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장 군마성! 군마맹주!
1
용천강이 격탕(擊蕩)하며 흐르는 드높은 절벽 위, 오연하게 자리한 한 채의 십팔층 전각은
그 웅대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곳이 바로 군마맹주가 기거하는 군마대전이었다.
전각이라고 하기보다는 탑(塔)이라 해야 옳았다. 십팔층으로 이루어진 탑 전체는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적와(赤瓦)와 적석(赤石)만으로 이루어진 건물인 것이다.
군마대전 앞에 이르자 혈마화가 걸음을 멈췄다.
"소녀는 이곳까지만 상공을 안내할 수 있습니다. 맹주께서는 십팔층에 계십니다."
그녀는 공손히 백무옥에게 예를 취하며 물러났다.
'십팔층이라.......'
백무옥, 그는 어서 오라는 듯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있는 군마대전의 입구로 혼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백무옥이 십팔층까지 오르는 데는 한 식경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십팔층까지 오르던 중 그는 내심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 층마다 문이 활짝 개방되어 있어 보기 싫더라도 그는 각 층에 있는 물건들을 보아야 했
던 것이다.
일층부터 십층까지는 거대한 대전 전체가 온통 금은보화로 가득차 있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엄청난 부(富), 감히 황궁이라 해도 그 엄청난 부를 축척할 수 없을 것이다. 육 개
월 동안 이 엄청난 공사를 이끌어낸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했다.
십일층은 병기고(兵器庫), 십이층에서부터 십오층까지는 서고(書庫), 십육층은 의약고(醫藥
庫), 십칠층은 현무실(玄武室)로 온갖 병장기(兵仗器)와 장서(藏書), 그리고 영약선초들과 무
공비급들이 각 석실 안에 총망라(總網羅)되어 있었다.
웬만한 인내심과 부동심(不動心) 없이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었
다.
십팔층에 오른 백무옥, 그는 내심 군마맹주를 비웃었다.
'후훗! 군마맹주, 그대는 나를 시험하는군. 누구나 원하고 바라는 것들, 그리고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나에게 보여줌으로써 나를 시험하나 어림없다. 그런 것에 넘어간다면 애초부터
이곳에 오지 않았다.'
군마맹은 당금 강호무림에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집단이었다.
돌아오는 중추절에 모든 강호인들을 초청하여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창맹을 선포한다는 사실
은 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천하각지로 이미 수만 통의 배첩이 발송되었다. 지금쯤 많은 강호의 영웅호걸들이 호기심을
느끼고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을 움직이는 힘, 그것이 무한한
황금의 저력이었다.
그러나 내심 의아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중추절에 나를 초청하면 될 것을...... 왜 하필이면 오늘......?'
2
"하하하! 어서 오시오. 마중을 나가지 못한 본인의 불찰을 이해해주기 바라오."
넓은 대전이었다. 그동안 보아왔던 층과는 달리 화려하거나 호화스럽지 않았다.
깨끗했다. 그래서 더욱 웅장한 기세가 넘쳤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창가에서 팔짱을 끼고 들어선 백무옥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신에 적색장포(赤色長袍)를 걸친 사내였다. 몸집은 건강하기보다는 탄력적이었다. 기이한
것은 고개를 돌리고 웃는 적색장포인의 얼굴이 검은 면사(綿絲)로 가리워져 있다는 것이었
다.
면사인의 발 아래 조촐한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술주담자 하나와 낙화생(落花生)이 담겨
있는 접시 하나만 달랑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백무옥은 직감적으로 그가 군마맹주임을 알 수 있었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도! 예사인물이 아니다.'
면사인은 백무옥을 바라보며 화통하게 웃었다.
"하하하! 느닷없는 초청에 불쾌했을 줄 아오. 본인이 바로 신의를 초청한 군마맹주이외다.
술한 잔을 나누며 주담을 나눈다면 본인에 대한 감정은 사라지게 될 것이오."
그렇다. 면사인 그가 군마맹주였다. 최근 강호에 최고의 신비인으로 부각되고 있으며 타인에
게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자.
"어서 앉읍시다. 이야기는 술이 몇 순배 돌아가고 난 다음에 해도 충분할 터이니."
군마맹주의 음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몸이 움츠러들게 하는 위엄이 서려있었다. 그러
나 백무옥을 향한 그의 음성은 호의가 가득했다.
