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주] 비검무정 飛劍無情(1권) 1. 하나의 정사(情事), 하나의 음모(陰謀), 하나의 죽음

[해시시]

第一章 하나의 정사(情事), 하나의 음모(陰謀), 하나의 죽음


1

천하에서 가장 오만한 인물(人物).
그 인물이 지금 잔인하게 짓밟히며 생사(生死)의 기로에 서 있었다.
"크하하하… 크하하하핫……!"
미친 듯한 분노의 광소성(狂笑聲)이 울려 퍼진다.
그곳은 끝이 보이지도 않는 수천 길의 만(萬) 장(丈) 단애(斷崖) 위.
꽈아아아아－!
단애 밑으로는 산악이라도 무너뜨린다는 무서운 급류(急流)가 굉렬히 흐르고 있다.
세인들이 흔히 와룡탄(臥龍灘)이라고 부르는 곳!
강호의 절대사지(絶對死地) 중의 한 곳으로 지칭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지금 그 와룡탄의 꼭대기에 서 있는 자가 있다.
지금 주위가 무너져라 분노의 광소성을 터뜨리는 자.
그는 한 명의 노인(老人)이었다.
"크하하하하하하핫……!"
얼마나 거대한 웃음소리인가? 
강렬한 내가진기(內家眞氣)가 실린 웃음소리에 와룡탄의 절벽이 무너져 내릴 듯 웅웅거렸다.
길다란 금색(金色) 장포(長袍)를 흩날리는 자이다.
칠 척 거구의 철탑처럼 당당한 체구를 지닌 육순노인!
일견 그의 전신에서는 산악 같은 위맹한 기운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보라! 그의 모습은 실로 비참하고 끔찍하지 않은가?
전신에는 수많은 상흔(傷痕)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일견 온통 피를 뒤집어쓴 혈인(血人)의 모습, 그 자체랄까?
드러난 상흔(傷痕)들은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크고 깊숙했다.
그 처참한 몰골은 이미 수많은 혈투(血鬪)를 치렀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그가 서 있는 단애의 주위, 수많은 시신(屍身)들이 즐비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대략 오십여 구쯤이나 될까?
어떤 자는 머리가 으깨져 나갔고, 어떤 자는 허리가 잘려 나갔으며, 어떤 자는 사지가 떨어져 나가고…….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어날 만큼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들!
하지만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
보라! 나자빠진 시신들을 짓밟으며 노인에게 다가드는 살아 있는 또 다른 인물들을…….
스스스슥－ 스슷－!
대략 오십여 명쯤 되어 보인다. 그들은 살벌한 살기(殺氣)를 뿜으며 노인을 압박해 오고 있다.
하나같이 전신에 핏빛 적포(赤袍)를 걸친 자들.
도(刀), 검(劍), 창(槍), 부(斧), 극(戟)…….
손에 든 병장기는 각기 달랐으나 그들의 움직임은 기계처럼 일사분란했다.
그들은 무표정했다. 주위에 자신들의 동료가 쓰러져 있든 말든, 또 금포노인이 분노를 터뜨리든 말든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눈빛이랄까?
그들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
"……."
오직 전진뿐이다. 그저 죽음 같은 침묵을 유지하며 노인을 압박해 들어오고 있을 뿐이다.
일견 적포인들의 포위망은 완벽한 살인대형(殺人大型)이었다.
미루어, 지독한 지옥의 수련을 겪은 전문적인 살인자(殺人者)들임이 분명했다.
싸아… 쏴아아아아……!
어느 순간이다. 약속이나 한 듯 오십여 자루의 병장기가 눈부신 살광을 뿌리며 휩쓸어 왔다.
오십여 자루의 병장기가 일시에 쓸어 오는 모습!
그것은 흡사 살기의 해일(海溢)이 밀려오는 듯 가공스러웠다.
순간 장포노인의 눈에서 벼락 같은 살광이 폭출되었다.
"크하하하… 일월(日月)의 정기(精氣)를 모아 하늘을 강타하니, 홀연 천지가 열린다! 일월파천(日月破天)!"
장포노인의 쌍장(雙掌)이 번개같이 앞으로 내뻗어졌다.
콰우우우－!
순간 무시무시한 붉은 광채가 그의 쌍장에서 폭사되어 나왔다. 흡사 뇌전(雷電)처럼!
그 광채는 곧장 다가드는 적포인들을 향해 밀려갔다.
꽈꽈꽝－ 꽈지지직－!
순간이다. 흡사 화약(火藥)이 폭발하는 듯한 굉렬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수많은 병장기와 적포인들의 몸이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케에엑……!"
"크윽!"
뒤로 날아가는 십여 명 적포인들!
그들의 몸체는 아예 피떡으로 으스러져 있었다.
하지만 장포노인도 결코 무사하지는 못했다.
퍼퍼퍽－!
