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장 핏줄!
1
한 치 앞을 구분할 수 없는 암흑 속이었다.
그 속에서 누군가 흡사 어둠과 일부인 양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일신에 빛바랜 흑의(黑衣)를 걸친 이십대의 젊은 사내, 나이가 소장에 불과하나 그에게서는
천하를 오시하는 듯한 거만함이 느껴진다.
그는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를 기다리듯 앉아 있었다.
그렇다. 그는 벌써 이십 칠 년 동안이나 어둠 속에서 기다려 왔다.
일어설 때를.......
그리고 이제 그 때가 온 것이다.
검(劍).
길이는 이척팔촌(二尺八寸).
검신은 온통 피를 머금은 것 같은 핏빛의 순혈검(純血劍)이었다.
사내의 무릎 위엔 언제부터인지 그 검이 놓여져 있었다.
츠으으...... 츠으!
그 순혈검에서는 기이한 혈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 피어나 흑의사내의 전신을 소리없이 감싸는 핏빛 안개, 그것은 마기(魔氣)였다.
철저한 마(魔)를 터득한 자만이 느낄 수 있고, 발할 수 있는 절대마기(絶代魔氣)가 바로 그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순혈의 검이 핏빛의 호흡을 토해내고 있었다.
하아아...... 하아!
짓눌려 나오는 악마의 흐느낌처럼...... 억겁지옥 속에 떨어진 사신의 울부짖음과 흡사한 그것
은 정녕 섬뜩하고 공포스러운 검명(劍鳴)이었다.
그리고 사내의 무릎 위에 놓인 순혈검은 혼자서 살아움직이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사내의 손이 아주 느릿하게 검신을 쓰다듬었다. 마치 계집의 몸을 애무하듯 소중하게 어루
만지고 있는 것이었다.
"일컬어 암흑영혼혈, 이 이척팔촌 피의 검에는 선조(先朝)들의 영혼이 스며들어 있지. 그리
고 나와 더불어 나의 피를 먹고 이만큼 자랐다."
문득 검신을 쓰다듬던 사내의 손이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다시 어둠 한켠이 움직이더니 한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나타나자 마자 사내의 앞에 부복했다.
"그동안 너무도 오랫동안 암흑속에서 기다려왔습니다."
사내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눈은 무저의 입구처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섬뜩한 눈이었다.
문득 사내가 척!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본좌가 왜 이렇게 기다렸는지 아시오?"
노인은 공경한 음성으로 말했다.
"부주의 뜻, 아니 맹주의 뜻이 적어도 천하를 거의 장악할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
인줄 아외다. 과거 선조들이 마도천하의 야망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 너무도 경박하게 움직
였다는 것을 알기에, 그게 실패의 근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고
자 철저하게 기다린 것으로 아외다."
"본좌는 이 검을 물려주신 부친께서 창궁대협에게 무참하게 베어지는 광경을 보며 다짐했소
이다. 결코,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그리고 이제 그 뜻을 이룬 이상 내가 일어
설때가 되었소이다."
노인은 감격에 겨운 음성을 발했다.
"맹주! 이제 천하를 장악할 모든 준비를 이루었습니다. 이젠 맹주가 일어선다 해도 천하의
그 누구라도 맹주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외다."
사내의 허연 이가 암흑 속에서 선명하게 보였다.
"그렇소. 가로막는 자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이렇게 베어질테니까. 나 독고한천(獨孤寒天)
에게!"
그 순간이었다.
그의 검을 쥔 그의 손이 소리없이 기쾌하게 앞으로 뻗어졌다.
슈...... 파아아앗!
한 줄기 섬광이 어둠을 밝혔다.
그리고 너무도 선명하게 어둠이 갈라져 내리고 있었다.
한 줄기 핏빛 섬광이 스쳐가는 어둠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갈라져 내리는 광경은 가히 장관
이었다.
그 갈라지는 핏빛의 섬광 속에서 뚜렷하게 앉아있는 두 사내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가히 사내다운 사내의 표본이라 할 수 있을 듯한 인물과 얼굴 전체가 거미줄 같이 얽히고
설킨 상흔으로 뒤덮힌 추한 몰골의 노인.
