 1330년의 기간으로 노예 창기 및 官娼의 발생 시기.
(3) 남북조를 지나 수(隋)가 망할 때까지(AD 220 - 617)
약 435년간 家妓와 노예 창기가 함께 발전하던 시대였다.
(4) 唐, 宋, 元, 明의 4대(AD 618 - 1643)는 관기 전성시대.
약 1028년 간 당과 송에 관기(官妓)와 영기(營妓)가 있었다.
(5) 1619년 淸의 건국후 1911년 신해혁명까지
약 290년간, 사설경영(私設經營)의 창기 시대.
송나라 창기 제도는 당나라 제도에서 기인.
북송(北宋)은 관기 및 영기 제도가 있었다.
남송(南宋) 항주(杭州)에는 많은 와사(瓦舍)
송나라 태종이 북한(北漢)을 멸망시킨 뒤
부녀자들을 탈취해 군영으로 끌고 다닌 것
이것이 영기 제도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무렵 관기는 식구가 없는 관료에게만 제공되었다.
관기 몸값은 5천 냥으로 5년 만기 후에야 귀가가 가능.
본관이 관기를 데리고 갈 경우 다시 2천냥을 내야 했다.
중국 장안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방탕한 매음굴.
그들의 자제들까지도 흘러 들어 타락의 장소로 변했다.
소흥과 양기 군영이 많은 지역은 서북 사람들이 많았다.
서북 사람들은 와사(매음굴)를 만들고
기녀들을 모아 병사들을 상대로.,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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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량들은 해어화(解語花)라 한.,기생.
해어화(解語花)란 '말하는 꽃' 기생을 일컫는다.
한반도의 기생은 고대 부족사회의 무녀에서 비롯.
전쟁에서 패한 고대국가 부녀자들은.,관기(官妓).
고려 때 교방제도와 기생학교는 조선시대에도 계승.
조선 중기 유교문화와 융합해 독특한 기생문화를 낳는다.
.
황진이(黃眞伊)· 이매창(李梅窓) 등은
조선시대 여성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
조선시대 이름난 기생을 명기(名妓)라 불렀다.
미모로 이름난 기생, 가무를 잘하여 이름난 기생.
시사(詩詞)를 잘하거나, 해학을 잘하여 이름난 기생,
서화를 잘하여 이름 난.,기생,
신의를 잘 지켜 이름 난.,기생.
황진이, 홍랑, 매창 처럼 시를 잘하는 기생은 수없이 많았다.
이들 기생의 시는 당대 시인들의 작품들과 비교해도 손색 없다.
조선시대 문학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서정적인 작품들.
'산에 있는 버들가지를 골라 꺾어 보내오니
님 주무시는 방 창가에 심어두고 보시옵소서
밤비에 새 잎이라도 나면 나를 본 듯 여기소서.'
조선시대 선조 때 함경도 경성 기생 홍랑의 작품이다.
홍랑은 당대 최고 시인 중 한사람 최경창과 정분 깊었다.
선조 6년 최경창이 북해 평사(北海評事)로 경성에 가 있을 때
홍랑이 이듬해 서울로 돌아간 최경창을 영흥(永興)까지 배웅하고
함관령에 이르러 해저문 날에 '비를 맞으며 그 마음 담았다.' 전해온다.
조선 유교문화에서 관기는 천대와 멸시를 겪으며 태어났다.
나라의 중죄인은 삼족을 멸하는 엄격한 제도가 있었기 때문.
하여, 중죄인은 왕에게 사배 후 사약을 기꺼이 마셔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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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를 어기면, 더 큰 형벌.
중죄인의 삼족은 살아 남더라도
노비가 되어 대물림으로 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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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사후에라도 사면을 받지 못하면,
후손은 대물림 노비신분으로 살아가야 했다.
특히, 중죄인의 삼족 여인네들은
관기 또는 궁방비가 되어야 했었다.
과거에 지체 높은 양반 규수였더라도
관기 신분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관기로 전락한, 사대부 규수가
멸문 가문을 되살리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관아에 속한 관기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 뿐.,
몸을 팔아 부를 축적 또는 권력의 힘을 빌리기.
장래성이 있는 당대 석학을 지극 정성 섬기는 길.
당대 석학을 분별할 안목과 사로잡을 재색 갖추기.
'조선시대 진주기생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반역의 산이라 불렀던.,지리산.
지리산은 고려 세력의 은둔처이자 우리나라 불교의 성지.
고려 말, 그 은둔 세력을 뿌리뽑기 위해 했던 말로 여겨진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독실한 불교신자이지만.
그러나, 새왕조를 뿌리내리기 위해.,구국적인 결단.
지리산 사찰에 은둔한 고려 세력들을 모두 제거한 것.
그후, 조선은 지리산 일대 사찰을 폐사찰 화.
조선시대 숭유억불, 폐불정책으로 불교탄압.
사찰에 암행어사를 파견하거나 과중한 세금을 부과.
국사제도 승과 과거시험 폐지.도성안 승려 출입금지.
불교종파를 소수로 통폐합하고 종파 별 사찰 수를 제한.
'고려 말 지리산 5백 사찰 중
대부분의 사찰들이 문을 닫자
갈 곳이 없어진.,사찰의 승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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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인 비구들는 관노로 삼았고
여성 비구니들는 방지기 또는 관비.
특출한 비구니는 왕족 관노로 삼았다.
조선의 억불정책에 의하여
성직자 신분이었던 승려들이
몸 담았던 사찰이 문을 닫으며
하루 아침에., '8천민'으로 전락.
남원과 진주의 기생문화는
그당시 억불정책 유산이 아닐까?
'지리산은 반역의 산이다.' - 이성계 -.
그후, 당파싸움으로 가문이 몰락한.,양반 규수.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 스스로 기생의 길을 선택.
진주를 찾는 명사 또는 유배지 당대 석학들과 교류.
'가문의 명예회복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을 듯 싶다.'
진주기생은 옛부터 충절을 목숨처럼 여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시대 박해받았던 승려와 기생은 국란 때마다 나라를 구했다.
조선을 임진왜란 위기에서 구해낸 논개, 고승 등이 그 사실을 뒷받침.
조선은 잦은 당파싸움으로 양반도 신분이 뒤바뀌었다.
공신이 역적이 되고, 역적이 공신이 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따라서, 관비가 되었다가도 신분회복이 된 후에는 사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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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기존 관비제도를 바꿔 문제점 개선을 시도했다.
결국, 기생학교를 세워 관기를 양성하는 교방제도를 도입.
14살 전후 어린 처녀를 모아 3년 이상 교육과정을 만들었다.
교방은 고려·조선 시대부터 기생들의 노래와 춤을 관장한 기관.
교방청은 중국 당나라 궁중에서 관기에게 가무를 가르치던 관청.
중국 교방은 발해를 거쳐 고려 문종 때 도입, 조선조까지 이어졌다.