앞쪽의 적포인들을 향해 공세를 펼친 순간, 십여 자루의 병장기가 그의 옆쪽에서 날아들며 몸에 작렬했기에!
깊은 상흔이 여기저기 그어짐과 동시에 더운 피가 화악, 튀어올랐다.
'윽!'
소리 없는 비명을 감추는 금포노인!
육중한 체구가 순간적으로 쓰러질 듯 비틀거린다.
툭－!
그 바람에 위태스럽게 밟고 서 있던 절벽 끝의 바위가 한 움큼 떨어져 나갔다.
흡사 떨어져 내리기 일보 직전의 모습이다.
저벅－ 저벅－!
잠시 뒤로 물러났던 적포인들은 다시 대열을 정비하여 밀려들었다.
그들은 여전히 단 한 마디 말도 없었다. 단지 그들의 전신에서는 피를 탐하는 집요한 살인자들의 피비린내만 물씬 풍겨 나올 뿐이다.
금포노인이 다가드는 자들을 향해 절규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왜 이유도 없이, 무조건 이 적성광요자(赤星狂凹子)를 공격하는 거냐?"
"……."
"……."
적포인들은 단 한 마디의 대꾸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자칭 적성광요자라 밝힌 금포노인의 얼굴이 처절하게 일그러졌다.
"크하하하… 천하의 나 적성광요자가 이름도 모르는 강호의 들개 놈들과 동귀어진(同歸於盡)을 해야 할 정도로 비참하게 전락하다니! 크하하핫……!"
그것은 처절한 광소성이었다. 동시에 그는 혼신진기를 쌍장에 모았다.
"최후!"
문득 적포인들 사이에서 한 마디 무심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외침!
그것은 그들이 나타난 이래 죽음의 비명을 빼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토해 낸 언어(言語)였다.
동시에 모든 적포인들이 일제히 금포노인에게 덮쳐 갔다.
일체의 수비가 없는 무자비한 공격이었다.
가히 육탄 돌격이랄까? 순간 노인의 손에서 뻗어 나온 마지막 반격과 사십여 명의 몸이 무서운 충돌을 일으켰다.
꽈꽈꽈꽝－!
사십 대 일의 육탄 충돌!
"크아아악……!"
"케엑!"
처절한 비명과 터져 나오는 파육음들!
이어 금포인과 사십여 구의 시신이 거의 동시에 하나로 뒤엉켜 밑으로 추락해 내린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일거에 뭉쳐 단애 밑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실로 장렬하고도 비참한 최후였다.
쐐애애액－!
금포노인은 적포인들과 함께 뒤엉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마지막 남은 의식으로 쥐어짜듯 외치고 있었다.
"주… 주군(主君)! 먼저 가는 못난 속하를 부디 용서하시길……."
금포노인과 적포의 살인자들!
그들은 함께 어우러져 까마득한 만 장 단애 밑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그들이 떨어져 내린 곳.
꽈우우우－!
쏴아아아아……!
바로 산악이라도 순식간에 허물어 버린다는 와룡폭의 급류(急流)였다.
그리고 그것은 난세(亂世)를 시작하는 첫 번째의 죽음이었다.


2

시체(屍體), 그것은 한 마리 커다란 흑견(黑犬)의 시체였다.
일견 명견(名犬)쯤으로 보이는 개의 시체였다.
한데 언제부터였을까? 죽어 나자빠진 흑견 앞에서 통곡하고 있는 한 명의 괴승(怪僧)이 있었다.
대략 사십대 중반쯤이나 되었을까?
철퍼덕－ 철퍽－!
그자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손바닥으로 땅을 쳐 가며 울어 대고 있었다.
"으허허헝… 이게 웬 말이냐? 흑구(黑狗)야, 네가 죽다니! 아이고! 아미타불… 슬프고 슬프도다."
괴이한 행색과 괴이한 울음소리.
하되 괴승은 진정 슬퍼하고 있는 듯했다. 오래 전부터 울고 있었던 듯한 퉁퉁 부어 있는 두 눈덩이가 그 증거였다.
괴승은 실로 해괴하고 우스꽝스러웠다. 머리 위에 다 떨어진 도관(道冠)을 쓰고 있고, 키는 채 사 척도 되지 않는 난쟁이였다.
또 일신에 색동 저고리와 바지를 어린아이처럼 걸친 인물.
보면 볼수록 괴이한 괴승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상 최대로 분노하고 있었다.
"크으으흑… 말해 보거라, 흑구야! 어떤 찢어 죽일 놈이 널 감히 극락왕생시켰는지 말이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아니, 죽은 개는 말이 없다.
"제자야, 네가 뜻밖에 개죽음을 당한 데 대해 이 비광승(飛狂僧)은 지금 많이 슬퍼하고 있느니라. 흑흑흑… 아이고, 아미타불……!"
비광승! 
이것이 노인을 지칭하는 이름인가?