두 사람,
그들은 바로 능한천과 그의 흑노였다.
거금상각의 가주이며 백무옥에게 있어 의형과도 같은 존재, 그리고 백도맹인 창궁용검회의
얼굴없는 후원자라 알려진 인물이 뜻밖에도 어둠의 제왕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핏빛의 섬광으로 갈라진 어둠, 어둠은 다시 주위의 모든 사물을 삼켜버렸다.
문득 흑노가 부복한 채 입을 열었다.
"그는 어쩌실 거외까?"
능한천은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머지않아 천하는 나 능한천의 손에 움직여지오. 그는 내가 천하의 제왕으로 등극함에 있어
절실히 필요한 존재!"
흑노가 고개를 들어 능한천을 바라보았다.
"거부한다면?"
"나의 손에 베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오. 야망을 위해서 피는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그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고, 그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를 베리라!"
흑노는 피가 끓어 올랐다.
'독고예사, 그 친구는 정말 훌륭한 아들을 두었다. 그의 아들이 나의 주군임이 자랑스럽다.'
2
냉조린은 떠나고, 초류화도 동이 터오기 전에 거금상각을 떠났다.
자객 십구호에 대한 마지막 단서를 위해 거금상각에 왔던 창궁용검회의 인물들은 만나고자
했던 거금상각주 능한천을 만나지도 못하고 떠났다.
그들이 왜 갑자기 떠나갔는지, 그들을 정중히 대접했던 거금상각의 인물들은 모두가 어리둥
절했다.
그럴 즈음 또 다른 손님이 이곳을 방문했다.
방문한 사내는 백무옥이라 했다.
지객당에 머물러 있는 자는 죽립을 깊이 눌러쓴 백무옥이었다.
아침에 일을 마치고 돌아온 흑노는 어쩔 수 없이 초류화나 냉조린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 해
야 했다.
"각주께서는 이틀이 지난 후에야 돌아오십니다. 계속 각주를 기다리겠다면 언제까지나 이곳
에 머물러 계셔도 좋소이다."
백무옥은 권태스럽다는 듯 흑노에게 서찰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건......?"
흑노는 예리한 눈길로 백무옥을 주시하며 서찰을 받아들었다.
"봐도 무방하오. 그걸 각주가 돌아오시면 전해주시오."
백무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문을 나섰다.
흑노의 작은 눈은 더욱 예리해졌다.
'백무옥! 맹주님의 말씀은 한 치도 거짓이 없었다. 저러한 기세는 가히 맹주님과 비견될 만
한 것! 저 자가 친구가 된다면 가장 좋은 동조자를 얻은 것이고 적이 된다면...... 저 자를 죽
이지 않고는 대업을 달성할 수 없으리라!'
이미 개봉된 서찰, 흑노는 보고자 한 것이 아니었으나 글자는 이미 그의 눈에 들어와 있었
다.
<능형, 오실 때까지 파양호의 등왕루(騰王樓)에서 기다리겠소.
소제(少弟) 백무옥>
등왕루는 파양호변의 아름다운 절경을 감상하고 내려다 보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끝이 없는 듯한 푸른 창파(蒼波)와 주위의 경관과 어울린 조화, 그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외
경심을 지니게 한다.
등왕루를 찾아든 자라면 단숨에 주위의 절경에 매료되기 마련, 때문에 미처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으리라.
마찬가지로, 등왕루 한쪽 구석에 기대어 묵묵히 앉아있는 한 사내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들
은 아무도 없었다.
백무옥은 석상처럼 앉아있었다. 그나마 간간이 술을 마시는 동작마저 없었다면 영락없이 죽
은 사람으로 인식할 정도였다.
십여 개의 술병이 그의 주위에 나뒹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앉아있었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장 이틀. 그동안 그에게 친구가 되어준 것은 술 뿐이었다.
벡무옥은 고개를 들어 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최근 강호엔 오로지 군마맹이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떠오르고 있다.'
그는 암중으로 군마맹에 대하여 조사해보았다.