백무옥은 담담하게 군마맹주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군마맹주의 호의적
인 음성과는 대조적이었다.
"본인은 한 가지 궁금한 것을 묻고자 왔을 뿐이오. 어이해 귀하께서 능형의 존함을 빙자하
여 나를 이곳까지 부른 것인지 그 목적을 듣는다면 주저없이 돌아가겠소."
그의 음성은 매몰찼다. 그러나 군마맹주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하하하! 본인의 막역지우 능한천, 그 친구로부터 신의에 대해 들은 바 있소. 싸늘하고 오만
하며 진정한 술맛을 아는 믿을 수 있는 사내라고...... 그의 말은 하나도 틀림이 없구려.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오. 곧 모든 것을 알게 될 터이니."
백무옥이 기분이 상했다는 듯이 말했다.
"모름지기 상대를 초청함에 있어 예의가 있어야 하는 법...... 군자는 객(客)에게 자신의 모습
을 감추는 법이 아니라 알고 있소."
군마맹주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곧, 예의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 면사 때문이라면 노기를 풀기 바라오. 허나 나의 얼굴을 본다면 왜 면사를 써야
했는지 이해가 될 것이외다."
군마맹주는 서슴없이 면사를 벗겨내렸다.
그 순간 백무옥은 구토가 일 것 같은 역겨움을 느껴야 했다.
'지독하다.'
드러난 군마맹주의 얼굴은 실로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그의 얼굴은 추했다. 그것은 가히 인간의 얼굴이라 할 수 없는 마귀의 얼굴이라 해도 무방
했다.
오관은 어디 있는지 아예 짓뭉개진 상태였고, 얼굴은 심한 화상을 입어 수십 마리의 지렁이
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철마륵의 얼굴은 차라리 눈에 익어 익숙했다. 하되, 군마맹주의 얼굴만큼은 평생을 가도 익
숙해지지 않을 듯했다.
군마맹주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피식! 미소를 지었다.
"죄송하외다. 어렸을 때 화상을 입어...... 어쩔 수 없이 면사로 가리고 있었던 것이오. 후훗,
그 때문에 강호에 본인이 얼굴없는 신비인으로 소문이 나게 되었는지도......."
공연히 자존심을 건드렸는지도 몰랐다. 백무옥은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조금 전 귀하에게 했던 발언에 대해 정중히 사과하겠소이다."
백무옥은 겸허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술 한 잔을 얻어 먹고 가도 될런지요."
"역시 신의는 소문대로 흔쾌하외다. 기꺼이 환영하겠소."
백무옥, 그는 무엇보다도 군마맹주의 꾸밈없는 화통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백무옥과 군마맹주.
향후 강호에서 폭풍의 핵(核)이 될 두 사람은 이렇게 대면했다.
3
술자리는 단촐했다.
술은 싸구려 죽엽청이었고, 안주는 구운 낙화생 한 접시.
그런 단촐한 술좌석이었기에 백무옥은 훨씬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백무옥은 군마맹주에 대한 악감이 어느 정도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백무옥이 군마맹주의 초청을 받아들여 이곳에 올 때만 해도 그는 살기를 품고 있었다.
그는 군마맹주의 얼굴을 볼 때까지 두 손에 내공을 끌어올린 상태였고, 만에 하나 군마맹주
가 죽여야할 상대라고 판단되었다면 서슴없이 살수를 날렸을 것이다.
백무옥은 무심코 창 밖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얼마 전까지 자
신이 낚시질을 하고 있던 바로 그곳이었다.
군마맹주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사색하는 모습을 훔쳐볼 마음은 없었소. 헌데, 바로 눈 아래 있는지라......."
그 말은 곧, 이곳에서 백무옥을 지켜보았다는 뜻. 공교롭다면 상당히 공교로운 일이었다.
자신의 사생활이 타인의 눈에 노출되었다는 것은 결코 기분좋은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
는 어제 본의는 아니었지만 화란군주를 무참히 능욕하지 않았던가!
군마맹주같은 고수라면 강건너 어둠쯤은 능히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
다.
그러나 군마맹주는 백무옥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미소만 베어물고 있었다.
"하하하! 오늘 따라 유난히 술맛이 좋소. 마음껏 마셔봅시다. 오랫동안 술을 자제해 왔으나
백형같은 영웅호걸을 만났음에야......."