이때 죽은 흑견을 바라보는 괴승의 눈에 묘한 분노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 이것은 분명 누군가 흑구를 교살(絞殺)시킨 것이다. 흑구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쾌락의 표정은 그가 교접 중에 타살되었다는 증거! 흑구는 아예 항거조차 못하고 죽었다!'
무서운 살기가 비광승의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의 눈길이 머무는 곳, 흑견의 아랫도리 부근이다.
흑견의 물건이 매달린 음경(陰莖) 부근이 아예 짓뭉개져 있었다.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음경!
'복상사(腹上死)라… 하면, 날 따라다니며 불심(佛心)을 익혀 전혀 색(色)에 무관심한 내 제자놈을 유혹한 개잡년은 누구인가?'
비광승의 뇌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찰나 그의 머리는 빠르게 하나의 사건을 유출해 냈다.
"그렇다. 내 애제자를 유혹한 잡년은 며칠 전부터 음악한 눈빛으로 흑구의 주위를 배회하던 그 추잡한 비구견(比丘犬), 그 개잡년이 틀림없다. 비구견, 그 계집은 내 제자를 유혹하여 색욕을 충족시킨 다음 잔인하게 저곳을 물어뜯어 죽인 것이다."
부들… 부들……!
생각이 거기 미치자 비광승의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경련했다.
"아미타불… 고 간악한 비구견 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내 사랑하는 애제자를 간살한 그 계집을 붙잡아 갈가리 찢어 죽이리라!"
비광승의 분노와 흥분은 가히 최고조에 달했다.
그는 거의 이성을 잃고 있는 상태였다.
하되 그는 몰랐다. 
그의 분노가 최고에 달한 그 순간.
스으……!
자신의 뒤쪽에서 죽음보다 암울한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다가들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애견의 죽음 때문에 이성을 잃은 그는 그 기척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긴 주의를 기울였다 해도 알아차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림자의 움직임은 너무도 은밀하고, 너무도 쾌속한 것이었기에!
비광승은 골똘한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누군가 비구견을 흑구에게 보냈다. 어떤 육시랄놈이 미인계(美人計)를 써서 내 흑구를 교살한 것일까? 무엇 때문에?"
바로 그때였다.
스으……!
등 뒤에서 하나의 손(手)이 어둠처럼 다가들었다.
어둠의 기류(氣流)에 휩싸인 그 형체조차 흐릿한 손이었다.
그것은 죽음의 손이었다.
하되 흥분과 분노에 휩싸인 비광승은 애석하게도 그 손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콰악－!
죽음의 손은 비광승의 목을 뒤에서 움켜쥐었다.
"으윽! 누… 누구?"
그제서야 비광승이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우드드득－!
그 손은 순식간에 비광승의 목덜미를 가공할 힘으로 꺾어 버렸다.
비광승의 목이 단숨에 수직으로 꺾어졌다.
"크… 크윽! 누… 누가 날……?"
비광승의 눈이 있는 대로 부릅뜨여졌다.
"내가 방심하다니… 그… 그것보다는 내가 방심하는 순간을 알고 기습하다니… 크윽!"
비광승의 몸이 천천히 앞으로 쓰러져 갔다.
퍼억－!
그는 얼굴을 지면에 처박으며 죽어 갔다.
가물가물해져 가는 비광승의 의식 속으로 문득 한 사람의 영상이 떠올랐다.
'주… 주군! 이렇게 무력하게 죽어 가는 속하를 용서하시길…….'
대체 떠돌이 비광승은 누구일까?
무엇 때문에 이런 개죽음을 당한 것일까?
그리고 그를 단숨에 쓰러뜨린 검은 손의 임자는 누구일까?
개를 자신의 목숨 이상으로 사랑하던 한 떠돌이 비광승이 죽었다.
자신의 애견(愛犬)이 죽어 간 것처럼 비참하게!
그것은 두 번째의 죽음이었다.


3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비천한 인물!
그가 수년 이래 최대의 횡재를 했다.
합붕(合鵬)!
흔히 세인들에 의해 귀타개(鬼打 )라고 불리는 사상 최대의 걸인(乞人)이 바로 그였다.
그는 하늘을 지붕 삼아 천하를 떠도는 걸인 중의 상걸인이었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한 그의 구걸 행각은 이미 강호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흡사 피를 빠는 거머리랄까?
그는 실로 악착같아서 세상의 누구든 일단 그의 목표가 된 이상, 반드시 먹을 것을 내주어야 한다 했다.
지금, 그 귀타개 합붕은 썩은 악취가 풍기는 뒷골목의 후미진 곳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연신 희희낙락한 기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 어느 주루(酒樓)에 들어갔다가 뜻밖에 반쯤 쉰 한 마리 통닭을 구걸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사흘 이래 처음 구걸한 음식이었으며, 한 달 이래 얻은 가장 풍성한 음식이기도 했다.