그들은 창궁용검회와 구파일방을 제외한 모든 세력들의 동조를 얻고 있는 상태였다. 황금에
현혹된 그들은 거의 팔할 이상이 군마맹의 명령대로 움직일 공산이 컸다.
마도세력들은 원래 결집되기가 쉽지 않은 법이었다. 그런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황
금 때문이 아닌 모든 마도세력들마저 군마맹에 파격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추측해 보았다.
'군마맹주는 오랫동안 군마맹을 만들어 왔고, 강호인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백무옥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군마맹주가 궐기하여 강호를 장악하고자 한다면 강호는 사상 최대의 혈겁(血劫)에 휩쓸릴
것이고, 늦어도 두 달 이내에 백도는 완벽하게 몰락한다. 그만큼 그들의 힘은 가공할
것......!'
군마맹의 힘은 대륙천하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군마맹이 강호인들의 동조를 얻는 것은 무혈(無血)의 의지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은 천하각
대문파에 서슴없이 지원금을 보냈고, 군마맹이 뿌리는 황금은 강호인들에게 신뢰감을 주기
에 충분했다.
더불어 근래 창궁의혈대가 일으키는 혈겁은 그들의 의행(義行)과는 좋은 대조를 보였다.
인간의 마음이란 다분히 간사했다. 당연히 스스로의 이익을 쫓기 마련. 철저하게 백도를 추
구하는 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군마맹에 동조를 보내고 있는 게 당금무림의 형세였다.
그러나 백무옥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군마맹의 정체였다. 그들의 진정한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멸문했지만 오늘날까지도 마도제일세력은 암흑마황부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다.
그런데 암흑마황부는 철저하게 어둠 속으로 숨어버린 상태이고 마도세력들은 너나할 것 없
이 군마맹을 투종한다.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술잔을 쥔 백무옥의 손이 떨려왔다.
'만에 하나, 암흑마황부가 군마맹으로 화신한 것이라면...... 가장 잔인하다고 알려진 그들이
스스로를 위장하기 위해 무한대의 황금으로써 그리고 선행으로 천하인들을 현혹하고 있는
중이라면......?'
목이 갈라질 듯 타왔다. 그는 급하게 술잔을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그의 생각은 항상 한 발짝 앞서갔다. 미리 예측하고 행동하는 자객의 습성이 몸에 밴 탓이
었다.
군마맹주는 백무옥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인물이었다. 적어도 강하다는
것 한 가지만 놓고 말한다 해도.
사실, 그는 군마맹주를 만났을 때 그 자를 베고자 시도할 수 있었다. 허나 그때는 그의 의도
를 몰랐고,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 추측 뿐이었지만 자신의 추측이 맞는다면 언제고 그를 베
어야 했다.
백무옥은 그때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만약 그때 그가 악인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나는 그를 베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그를 벨 자신이 없었다. 그는 군마맹주에 비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벨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녕, 그자가 암흑마황부의 수뇌이고 음모의 주재자라면 그는 최고의 악마를 암살할
절호의 기회를 이미 한 번은 놓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몰
랐다.
* * *
아마도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문득 백무옥은 감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런데 언제 나타났을까?
그의 일 장여 앞에서 뒷짐을 지고 파양호의 물결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순간 백무옥은 거대한 무엇을 느꼈다.
사내의 등에서 느껴지는 것은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벽이었다.
그때였다. 사내가 서서히 몸을 돌리며 웃었다.
"하핫, 백형이 날 찾아와 주는 날이 있으리라곤 생각치도 못했소. 곤히 잠자고 있기에 깨우
지 않고 잠시 기다렸소."
그는 바로 능한천이었다.
"아! 능형......."
백무옥은 덥석 능한천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들이 다시 만나는 것도 꽤나 오랜만이었다. 창
궁용검회에서 나온 이후로는 한 번도 서로의 소식을 들어보지 못한 처지였다.
"그동안 무고하셨소?"
"하핫, 상인이란 잠시도 쉴 틈이 있어서는 아니되지요. 언제나 투자 가치를 찾아 떠돌아야
하는 게 상인이니까."
능한천의 웃음은 여전히 싱그러웠다.