군마맹주는 이미 백무옥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능한천에 의해서일 것이다.
백무옥은 개의치 않고 그가 권하는 술잔을 받아 목구멍으로 넘겼다.
다시 술이 몇 순배 돌았다.
문득 군마맹주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 오늘밤 백형을 초청한 것은 꼭 술좌석만이 목적이 아니었소이다."
"짐작은 했소."
백무옥이 짧게 대답했다. 군마맹주는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능한천 그 친구와는 어렸을 때부터 둘도 없는 친구였소. 가는 길은 서로 틀리나 우린 서로
를 가장 잘 아는 사이라 할 수 있소. 최근에 그 친구를 만나 우연히 백형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소."
그는 고개를 돌려 백무옥을 직시했다.
"성격상 좀처럼 타인을 칭찬하지 않는 그 친구가 백형에 대해서만큼은 입에 침을 바르길 주
저하질 않았소. 그리고, 그 친구의 칭찬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바도 역시 백형은 진정한 사
내외다."
군마맹주의 솔직한 말에 백무옥은 내심 생각했다.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운 능형이 군마맹주를 인정했다면, 군마맹주도 매우 뛰어난 사람이
라는 뜻...... 호감을 느낄만한 사내다.'
백무옥은 희미하게 웃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맹주께서 능형과 막역지우이니 이 백무옥에게 있어서도 능형과
다름없습니다."
"그 말, 진실로 받아들여도 되겠소?"
군마맹주는 반색하며 물었다.
백무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하하하!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백형을 능한천 그 친구처럼 편하게 생각하고 가슴 속
에 있는 말을 모두 꺼내도 기분 나빠하지 않겠소?"
"좋은 여자가 있으니 장가가라는 제의만 없다면......."
군마맹주는 호탕하게 웃으며 백무옥의 손을 붙잡았다.
붙잡은 손, 뜨거운 피가 소용돌이 치고 있다는 것을 백무옥은 느낄 수 있었다.
"백형에게 부탁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불타는 듯한 군마맹주의 눈, 백무옥은 그 눈빛이 이상하게도 친숙
하게 느껴졌다.
'어디선가 본 듯한 눈빛,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 역시.......'
그러나 면사 밑에 숨겨진 얼굴은 그가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알다시피 난 군마맹을 일으켜 세웠고, 나의 뜻은 가장 강하고 위대한 문파를 세우는 것이
오. 그리하여 시작된 것이 군마맹이고......."
백무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어차피 검을 쥔 무사라면 그런 야망을 갖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후훗, 어쩌면 백형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내가 군마맹을 세움에 있어 천하에서 가장 구
두쇠인 능한천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면 이해할 수 있겠소?"
"......?"
경악성은 없었으나 백무옥은 그 못지않게 눈을 치켜떴다.
"그가 군마맹의 실질적인 후원자요. 군마맹이 세워지게 된 것도 그가 모든 군자금(軍資金)을
지원했기 때문이오."
"그 말은......?"
능한천, 믿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내이기는 하나 백무옥이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
었다.
그러나 한 가지, 능한천은 백도맹인 창궁용검회의 후원자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
었다.
'그렇다면 능형은 두 집단을 모두 지원하고 있단 말인가?'
그는 미간을 모았다. 머릿속이 갑자기 어지러워진 것이다.
"이제 군마맹은 돌아오는 중추절에 창업선포를 하는 일만 남았소. 허나 한 가지 부족한 것
이 있소."
"그게 무엇입니까?"
"사람."
"사람이라니......?"
"한 자리가 비어있소. 태상장로(太上長老) 겸 군사(軍師)의 자리가."
"음......."
"그 자리를 능한천 그 친구에게 부탁을 했소. 그리고 보는 대로 단 한 마디에 거절당했소."
"후훗, 능형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것입니다."
군마맹주는 진저리를 치듯 머리를 흔들었다.
"빌어먹을 친구...... 그래도 그는 나에게 마지막 희망을 주었소. 그는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을
나에게 추천했소이다."
백무옥은 흠칫했다. 군마맹주의 지금 말은 자신을 난데없이 부른 행동과 맞아 떨어진 것이
다.
"설마......?"
"그렇소. 바로 백형이오."