"히히히… 쩝쩝……!"
합붕은 미친 듯 게걸스럽게 통닭을 뜯어먹고 있었다.
나이를 추측할 수 없게 시커먼 봉두난발의 소유자.
전신에 걸친 의복은 아예 남루하다 못해 때에 찌들어 지독한 악취마저 풍겨 났다.
앵… 앵……!
통닭을 향해 파리 떼들이 맹렬하게 돌진했다.
"저리 꺼지지 못해, 이 날강도 놈들아!"
합붕은 연신 파리 떼를 쫓으면서도 통닭을 뜯어먹기에 여념이 없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꼴깍!"
돌연 그의 전면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 오는 게 아닌가?
그것은 침 넘어가는 소리였다.
합붕은 흠칫,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 저만큼 쓰레기통 곁에 한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한 명의 걸개소녀(乞 少女)였다.
허름하고 초라한 행색을 한 거지소녀가 거기 앉아 있었다.
십오륙 세쯤이나 되었을까?
거지소녀는 합붕을 노려보고 있었다. 소녀의 눈빛은 어떤 갈망으로 활화산(活火山)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합붕의 통닭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 적당한 표현이리라.
소녀는 합붕 못지 않는 추레한 행색이었다.
하지만 용모는 일견 상당히 반반한 것이었다.
반듯한 이목구비와 찢어진 옷 속으로 내다 보이는 하이얀 살결.
"꼴깍… 꼴깍……!"
통닭을 노려보는 소녀의 입에서는 연신 침 넘어가는 소리가 애절하게 들려 왔다.
합붕은 더 이상 식사를 계속할 수 없었다.
그는 여태껏 먹을 것을 앞에 두고 타인을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타인을 생각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굶어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소녀의 표정과 눈빛은 애절했다.
합붕은 잠시 소녀를 바라보았다.
"먹고… 싶으냐?"
말을 꺼내고 나서 합붕은 곧 후회했다. 사실 그 질문은 물으나마나 한 것이었다.
소녀는 대답 대신 가장 빠른 속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합붕은 내심 질책했다.
'젠장, 거지 주제에 남을 동정하다니…….'
왜 갑자기 소녀에게 관심이 갔는지는 그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반반해 보이는 얼굴과 찢어진 옷자락 속으로 드러난 하얀 속살 때문이었는지도…….
합붕의 얼굴에는 씁쓰레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저 작은 조개(?)야말로 진짜 강적이다. 이 귀타개 합붕으로 하여금 절로 동정심을 일게 하다니…….'
합붕은 눈을 질끈 감고 닭다리를 하나 떼어 냈다.
"옜다, 먹어라. 하지만 더 이상은 못 준다."
합붕은 부들부들 손을 떨며 소녀에게 닭다리를 던져 주었다.
순간, 보라! 소녀는 행동이 실로 가공스럽도록 재빠르지 않은가?
파파팍－!
소녀는 닭다리가 채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받아 들고 눈부신 속도로 허겁지겁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와구… 와구……!"
그 눈부신 게걸스러움에는 합붕조차 절로 입이 떠억 벌어질 지경이었다.
그때 문득 합붕은 두 눈이 동그래졌다.
먹을 것에 정신이 팔린 거지소녀의 양 다리가 살짝 벌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쪼그려 앉은 다리 사이로 치마 안쪽의 뽀얀 살결이 들여다보였다. 초라한 행색에 어울리지 않는 눈부신 속살이었다.
소녀는 허벅지 안쪽에 중요한 부분만을 겨우 가린 한 장의 고의만을 걸치고 있었다. 고의는 앙증맞도록 붉은 색깔이었다.
그 역시 바람만 불면 훅 날아가 버릴 것처럼 위태로웠지만 말이다.
허벅지 안쪽의 속살은 소녀의 속살답지 않게 너무도 도톰하다. 그 장면에는 합붕의 얼굴이 절로 붉어질 지경이었다.
합붕은 시선을 돌리며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험, 험!"
문득 합붕은 아랫도리가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랫도리로부터 무언가 묘한 열기(熱氣)가 치밀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일컬어 욕념(慾念)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욕정은 아주 우연찮게 발생하는 것이며, 사실 인격(人格)과는 별다른 상관이 없는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중국의 성자(聖者) 중 성자라는 맹자(孟子)는 이런 말을 남겼다던가?
－ 인간은 식색성야(食色性也) 한다!
그 말은 음식(飮食)과 성욕(性慾)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本能)이며, 인간은 결코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천하의 성자인 맹자가 그러할진대, 일반 범인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만약 그렇다 해도 합붕의 배가 고픈 상태였다면, 결코 그러한 욕념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통닭을 먹고 어느 정도 배가 두둑한 상태였기에, 소녀의 뽀얀 속살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본능(本能)이 고개를 쳐든 것이다.
합붕은 애써 치밀어오르는 성욕을 억눌렀다.