"장원까지 찾아왔으면서 서찰만 남겨놓고 가는 것은 너무하셨소. 나의 대접이 섭섭하셨소?"
"아니외다. 그건...... 단지 능형께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누라니? 그게 무슨?"
"능형도 이미 알고 계시다시피, 저는 일개 의생이 아니외다. 내가 머물러 있는 곳에는 항상
불행이 뒤따를 터, 때문에 능형의 곁에 머물지 않았던 것입니다."
능한천은 못내 섭섭한 듯 두 눈을 치켜떴다.
"으음,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백형이 누구이고, 또 설혹 살인마라 해도 나와 백형과
의 사이는 불변하오."
"능...... 능형!"
"아무 소리 마시오. 불행이 있으면 나누어 가져야 하고, 백형의 인생에서 나를 떼어내고자
한다면 나는 꽤나 섭섭할 것이오."
"죄송하외다."
"어서 나의 장원으로 돌아갑시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마음껏 술이나 마셔봅시다."
능한천은 표정을 바꾸며 백무옥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러나 백무옥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장원에 가서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될 것을......?"
"제가 알고 싶은 것은 화급을 다투는 일입니다. 능형께서는 꼭 사실을 밝혀 주셨으면 합니
다."
백무옥은 능한천을 직시했다.
"그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능형과 그 자가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어이해 저를 그 자에
게 추천했는지......?"
백무옥의 말은 빠르게 이어졌다. 그러나 능한천은 묵묵부답하며 서있을 뿐이었다.
"능형!"
백무옥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져서야 능한천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였다.
"군마맹주, 그 자에 대해 묻는 거요?"
"그렇습니다."
문득, 능한천의 시선은 파양호의 푸른 물결로 향했다.
그의 그런 태도에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
"어차피 나는 머지않아 있을 군마맹의 개파대전에 귀빈으로 초대받아 가야할 몸, 함께 가면
서 이야기 합시다."
3
두두두두......!
한 대의 마차가 황진(黃塵)을 일으키며 관도 위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서북 쪽의 관도, 그 관도를 따라 닷새 이상을 치달리면 장안성에 당도하게 된다.
채찍을 휘날리며 마차를 모는 마부석의 추한 노인은 흑노였고, 그와 대조적으로 마차 안의
두 사람은 젊고 준수했다.
백무옥과 능한천이었다.
거금상각을 떠나온 지 사흘째, 그들은 장안성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 뿐만 아니라 검을 쥔 무림인들이라면 대부분 장안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장안성에서 개최되는 군마맹의 개파대전 때문이었다.
열어젖힌 창문으로 지나는 산야, 그것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표정은 대조적이었다.
능한천은 시종일관 유쾌해 보였고, 백무옥의 얼굴은 웃음을 모르는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문득 능한천이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역시 강호의 산천은 아름답단 말이야. 그렇지 않소, 백형?"
"그렇군요."
"많은 곳을 유람해 봤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은 역시 파양호의 절경이지. 비록 이번에는 바
쁜일 때문에 그냥 오긴 했으나 다음에는 백형과 함께 파양호의 절경명소만을 찾아 열흘 밤
낮으로 구경하고 싶소이다."
백무옥은 빠르게 지나는 차창 밖의 풍경에 도취되었는지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나중에 올 때는 제수씨와 함께 오시오. 그때라면 나도 내 부인을 만들어 백형에게 소개시
켜 주겠소."
백무옥은 미소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히이이잉......!
말 울음소리와 함께 치달리던 마차가 돌연 멈춰섰다.
두 사람의 몸이 급격히 앞으로 쏠렸을 때, 흑노의 공손한 음성이 들려왔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각주님, 마차를 가로막는 야적들이 있습니다."
"야적이라고?"
"십여 명쯤 되어 보이는데 금방 타일러서 길을 비키도록 만들겠습니다."
능한천은 손가락을 들어 턱을 매만졌다.
"으음, 강호의 야적이라면 섣불리 상대해서는 안되지. 흑노, 은자 몇푼 쥐어 주어서 시비없
이 돌려보내도록 해라."
백무옥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면에서도 박학다식한 능한천, 그러나 그는 아직 강호의 야적떼들을 만나본적이 없는지
대응 방법이 어리숙했다.