뜻밖이었다. 아무리 막역지우인 능한천의 추천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막중한 지위를 초면인
그에게 넘겨주려는 군마맹주의 의도는 정녕 백무옥도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부탁하오. 태상장로와 군사, 그 지위를 맡아주시오."
그의 음성은 간곡했다. 추호도 거짓이 없었다.
백무옥은 술이 확! 깨는 듯했다.
"그...... 그것은......."
군마맹주가 백무옥의 말을 잘랐다.
"거절하지 마시오. 난 그 친구의 안목을 믿소. 그리고 백형을 만난 순간 그 지위에 가장 적
합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소."
머릿 속의 어지러운 실타래를 풀어야만 했다. 백무옥은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자리가 이인자(二人者)의 자리라 거북스럽다면 군마맹주라는 허울까지 백형에게 양보하
겠소. 뜻을 세우는 것이 중요할 뿐 지위나 신분이라는 것은 지극히 헛된 것일 뿐이니."
화통한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군마맹주는 실로 통이 엄청난 인물이었다.
태상장로 겸 군사. 그것은 이인자의 자리이지만 어찌 본다면 맹주보다도 중요한 직위라 할
수 있었다.
맹주가 상징적인 인물이라면 군사는 실질적인 모든 것을 한 손에 움켜쥐는 자리였다.
그리고 백무옥 한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 맹주의 자리마저 포기하겠다니! 그는 명예와 신
분의 야욕이 전혀 없는 인물이거나 뛰어난 모략가가 틀림없었다.
군마맹주의 음성은 일인자라는 신분을 떠나 너무도 간곡하고 진중해 웬만한 자라면 서슴없
이 허락했을 것이다.
문득 백무옥은 군마맹주라는 인물에 대해 묘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은 이곳에 오기 전 느꼈던 두려움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만에 하나, 이런 군마맹주의 모든 언행이 계산된 것이라면...... 나의 심정적인 동요까지 계
산에 넣고서 나를 얻고자 하는 것이라면......?'
백무옥은 마른침을 삼켰다.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그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군마맹주는 집요하게 백무옥을 응시했다.
"군마맹은 마도를 추구하고 있소. 사실 마도란 독선적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
을 받았소. 허나 정도나 마도나 추구하는 과정이 틀릴 뿐 정상에 이르는 길은 똑같소이다.
의술에서도 추구하는 방향이 틀리되 결국 목숨을 구하는 결과로 귀결되는 것과 마찬가지 아
니겠소?"
그의 말에서는 조금의 헛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때문에 백무옥은 뭐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사실, 그 친구에게 백형을 천거받고 난 이후에 난 이곳에 군마성을 세우기 시작했소. 백형
에게 줄 선물이 필요했기 때문이오."
"아!"
백무옥은 짧은 신음을 발했다.
'이 군마성을 나에게 주기 위해 지었단 말인가? 때문에 생사의축과 가까운 이곳에.......'
누구인들 군마맹주의 말을 듣고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백무옥은 그에 대해 더
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나의 모든 신분을 알고 있을지도...... 내가 일자살맹의 자객 십구호라는 것도, 그리고
어쩌면 창궁용검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지도.......'
백무옥은 절대 마도인물들과 타협할 수 없는 처지였다. 더욱이 마도의 인물이 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군마맹주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군마맹주가 자신과 가장 가
깝다 여기는 능한천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백무옥도 결단을 내려야 했다.
"너무 과한 직책이외다. 난 단지 이름없는 의생일 뿐이오."
"아니오. 백형은 능히 군마맹을 이끌어갈 자격이 있소."
군마맹주의 눈길은 백무옥의 마지막 대답을 촉구하고 있었다.
"제안을 거절한다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요?"
"그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소. 난 그대가 결코 거절하지 않으리라 믿고 있으니까."
"오늘은 어려운 문제는 접어두고 술만 마셨으면 합니다. 오늘 따라 유난히 술맛이 좋군요."
대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여유를 달라는 것이다.
군마맹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거절이오? 생각할 여유를 달라는 것이오?"
"언제인가 기회가 생긴다면 함께 일해볼 수도 있겠지요. 허나 지금 이 자리는 술을 마시기
위한 자리라고 생각하외다."
명백한 거절은 아니었다.
"그때라면......?"
"나의 일이 모두 마무리될 때까지요."
"흐음......."
군마맹주는 침음성을 토했다. 대신 그의 눈빛은 강렬해졌다.