'아서라, 아서! 거지 주제에… 그것도 나이 어린 소녀에게 음욕을 느끼다니…….'
바로 그때였다. 돌연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앞쪽에서 들려 왔다.
"아악!"
합붕이 흠칫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순간, 합붕은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언제 나타난 것일까?
허겁지겁 닭다리를 뜯기에 여념이 없는 소녀의 주위를 세 명의 시커먼 그림자가 포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행색과 용모가 다분히 흉악하고 불량스러워 보이는 불량배들이었다.
'윽! 저놈들은 인근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다는 흉살삼귀(兇殺三鬼)란 놈들이 아닌가?'
합붕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흐흐……!"
"고년, 보면 볼수록 탱탱하구나."
세 장한들은 거지소녀를 바라보며 음산한 눈빛을 번들거렸다. 색기와 욕정으로 이글거리는 시선들이었다.
이어 그들은 다짜고짜 거지소녀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찌이익－!
거친 손길에 의해 거지소녀의 상의 자락이 단숨에 찢겨져 나갔다.
소녀의 상체는 순식간에 알몸을 드러내고 말았다.
순간 장한들의 눈빛이 휘둥그레졌다. 드러난 소녀의 상반신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풍만하고 탱탱했기 때문이다.
보라! 아직 다 성숙하지 않았지만 두 손으로는 감싸쥘 수 없도록 발달한 두 개의 탐스런 젖가슴과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뽀얗고 눈부신 살결, 더욱이 그 끝에는 녹두알만한 크기의 앙증맞은 유실(乳實)이 톡 매달려 있었으니…….
그것은 초라한 행색 속에 숨어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도록 눈부신 나신(裸身)이었다.
일순 세 장한의 눈빛이 더욱 뜨겁게 이글거렸다.
"크흐흐… 닭인 줄 알았더니, 봉이었다는 건가?"
"흐흐… 지나가다가 다만 회포 좀 풀랬더니, 뜻밖에 횡재했구나."
한 장한이 다짜고짜 소녀에게 손을 뻗었다.
콰악－!
장한의 손은 우악스럽게 소녀의 한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악! 사람 살려요."
가슴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에 소녀는 비수날 같은 비명을 터뜨렸다. 그러나 외지고 폐허가 된 골목에서 그 비명은 공허하게 들릴 뿐이었다.
"흐흐… 계집년! 한 번만 더 주둥이를 놀리면 아예 숨통을 끊어 버릴 테다."
한 장한이 소녀의 목덜미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거지소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소녀는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육욕에 눈먼 세 장한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일 뿐이었다.
"흐흐… 물론 살려 주지."
"잔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해라. 그럼 살려 줄 뿐더러 평생 다시없는 쾌락과 즐거움을 맛보여 주겠다."
세 장한의 눈빛이 시뻘겋게 번들거렸다.
찌이이익－ 쫘악－!
억센 손길에 의해 남은 소녀의 옷자락이 마저 떨어져 나갔다.
거친 손길을 막아 내기엔 소녀는 너무도 힘없고 나약했다.
소녀는 순식간에 전라의 몸으로 화하고 말았다. 오직 손바닥만한 붉은 고의 하나만이 소녀가 걸친 의복의 전부일 뿐이었다.
"아아, 제발……!"
소녀는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하지만 이미 색욕에 눈이 뒤집힌 장한들에게 그런 애원이 통할 리 만무했다. 오히려 그 애원은 사내들의 욕념을 더욱 자극시켰을 뿐이었다.
"흐흐… 뒷골목에서 뒹구는 계집이 이런 훌륭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니……."
"헉! 도저히 못 참겠다."
한 명의 장한이 급히 허리춤의 끈을 풀어 내렸다.
남은 두 장한이 버둥거리는 소녀의 몸을 좌우에서 꽉 붙잡았다.
사내들의 억센 손아귀에 붙잡힌 소녀는 겨우 몸을 버둥거렸을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툭－!
아래춤을 벗어 내린 장한이 마지막으로 소녀의 고의를 떼어 냈다.
순간 한 올 가림도 없는 소녀의 적나라한 나신(裸身)이 드러났다.
비밀의 삼각주(三角洲)!
그곳에는 아지랑이 같은 봄풀이 거뭇거뭇 자라나 있었다.
그것은 가녀린 얼굴과 달리 이미 소녀가 여인으로 성숙한 몸매를 지니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아아, 제발……!"
소녀는 세 장한의 뜨거운 눈길을 의식하며 아랫도리가 벌어지지 않게 하려 애를 썼다.
세 장한의 눈이 아예 뒤집혀졌다.
"헉! 더… 더 이상은……."
아래춤을 벗어 내린 장한이 거친 헛바람을 불어 내며 덮쳐 들었다.
장한은 다짜고짜 소녀의 다리를 벌렸다.