'한 푼 쥐어 주면 나중에는 속옷까지 빼앗는 게 바로 그들이외다, 능형.'
백무옥은 다음 장면이 짐작이 갔다.
"알겠습니다."
흑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사나운 외침이 토해졌다.
"썩 나와서 무릎을 꿇어라!"
"남김없이 털어놓는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크하하핫......!"
들려오는 광폭한 외침소리에 백무옥의 고개가 흘깃 돌아갔다.
오 장여 전방에 십여 명의 사내들이 길을 막고 서있었다.
하나같이 몸집이 건장하고 흉흉한 눈빛을 발하고 있는 자들, 일신에 지닌 병장기와 사나운
차림새는 그들이 강호의 야적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리게 했다.
흑노가 그들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신거렸다. 품 속에 은자를 꺼내 그들을 달래고 있는 것
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어 흑노를 한방에 날려버리고 침을 뱉고 있었다.
그래도 흑노는 일어서서 그들에게 사정했다.
그때였다.
야적들 가운데 한 명이 거대한 귀두도를 허공으로 쳐들었다. 그리고는 금방이라도 베어버릴
듯이 흉흉하게 휘둘러왔다.
백무옥은 더 이상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잠깐만 계십시오."
백무옥이 급히 밖으로 나가려 하자, 능한천이 그의 손을 완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만 두시오. 흑노가 알아서 처리할터, 문을 닫고 편히 쉬도록 하시오. 저런 야적떼들에게
까지 신경 쓸 것까지는 없잖소."
능한천은 슬쩍 창문을 휘장으로 가렸다.
그 찰나의 순간 백무옥은 놀라운 장면 하나를 볼 수 있었다.
휘장이 쳐진 순간 약속이라도 하듯 흑노의 눈에 기광이 스쳤다.
금방이라도 야적들의 귀두도에 난자될 듯 위태로워 보이던 흑노가 홀연 느릿하게 허공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 손이 움직여지는 곳에서 달려들던 십여 명의 야적들이 거짓말처럼 쓰러져 가고 있지 않
는가!
비명도 없었다. 흑노의 손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상처도 하나 없이 픽! 픽! 쓰러지는 것
이다.
'저럴 수가......!'
휘장이 닫혀지고 더 이상 밖의 광경을 볼 수 없었지만 백무옥의 뇌리에는 조금 전의 광경이
도장을 찍은 것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단 한 번의 손짓이 무려 일흔 두 가지의 변화를 일으켰다. 놈들은 모두 사혈을 찍혔기 때
문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능히 강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수 있는 가
공할 고수! 대체 흑노가 누구이길래......?'
그리고 그 놀라움이 다 끝나기도 전이었다.
덜컹!
마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거금상각의 총관이 강호의 절정 고수라면, 그렇다면 능형도......?'
흑노, 달리 말하자면 독고예사와 더불어 암흑마황부의 이인자였던 공노!
어찌 백무옥이 그에 대해서 알 수 있겠는가?
백무옥이 능한천을 바라보았을 때 문득 능한천이 그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백형이 군마맹에 대하여 알고 싶다 했으니 내가 있는대로 말해 주겠소."
팽팽한 긴장감이 백무옥의 전신을 휘어감았다.
지금 능한천의 입에서 흘러나올 말들은 백무옥이 그를 만나러 온 목적인 동시에 향후 강호
의 운명과 직결되는 말인 것이다.
능한천은 담담하게 말했다.
"군마맹에 대해서는 사실 나도 아는 바가 없소."
백무옥은 내심 실망했다.
"없다니......?"
"군마맹이 무얼 하는 집단이고,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는가 따
위는 나도 모르고 신경을 쓸 필요도 없소."
능한천은 백무옥을 직시했다.
"난 군마맹주란 자를 믿고 거금의 황금을 투자한 것 뿐이니......."
백무옥의 눈빛은 예리해졌다.
"그게 다요?"
"더 있다면, 난 군마맹주의 말대로 군마맹의 후원자이고, 또한 백형을 천거한 사실이 있기도
하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백형이 알고자 하는 바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 줄지는
의문이오."
