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꽃 지는 저녁 [오민석]
치자꽃이 지는구나
치자꽃이 화장지처럼 구겨지다 마침내
비 뿌리는 저녁
어디 부를 노래도 남아 있지 않은
거리에서 당신은 당신일 뿐
이제 아무도 담배를 피우지 않고
아무도 과음하지 않는다
오직 몹쓸 詩人들만 남아
통음(痛飮)의 밤을 기다리는데
어리석은 자여, 이제 환멸도 잔치가 아니다
세상은 단정한 신사들의 것
누가 함부로 울어 이파리 하나 흔들리게 하리
희망은 버림받은 배들의 안주일 뿐
그 누가 남아 비애의 항구를 노래하리
푸르른 안개의 칼이여 길 건너
실비동태집에선 죽은 바다가 끓고 있다
당신은 이미 미아이므로
아무도 당신을 찾을 수 없다
- 그리운 명륜여인숙, 시인동네, 2015
춘천 시놉시스 [안현미]
#1 청량리역 혹은 뽀르뚜갈 광장
경춘선을 타기로 했다. 즉흥적으로. 봄이었으므로. 그러나 곧바로 떠나는 기차는 없었다. 그 순간 우리는 이 즉흥적인 여행을 그만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청량리역 광장이 아닌 뽀루뚜갈 광장에 서 있는 이국의 여행자들처럼 밤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불리는 낮과 밤의 경계 위를 어슬렁거리며 광장의 시계탑 위를 물들이는 붉은 노을을 공유하며.
#2 기차 안과 밖
어두운 차창 밖으로 몇겁의 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있다. 당신과 나는 그 어둠속에서 전생 혹은 전전생을 시청 중이다. 홍익회의 삶은 계란과 캔맥주를 홀짝이며. 이어폰의 리시버를 한쪽씩 나누어 꽂고 우리가 듣는 음악은 부에나 비스따 쏘셜 클럽의 이브라힘 페레르가 부르는 「 Dos Gardenias」. 이국적인 그 음악은 전생의 당신을 닮았다. 당신은 노래한다. "치자꽃 두송이를 그대에게 주었네 사랑한다 말하고 싶어서 잘 돌봐주세요 그것은 당신과 나의 마음입니다."
#3 새춘천교회 그리고 일요일
그리고 일요일, 우리는 예배당을 찾아간다. 성경책도 믿음도 없이. 그러나 당신을 향한 찬송가처럼 몇개의 빗방울 흩뿌린다.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부른다. 당신은 말한다. " 이 길 끝에는 아무것도 없어."
#4 공지천과 이디오피아
언젠가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열아홉 혹은 스무살 봄에. 사랑을 시작해도 부동산 투기를 시작해도 외국어 공부를 시작해도 실패하기 딱 좋은 나이, 실패해도 상관없는 나이, 즉흥적이어서 아름다운 나이, 열아홉 혹은 스무살 봄.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히 서로가 서로를 향해 찬송가를 불렀지. 찬송가책도 미래도 없이.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었지. 언젠가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전생 혹은 전쟁 같았던 그 봄 춘천에.