소녀는 다리에 힘을 주고 저항하려 했다. 그러나 우악스런 손길을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소녀의 두 다리 사이가 열리며 앙증맞은 꽃잎 하나가 사내들의 시야 앞에 펼쳐진다. 급기야 사내의 눈이 뒤집혔다.
"이… 이년! 정말 죽이는구나."
사내는 급급히 자신의 하체를 벌어진 다리 사이로 우겨 넣었다.
육중한 사내의 하체가 소녀의 꽃잎을 향해 덮쳐 내렸다.
소녀는 자신의 가장 은밀한 부위로 충격이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진저리를 쳤다.
그때 그 모습을 바라보며 분노에 떨고 있는 한 쌍의 눈이 있었다.
저만큼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자, 눈동자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합붕이었다.
비록 인적이 없는 곳이라고는 하되, 이 파렴치하고 무자비한 악행을 지켜보던 합붕의 전신은 무시무시한 분노로 경련하고 있었다.
'으으, 찢어 죽일 놈들 같으니! 저놈들이 감히 불쌍한 소녀를 범하려 들어?'
하지만 합붕은 망설였다.
그는 잘 알고 있다. 오래 살기 위해서는 절대 타인의 일에 간섭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호의 불문율(不文律)을.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에서 한 줄기 외침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멈춰라, 악당 놈들!"
그의 호통성은 막 소녀를 덮치던 장한의 몸을 굳어지게 했다.
세 장한이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곧이어 징그러운 조소가 피어 올랐다. 이어 조소는 지독한 살기(殺氣)로 화했다.
"흐흥! 어떤 놈이 감히 어르신네들의 일에 끼여드나 하였더니, 쓰레기통을 뒤져 처먹는 거지새끼였다는 건가?"
"크크… 꼴에 제 놈도 남자라 이건데? 하지만 네놈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우리가 어떤 분들인지 아느냐?"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하신 흉살삼귀(兇殺三鬼)란 말이다."
그와 함께 한 장한이 빠르게 주먹을 휘둘러 왔다.
주먹은 우악스럽게 합붕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퍼억－!
"크윽!"
합붕의 몸이 주먹질로 인해 붕 떠올랐다가 이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순간 합붕은 숨이 막히는 듯한 충격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아무래도 갈비뼈가 몇 대쯤 으스러져 버린 듯했다.
"컥컥……!"
그는 참을 수 없어 마구 토사질을 해 댔다.
세 장한의 시선은 다시 소녀에게 돌려졌다.
"흐흐… 별것도 아닌 거지새끼 때문에 기분을 잡칠 뻔했군 그래?"
"크크… 그러게 말야."
합붕을 아랑곳하지 않고 세 장한은 다시 자신들의 일을 계속했다.
한 장한이 소녀의 가랑이 사이로 흥분할 대로 흥분한 아랫도리를 거칠게 밀어넣었다. 그리고 소녀의 꽃잎 사이로 자신의 몸을 압박시켜 갔다.
소녀의 두 눈이 크게 부릅뜨여졌다.
순간, 소녀는 느꼈다. 자신의 비밀지 속을 파고드는 극렬한 통증을!
육중한 이물질이 그녀의 여린 속살을 찢으며 밀려들고 있었다. 아니, 꿰뚫어 오고 있었다.
불칼이 박혀 드는 듯한 그 통증은 소녀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극통이었다.
"아아아악……!"
소녀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명 소리는 폐허의 뒷골목을 요란하게 뒤흔들었다. 하지만 비명을 듣고 달려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바야흐로 입성(入城)에 성공한 녀석은 본격적으로 소녀를 짓밟아 가기 시작했다.
"헉헉……!"
턱－ 턱－ 턱－!
희멀건 사내의 둔부가 쉴새없이 들썩거린다. 그때마다 가녀린 소녀의 몸은 마치 가랑잎처럼 애절하게 흔들거렸다.
그렇게 얼마…….
어느 순간, 장한의 몸이 무서운 경련을 일으켰다. 
마지막 쾌락의 절정(絶頂)!
가히 머리끝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통렬한 방사(放射)의 쾌락이다.
잠시 후, 그자는 소녀의 몸에 붙어 마지막 잔경련을 일으켰다. 마지막 한 방울의 쾌락까지 쥐어 짜내는 것인가?
"흐흐… 정말 기가 막히는군 그래?"
이어 사내는 반은 어색하고 반은 헤벌쭉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흉칙한 그의 아랫도리가 시뻘건 피로 흥건하다.
"젠장, 다 했으면 어서 나오라구!"
이어 나머지 두 장한이 급급히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짐승처럼 차례차례 소녀를 겁탈하기 시작했다.
"아악악……!"
처음 소녀는 처절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 냈다. 그것은 흡사 잘게 쪼개지는 유리 조각의 편린(片鱗)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 음성은 점차 낮아져 갔고, 이윽고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다. 고통을 참다 못해 아예 혼절해 버린 것이다.