백무옥의 얼굴엔 실망의 표정이 역력했다.
"그렇다면, 군마맹주라는 자는 누구요? 그리고 능형과는 어떻게 되는 사이요?"
능한천은 피식! 웃었다.
"후훗, 상인(商人)과 사업가의 관계라 해둘까?"
"그 말씀은......?"
"후훗! 백형도 알다시피 나는 상인이요. 상인이란 어떠한 경우에든지 황금의 이익을 쫓아 행
동하기 마련이오."
"......."
"나는 군마맹주에게 후에 거둬들일 황금을 위해 지금의 손해를 감수한 것 뿐이오. 그 자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도 없고, 알 필요도 느끼지 않소. 내가 아는 건 그는 신용이 있는 인
물이라는 것이며, 나중에 내가 투자한 황금의 두 배 이상의 이익을 남겨줄 수 있는 인물이
라는 사실 뿐이오."
백무옥의 얼굴은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 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투자를 한단 말이오? 그리고 그 자를 모르고 있다면 어이해 나
를 천거했소?"
순간 능한천의 얼굴이 엄숙해졌다. 백무옥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그의 가슴 속에서 끓어
오르는 분노를 잠재워 버리는 묘한 힘이 있었다.
"백형을 천거한 것 역시 투자의 하나일 뿐이오."
"......?"
"백형은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한 가장 이익을 많이 줄 수 있는 투
자대상이기도 하오. 그 말은 곧 백형을 군마맹주 이상으로 높은 투자가치를 지닌 대상으로
평가한다는 말이오."
능한천의 눈빛은 강렬해졌다.
"나는 사실 군마맹주의 야망을 믿고 나의 전 재산을 투자했소. 하지만, 역시 최후의 투자대
상은 백형이 될 것이오."
"으음......!"
백무옥은 침음성을 흘렸다.
"군마맹주의 야망은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소. 또한 가장 잔혹하고 무서운 자라 할 수 있지.
그런 자가 강호의 패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많은 싸움이 일어남을 의미하고, 그 많은 싸움은
더 많은 장사를 필요로 하게 되오."
"많은 장사라는 것은......?"
"후훗, 사람장사, 말장사, 그리고 병장기 장사, 또한 군량미...... 후훗, 거대한 세력을 유지하
기 위해서는 많은 물자가 필요한 것은 필수, 그 많은 물자를 나 혼자 독점하면 내가 지금까
지 쓴 황금의 두 배 이상 되는 이익을 적어도 오 년 안에 찾을 수 있지 않겠소?"
백무옥은 몸이 떨리는 것을 제지할 수 없었다.
그것은 지나칠 정도로 치밀하고 완벽한 계획이었다. 능한천 그는 철저한 상인이었다.
"군마맹주, 그는 확실히 무서운 사람이나 그는 백형이 지닌 것을 가지지 못하고 있소. 끈질
긴 생명력과 인내력, 그리고 꺾일수록 강해지는 잡초같은 근성, 그걸 지녔기에 나는 감히 백
형을 강호제일인이라고 판단하고 있소."
백무옥은 침중하게 말했다.
"아니오, 잘못 보았소."
능한천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잘못 보지 않았소. 그래서 나는 그 자에게 백형을 자연스럽게 접근시킨 것이었소. 그
자는 형식적인 강호패주로 머물러 있게 될 것이고, 후훗...... 그리고 모든 실질적인 책임자는
백형이 될 것이오. 그런 두 사람을 동시에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나의 즐거움은 꽤나 큰 것
이 아니겠소? 하하하......!"
능한천은 백무옥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웃었다.
충격이었다. 너무도 큰 충격이어서 백무옥은 머리 속이 텅 비어 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
다.
'능형...... 나를 가장 잘 이해한다 여겼던 능형이...... 이익에 눈이 먼 장사꾼에 불과했단 말인
가?'
어느새 대소를 멈춘 능한천이 신중하게 물었다.
"백형, 군마맹주의 제의를 어찌 생각하시오? 백형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또한 강호를
위해 군마맹주의 부탁을 허락해 주시길 바라겠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백무옥의 음성은 격했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오는 묘한 배신감 때문이었다.
