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길은 소통과 공유의 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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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전화나 TV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유년시절 산골마을이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는 도회지 물먹은 몇몇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단파라디오가 전부였다.
그래서 인지 신작로를 따라 흙먼지를 날리던 시골버스에서부터 시작된 촌사람들의 세설은 5일장으로 이어져 풍문으로 들은 이웃동네 복순이 정분난 이야기며 중풍으로 드러누운 친정아버지 안부까지 풍성한 이야기 꺼리와 목마른 그리운 것들을 기억하게 해주었다.
시골버스가 그렇듯이 섬사람들에게 여객선은 역시 그리운 것들에 대한 소통의 통로인 것 같다. 이 섬 저 섬 어찌 사돈도 그리도 많은지 만나는 사람마다 사돈이고 아제 조카 친척이다.
이렇듯 흙먼지 달리는 신작로에서 시작해 파도 넘실대는 여객선 항로까지 길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소통과 공유의 끈이다.
파시가 기울고 섬도 기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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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립도서관장인 고경남형에게 전화해 전라도에서 여객선이 가는 먼 섬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렇게 해서 만난 섬이 쾌속선으로 5시간 걸리는, 다도해 바닷길의 종점 ‘만재도’다.
목포에서 105㎞, 면적이 0.63㎢에 불과한 작은 섬. 진도군 조도면에 속해 있다가 1983년 신안군에 흡수되었으며 45가구에 102명의 주민이 산다.
인근 섬에서 선사시대 패총과 고인돌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 때쯤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의병장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피해 고경명장군의 후손들이 인근 태도에 정착해 고씨 성을 가진 이들이 많다.
몽돌해수욕장이 있는 부둣가를 제외하고는 섬전체가 기암괴석으로 병풍을 둘렀으며 마을 전면에 위치한 자엽습지에는 천연기념물 323호 붉은배새매를 비롯해 파랑새, 솔딱새, 흰날개해오라기 같은 새들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어 철새 탐방객들과 낚시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바다가운데 외떨어져 있다하여 ‘먼데 섬’ 또는 ‘만대도’라고 했는데 이를 한자식으로 병기한 것이 만재도(晩捚島)라 한다. 혹자들은 ‘재물을 가득 실은 섬’ 또는 ‘해가 지고 나면 고기가 많이 잡힌다.’ 하여 만재도라 했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어장이 쇠퇴해 명운이 기울었지만 1930~1960년까지만 해도 조금이 되면 몽돌해수욕장에 진을 친 12곳 기생집에서는 ‘흑산도아가씨’에서 시작해 ‘목포의 눈물’로 이어지는 노랫가락이 밤새 멈추지 않았다. 가라지(전갱잇과 물고기)를 잡는 수백여척의 풍선들이 성시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섬에서 파시(성어기 때 어항에서 열리는 생선시장)가 열리다 보니 ‘돈섬’이라는 별칭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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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류와 여가 발달해 있어 뱃전에 머리를 박고 노에 걸릴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물고기가 많은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지금도 실력 있는 낚시마니아들은 한나절에 우럭 40마리를 너끈히 낚는다. 신안바다에서는 최고의 황금어장이다.
농어, 우럭, 조피볼락, 전복, 다시마, 미역 같은 수산물들이 풍부해 진도군 서망항을 통해 노량진 수산시장 등으로 위판 된다.
섬은 뿌리를 찾는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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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집들은 춘삼월 보튼 어미 젓 마냥 가파른 둔덕에 방 두간에 정지(부엌)가 딸린 조그만 오막살이가 대부분이다. 어촌마을이 다 그렇겠지만 따로 사립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 자란 산골마을은 깨금발로 들여다보면 살강에 사기그릇 옹이까지 보일 정도로 낮은 담벼락이 낮았는데 만재도의 집들은 처마까지 돌담을 쌓고 입구 정면에 내지 않고 바람결이 휘어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거센 태풍의 위력도 너끈히 피해갈 수 있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받아 안아 품어버리는 우리네 조상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그 처마 아래서 태어난 섬의 유일한 아이 하늘이(여, 5세)는 해수욕장 몽돌이며 조개껍데기를 패물삼아 홀로 빠끔 살이(소꿉놀이)를 하더니 다순 늦봄 볕에 자울 거리다 엄마 품에 스며들어 꿈속을 되작거린다.
노인들은 전부 부두에 나와 주낙에 멸치를 끼워 넣고 사내들은 통통배를 몰고 나가 갓 잡아온 조피볼락이며 우럭을 그물에서 떼어 내느라 해 가는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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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바다에서는 돌고래 자맥질 하듯 ‘쉬익 쉬익’ 거친 숨소리를 고르며 해녀들이 전복이며 해삼, 멍게, 문어 같은 것들을 건져 올린다.
만재도의 여자아이들은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수영을
배운다. 열댓 살이 되면 물질을 배우는데 어미의 어미에서부터 이어진 해녀의 숙명이 그 딸에서 딸에게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들을 기다렸다가 섬 할머니가 직접 담근 쌀 막걸리에 초고추장 즉석 회판도 맛깔스럽다.
30년전 까지만 해도 11월이 되면 사람들은 건장(마른 물고기)을 풍선(風船)에 보름동안 싣고 진도 같은 큰 섬이나 육지에 나가 쌀과 보리와 같은 식량과 바꾸고 지붕을 이을 볏짚을 싣고 들어와 월동준비를 하느라고 바빴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추석이 지나면 사람들은 목포 같은 뭍으로 나가 휴어기를 보내고 춘삼월이 돼야 섬으로 돌아온다. 그야말로 섬의 겨울은 무인도가 된다.
옛 사람들은 ‘중국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한국전쟁 전까지만 하더라도 따로 국경이 없어 인근 섬에서는 중국에 땔감을 내다 팔고 보리와 바꾸어 오는 해상무역이 성행 했었다.
사실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민초들에게 이웃을 경계 짓는 담장이며 국경선 같은 것은 의미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허나 문명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것은 물질적 풍요 뒤편에는 가려진 경계선과 소유, 그리고 어지러운 속도와 공존이 없는 경쟁 같은 낯선 것들도 있다.
물고기와 새들은 끝없이 난 곳을 찾아 회유한다. 이렇듯 바다와 하늘의 길은 담장도 장벽도 없이 뿌리를 찾는 여정을 돕는다. 섬은 이들이 길을 찾는 이정표다. 이렇듯 사람 사는 세상도 구분과 경계가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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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목포항여객선터미널→만재도 08시(뱃삯 4만5천원), 만재도→목포항 13시
숙박: 만재콘도 민박 및 낚시 배 (061)275-8654)-최귀한 이장
수산물 구입 및 민박(061)275-9821)-고현진 어촌계장
(자연산 대복(전복) 8만원 중복 6만원, 생선(조피볼락, 우럭 등) 10㎏ 7만원)
마지막 왕의 후예들... ![](http://i1.daumcdn.net/deco/contents/emoticon/things_06.gif?rv=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