백무옥은 내심 생각했다.
'거절의 대가가 죽음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무옥의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서서히 군마맹주의 눈빛이 풀렸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는 것은 말이라 하더니...... 좋소. 오늘은
내가 백형을 포기하겠소. 허나 언제라도 백형을 위해 태상장로와 군사의 자리는 비워놓을
것이오. 자, 하여간 오늘은 마음껏 술이나 듭시다."
군마맹주가 술잔을 쳐들었다.
백무옥도 미미하게 웃으며 술잔을 마주쳤다.
진한 술내음과 함께 취기가 온몸을 나른하게 했다.
* * *
백여 개의 술병이 바닥에 나뒹굴어서야 백무옥과 군마맹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새벽이었다.
군마맹주와 백무옥은 군마성을 빠져나갔다. 백무옥을 배웅하기 위함이었다.
새벽의 용천강가.
짙은 안개가 낮게 깔려 있어 이삼 장 앞도 제대로 구분하기 어려웠다.
"흐음, 강을 돌아가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는데 어이해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소."
백무옥은 군마맹주가 배를 내주겠다는 호의를 굳이 거절했다.
"이런 새벽에 걷는 것도 제법 운치가 있지요."
"하여간 백형이 부럽소.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게 그 얼마나 행복한 일
이오?"
백무옥은 내심 자조섞인 웃음을 흘렸다.
'후훗,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간다고? 그런가? 아직까지 내 뜻대로 살아온 적이 있었던
가?'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걸었다.
그때 문득 군마맹주가 걸음을 멈췄다.
"더 이상은 배웅하지 않겠소. 아무래도 혼자서 호젓하게 강가를 산책하고 싶은 눈치이
니......."
백무옥은 피식! 웃었다.
군마맹주가 그의 팔짱을 끼었다.
"한 가지 말해줄 것이 있소. 백형은 결국 나에게 돌아올 것이오."
"후훗...... 사람의 앞날은 모르는 것이지요."
"그건 그렇고? 돌아오는 중추절의 개파대전 때 꼭 와주셨으면 하외다. 다른 뜻은 없소. 나의
호의라 생각해 주셨으면 하오."
"글쎄요. 바쁜 일이 없다면......."
백무옥이 미소를 지을 때 군마맹주가 팔짱을 풀며 말했다.
"후훗! 나는 이 순간 결심했소."
백무옥이 의아스러운 듯 물었다.
"무엇을......?"
"나는 어려서 조실부모했고 누이동생과 함께 자라왔소.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착
한 누이동생이 한 명 있소. 그 아이를 백형에게 주겠소이다. 하하핫!"
"그...... 그런......?"
백무옥이 황망한 표정을 지을 때, 군마맹주는 몸을 돌려 휘적휘적 안개를 헤치며 왔던 길을
되돌아 가고 있었다.
군마맹주의 모습은 빠르게 안개 속에 파묻혔다. 그 순간 동공에 남은 잔영처럼 군마맹주의
목소리가 백무옥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백형과 그 아이는 가장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것이오. 백형도 이젠 짐작할 것이오. 나 군마
맹주는 바라고자 하는 것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루고야 만다는 것을...... 누이동생과 백
형이 합쳐지는 것은 나의 간절한 바램이오. 하하하......!"
아스라이 사라져 가는 음성, 백무옥은 한참 동안 그가 남긴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군마맹주...... 그의 누이동생...... 그리고...... 나는?'
4
― 천하의 무림동도들에게 고(告)함.
돌아오는 중추절 군마맹의 개파대전에 모두 왕림하시어 앞날을 축하해 주신다면 백골난망이
라 여기겠소이다.
군마맹은 마도를 추구하되 철저하게 피를 배격할 것이며 모든 것은 순리에 따라 처리할 것
이외다.
군마맹은 정사마(正邪魔) 누구를 막론하고 군마맹의 율법을 지키겠다는 자에 대해서는 과거
를 묻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고, 앙숙이라 여기던 마도와 백도의 싸움을 종식시키기 위해 혼
신의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외다.
부디 왕림하시어 개파대전을 빛내주시기를 바라오이다.
군마맹주(群魔盟主).
군마맹의 등장은 가히 강호에 선풍(旋風)을 일으켰다.