능한천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머물고 있었다.
"백형의 기분은 이해하오. 하지만 군마맹주를 위한 것보다는 나를 위해 잠시 동안이나마 그
지위를 맡아 줄 수는 없겠소?"
백무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소이다."
능한천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선 섬광이 번쩍였다.
"능형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소. 하지만 그 일이 마도세력과 손잡는 일인 이상 어쩔 수
가 없소."
"으음, 유감이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이해 그리도 마도세력에 대한 백형의 원한이 깊은지?"
"그들이 지금은 평화를 위장한다 하더라도 언제인가 반드시 피를 원할 것입니다. 마도에 대
한 사사로운 가문의 원한을 들추지 않더라도 강호의 대의를 위해 군마맹주 그 자는 반드시
나의 손에 쓰러져야 합니다. 이제 모든 것을 확인한 이상 저는 군마맹주 그 자를 쓰러뜨리
는 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백무옥의 어조는 결연했다.
능한천은 한참동안 백무옥을 응시하다 슬쩍 말문을 열었다.
"진실로 강호의 대의를 원한다면 용서해야 할 자는 용서해야 한다고 믿소. 정녕 백형의 뜻
은 바뀌지 않겠소?"
"용서한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언젠가는 반드시 피를
원하는 마인들은 다시 일어서기 마련입니다."
능한천은 고개를 저으며 진정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으음...... 유감이야...... 정녕 유감이외다."
"죄송하외다. 능형, 하지만 저의 결심이 이렇다 해도 능형께 투자까지 포기하라고 말씀드리
지는 못합니다. 어디까지나 투자는 능형이 하시는 것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백무옥은 입을 다물었다.
마찬가지로 능한천도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색한 침묵이 마차
안에 감돌았다.
능한천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는 언제인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어쩔 수 없다는 듯 씁쓰레한 미소가 입가에 남아있을 뿐이다.
'으음, 결국......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인가. 무옥 너를 얻고자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
고자 했거늘...... 결국은.......'
백무옥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죄송하외다, 능형.......'
침묵으로 일관하는 두 사람이었으나 마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그리고 마지막 풍운은 역사의 고도 장안성에서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4
장안성으로 접어드는 관도변에는 많은 강호인들이 왕래하고 있었다.
각양각파의 수많은 무사들이 모여드는 가운데 한 대의 마차가 느릿하게 장안성 내로 접어들
고 있었다.
"여기쯤에 내려 주십시오. 길이 갈라지니 걸어가겠습니다."
"웬만하면 장원까지 태워다 주겠소."
"괜찮습니다. 여기까지 태워다 주신 능형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백무옥은 마차에서 내려 포권을 취했다.
능한천은 꽤나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쁘게 오느라 술을 마실 기회도 없었던 것은 유감이오, 백형."
"저도 그렇습니다."
"삼 일 후 군마맹의 개파대전 때 봤으면 좋겠소."
백무옥은 잠시 말문을 끊었다.
"예, 바쁜일이 없다면 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능한천은 예의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꼭 와주셔야 하오, 백형!"
창문이 닫히고 마차가 멀어져 갔다. 마차는 곧 많은 인파에 묻혀 사라져갔다.
'꼭 가겠소. 군마맹주, 그 자를 제거하기 위해!'
* * *
백무옥이 생사의축으로 들어선 것은 날씨가 어둑해졌을 때였다.
생사의축은 깊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어두워지면 병자들이 끊기기 마련. 더욱이 근래 백
무옥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병자들의 수효는 급격히 떨어졌을 것이다.
생사의축에 들어선 백무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조용하군.'
사람이 많지 않은 생사의축이었지만 밤이 되면 하인들이 자는 방 안에는 불이 켜지기 마련.
하지만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저녁에는 하인들의 방 안에도 불이 꺼져 있는 것이다.
백무옥은 주위를 둘러보다 서서히 발길을 후원 쪽으로 옮겼다.
그가 난향이 가꾸는 차밭 사이로 접어들때였다.
돌연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백무옥 앞에 덥석 절을 했다.