조선에는 장악원 소속 좌방(아악)과 우방(속악)을 교방이라 불렀다.
교방은 지방 관아에 부속된 건물로 관문 밖 객사 주변에 위치해 있었다.
교방의 기생들은 악기 노래 춤과 예기를 익혀 공적인 연회에 불려 다녔다.
조선 말, 기생은 일패(一牌)·이패·삼패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일패는 한국 전통가무의 보존·전승자로 뛰어난 예술인들이었고
이패는 밀매음 (密賣淫) 기생, 삼패는 공창(公娼) 기능을 도맡았다.
기생 신분을 3등급으로 구분하여
관청 별로 기생을 관장하였던., 삼패제도.
관기는 본관 사또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남원 춘향의 정절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이유 그 이유이다.
기생이라도 언제 신분회복이 될지 모른다는 뜻도 담겨있다.
하여, 격조 높은 기생은 사대부 양반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 것.
따라서, 기방은 품격 높은 사대부와 기생의 로맨스 산실.
격조 높은 기생은 당대 석학들과 겨룰만한 시를 구사했다.
아울러 신분 격차를 초월한 깊은 연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남원군수는.,정5품.
조선시대 일반 상궁은.,종5품.
같은 신분에 비슷한 녹봉을 받았지만,
남원군수는 호사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관기제도 덕분이었다.
관청 별로 기생을 관장한., 삼패제도.
관아의 삼패기생이라 할지라도
관아 유지에게는 귀인 같았던 존재.
귀한 손님이 오면 하룻밤 편의를 제공.
관아의 사전 동의가 없으면
유지라 하더라도.,불가한 일.
관아 소속 1패 기생은
군수라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던 존재였을 것이다.
관기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남원군수의 미래가 좌우될 수 있었고
관기는 관아의 재정을 충당하는 창구였다.
1905년 ‘진주교방’은 을사조약으로 문을 닫게 된다.
진주교방 관기제도가 없어지자 ‘기생조합’이 생겼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생조합이 서울의 광교 조합이었다.
광교조합은 유부녀 기생조합에서 한성권번으로 개칭.
기생조합이 일본식 이름으로 바뀐 것은 1914년 경이다.
'권번은 조선시대부터 기생을 총괄하였던 교방청의 후신.'
당시 서울에는 한성권번·대동권번·한남권번·조선권번,
평양에는 기성권번 등이 있었고, 그 밖에 진주 부산 대구
광주 남원 개성 함흥 등에도 각각 권번들이 조직되었다.
당시 기생 1백여명과 견습생 5-60명으로 학부를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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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과 오후 2번에 걸쳐 가무 음곡 산수 국어 예법을 교육.
약 3년의 수업 연한을 거쳐 고전시조 가야금 등 무곡 유행가
서화 국어 예법 등 학술 과정을 더해 졸업자에 한해 기생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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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기가 기생이 된 교방은 일제강점기에 유곽으로 전락하였다.
기생 본연의 품격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진주교방.
100 년전 위암이 진양삼절 중 하나라고 만천 하에 알린..진주기생.
진주기생들이 만든 교방이 있어
많은 시인과 가객이 진주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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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문인들은 그당시 풍류를 찾아
진주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
진주 권번은 1915년 진주경찰서 경무부장 전전승(前田勝)이 설립.
진주 기생조합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기고,
경찰서에 함께 근무하던 경부인 '최지환'에게 은밀하게 재조직을 지시.
이때 금향을 비롯한 고참 기생들이 만든..‘진주기생조합’
얼마 후 부채를 갚고 재정이 건실한 진주권번으로서 발전.
당시 진주기생조합은 기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운영했다.
하지만, 시대의 변천으로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바뀐다.
그리고, 남자들의 손으로 권번 경영권이 넘어가게 된다.
1939년 11월 2일 드디어 주식회사 ‘진주 예기권번’의 창립
이 회사는 자본금 5만원을 최지환씨등 8명이 평등하게 출자
전통적 진주 기생의 풍류와 멋을 복원하려는 취지로 만들었다.
권번에서는 동기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
기생들의 요정출입을 지휘하고 화대 받는 역할을 담당.
당시 기생들은 허가제라서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바쳤고
이들 권번기생은 다른 기생들과는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즉, 1970년대의 밀매음 기생문화와는 품격이 달랐던 것이었다.
...................진주기생들의 삼일만세 의거......................
논개의 충절, 매국노 이지용의 첩이 되기를 거부한 산홍이
“대한독립만세! 왜놈들은 물러가라.”를 외친 진주의 기생들
1919년 3월 19일 한금화를 비롯한 진주기생들의 태극기 행렬
이때 일본 경찰이 진주 기생 6인을 구금했을 때 한금화의 혈서.
“기쁘다, 삼천리 강산에 다시 무궁화가 피누나.”라는 노래 가사
고은 시인도 <만인보2>에 <기생독립단>에 대한 시를 남겼다.
-기생독립단-
평양기생 아미녀가 떨쳤지요.
뭇 사내들이 뼈 깨나 녹았지요.
평양하고 비슷한데가 진주성.
대동강하고 남강이 사촌이지요.
진주기생조합 기생 50명이
기미년 3월 29일 자혜병원으로
정기검진을 받으러 가던 도중에
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 외쳤지요.
(행수)기생 '김향화'가
앞장을 서서 외쳤지요.
병원으로 가서도 검진을 거부하고
모두 함께 "만세" 삼창을 외쳤지요.
만세를 부른 기생들은 다 붙잡혀 가서
김향화는 6개월 징역 받아 콩밥 먹었지요.
기생들은 꽃값을 받아 영치금을 넣었지요.
면회 가서 "언니 언니" 하고 위로했지요
그럴 때마다., '만세 주동자' 김향화 가로되.
"아무리 곤궁할지라도
조선 불효자식에겐 술 따라도
왜놈들에게는 술 따라 주지 말고
그들에게 권주가 또한 부르지 말아라."
"언니 언니 걱정 말아요.
우리도 춘삼월 독립군이어요."
<김향화>는 진주기생이 아니고 수원기생.
3월 29일에 수원 기생조합 소속의 기생 일동.
검진받기 위해 자혜병원으로 가던 중 독립만세.
그것도 경찰서 앞에서의.,만세 의거 사건.
진주 기생들의 만세 의거 역시 당시 매일신보에 실려 있다.
1919년 3월 25일자 ‘기생이 앞서서 형세자못 불온’이란 기사.
이때 기생들의 의거는 진주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거.
4월 1일 해주의 기생일동은 손가락을 깨문 피로 그린 태극기
이에 용기를 얻고 참여한 만세시위 군중은 3천명이나 되었다.
진주기생조합 기생들의 3·.1 만세 의거는 색다른 의미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논개가 왜장을 안고 순국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생은 나라로부터 대우를 받기보다 멸시를 당하던 신분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나라에서 기생에게 베푼 것은 거의 없는 수준이다.
굳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이유가 없었던 기생들.