-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 2014
내 인생의 0.5 [이근화]'
터미널 앞 만두집에서 만두를 한 판 먹었다
치자의 찝찔한 맛이 만두에 가 닿았다
부추나 숙주 따위가 이 사이에 끼어서
혀끝으로 이를 쓸어가며 먹었다
시계 바늘은 늘 애매하게 걸쳐 있다
그것이 정말 숫자를 가리킨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조금씩 빨리 오거나 늦게 온 사람들이
서로의 숨을 섞어가며 앉아서 눈동자를 굴린다
멈추지 않는 것은 버스 그리고 창밖의 심장
창문이 안으로는 나를 낳고 밖으로는 어둠을 낳는다
도시와 도시 간에 느슨하게 마음을 풀어 놓으면
환기구를 통해 들어오는 비현실적인 냄새
아이가 울지만 아무도 말릴 수가 없다
차안의 먼지가 실내 온도를 결정하듯이
졸음도 눈물도 구역질도 속도에 대한 반응
밤벌레들을 팍팍 터뜨리며
서로의 어깨에 머리카락을 떨어뜨리며
우리는 같은 목적지에 가 닿고
납작해진 뒤통수를 털어내며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밤 버스 가로등 별이 저마다의 속도로 달려가고
- 우리들의 진화, 문학과지성사, 2009
치자나무의 사색 [배영옥]
갈망(渴望)에 대해 생각하느니
갈(渴)과 망(望)에 따르는 마음의 움직임에 대하여
순수하고도 티끌 하나 없는,
번져오고 번져가는
이 목마른 잎사귀에 대하여
무성한 손아귀로 숨결을 조여오는 칡넝쿨의 간절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자두나무는 생각한다
허공을 뜨겁게 달구는 저 촉수의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칡넝쿨에 온몸 내어준 채
자두나무의 사색이 붉다
누렇게 말라버린 잎사귀는 누구의 갈증인가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더욱더 위험한 짐승이 되는
갈망
다시 생각하느니
마른 잎사귀에도 그늘은 지고
그늘은 결코 마르지 않느니
칡넝쿨의 결박이 견고해질수록
불타오르는 나의 갈망, 갈증 아니 너에 대하여
- 시인동네, 2017년 9월호
슬픔의 식구 [송재학]
슬플 때 나를 위로하는 건 내 몸이 먼저다
미열이 그 식구다
섭씨 39도의 편두통은 지금 염료를 섞고 있다
내 발열은 치자꽃대궁 같은 것
치자꽃 노란색 열매는 종일 위염을 생각하고 있다
햇빛의 양철 지붕에 세운 내 미열 학교에서
아픈 위도 명치에서 질문한다
붉은색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쓰라린 위를 향한 몸의 집착은
슬픔의 입성을 꿰차는 것이다
식구 없는 슬픔도 참조하도록!
자꾸 속삭이는 적나라한 열꽃,
자꾸 넘치는 치자꽃물의 강우량에 물드는 쪽으로
미열은 운동한다
어깨도 등도 치자꽃 가득핀
슬픔역驛의 악보여
- 내간체를 얻다, 문학동네, 2011
유월 [이상국]
내가 아는 유월은 오월과 칠월 사이에 숨어 지내
는데 사람들은 잘 모르고 그냥 지나간다. 유월에
는 보라색 칡꽃이 손톱만 하게 피고 은어들도 강
물에 집을 짓는다. 허공은 하늘로 가득해서 더 올
라가 구름은 치자꽃보다 희다. 물소리가 종일 심
심해서 제 이름을 부르며 산을 내려오고 세상이
새 둥지인 양 오목하고 조용하니까 나는 또 빈집
처럼 살고 싶어서……
-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창비, 2016
외할머니 [마종기]
온천장 금정사 밑 우리 외할머니,
마당 끝 치자나무 드문 흰 꽃 옆에
노방 깨끼저고리 맵시 있게 입으시고
낮은 사투리로 나를 찾으시던
외할머니 그 은근한 손짓이 매해
내 어린 여름방학을 치장해주셨네.
넓게 열린 푸른 별밭의 수박 잔치도
반딧불 어지러워 잠이 오지 않던 밤도
할머니 신명난 다듬이 소리같이 그립네.
치자 열매 다 익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시고
해운대 보이는 조그만 산소 가에서
오늘은 외할머니 모시 치마 입으실까
오, 내 부끄러움의 감빛 치자 열매 익는다.
여름만 되면 사방에 계신 외할머니
낮은 사투리로 나 부르시는 목소리 듣네.
-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문학과지성사, 2002
소식 [김진경]
서늘해지는 바람에서 그대 소식 듣습니다. 거리를 떠도는
걸 보았다고도 하고, 서릿발 일어나는 들판의 후미진 구석에
서 길 잃은 고라니 새끼처럼 웅크리고 있었다고도 하고. 바
람은 늘 거대하게 날개 편 풍문의 새와도 같습니다. 무사하신
지요. 한때는 치자꽃 향기에 휩싸이기도 했고, 한때는 그대가
서리 내린 들판을 걷고 있다 해서 칼날 같은 서릿발 위에 서
는 것도 같았습니다.