"주인님, 오셨군요. 헤헤!"
막리격이었다.
백무옥은 막리격을 보자 괜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후훗, 그래 잘 있었느냐? 그런데 난향은......?"
"아, 안에 계십니다. 그...... 그런데...... 주모님께서...... 주모님께서......."
막리격은 말을 더듬거렸다.
백무옥이 먼저 그의 뜻을 알아챘다. 다급하면 말을 더듬는 막리격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
는 그였다.
"알았다."
백무옥이 후원으로 걸음을 옮기자 막리격은 뒤쪽에서 헤픈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헤헤...... 헤헤......."
어딘지 기쁨이 배어 있는 웃음이었다.
백무옥은 의아스러웠다.
'무언가 난향에게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인데......?'
방 안에는 촛불 두 개가 사르르! 몸을 사르며 안을 훤히 밝혀주고 있었다.
그리고 난향은 이부자리 위에 앉아 무언가를 품에 안고 있었다.
막 안으로 들어서던 백무옥은 난향의 젖가슴이 박속처럼 열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난향은 가슴을 열어놓고 무엇을 하는 것일까?'
난향이 품 속에 안은 것은 강보로 싼 자그마한 물체였다.
백무옥은 안으로 들어서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충격과 기쁨에 휩싸였다.
'난향이 아기를......?'
그렇다. 난향은 품 속에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고 있었던 것이다.
"루루, 아가야...... 어서 많이 먹고, 어서 자라거라."
난향은 아기에게 빠져 백무옥이 다가서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백무옥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저 아기가 바로 나의 핏줄...... 내가 거금상각에 다녀오는 사이에...... 오! 이럴수가......!'
문득 백무옥의 눈자위가 붉어졌다.
그는 코 끝이 찡해졌다.
아기와 난향이 주는 감격......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쁨이었다.
바로 사흘 전, 난향은 예정보다 칠주나 빨리 엄청난 산고(産苦)를 혼자서 치르어냈던 것이
다.
백무옥의 호흡소리는 유난히 컸다.
그제서야 그의 존재를 눈치챈 난향은 고개를 돌리다 말고 짧은 비명소리를 냈다.
"사...... 상공!"
그녀의 목소리도 순식간에 떨려왔다. 동시에 그녀의 크고 아름다운 눈에 습막이 어렸다.
어찌 그녀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모르겠는가!
그는 말없이 난향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기와 더불어 그녀의 몸을 꼬옥 안아주었다.
"고맙소...... 당신이 건강하니 더 바랄 것이 없소."
한 번의 포옹은 난향이 그동안 겪은 온갖 고통과 기다림의 시간을 모조리 상쇄하기에 부족
함이 없었다.
백무옥은 팔을 풀고 그녀의 품 안에 있는 아기를 내려다 봤다.
채 눈을 뜨지 못한 아기는 난향의 젖만 옹알옹알 빨아댔다.
난향은 백무옥의 눈길을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사...... 사내아이에요. 상공을 닮았어요."
난향의 음성은 모기소리를 닮아있었다.
아기를 낳은 어머니가 무엇이 그리 수줍은 것일까?
백무옥은 아기가 정말 자신을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핏줄의 끌림이었다.
백무옥은 한참동안 난향과 아기를 내려다보고는 서서히 그녀에게 두 팔을 내밀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젖꼭지를 아기의 입 안에서 빼내고 백무옥에게 안기게 했다.
백무옥이 아기를 안았다. 확인해 보려는 부정(父情)일게다.
그 순간 아기가 울어대기 시작했다.
"으앙...... 으애애앵......!"
엄마의 젖꼭지를 빼앗긴 아기는 아비의 심정을 이해 못했다.
아기가 울어대도 백무옥은 신기하기만 했다.
"하하하......!"
그는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오랜만에 웃는 심장을 확 뚫어 버릴 것 같은 통쾌한 웃음이었다.
아기가 더 울어대자 그걸 본 난향이 쌜쭉 눈을 흘겼다.
"아기를 볼 줄도 모르면서......."
하지만 마냥 좋은 것을 어쩌란 말인가?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