이 시대에서 다시 한번 곰곰이 돌이켜 생각해 보아야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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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와 남원은 반야봉을 마주보는 위치.
지리산 자락의 사람들은 지리산을 닮았다.
지리산 골짜기마다 삶의 모습은 각각 다르다.
'지리산 산간마을마다
풍습과 삶도.,각양각색.'
지리산을 바라보면 우리나라 역사가 보인다.
격동의 역사와 피맺힌 민족 한까지 품은 지리산.
섬진강은 그 아픔을 어루만지는 어머니 손길 같다.
진주와 남원은 서편제와 동편제 판소리.,본 고장.
서편제는 지리산의 남동쪽, 동편제는 지리산 서북쪽.
서편제는 가야금 선율 같고, 동편제는 거문고 선율같다.
지리산과 낙동강은
조선시대 '풍류문화와
판소리'의 산실인 곳이다.
진주기생은
조선시대 여성문학의
큰 주류를 이루었던.,산실.
'산홍, 매화, 승이교, 채란'은
조선시대 진주가 배출한 명기들.'
.......
산홍.
........
의암사에는 매국노를 꾸짖은 진주기생 '산홍'의 시가 걸려있다.
김소월 시인의 정한(情恨)을 뜻하는 진달래 꽃이 산홍화(山紅花)
마산 출신 가수 진방남의 노래 가사 중에 나오는 산홍이기도 하다.
'나를 혼자 버리고 무정하게 떠난 산홍이 도대체 누구길래
너 없는 내 가슴은 눈오는 벌판, 달없는 사막, 불꺼진 항구.'
옛부터 ‘북 평양 남 진주’라고 불릴 만큼 명성 높았던 진주기생
가무가 뛰어났고 , 정조가 두터워 왕실잔치에 불려나갔던 명기들.
구한말의 애국선비 황현이 지은 ‘매천야록’에도 기록된 기생 산홍.
'매국노 이지용이 천금을 싸들고 첩이 되어줄 것을 요청.'
"모두가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
"기생 줄 돈이 있으면, 나라를 위해 피흘리는 젊은이들에게 주시지요."
산홍은 당대의 권력자 이지용을 매국노라 꾸짖었던 정의로운 기생이다.
이지용은 1905년 내무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서명한 을사오적 중 한 사람.
그당시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을 산홍이 했던 것.
역사는 산홍의 정의로움을 논개의 정절 못지않게 높이 평가한다.
1906년 이지용이 산홍에게 거절 당했기에 의암사 현판에 걸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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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곁 의기의 벗들
평양성 안에 충랑의 이름
산홍이 한낱 유곽에 남았으나
누군들 열녀의 정렬로 일컫지 않으랴.'
어느 역적 부엌에다
요리상을 올리라 하니
거부하고 도망을 치며
문밖으로 나갔다 전하네.
가련하다.
그날 여러 역적들을
살려 두었으나 개들도
주인의 마음을 알아채고
남은 음식 먹지 않았다 하네.
온 나라 사람이 다투어 매국노에게 달려가
노복과 여비처럼 굽신거림이 날로 분분하네.
그대 집 금과 옥이
집보다 높이 쌓였다고 하여도
'산홍'의 마음을 사지는 못하였구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비 매천.,황현.
'매국노를 꾸짖은 산홍을 위한 '한시'가 논개 사당에 걸렸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그곳 현판의 한시를 음미해도 좋을듯..
........
매화 .
.........
매화는 기생이나 인물고운 계집 종 이름.
사랑하는 남녀 결합을 상징하는 꽃 매화.
매화는 이조시대 기생 이름으로 널리 통용.
눈 속에 홀로 핀 소녀 기생.. 매화
'재가열녀'라고도 하는 조선시대 명기.
약 220 년 전, 황해도 곡산 16살 동기(童妓)., 매화
빼어난 청순미에 노래도 잘 불렀고 특히 시조에 능했다.
정절을 받치면 일생을 섬겨야만 한다는 철저한 정절 관념
그 소녀 기생의 정절을 취하려는 뭇 풍류 묵객들
그만한 남자 아니면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매화.
전국에서 구름같이 몰려든 남자들을 마다했던 그녀.
칠십 고령 어윤겸에게 열 일곱 순결을 받친 매화.
황해도 관찰사 어윤겸이 곡산에 순시 차 들렀을 때 였다.
곡산 사또가 마련한 주연에서 매화를 보고 반했던 어윤겸.
그날 밤, 어윤겸의 시중을 들기 위해 객사로 찾아 온 매화
내면에 일렁이는 흔들림을 감출 수 없었던 어윤겸.
그녀가 금침을 깔아 놓고 나가려하자 불러 세웠다.
매화는 그 의중을 짐작하고, 살포시 곁에 앉았다.
"올해 네 나이 몇이냐?"
"예, 열 일곱이옵니다."
"너는 여지껏 머리얹어 주겠다는 사람이 없었더냐?"
"아니옵니다. 있긴 있었사오나 소녀가 거절하였습니다."
"거절하다니..그 연유가 무엇인고?"
"황공하옵니다마는 천기일지라도,
한번 몸을 허락하면 수절해야 하옵는데,
아직 그런 분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음, 갸륵한 생각, 여자는 정절이 생명이어야지.
너의 정절을 지키려는 갸륵한 뜻에 감탄했느니라.
너는 네가 바라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정절을 지키거라."
"......................."
"내 비록 늙었으나 몸이 동하지 않는건 아니다만,
네 뜻을 가상히 여겨 보내는게다. 어서 돌아가라."
"소녀는 오늘밤 여기 머물러 영감을 뫼실까 하옵니다."
17살 동기(童妓)가 첫 순결을 바치겠다고 하자
어감사는 당혹스러웠고 안스러웠지만 내심 기뻤다.
이백의 시를 생각하며 매화의 손을 끌어 잡은 어윤겸.
'인생은 뜻을 얻었을 때 모름지기 환락을 다할 것이니
황금의 술단지를 달빛 아래에 헛되이 버려 두지 말라- 이백.
매화가 들여 온 주안상을 밀쳐낸뒤 촛불이 꺼졌다.
깊어가는 밤의 정적 속에 두 사람 숨소리만 들렸다.
칠십 고령 어윤겸과 17 순결을 여는 매화와의 첫날밤
어윤겸의 극진한 애무가 난생 첫 남자였던., 매화
차츰 그녀를 달아 오르게 하고 몸부림치게 하였지만
나이 차가 워낙 많아 매화의 뜨거움을 식히는데는 한계
스물이 되자 매력이 철철 넘치는 무르익은 여인의 모습
한편, 어윤겸의 몸은 초췌해지고 점점 늙어 무력해졌다.
그무렵, 죽기 전에 보고 싶다는 어머니 편지를 받은 매화.
이 편지를 매화로부터 전해 본 어윤겸은 걱정과 위로
부담마(負擔馬)와 로수(路需)를 주며 다녀오라고 했다.
