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성’과 ‘모던걸’이라는 단어는 1920~1930년대의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면서 많은 화제를 남겼다. 신여성은 기혼 개화 여성을 포함한 단어였고, 모던걸은 미혼 여성을 뜻했다. 시대를 앞서갔기에 비판과 선망 사이를 오갔지만, 그들은 세상의 눈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종을 미덕으로 알았던 구식 여성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당시 신여성과 모던걸 중에는 서구 문화를 맹목적으로 동경하며 추종하는 여인도 있었지만, 여성의 권리를 찾겠다는 개화사상으로 의식화된 여학생이나 선각자도 많았다.
‘모던걸’이라는 신조어가 생기자 ‘모던보이’도 탄생했다. 이들은 그야말로 모던한 의상과 서구식 머리 모양으로 구별되었다.
우리 근대 사회에서 신여성과 모던걸이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와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긴 머리를 자르고 한복을 양장으로 바꿔입는 일은 ‘남자의 나라’ 조선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오랜 시간과 최소한의 사회적 동의가 필요한 과정이었다.
남자들의 머리 모양과 옷의 변화는 개화와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하나의 신호였다. 1895년 단발령이 공포되었을 때 조선 사회는 반발과 혼란으로 뒤덮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군복과 외교관 복장이 서구식으로 바뀌었다. 개화에 앞장섰던 윤치호는 단발령 이전인 1885년 1월 미국으로 유학가면서 상투를 잘랐고, 서광범은 두루마기를 벗고 양복을 입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남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여자들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엄 귀비[1854~1911, 고종의 총애를 받아 황태자 은(垠, 의민태자)을 낳은 엄비, 순헌황귀비 엄씨], 윤치호의 부인 윤고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긴 머리를 틀어올려 쪽을 찌고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애들이나 건사하는 존재였던 조선 여성들에게 개화바람이 분 건 여학교가 생기면서부터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는 1886년 5월 31일 정동에 세워진 이화학당(이화여중고 · 이화여대의 전신)이다. 미국 감리회 해외여선교회에서 파견한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이 조선 여성들의 자기계발과 근대적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설립한 학교였다.
서당도 가지 못하던 여자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여학교가 생겼지만, 미국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딸을 보내겠다는 부모는 없었다. ‘여학교’라는 것도 생소했지만, 나중에 미국으로 데려갈 거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화학당의 첫 학생은 기혼녀였다. 어느 고관의 소실로 명성황후의 영어 통역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김 부인’이었는데, 건강상의 이유로 세 달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두 번째 학생 조별단의 부모에게는 스크랜턴 교장이 “당신의 딸을 맡아 기르며 공부시키되 당신의 허락 없이는 서양은 물론 조선 안에서도 열흘 이상은 데리고 다니지 않겠다고 서약합니다”라는 서약서를 써줘야 했다.
이화학당은 1887년에 학생 수가 7명으로 늘었지만, 교과목이 영어 · 성경 · 국어뿐이었다. 다른 과목을 가르치고 싶어도 교과서와 여선생이 없었다. 개교 당시 이화학당은 이런 이유로 대중성 있는 여학교가 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후인 1898년 9월 8일 〈황성신문〉 1면.
이제는 옛풍습을 타파하고 개명하였으니 우리나라도 타국과 같이 여학교를 설립하고 여아들을 보내어 여러 가지 재주(학문)를 배워 나중에 여자들의 대표가 되게 하기 위하여 여학교를 창설하오니 귀한 여아들을 우리 여학교에 들여보내시라는 발표가 나면 그리 해주시기를 바라나이다. 9월 1일 여학교 선언 발기인 이 소사, 김 소사.
〈황성신문〉에서 여학교 설립 선언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한글 전용을 표방한 〈독립신문〉도 다음 날 크게 다뤘다. 이후 〈독립신문〉은 여학교 설립을 찬성하는 논설을 실었고(1898. 9. 13), 학교 이름을 ‘순성여학교’로 정했다는 것, 발기인 400여 명에 개화 신사 윤치호가 남성 지지자 대표라는 기사도 실었다(1898. 9. 15).