그들은 혜성같이 나타나 많은 화제를 뿌렸다. 이미 수만 개의 초청장이 구파일방(九派一 )을
비롯한 군소방파, 심지어 심산유곡에 은거한 기인들에게까지 전달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한 순간 강호에서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황금의 힘이었다.
황금의 힘은 능히 귀신을 부려 맷돌을 돌리게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군마맹이 지닌 황금은 엄청났다. 그것은 군마맹을 전폭적으로 후원하는 대륙제일의 거부(巨
富) 능한천의 힘이기도 했다.
이미 황하의 범람으로 물난리를 겪은 수재민을 위해 거금 일천만 냥을 내놓았으며, 배첩을
받은 무림인들에게도 하나같이 진귀한 선물을 보내 그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마도세력이란 모름지기 목적달성을 위해선 피를 원하기 마련, 그러나 그들은 피를 원하지
않는 평화를 원하는 집단이라는 점에서 더욱 세인들의 이목에 부각되었다.
결과 많은 마도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군마맹에 가입하길 원했고 정파인들 역시 군마맹에
대한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 * *
파양호.
중원의 역사를 깊은 수심에 담아두고 고고하게 자리잡은 중원의 대호(大湖).
빼어난 절경에 이끌린 시인묵객들이 줄을 지어 찾던 이곳에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발길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파양호에서 약 이백 리 가량 떨어진 노산(魯山).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자리잡은 하나의 마도
문파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것이다.
그 문파가 바로 살마문(殺魔門)이었다.
그들은 단 한 마디로 표현된다.
온갖 약탈과 도적질을 서슴지 않는 마도의 도적떼!
깊은 산중의 천험의 요새에 성채를 세운 그들은 일신에 갖춘 무공도 출중했다. 여러번이나
관군들이 토벌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막대한 피해만 입은 채 패퇴한 형편이었다.
관군의 토벌실패는 최근 그들의 기세를 더욱 살려주는 꼴이 되어 이젠 대낮에도 활개를 치
고 온갖 악행을 자행했다.
서서히 어둠이 밀려들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
뚝뚝! 떨어지는 피처럼 붉게 타오르는 노을이 서편 하늘에 쫘악! 깔렸다.
음풍곡(陰風谷).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독지(毒地)요, 간간이 땅을 할퀴고 지나가는 독풍(毒風)에 나는 새도
접근할 수 없는 곳, 이곳이 바로 살마문이 위치한 곳이었다.
살마문의 정문.
누구도 침입할 수 없다고 장담하는 그들이었지만 경계를 서는 무사들은 있기 마련이었다.
지금도 세 명의 무사가 교대를 하며 경계를 서고 있었다.
문득 얼굴에 큰 사마귀가 난 무사가 게걸스러운 침을 흘리며 말했다.
"흐흐! 이봐, 곡삼(曲三), 어젯밤에 안아본 계집맛이 어땠어? 얼굴은 별볼일 없어도 몸매는
매끈하던데......?"
옆에 있던 사내가 입맛을 다셨다.
"훗! 숫처녀였던가?"
곡삼이라 불린 자는 갖은 인상을 찌푸렸다.
"숫처녀면 뭘해, 난리를 피우길래 그냥 단숨에 죽여버렸지. 젠장...... 재수없는 계집이었어."
그 말에 두 사람은 대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카카카......!"
그들은 어젯저녁 인근에 있는 마을을 습격하고 온 무용담? 을 털어 놓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음담패설도 없다면 그들이 경계를 서야할 이 밤은 너무도 길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곡삼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봐,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사마귀 사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빌어먹을, 이건 말발굽 소리잖아. 적들이 쳐들어오고 있다!"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소리,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그만큼 정문을 향해 달
려오는 자들은 기마술에 능통한 인물들이란 뜻!
음풍곡은 웬만한 우마(牛馬)는 출입조차 할 수 없는 곳인데, 수백 필 이상은 될 듯한 말이
치달리는 소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곡삼은 다급하게 외쳤다.
"비상종을 타종해!"
"동료들을 깨워!"
세 사람이 급급히 정문을 가로막고자 했을 때, 거대한 먼지 기둥은 이미 살마문의 정문쪽으
로 밀어닥치고 있었다.
두두두두......!
거대한 먼지기둥을 동반한 폭풍!
그들의 기세는 폭풍 그 자체였다.
수백 필은 될 듯싶은 말. 마상에는 기치창검을 휘날리며 무사들이 타고 있었다.