다음날 일찍 매화는 고향 곡산에 도착해 어머니와 상봉.
병이 위독하여 죽을 날을 기다리며 누웠다던 어머니.
버선발로 달려나와 사립문을 열고 딸을 반긴 어머니.
어머니가 매화를 황급하게 부른 사연은 따로 있었다.
어윤겸이 해주 감영으로 간후, 후임 곡산 사또 홍시유
매화를 찾았으나 이미 어윤겸따라 해주 감영으로 간 후.
홍시유는 안타까워 매화의 어머니를 정성껏 보살펴준 것.
매화의 어머니는 감동해 딸에게 편지까지 보냈던 것.
그녀가 곡성 사또를 찾아가 고마움을 표시하자 화답.
"매화야, 내가 너를 위해 매화타령을 부르마."
몽매에도 그리워했던 여인을 눈앞에서 만나자
그녀가 상관의 여인인 사실도 잊어버린., 홍 시유.
홍 시유의 젊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에 반한, 매화
매화타령에 맞춰 춤추고 오랜만에 흥을 맘껏 돋우었다.
어윤겸에 대한 죄책감과 홍 사또 매력에 빠져드는 자신.
난생 처음 여자로서의 기쁨을 만끽하고는 기진맥진한 그녀.
태우고 태워도 끝없는 정염
퍼내고 퍼내도 바닥없는 욕정
보름 동안이 너무나도 짧았던 두 사람.
그러나, 어윤겸에게 돌아가야 하는 매화.
'죽어 니즈랴 하랴,
살아 글여야 하랴.' - 매화.
강 위에 눈 녹으니 강물이 불었는데
밤이 되니 강 위엔 죽지가 슬픈 곡조.
당신을 보내고 나면 그리움을 어찌하오.
천리라도 그리운 맘을 물결 위에 보내리. -홍시유.
살들헌 내 마음과 알돌헌 님의 졍을
일시상봉 글리워도 단장심회 어렵거든
하물며 몃몃 날을 이대도록 - 매화
해주 감영으로 돌아온 매화
홍시유를 향한 마음속 그리움.
"꿈에 뵈는 님이 인연 업다 하건마는
탐탐이 그리온제 꿈 아니면 어이하리
꿈이야 꿈이언마는 자로자로 뵈여라" - 매화.
심중(心中)에 무한사(無限事)을 세세(細細)히 옴겨다가
월사창(月紗窓) 금수장(錦繡帳)에 님 게신 곳 전하고져
그졔야 알들이 그리는 쥴을 짐작이나. - 매화.
야심(夜深) 오경(五更)토록 잠 못 일워 전전(轉輾)헐 졔
구즌 비 문령성(聞鈴聲)이 상사(相思)로 단장(斷腸)이라.
뉘라셔 이 행색(行色) 글려다가 님의 압혜 - 진주기생 매화
매화 녯 등걸에 춘절(春節)이 도라오니
녜 픠던 매지(梅枝)에 픠염 즉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똥말똥 하여라 - 매화.
죽어 니저야 하랴 살아 글여야 하랴
죽어 닛기도 얼엽꼬 살아 글의이도 얼여왜라
져 님아 한 말씀만 하소라 사생결단 하리라 - 매화.
홍시유를 향한 그리움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매화
자리에 누워버리자 놀란 어윤겸이 명의를 불러다 진맥
좋다는 약을 다 조제해 먹였으나 나을 리 없는 상사병.
어윤겸은 할 수 없이 매화를 고향 곡산으로 돌려 보냈다.
매화는 모처럼 그리웠던 홍시유 품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그로부터 두어 달 후, 병신옥사에 연루되어 투옥된 홍시유.
어윤겸 감사의 해주 감영에 갇혔다가 참형을 당한 홍시유.
홍시유가 참형당하자 그 정실부인도 남편따라 목 매어 순사
매화는 그 부인의 죽음을 보고 존경과 흠모의 정을 느끼었다.
매화는 홍시유 내외를 선영에 안장하고
날마다 그 묘를 찾아가서 울며 지냈다.
"죽어 잊어야 하랴, 살아 그리워 해야 하랴
죽어 잊기도 어렵고 살아 그리기도 어려워라
저 님아 한 말씀만 하소서, 사생결단 하리라. -매화 -
다음날 매화의 시신은 홍시유 무덤 곁에서 발견되었다.
어윤겸을 떠나 사랑을 찾아 홍시유에게 달려 갔던 매화.
홍시유를 위해 죽자 '재가열녀(再嫁烈女)라 불리운 매화.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을 주체할 수 없었던 매화.
고희 감사 애무만으로 갈증을 채울 수 없던 그녀.
결국, 홍시유 무덤 앞에서 숨진 재가열녀(再嫁烈女)
.....................
승이교(勝二喬).
......................
진주 기생 중 가장 뛰어난 여류시인.,승이교(勝二喬).
승이교는 ‘해어화사’에 조선시대 명기로 기록되어 있다.
본명 억춘이 '승이교'라 이름을 지었던 사연는 무엇일까?
중국 삼국시대 강동의 영웅 손책과 주유는 동서지간.
이들은 당대의 미인, 대교와 소교를 각각 아내로 맞이했다.
손책의 부인이 대교이고 주유의 부인이 소교였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승이교는 ‘대교와 소교 즉 이교를 능가한다’는 의미.
'미모가 얼마나 뛰어났으면,
승이교를 그렇게 비유했을까?'
승이교에게 마관(馬官) 벼슬 '김인갑'이란 애인이 있었다.
각 도의 역참을 관리하던 '종6 품 외관직'인.,조선시대 관직.
역리(驛吏)를 포함한 역민 관리, 역마 보급, 사신 접대를 총괄.
승이교는 총명하여
김인갑의 사랑을 받았고
그에게 시를 배웠다고 전한다.
강양관 안에 서풍이 일어나니
뒷산은 붉게 물들고 앞 강은 맑아
비단 창에 달 밝으니 벌레소리 목메어
외로운 베개 찬 이불에 잠못 이루네
江陽館裏西風起
後山欲醉前江淸
紗窓月白百蟲咽
孤枕衾寒夢不成
갈바람이 치마폭 휘 불때마다
뜬 몸엔 가는 세월 속설은 것을
연당에 가을비 부슬부슬
이슬맺힌 가지엔 매미소리 목메이네
추위에 놀란 기러기 저소리
쓸쓸한 산성을 넘어가누나
님 그리는 꿈에서 깨어나 보니
가을 달빛이 창으로 비쳐드네
西風吹衣裳
衰容傷日月
蓮堂秋雨疎
露枝寒蟬咽
霜雁墜飛聲
寂寞過山城
思君孤夢罷
秋月照窓明
남명과 퇴계의 제자인 권응인은 송계만록(松溪漫錄)에서 격찬.
“아직 어리고 총명하니 정진하면 옥봉(玉峰)의 경지에 이르리라."