이 소사와 김 소사는 순성여학교 창립을 주도한 찬양회(贊襄會)의 회장 양성당(養成堂) 이씨와 부회장 양현당(洋賢堂) 김씨인데, 북촌에 사는 양반집 과부였다. [소사(召史)는 성 아래 붙여 양민의 아내나 과부를 점잖게 이르는 말이다.] 기독교와는 관계없이 ‘나라를 찬양한다’는 뜻의 찬양회는 여성 개화운동 단체로, 순성여학교를 관립으로 해달라고 청원하는 활동을 계속 했다. 같은 해 10월 13일에는 찬양회원 100여 명이 대안문(지금의 덕수궁 대한문) 앞에 가서 관립 여학교 설립을 청원하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직접 제출해 비답(批答)을 받았다.
이런 활발한 활동에 힘입어 1899년 대한제국 교육 관계 예산에 ‘여학교’ 항목이 신설되어 3,750원이 배정되었다. 〈황성신문〉과 〈독립신문〉은 새해 예산안 내역을 신문 2면에 걸쳐 자세히 공개했는데, 〈황성신문〉은 이미 그 전해인 1898년 12월 6일자에 “대한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학교 예산이 배정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남성우월주의에 젖어 있던 관료들의 반대로 순성여학교의 관립 인가는 나지 않았다. 찬양회는 하는 수 없이 1899년 2월 26일 일단 사립으로 개교해서 7~13세 여아들에게 《천자》 《동몽선습》 《태서신사(泰西新史, 서양의 역사)》 그리고 가정생활에 필요한 육아와 요리 및 바느질법을 가르치면서 끈질기게 관립 인가를 호소했지만, 인가는 끝내 나지 않았다.
학교는 재정 부족에 허덕이면서 교장이 계속 바뀌었고, 1905년 12월 28일 이후 더 이상 순성여학교에 대한 기사가 언론에 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무렵 폐교된 것으로 추정된다.
순성여학교가 관립 인가를 받지 못해 운영이 부실해지는 사이, 이화학당은 학생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대표적인 여학교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화학당의 공식적인 행사와 학생들의 특별활동은 당시 많은 사람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독립신문〉은 1899년 5월 1일자에 “정동 이화학당 여학도들이 놀이를 갔는데, 자하문 밖으로 가서 화창한 일기에 좋은 산수와 화려한 꽃과 나무숲 사이에서 깨끗하고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재미있게 놀고 왔다더라”면서, 야외로 소풍 나간 것까지 기사화할 정도였다.
당시 이화학당에 다니는 여학생들은 개화의 상징적인 존재였고, 실제로도 그 졸업생들이 우리나라 여성 근대화에 큰 족적을 남겼다.
1899년 7월 14일자 〈독립신문〉은 “이화학당 학생 두 명(신 규수와 김 규수)이 배재학당 학생 두 명(문경호, 민찬호)과 예배당에서 서양식 결혼식을 올리니 구경할 사람은 그리로 가서 보라”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이화학당은 교과목과 학교 체제를 개편해서 1904년에 중등과를 설치했다. 이화학당에 여학생이 점점 많아지자 외국 선교사들은 엄 귀비에게 여학교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관립 여학교 설립을 권유했다. 이에 엄 귀비는 1906년 4월, 스크랜턴 선교사의 양녀이자 이화학당 졸업생인 여메레(余袂禮, 1871~1933, 메레는 Mary의 한자 음역)에게 땅 1천 평과 교사와 기숙사로 쓸 기와집을 하사해 진명여학교를 세우게 했다.
한 달 후인 1906년 5월에는 조 대비(신정왕후)의 조카며느리인 이정숙(李貞淑, 1858~1935, 갑신정변 때 사망한 영의정 조영하의 부인)에게 한성부 박동(지금의 종로구 수송동)에 위치한 용동궁 480평 대지에 75칸짜리 한옥을 하사해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 1909년에 숙명고등여학교로 개칭, 지금의 숙명여고)를 세우게 하면서 근대 우리나라의 여성 교육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이화학당은 1908년에 보통과(중학교)와 고등과(고등학교)를 신설했다. 학생 모집 광고를 통해 당시 교육 과목을 알 수 있는데, 수준이 상당히 높았던 것 같다.
학생 모집
초등과 : 국어, 한문, 작문, 산수, 미술, 지리, 체조, 영어.
보통과 : 성경, 한문, 수신, 지리, 우리나라 역사, 산수, 영어, 생물, 위생, 동물학, 식물학, 미술, 물리, 부기, 초보 대수, 체조.
고등과 : 성경, 한문, 대수, 삼각기하, 천문학, 지리, 심리학, 교육학, 물리, 화학, 영문학, 세계지리, 고등생물, 경제, 역사(세계 · 영국 · 미국 · 근세 · 고대).
- 〈황성신문〉 19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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