용문이 푸른 수실로 수놓아진 깃발, 더불어 깃발에 쓰여져 있는 두 글자.
의혈(義血)!
그렇다. 그들은 바로 창궁용검회에서도 일당백의 고수로만 편성된 창궁의혈대였다.
"창궁용검회의 이름으로 마를 심판한다!"
"한 놈도 남기지 마라!"
각자의 전포 가슴에 새겨진 용문, 그 용문이 살아 날아갈 듯 그들의 가슴에서 꿈틀거렸다.
쿠쾅......!
폭풍같은 돌진에 정문이 부숴지고, 그들은 그 기세 그대로 살마문을 휘감아 들었다.
츠츠츠츳......!
동시에 움켜쥔 그들의 검에서는 엄청난 빛살들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가공스러운 검기였다.
"크아아악......!"
"창궁용검회가 나타났다!"
폐부를 후벼파는 듯한 비명성과 사신(死神)을 본 듯한 공포성이 한데 어우러진 순간이었다.
뎅뎅뎅......!
살마문의 도처에서 요란한 비상타종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들의 대응도 빨랐다. 어젯밤의 승고(勝鼓)를 울린 그들이었으나 한 순간 병장기를 꼬나쥐
고 이곳저곳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진세를 발동시켜!"
"살마문의 위세를 보여주자!"
그러나 그들의 대응은 창궁의혈대의 기세에 비하면 그것은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한 것
이었다.
"쓰레기를 소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
"마음껏 소각하라!"
몇마디 웅후한 외침이 토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마상 위에서 엄청난 빛살들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하늘을 찢어 발기고 땅을 파헤치며 뿌려지는 새하얀 검기. 순간 살마문 무사들의 비명이 하
늘을 뒤덮었다.
"크아악......!"
"케엑......!"
잘려진 팔다리는 물론이요, 목없이 나뒹구는 시체가 몇구인지 셀 수도 없었다.
속절없이 쓰러지는 살마문의 무사들, 찐득하게 땅을 적시는 핏물, 그 핏물을 튀기며 창궁의
혈대의 가공할 살행은 계속 되었다.
창궁의혈대는 창궁용검회에서도 최정예 고수들로 일당백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낭설
이 아니었다.
웬만한 진세나 숫자상의 우위로는 의혈대를 막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
다.
싸움이 시작된 지 반 각도 되지 않아 싸움의 우열은 일시에 드러났다.
싸움은 일방적으로 창궁의혈대의 압승으로 기울어졌다.
살마(殺魔)가 휩쓸고 간 맨 뒤쪽.
한쌍의 남녀가 마상에서 팔짱을 낀 채 오연하게 일방적인 도살(屠殺)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그들은 다름아닌 창궁비연 초류화와 용검공자 냉조린이었다.
냉조린의 왼손에는 한 개의 향(香)이 피워오르고 있었다.
마도문파 하나를 격파할 때마다 생긴 버릇이었다. 향 하나를 태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일각,
일각이 채 지나지 않아 창궁의혈대는 능히 마도문파 하나를 전멸시켜 버렸다.
그만큼 그들의 무공은 가공할 것이었다.
문득 냉조린의 입꼬리가 말려올랐다.
'삼분지 일로 줄었군.'
향이 줄은 만큼 살마문의 멸문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초류화와 냉조린이 창궁의혈대를 이끌고 강호에 나온 것은 창궁대협을 암살한 자객 십구호
를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십구호의 종적도 발견할 수 없었고 대신 그 화풀이라도 하듯
중원을 가로지르며 마도문파의 씨를 말리고 있는 것이었다.
초류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 놈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
그녀의 곁에 있는 자라면 으스스 몸을 떨어야 했을 것이다.
냉혹한 얼음꽃.
감정이라고는 한 점도 보이지 않는 비정함이 그녀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사실 마도인들에 대한 그녀의 증오심은 처절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일자살맹, 그녀는 그 자객집단을 마도로 치부해버렸다. 자신의 할아버지를
죽인 자, 백도의 거목을 죽인 자라면 마도인들밖에 더 있겠는가!
초류화,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힘으로 모든 마도의 무리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도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나의 손에 쓰러진다. 나의 운명을 바꾸고 나의 손에 검을
쥐게 한 장본인들. 추한 악(惡)은 강호에서 없어져야 한다.'