참 많은 세월과 길을 걸어왔습니다. 감꽃 하얗게 핀 울타리
를 따라 걷기도 했고, 맨발로 서릿발 위를 걷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 수많은 내가 나일 뿐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이
또한 슬픔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렇듯이 당신에 관한 많은
풍문이 당신의 빈자리를 가리키고 있을 뿐임을 알 것도 같습
니다. 그것이 무한한 연민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이 덧
없이 왔다 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란 말씀인 줄을 알겠습니
다.
무사하신지요. 바람은 거대하게 날개 편 풍문의 새와도 같
습니다. 저에게 치자꽃 향기를 한 번 더 보내주십시오. 이제
사랑하는 것들 위에 치자꽃 향기 하나 보탠들 어떻겠습니까.
- 슬픔의 힘. 문학동네, 2000
부처 [김진경]
치자꽃 향기가 좋아
코를 댔더니
그 큰 꽃송이가 툭 떨어진다
귀한 꽃 다친 게 미안해서
손바닥 모아
꽃송일 감추었더니
합장 인산 줄 알았던가?
보는 이마다
합장한 채 고개를 숙이고 간다
어허, 여기선
치자꽃이 부처일세!
- 슬픔의 힘, 문학동네, 2000
그렇게 사랑을 [김경미]
옛사람들은
치자꽃 열매에서 배어나오는 노란색이며
관목과 바위 밑 푸른 이끼에서 꺼낸
천연의 색들을 가져다 썼다지
그렇게 흰 광목천도 자목련빛이며 남청색으로
본디 바탕마저 바꾸었다지
내 안에도 혹 치자 소리 나는 꽃잎들이며
그늘에서만 오래 묵은 녹색 이끼 같은
타고난 색염료 있어
그대 바탕 물감 들여 영영 빠지지 않았으면
- 쉬잇, 나의 세컨드는 문학동네. 2003
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 [정화진]
쉼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장독마다 물이 가득 차 있고
아이들이 물에 잠겨 있지 뭐예요
아가씨, 이상한 꿈이죠
아이들은 창가에서 눈 뜨고
냇물을 끌고 꼬리를 흔들며 마당가 치자나무 아래로
납줄갱이 세 마리가 헤엄쳐 온다
납줄갱이 등지느러미에 결 고운 선이 파르르
떨린다 아이들의 속눈썹이 하늘대며 물 위에 뜨고
아이들이 독을 가르며 냇가로 헤엄쳐 간다
독 속으로 스며드는 납줄갱이
밤 사이 독 속엔 거품이 가득찬다
치자향이 넘친다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요
새언니, 그건 고기알이었어요
냇가로 가고 싶은 아이들의 꿈 속에 스며든 것일 뿐
장마는 우리 꿈에 알을 슬어 놓고
아이들을 눈 뜨게 하고
향기로운 날개를 달게 하고
아이들은 물 속에서 울고불고 날마다
빈 독을 마당에 늘어 놓게하고
- 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민음사, 1990
아바나 블루스 [김혜식]
치자꽃 두 송이
노래를 부르던 나이 든 사내
탱고를 추면서 손을 내밀어요
치자꽃 피는 동안만
사랑할까요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
치자꽃 빛 엉덩이
나시오날 호텔 바에서 만난 이브라힘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진작에 사라졌어요
돌아온다고 말해 줘요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
* 냇 킹 콜Nat King Cole: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Quizas, Quizas, Quizas>
- 아바나 블루스, 천년의시작, 2023
첫댓글 시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치자꽃을 검색해봅니다.
향기로 치자면 쥐똥나무꽃과 치자꽃이 1,2위를 다툴 것입니다.
저는 쥐똥나무꽃에 한표를 던집니다.^^*
@joofe 이름도 시적인 쥐똥나무 ㅎ
울릉도 부지깽이 나물처럼 ...
@봄, 그리고 봄 부지깽이나물, 본적은 없지만 재밌는 이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