옥봉이 사랑하는 이에게 보낸 연시는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는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창가에 달 오르니 그리움 사무칩니다
꿈을 꾼 것들이 만약 흔적이 되어있다면
그대 집 문앞 돌길에 깔린 모래가 되었겠지요.
갈바람이 치마폭 휘 불때마다
뜬 몸엔 가는 세월 속 설운 것을
연당에는 가을비가 부슬거리고
이슬 맺힌 가지엔 매암이 우네.'
'김소월의 스승' 김안서 저서
‘한국여류 한시선집’ 中에서..
........
채란.
.........
채란은 진달래꽃 같은 여인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기생.
봄바람이 불면 제일 먼저 한반도 어디에서나 피어나는 꽃.
바라만 보아도 곱고 하도 흔해 누구나꺾을 수 있는듯한 꽃.
그녀는 진달래꽃이 피는 곳마다 떠돌며 몸이 팔려다녔던 신세.
김소월 시인이 남긴 불멸의 대표작 <진달래 꽃>의 여자 주인공.
1924년 오랜 방황 끝에 연변으로 돌아온 민족 시인 김소월.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돌보며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이 무렵에 민족 설움과 애한이 깃든 시를 발표하며 채란을 만난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생각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의 '주옥같은 시'를 보면
'삼패기생' 채란과 깊은 관계.'
채란은 생모 아닌 편모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채란이 어릴 때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가 집을 나간 탓.
편모는 개가 밑천을 마련하려고 13살 채란을 전라도 행상에게 판다.
채란은 팔도, 홍콩, 따이렌, 텐진을 떠돌다가 연변에서 소월을 만난다.
그당시 진주는 관기, 교방도 폐지되고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바뀔 무렵.
채란은 진주권번 들병이(삼패기생) ‘뿌리없는 몸’.
타향으로 팔려다니면서 스스로 춤과 노래를 익히고,
멀리 고향이 그리울 때에는 시로 마음을 달랜듯 보인다.
첫날에 길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동무 되지요.
날글다 말아라. 家長님만 님이랴.
오다 가다 만나도 정 붓들면 님이지.
............팔베개 노래............
花紋席 돗자리놋燭臺 그늘엔..
七十年 苦樂을 다짐 둔 팔베개.
드나는 곁방의 미닫이 소리라.
우리는 하룻밤 빌어얻은 팔베개.
朝鮮의 강산아 네가 그리 좁더냐.
三千里 西道를 끝까지 왔노라.
삼천리 西道를 내가 여기 왜 왔나.
西浦의 사공님 날 실어다 주었소.
집 뒷山 솔밭에 버섯 따던 동무야.
어느 뉘집 家門에 시집가서 사느냐.
.
嶺南의 晉州는 자라난 내 故鄕.
父母없는 故鄕이라우.
오늘은 하룻밤 단잠의 팔베개.
來日은 相思의 거문고 베개라.
첫닭아 꼬꾸요 목놓지 말아라.
품속에 있던 님, 길 차비를 차릴라.
두루두루 살펴도 金剛 斷髮令.
고갯길도 없는 몸 나는 어찌 하라우.
嶺南의 晋州는 자라난 내 故鄕.
돌아갈 故鄕은 우리 님의 팔베개 뿐.
................................................
채란이 고향을 생각하며 처연히 불렀던 ‘팔베개 노래’.
김소월이 그 노래를 듣고 기록한 민요시라고 알려졌다.
채란은 김소월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던 여인.
대표작 <진달래 꽃>은 채란과의 이별을 시로 표현.
채란을 만나 헤어져 죽을 때까지 남긴 시엔 그 흔적들.
.......김소월(1902 8.30∼1934]........
본명 :김정식( 金廷湜) 배재고보 졸업
경력은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운영했다.
본관은 공주(公州). 평안북도 구성(龜城) 출생.
오산(五山)학교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를 졸업
동경상대에 재학 중 관동 대진재으로 중퇴 후 귀국.
.........김소월의 작품들................
1922년 낭인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그리워, 춘강(春崗)
오산중학시절 作. 문단에 오른 후 발표.
먼 후일, 죽으면, 허트러진 모래 동으로..
배재고보에 편입한 후 대표 작품.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등등 8편.
1922년 - 닭은 꼬꾸요. 바람의 봄. 봄밤, <진달래꽃>,
소설-<함박눈> 산문시-꿈자리, 깊은 구멍. 등등 발표.
1923년 - 설움과 애한의 정서가 깃든..'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생각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시 작품을 발표.
1925년 처가집 구산군 서산면에서 발표 作 꽃촛불 켜는 밤,
옛 임을 따라가다가 꿈깨어 탄식함이라, 무언, '진달래꽃' 시집.
....................................................................................
조국을 잃어버린 김소월과 '삼패기생' 채란의 만남.
서로 신세를 한탄하며 자학하듯.,사랑에 빠진 두 사람.
그당시, 소월의 시 속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나타나 있다.
진주기녀 채란이 고향을 생각하며 처연히 불렀던 <팔베개 노래>.
김소월이 그 노래를 듣고 기록한 민요시라고 지금까지 알려졌다.
김소월의 '불멸의 작' <진달래꽃>에는 채란의 심경도 잘 담겨있다.
..................
..................
채란은 진주 권번사에서 손꼽는 미모의 여류시인이자 기생.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가 집을 나가 편모 슬하에서 자란 채란.
13살 때 편모가 개가 밑천을 장만하려고 전라도 행상에게 판다.
불과 13살 어린 나이에 기방에 팔려간.,채란.
일제 치하에서 권번이 해체되자 갈곳 없던.,채란.
삼패기생이 되어 만주까지 떠돌아 다닌.,들병이 신세.
채란은 팔도강산, 홍콩, 따이렌, 텐진을 떠돌다
영변에서 김소월을 처음 만나 약산에서 사랑을 나눈다.
김소월이 주옥 같은 시를 쏟아낼 만큼, 채란과는 깊은 관계.
온몸으로 님을 반기듯
봄바람을 타고 피어나서
쉽게 꺽여버리기도 하는 꽃.
채란은 자신이 진달래꽃 같은 신세라
진달래꽃을 보며 고향을 그리워했던듯.
객지를 사내 품속처럼 떠돌며.,토해낸 시.
진주권번 출신.,채란.
일제강점기 권번 해체로
돗자리를 들고 다니면서.,
술과 몸을 파는 들병이 신세.
고국에 돌아와 영변에 도착한 채란
'천리 밖 고향' 진주를 못가는 신세.
고향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던.,채란.
'삼패기생 들병이 신세로 전락. '
'뿌리 없는 몸으로 팔려다닌 신세. '
'고향이 그리울때면 마음을 달랜 시.'
멀리 남쪽 고향 진주를 바라보며
처연한 목소리로 읊었던., 시 한수.
"첫날에 길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동무 되지요.
날글다 말아라.
家長 님만 님이랴.