강호제일미라 불리는 초류화, 그러나 그녀의 무공이 창궁용검회 내에서도 두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고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냉조린은 흘깃 초류화를 바라보았다.
'하여간 대단한 여인이야. 사내도 이루지 못할 엄청난 일을 일사천리로 해나가고 있으니.'
그는 못마땅했다. 사실, 창궁의혈대는 거의 그녀의 주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나보다 더 잔인하고 냉혹한 계집!'
그는 초류화의 치밀함과 비정함에 질투와 두려움마저 느꼈다.
냉조린은 히죽!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초류화, 그 아름다운 꽃을 꺾을 수 있는 사내는 오직 나 뿐이라는 것을 알아라. 누구도 나
의 꽃에 눈독을 들이지 못한다.'
아름다움은 세월에 시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명예는 그가 죽고 수십 성상 세월이 지나도
소멸되지 않는다.
냉조린이 초류화를 취하고자 하는 것은 외면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신분 때문이
었다.
창궁대협의 손녀딸이라는 신분은 냉조린을 창궁용검회의 회주로 만들어주는 데 충분할테니
까.
냉조린은 초류화를 향해 다가갔다.
"후훗, 과연 사매의 지략은 천하제일이오. 이 험준한 곳까지 기마대를 이끌고 단숨에 살마문
을 궤멸시키고 말다니......."
기동력으로 살마문을 궤멸시킨 것에 대한 칭찬이었다.
초류화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차갑게 말했다.
"소동(小童)도 생각해낼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었어요. 이걸 생각해내지 못했다면 감히 의혈
대를 이끌 자격이 없다고 해야겠죠."
냉조린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건방진 계집! 아름답고 똑똑한 건 인정한다. 허나 그 오만함은 인정할 수 없다. 조금만 헛
점을 보이거라, 당장 네년을 꺾어 주겠다.'
초류화는 냉조린은 물론 어떤 사내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물론 냉조린이 자신에게 잘 보이
려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허나 그녀가 관심있는 사내는 한 명, 십구호 뿐이다.
'냉조린은 용이 아니다. 저 자는 토룡(土龍)에 불과하다. 한심한 놈, 놈은 백도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을 뿐더러 오로지 나의 육체와 창궁용검회주라는 헛된 지위만을 노리고 있으
니.......'
냉조린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사매, 살마문을 무너뜨렸으니 다음은 어디로 갈 작정이오? 이젠 검회로 돌아갈 때가 되었
다고 여기는데...... 너무 오랫동안 맹을 비웠고, 검회주 자리마저 공석이니......."
"분명히 말하지만 조부님을 쓰러뜨린 그 자를 잡기 전에는 절대로 검회로 돌아가지 않아
요."
그녀의 음성은 얼음칼로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검회주가 없다해도 창궁은 무너지지 않아요."
"하지만 정신적 지주인 검회주 자리를 너무 오랫동안 공석으로 남긴다는 것은......."
"그토록 검회주 자리가 비어있는 것이 못마땅하다면 사형께서 돌아가 그 자리에 앉지 그래
요. 얼마든지 위임장을 써줄테니."
"무슨 말을 그렇게......!"
냉조린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집어 삼켰다.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냉조린은 다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매의 다음 계획은 뭐요?"
어느 틈에 싸움은 끝나 있었다. 살마문을 궤멸시킨 수하들이 보고를 하기 위해 두 사람에게
다가설 때 초류화는 느릿하게 말했다.
"거금상각이 있는 파양호로 갈거예요."
"거금상각이라면......?"
"거금상각주 능한천은 조부님을 암살한 십구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처지, 그 자가 과거
서신(書信)으로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이제 십구호를 찾을 수 있는 단서
는 그 사람밖에 없어요. 십구호는 꼭 내손으로 잡을 거예요."
"그 다음은?"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그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군마맹으로 갈거예요. 그들은 엄연한 마도의 집단. 군마맹주를 만나 그가 용서할 수 없는
자라 판단되면, 그 날로 군마맹은 살마문의 전철을 밟을 거예요."
차갑게 중얼거리는 초류화의 음성엔 모골을 송연케하는 진한 살기가 내포되어 있었다.
냉조린의 몸은 절로 떨려왔다.
'독한 계집! 강호의 피바람은 이 계집이 다 일으키는 군.'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