세 장한들은 소녀를 무자비하게 유린했다. 마음껏 학대했고, 마음껏 욕정을 채웠다. 소녀의 하체는 시뻘건 피와 사내들의 배설물로 범벅이 되었다.
정말 눈 뜨고는 보아 줄 수 없는 악행(惡行)이었다.
이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고 있는 한 인물이 있었다.
조금 전 장한에게 얻어맞아 나가떨어진 합붕이었다.
"크으……!"
합붕의 전신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해 그의 전신의 옷자락이 팽배해지고 머리칼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우우웅……!
그의 전신에서 알 수 없는 기세가 폭죽처럼 피어 올랐다.
아아, 그것은 힘없고 나약한 걸개 합붕이 발할 수 있는 그런 류의 기세가 절대 아니다. 그것은 일컬어 살기(殺氣)라는 것이었다.
절정의 고수들만이 풍겨 낼 수 있는 그런 류의 살기가 합붕의 전신에서 서릿발처럼 폭사되기 시작한 것이다.
'크으… 네놈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짐승보다도 못한 놈들!'
어느 순간, 그는 살쾡이처럼 날렵한 동작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동시에 그는 빠른 동작으로 세 장한의 곁으로 다가섰다.
이때, 세 장한은 막 소녀에게 자신들의 욕정을 끝낸 직후였다.
허리춤을 추스리는 세 장한의 얼굴에는 만족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이 역력했다.
"크흐흐… 오랜만에 후련하게 몸 좀 풀었군 그래?"
"흐흐… 그러게 말이야. 밤늦게 싸돌아다니다 이런 횡재를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스으……!
순간 합붕의 오른손이 허공으로 쳐들려졌다.
그의 손길이 세 장한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들었다.
일견 가벼워 보이는 손동작이다. 하되 다음 순간, 요란한 격타음이 골목 안을 울려 퍼졌다.
빠각－!
순간 한 장한의 머리통이 순식간에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난 채 짓뭉개졌다.
비명도 없다. 단지 머리통에서 튀어오른 뇌수(腦髓)와 핏물이 옆의 두 장한에게 가득 뒤집어씌워졌을 뿐이었다.
"헉! 뭐… 뭐냐?"
"어떤 놈이냐?"
방금 전의 쾌락을 음미하던 두 장한은 대경실색했다.
순간, 그들의 눈은 경악으로 인해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헉! 네… 네놈은 조금 전에……."
보라! 그들의 앞, 분노한 합붕이 무서운 눈길로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짐승만도 못한 놈들에게 내리는 천벌이다!"
합붕의 손은 다시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 손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쾌속했다. 그 손은 여지없이 나머지 두 장한의 머리통을 가격했다.
퍽－ 퍼억－!
두 장한의 머리통도 순식간에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말았다.
찰나간에 세 장한은 머리통 없는 시신이 되어 나뒹굴었다.
아아, 실로 믿을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인 손놀림이다.
귀타개 합붕은 세 개의 시신 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역겨운 피비린내가 악취와 더불어 골목길을 자욱하게 퍼져 흘렀다.
그때 합붕은 한 가닥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으음, 짐승보다도 못한 자들이기에 주군(主君)의 명을 어기고 말았다. 주군께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공과 신분을 감추고 있으라 분부하셨거늘…….'
하지만 합붕에게 있어 그것은 우선이 아니었다. 일단 일이 벌어진 이상, 정신을 잃은 소녀를 돌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합붕의 눈길은 한 곳에 머물렀다.
거기 조금 전 장한들에게 겁간을 당한 거지소녀가 있다. 소녀는 혼절한 채 차가운 땅바닥에 걸레처럼 누워 있었다. 
드러난 몸을 하나도 감추지 못한 채…….
전신에 멍 자국이 가득하고, 아랫도리가 붉은 선혈과 배설물로 낭자하게 얼룩져 있었다.
'불쌍한… 어쩌다 걸인의 신세가 되어 그런 불행을 당하게 되었느냐?'
언뜻 합붕의 눈길 속으로 한 가닥의 습막이 스쳐 갔다.
그는 소녀를 향해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혼절한 소녀를 조심스럽게 부축해 일으켰다.
너무 큰 충격과 고통 때문이었는가? 소녀의 안색은 창백했고, 호흡 역시 고르지 못했다.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몸매는 새털처럼 가볍기 이를 데 없었다.
'쯧쯧, 기왕 주군의 명을 어길 거였으면 불행을 당하기 전에 구했어야 하는 건데…….'
물밀듯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더 이상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합붕은 두 손을 소녀의 몸으로 가져갔다.
그는 손에 공력을 돋우어 소녀의 전신을 주물러 가기 시작했다. 소녀의 정신을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 자신의 진기를 불어넣어 주는 추궁과혈(推宮過穴)을 시작한 것이다.
그의 몸은 여린 소녀의 몸을 빠르게 주물러 갔다.