오다 가다 만나도 정들면 님. "
그무렵, 김소월 시인은
조국을 잃어버린 심정 만큼
가슴이 아팠던 채란과의 이별.
꽃촛불이 타오르듯
둘이 나누었던.,사랑.
그 사랑이 시로서.,승화.
'민족 혼'의 상징.,김소월 시인(진달래꽃 詩).
김소월이 채란과 이별할때 심경이 담겨있는.,시.
꽃촛불 켜는 밤.
못잊어 생각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옛임을 따라가다가
꿈깨어 탄식함이라.
무언(無言).
1925년에 김소월 시인은
처가집 구산군 서산으로 이사.
그후에, 발표 作들이., 꽃촛불 켜는 밤.
옛 임을 따라가다가 꿈깨어 탄식함이라,
무언 등 김소월의 대표작 시.,<진달래꽃>.
신윤복(申潤福, 1758년 ~ ?).,쌍검대무(雙劍對舞)
.............
검무(劍舞).
................
'지리산 천왕봉' 수호 여신., 천왕성모(天王聖母)
백무동 계곡에서 길을 잃은 헤메던 반야에게 길안내.
그 인연으로 결혼하여 백무동에 살며 딸만 8을 낳았다.
그 딸이 성장하여 8도 무당이 되었고
우리나라를 다스렸다는 전설이 전한다.
진주 남강의 발원지.,천왕봉 아래 천왕샘.
지리산 천왕샘은 곧 천왕성모의 상징.
천왕성모의 8딸을 상징하는.,진주검무.
나라의 평안과 번영을 기원하는.,궁중무용.
진주검무는 본래 궁중에서 연행되던 춤으로
'검무(劍舞)'는 '검기무(劍器舞)'라고도 한다.
궁중 계열 무용 가운데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
.
신라시대(660년경)
발생한 것으로 본다.
신라시대 황창랑 소년이 나라를 위하여 7살에
적국에 들어가 칼춤을 추다가 백제왕을 죽이고
그 자리에서 죽어 그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춤이다.
고려시대 문인 이담 또는 이유원 등의 시에는
검무가 가면을 쓰고 연출되었음을 알리는 기록.
조선 초기에는 검무에 대한 특별한 기록이 없다.
조선 말, 춤의 형태를 종류 별 기록한 궁중 정재홀기.
오늘날, 진주검무가 여기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주에서 검무가 전승되고, 보존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진주감영에 소속된 교방청 무녀 최순이(1884~1969).
8세 때부터 가무를 배우고 13세에 진연도감청에 뽑혀
장악원을 거쳐 '1904년(고종 41년)~순종' 때 궁중무희.
한일합방 때 낙향하여 다시 진주교방으로 돌아왔으나
곧 진주감영이 폐쇄되고 교방기구도 해산되자 얼마 후
일본인 감독하에 기생조합 형태로 유지하면서 후배양성.
이때 제자 가운데 '진주검무 최초 선구자' 김자진,
서상달, 김옥주, 강귀례, 이윤례, 최예분, 김수악 등
에게 진주검무를 비롯한 여러 가지 가무를 전수하였다.
1967년 그중 진주검무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
과거 진주교방에는 최순이 이전부터 검무가 추어져 왔다.
다산 정약용의 시 속에 진주검무를 찬미한 구절이 있고
매천야록에도 진주 명기 산홍이 검무를 잘 추었다는 기록.
또 이윤례는 고종때 순종 탄신축하행사에서 진주검무로 수상.
상품으로 옥관자를 비롯한 많은 비단을 받았다.
진주교방에서 가무를 배우려면 검무부터가 기본.
진주에서는 의암별제 등 행사에서 진주검무를 헌무.
여러 기록과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진주검무의 내력을 최순이 이전부터
진주에 토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주검무는 8명의 무원이
단복을 입고 남색띠를 띠고
전립을 쓰고 손에 색동 한삼을 낀다.
진주검무에 사용되는 악기는
피리 2, 저1, 해금1, 장고1, 북1.
................
운심(雲心).
.................
1700년대 초·중반에 활동한
경남 밀양 기생.,운심(雲心).
“내가 죽거든 관원들이 왕래하는
역원(驛院) 근처 큰 길가에 묻어달라.”
한평생 사랑했던 사람을 생전에 만나지 못했지만
죽고 난 뒤에라도 먼발치에서나마 보고 싶었던걸까?
신안원(新安院) 역로(驛路) 가까운 밀암(蜜岩)에 안장.
조선시대 ·역원은 관원의 숙소이다.
마을사람들은 운심이 남긴 유언대로
그녀를 밀암(꿀벵이)에 안장하였던 것.
.
운심(雲心)의 묘는 밀양시 상동면 신안마을 야산에 위치.
제법 컸던 봉분은 2003년 태풍 매미 때 대부분 유실되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관원이 오가는 영남대로(부산 동래~한양) 변.
“봉분이 있을 때만 해도 벌초를 누구인가 먼저 하면
그 노처녀 또는 노총각의 혼인 소원이 이루어진다하여
매년 벌초가 이루어졌다.” - 신안마을 윤중태(75)노인회장-
운심은 조선 영조 재위 때 검무(劍舞)로 명성이 자자했다.
궁궐 연회에 참여하면서 당대 유명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당시 유명한 서예가 백하(白下) 윤순(1680~1741)은
운심 치마 위에 도연명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써주었다.
규장각 교리 성대중(1732~1809)은 『청성잡기』에서
‘운심이가 늙어 명승지를 두루 유람했는데, 관서지방의
칼춤을 추는 기생들은 대부분 그의 제자였다’고 기록했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소설 『광문자전(廣文者傳)』에는
‘운심의 집에서 광문(廣文·거지왕초)이 춤을 구경하다’라는 구절.
운심은 밀양관기로 있을 때 사대부 관원을 깊이 사모했다.
하지만, 기생과 양반이라는 신분 차이가 사랑을 가로 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운심이는 궁궐 선상기로 불려갔고,
그 관원을 보고 싶을 때는 지병을 핑계삼아 고향을 방문.
50세에 귀향했지만 그 관원은 이미다른 고을로 전출간 뒤였다.
운심이는 영남대로변 신안원 근처에 주막집을 내고
관원이 오면 방안으로 빈 술잔을 들이밀도록 하면서
그 관원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십수 년뒤 병이 깊어져
결국, 마을사람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단다.
.
그로부터 운심의 애틋한 사랑은
신안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늘날까지 수백년간 전해져 왔단다.
밀양시는 운심의 검무와 러브스토리를 관광자원화
묘지로 가는 탐방로를 내고 묘역주변 정비 및 안내판.
밀양시는 주민에게 공연을 위한 검무를 가르치고 있다.
묘 옆에 사당을 짓고
전해오는 사랑 이야기를
마을 담장에 벽화로 그릴 계획.
贈雲心 -운심(雲心)에게 바침
내가 매일같이 책을 읽는 것은
누구의 스승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너를 위한 시를 짓기 위함이라.
