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오후
전선현
(1) 오월은 초록이다. 나뭇잎들은 숱 많은 머리칼을 한껏 흔들고 서 있는 청춘이다. 사월의 옅은 초록과 유월의 짙은 초록의 중간에서 부드럽게 불고 있는 오월의 초록. 도시가 초록으로 반짝인다.
(2) 정오가 지나면 햇빛은 더 달콤해진다. 출렁이는 초록을 쓰다듬다 보도 블럭으로 내려와 노란 동그라미를 그리며 춤을 춘다. 햇빛표 알전구들이 나무 그림자를 장식하고 있다.
(3) 건물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식사를 마친 도시의 일꾼들, 햇빛이 그들을 붙든다. 건물마다 즐비한 커피집에서 갓 태어난 커피 향이 오월 속으로 들어간다. 부드러운 바람은 사람들의 말소리를 안고 나뭇잎으로 달려간다. 사람들은 환한 오월처럼 웃고 있다. 그 위로 새들의 곡조가 내려 앉는다. 그들의 초록빛 곡조는 발랄하다.
(4) 이 도시가 태어나던 30 년 전을 생각했다. 조각 땅을 나눠 받고 함께 살림을 시작한 나무들은 얼마나 작고 앙상했던가. 먼지를 마시고 요란한 차 소리를 듣던 가로수들. 그러나 그들은 초록을 늘리는 일에 일생을 걸었나 보다. 쏟아지는 불 태양도, 귀청을 찢는 천둥 소리도, 무자비하게 칼날을 날리는 바람도 다 받아냈다. 모두 초록을 키우는데 쓰기라도 한 듯, 그들의 초록은 해마다 커지고 커지고, 반짝이고 반짝였다.
(5) 선물이었다. 커다랗고 차가운 건물 속에서 창백해져 가는 사람들에게 내미는 소중한 초록 선물. 나도 아무 조건 없이 선물을 받는다.
(6) 강아지들이 보인다. 분홍빛 귀여운 혀를 날름거리며 포메리언이 종종 걸음으로 뛴다. 동그란 머리의 비숑은 검은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그 뒤를 좇는다. 곱슬곱슬한 갈색 털마저 웃고 있는 푸들도 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살짝 쥐고 팔을 얼굴 주변으로 올리며 흔들고 있다. 못 견디게 귀여운 생명체들.
(7) 긴머리 소녀 셋이 지나간다.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하루 일을 재잘거리는 그들의 세계가 한없이 어여쁘다. 그들의 하루도 초록이었을까. 큰 목소리로 내일 보자며 인사하는 모습이 정겹다.
(8) 성당 담장 밖으로 꽃들이 피었다. 달맞이꽃의 노랑에도 초록이 숨어있다. 성당에 들어가기 전 짧은 기도를 올리는 신도들처럼 달맞이꽃도 기도하는 것 같다. 나도 덩달아 기도를 올려 본다.
(9) 나는 오월의 초록을 마시며 오후를 걸었다. 좋은 것들이 쏟아져 내렸다. 내 마음도 잘 헹궈 말린 빨래에서 나는 내음처럼 향긋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