처음 그녀의 속살을 보았을 때만 해도 불끈 욕념이 치밀어올랐지만, 지금 그는 아무 욕념도 느끼지 못했다.
소녀를 구하는 일념이 앞서기 때문인가?
그가 정신없이 소녀를 구하기 위해 추궁과혈을 계속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순간이다. 돌연 하나의 하얀 손이 번개와도 같은 빠르기로 합붕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콰악－!
그 손은 가공할 기세로 합붕의 심장부에 틀어박혔다.
"컥!"
합붕의 몸이 급살을 맞은 듯 펄쩍 튀어올랐다.
그것은 합붕은 물론, 세상의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돌발적인 기습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하필이면 합붕이 가장 방심하여 공력을 풀어 놓았을 순간이기도 했다.
아아, 그것은 다름 아닌 소녀의 손이었다.
방금 전까지 합붕의 품에서 혼절해 있던 소녀의 손이 흡사 악마의 손처럼 합붕의 가슴을 파고든 것이다.
그때 혼절해 있던 소녀의 눈이 조용히 뜨여졌다.
소녀는 합붕의 품에 안긴 채 한없이 담담하게 합붕을 바라보는 것이었는데…….
보라! 합붕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이 너무나도 투명하게 번들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독거미의 눈빛처럼 섬뜩한 살기로 젖어 있는 눈이었다.
소녀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소녀의 손은 여전히 합붕의 심장에 틀어박힌 그대로였다.
"안녕!"
합붕의 두 눈이 있는 대로 부릅뜨여졌다.
"크윽! 너… 너는……?"
합붕의 얼굴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불신과 경악의 빛이 물결치듯 피어났다.
소녀의 입이 다시 열리며 사이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호호… 믿을 수 없겠지, 귀타개 합붕?"
"나… 날 알고 있군."
그렇다. 소녀는 이미 합붕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소녀의 얼굴에 떠오르는 사악한 빛은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믿을 수 없어도 믿어야 한다. 너는 가장 방심한 상태에서 죽어 가며, 나는 방심한 네 가슴에 손을 박았다는 사실을! 이 모든 것은 완벽한 사전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살인미학(殺人美學)의 걸작품이라 할 수 있지. 호호호호……!"
흘러 나오는 소녀의 요사한 웃음소리.
그것은 일개 소녀의 입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그런 류(類)의 음성이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합붕의 마지막 의식은 끊어지고 있었다.
소녀의 손은 완벽하게 그의 심장을 관통한 상태였다. 합붕의 두 손이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렸다.
끊어지는 그의 의식 속으로 한 사람의 뚜렷한 얼굴이 영상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주군, 불충한 속하를 용서…….'
그리고 끝이었다.
푹－!
합붕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불신과 경악을 감추지 못한채 툭 튀어나와 있었다.
"깔깔깔……!"
요란한 소녀의 웃음소리가 골목길에 울려 퍼졌다.
소녀는 사악한 눈빛으로 합붕을 바라보며 자신의 손을 잡아 뽑았다.
뽑혀진 그 손에는 피가 뚝뚝 흐르는 물체 하나가 들려 있었는데…그것은 다름 아닌 합붕의 심장이었다.
푸아악－!
다음 순간, 합붕의 가슴에서 뭉클한 피가 화악! 솟구쳤다.
그 선열한 피는 고스란히 소녀의 얼굴과 전신으로 뒤집어씌워졌다.
소녀는 그 피를 전혀 피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소녀의 모습은 혈인(血人)으로 화했다.
그래도 소녀의 입에서는 유쾌하면서도 사악한 음성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호호… 이로써 그가 가장 아끼는 유일한 수족들인 삼천왕자(三天王子)의 숨통을 모조리 끊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뿐!"
사악했으되 놀랍도록 차갑고 냉철한 음성이었다.
합붕의 시신은 이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소녀는 그제서야 합붕의 몸을 밀쳤다.
쿠웅－!
합붕의 시신이 바닥으로 썩은 짚단처럼 나뒹굴었다.
소녀는 일어서서 쓰러진 합붕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드러난 자신의 몸을 전혀 가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호호… 어리석은 삼천왕자들! 무릇 무사에게 있어서 습관이라는 것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최대의 약점(弱點)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야지. 호호호호……!"
어느 순간이다.
팟－!
요란히 웃어 대던 소녀의 몸이 홀연 허공에서 연기처럼 꺼져 버렸다.
소녀의 모습은 찰나간에 골목길에서 사라졌다.
그곳에는 생명이 끊긴 네 구의 시신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스으으……!
한 줄기 야풍(夜風)이 불어 왔다. 그 바람은 나뒹구는 네 구의 시신에서 피어나는 피비린내를 자욱히 골목길 사방으로 휘몰고 갔다.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인물, 귀타개 합붕!
그것은 세 번째의 죽음이었다.

[얼음골]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