내가 매일 뒷산의 꾀꼬리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의 소리가 듣기에 좋아서가 아니라
오로지 너의 목소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이라.
내가 해질무렵이면 먼 산 위에 잔물진 노을을 바라보는 것은
그 빛깔이 어여뻐서가 아니라
다만 너의 춤사위를 그리워하기 위함이라.
의암별제.
.
.
논개가 왜장 에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뛰어든., 의암.
원래는 물이 깊고 소용돌이 치는 위험한 바위였던.,위암'
논개가 열 손가락에 낀 반지로
왜장을 빠져나갈 수 없게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義를 펼친 곳.
그 의기를 기리기 위하여
조선시대 명명된 이름.,'의암'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곳.
의암호는 촉석루 앞 남강의 거대한 호수이다.
논개가 숨진 의암을 품고 있어.,의암호(진양호).
.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논개는 왜장을 유인.
이곳에서 순국하였기에 '의암'이라고 명명한 것.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 정대륭은
바위 서쪽 벽면에 의암이란 글자를 전각
남쪽에는 한몽삼(1598∼1662)이 새긴 의암.
..의암 옆면 암각....
"일대장강(一帶長江)
천추의열(千秋義烈)”
“한 줄기 긴 강이 띠를 두르고,
의열은 천년의 세월을 흐르리라."
............................................
조정에서 논개의 순절을 기려 '의암' 사호(祠號)를 내렸고
그녀의 정절을 추모하는 논개의 사당을 촉석루 곁에 지었고
1954년 그녀의 고향 '전북 장수'에도 의암사 사당을 건축했다.
의암 주인공 논개는 진주기생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그당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 후실.
'장수군 주촌' 부친 주달문과 모친 밀양 박씨.,외동딸.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숙부 주달무에게 가 자랐는데
숙부가 강제로 임내면 김풍헌에게 민며느리로 보냈다.
논개는 도망쳤다가 붙잡혀
장수현감 최경회의 재판을 받고
무죄방면 되었지만 의지할 곳 없어
장수현감이었던 최현감 후실이 된 것.
그후 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현감은 의병을 모집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1593년 4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였다.
최현감은 논개와 함께
진주로 부임한 그해 6월 29일에
임진왜란, 진주성 2차 전투 때 성이 함락.
'최현감 절도사는
김천일 고종후 장군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살.'
논개는 국치의 설욕과
부군의 원수를 갚을 기회를
엿보던 그해 7월 7일 촉석루에서
왜군 승전잔치에 기생으로 가장한다.
주흥에 취한 왜장 '게다니무라 로꾸스케'
남강가 바위로 유인하여 그 허리를 끌어안고
남강 물속에 몸을 던졌던, 당시 논개 나이.,19 세.'
.
조선 말, 진주기생들이 지내는 제사가 의암별제.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매년 6월 중에 지낸다.
조선 말, 의암별제를 만든 정현석 목사가 쓴.,기록.
'傳 논개 묘역' & 최경희 장군 묘,
“장수(長水) 기생 노은개(魯隱介)는
경상우도 절도사 최경회(崔慶會) 소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되고
6만 군(軍)과 민(民)이 함께 전사하니,
논개가 촉석루 연회에서 왜장 허리를 끌어 안고
의암에서 소용돌이 치는 남강 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후 조정에서 논개 사당을 세워,
매년 봄가을 2차례 제사를 지냈다."
나는 진주 부임 다음해,
병마절도사와 의논하여
의기사(義妓祠)를 중건 후,
의암별제를 만들어 지냈고
제관은 진주기생 중에서 뽑아
제례의식 절차를 거행하였다."
.......................................
........................................
의암별제는 악사를 제외한 제관과 연희자 모두 여자들.
통일 신라시대 천관녀가 주관한 국가제사 풍습에서 비롯.
초헌관을 비롯 아헌관과 종헌관은
신망이 두터운 행수기생 중에서 뽑았고
'당상, 당하' 집례는 글을 잘 아는 기생을 선임.
의암별제는 초헌관이 잔을 올리면,
대축이 논개 영혼 앞에 축문을 고한다.
“맵고 매운 영혼이여, 산천의 정기로다.
빙옥 같이 맑은 자태. 상설 같은 곧은 마음.
임진년 난리를 만나, 왜적에게 무너진 성벽.
육만 군민들이 한 구덩이에 묻힐 적에도
낭자의 충성심이 있어 죽음 앞에 겁낼손가?
백척 높은 바위 끝에 홀로 서서 맞은 웃음
왜놈 무찌를 때 티끝 같이 목숨 바쳤던 낭자.
그 숭고한 충열에 힘 입어 나라강산 다시 밝아
천추에 높고 매운 논개의 절개 만고에 향기롭다.
돌에 새겨 높이 드러내
사당을 지어 제를 지내니
유월 한여름 좋은 날 때를 가려
삼백 미녀 분장하여 제청에 치성할 제
구슬픈 젓대소리, 제수도 푸짐하다.
임이여 내리셔서
맑은 술잔 드옵소서.”
의암별제는 전국기생들이 모여 촉석루에서 벌린., 국민적 축제.
1910년 일제침략으로 국권이 상실되며 의암별제의 맥이 끊겼다.
진주기생은 나라 잃은 뒤에도 교방 전통을 이어 진주권번을 설립.
'진주기생조합을 만들어
의암별제를 전승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하에서 실패.'
조선 말, 진주교방 출신 최순이씨(1891~1973년)와 성계옥씨
최씨는 의암별제 진주검무를 배우던 제자 성계옥씨에게 전수.
성계옥씨는 수년간에 걸친 노력 끝에 1987년 ‘의암별제지’ 간행.
이에 따라 구전으로 이어온
의암별제 봉행이 본격 가시화.
1992년 의암별제는
촉석루에서 맥이 끈긴 후
82년 만에 다시 재현된 것.
詩 - 논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남 콩 꽃보다도 더 푸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마음 그 위에 흘러라.
아름답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며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남 콩 꽃보다도 더 푸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기리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남 콩 꽃보다도 더 푸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변 영로 作.
'조선의 마음'
<평문관. 1924.>
조선시대 충신과 열녀의 행적에서 제외되었던 논개.
천한 기생의 절개를 논하는 것이 가당치 않다는 이유.
.
1988 년 함양군수 최낙건이 논개의 묘를 재정비하며
논개 삶에 매료되어 논개에 관한 사료와 유적을 찾아내
뒤늦게나마 그녀에 관한 역사적 진실이 사실대로 밝혀졌다.
.....................
.....................
조선시대 역사는 '왕실 사대부 남성 전유물.'
여성은 역사에서 언제나 도외시되는 존재였다.
특히, 조선시대에 여성은 남성의 부속물로 전락.
그러다보니, 역사상에 드러난 여성에 대한 평가는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폄하 왜곡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남성 못지않게 역사 상 걸출한 여인도 많았다.
이를테면 웅녀, 유화부인, 소서노, 낙랑공주,
허황옥, 우황후, 미실궁주, 선덕여왕, 선화공주,
신명순성황후, 기황후, 문정왕후, 신사임당, 황진이,
허난설헌, 이매창, 논개, 명성황후 등이 그러한 여인들
1. 웅녀(熊女) - 국조 단군왕검을 낳은 고조선의 국모.
2. 유화부인(柳花夫人) - 여신으로 모셔진 고구려의 국모.
3. 소서노(召西奴) - 고구려·백제 건국한 고대사의 여걸.
4. 낙랑공주(樂浪公主) - 호동왕자를 위해 목숨을 버린 비련의 여인.
5. 허황옥(許黃玉) - 김수로대왕과 국제결혼한 김해 허씨 시조.
6. 도미(都彌)의 아내 - 백제 여인의 정절을 빛낸 절세가인.
7. 우황후(于皇后) - 제왕을 선택한 고구려의 여걸.
8. 한주(韓珠) - 고구려 안장왕을 사랑한 백제 미인.
9. 미실궁주(美室宮主) - 미색으로 서라벌을 울린 화랑들의 여왕.
10. 평강공주(平崗公主) - ‘바보’ 온달을 고구려 용장으로 만든 왕녀.
11. 선덕여왕(善德女王) - 관음보살로 추앙받던 신라 최초의 여왕.
12. 선화공주(善花公主) - 백제의 서동왕자를 사랑한 신라의 왕녀.
13. 신명순성황후(神明順成皇后) - 정종·광종을 낳은 태조 왕건의 셋째부인.
14. 천추태후(千秋太后) - 고려의 자주성 지킨 목종의 모후.
15. 기황후(奇皇后) - 고려 공녀 출신으로 원나라 황후가 된 여걸.
16. 문정왕후(文貞王后) - 정난정과 ‘여인천하’ 구가한 중종의 제2계비,
17. 신사임당(申師任堂) - 현모양처의 모범, 빼어난 예술가.
18. 황진이(黃眞伊) - 풍류기행으로 자유롭게 살았던 개성의 명기.
19. 허난설헌(許蘭雪軒) - 삶의 아픔을 빛나는 시로 바꾼 대표적 여성시인.
20. 이매창(李梅窓) - ‘변산3절’로 꼽히는 부안의 명기.
고대사회에서는 신분이 높았던 걸출한 여성들
근대사회로 올수록 신분이 낮은 걸출한 여성들.
우리나라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바뀐 흔적.
여기 20인 역사적 여성을 포함해
마땅히 추가되어야 할.,인물로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아닐까?' 여겨진다.
논개는 조선 중반 임진왜란 때 진주기생.
왜장 에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동반자살.
그리하여, 조선 말, 열녀 행적에서 제외되었던.,논개.
그러한 논개 무덤에
사모하는 시를 바쳤던
승려시인., 한용운(韓龍雲).
'1879.8.29 ~ 1944.6.29'.,서울 死亡
한국 근대시사에서 '불후의 시집' <님의 침묵>을 펴냈고,
한국 근대 불교계에서.,혁신적인 사상과 활동을 펼쳤으며,
3·1 독립선언에 민족대표로 참가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선 그.
'한용운은 왜 논개에게
연시(戀詩)를 바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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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 - 한용운-
낮과 밤으로 흐르는
남강은 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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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는
살 깊은 광음을 따라서 달음질 칩니다.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 애인이 되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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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어디 있느뇨.
죽지 않는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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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황금의 칼에 베어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당년을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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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향기에 목맺힌 고요한 노래는
옥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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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바람은
귀신나라 꽃수풀을 거쳐
떨어지는 해를 얼리었다.
.
가냘픈
그대 마음은
비록 침착하였지만
떨리는 것보다도
더욱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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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무독한
그대 눈은 비록 웃었지만
우는 것보다도.,더욱 슬펐다.
.
붉은 듯하다가 푸르고
푸른 듯하다가 희어지며
가늘에 떨리는 그대의 입술은
웃음의 조운이냐 울음의 모우이냐
.
새벽달의 비밀이냐
이슬꽃의 상징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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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비같은 그대의 가냘픈 손에
꺽이우지 못한 낙화대 남은 꽃은
부끄럼에 취하여 얼굴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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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같은 그대 발꿈치에 밝히운
강 언덕이 묵은 이끼는 교긍에 넘쳐서
푸른 사롱으로 자기의 제명을 가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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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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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가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 집이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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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름뿐이나마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불러 볼
기회가 없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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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만은
그대 집에 꽃을 심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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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집에 꽃을 심으려면
나의 가슴에 가시가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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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셔요 논개여,
금석같은 굳은 언약을
져버린 것은 그대가 아니요.
.
나입니다.
.
용서하여요 논개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외로이 누워서
끼친 한에 울고 잇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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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슴에
'사랑'의 글자를
황금으로 새기어서
그대 사당에 기념비를 세운들
그대에게 무슨 위로가 되오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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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인 논개 그대에게
'눈물'의 곡조를 낙인으로 찍어서
그대의 사당에 제종을 울린다 해도
그것이 나에게 무슨 속죄가 되오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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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만 그대의 유언대로
그대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영원히 다른 여자에게 주지 않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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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대의 얼굴과 같이
잊을 수가 없는 맹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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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여요 논개여,
그대가 용서하면 나의 죄가
신에게 참회를 아니한대도 사라지겠습니다.
.
천추에 죽지 않는 논개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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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웃음에 겨워 눈물이 되고
눈물이 겨워서 웃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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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셔요.
사랑하는 논개여.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일제와는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집을 지은 그.
그 성북동 집에서
66세에 운명한 그.
논개 축제는 논개가 탄생(1574년 9월 3일)한 날을 기념.
그 정신은 민족정신이며 우리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모태.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숭고한 맥이 이어져오는듯.
'그녀의 숭고한 맥은
어디에서 발원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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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등 축제..........................
진주 남강 유등축제는 문화관광부 지정 문화관광 축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침공한 왜군을 무찌른 진주대첩
성밖 의병 지원군과의 군사 신호로
풍등을 하늘에 올리며 횃불과 함께
남강에 등불을 띄운데서 비롯되었다.
1593년 6월 12만 왜군에 의해 진주성이 함락.
그당시 목숨바친 7만 병사와 시민들의.,얼과 넋.
그 맺힌 한을 풀기 위한 행사가 이어져 유등 축제.
축제 기간동안 소망등 띄우기, 세계각국의 등 전시.
소망등 달기, 풍등 날리기 등 다양한 행사가 벌어진다.
각양각색 희귀등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진주 남강의 운치
또한, 왜장을 끌어안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논개.
그녀의 거룩한 흔적이 남아있는 진주성 촉석루.
임진왜란과 충무공의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는 진주.
아울러, 진주의 전통 있는 남도의 진미, 헛제사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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