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또 공사중이다. 아들 피아노 학원 가는 길. 학원 옆 건물 1층 휴대폰 가게였다. 나이 지긋한 사장님이 엊그제까지만 해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과연 월세라도 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답이라도 하듯 결국 가게는 문을 닫았다.
(2) 휴대폰 가게를 이웃해 2평 남짓한 점포가 하나 더 있었다. 가끔 야채 과일을 저렴하게 파는 상점으로 문을 열곤 했다. 그러나 그곳도 얼마 가지 않아 태권도 홍보 대형 천막으로 가려진 채 침묵하고 말았다.
(3) 옆 건물 1층에도 8개월째 ‘내부 수리중’ 종이가 붙은 프렌차이즈 빵집이 있다. 내부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곧 앞서 간 점포들과 운명을 같이 하려는 걸까. 공사를 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점포를 뺀 것도 아닌 채로 대기중이다. 그 옆을 지날때마다, 서비스 빵을 챙겨주던 주인이 떠올랐다.
(4) 세 개 브랜드 아파트가 모여 삼천 세대가 넘는다.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도 있다. 병원과 학원도 잘되는 듯 보였다. 비록 외부 유입이 많지는 않지만 자체 소비인구가 없는 편은 아닌 듯 했다. 그런데 가게 월세내기에 충분한 상권은 아니었을까. 근 이년 사이,개인이 운영하는 유기농 베이커리와 ‘엄마손’ 반찬가게, 문방구와 밀키트 가게가 문을 닫았다. 다행히 다른 아이템으로 새주인을 찾아 곧 다시 문을 열긴 했지만….
(5) 점포들의 흥망성쇄가 비단 이 골목만의 특이 현상은 아니다. 십여 분 거리에 있는 역을 가다보면, 코로나 시기에 문을 열자마자 다시 닫은 무인 반찬가게가 있다. 간판 값만 해도 백 여 만원은 될텐데, 보증금에 월세에 인테리어에 시설비에… 비록 얼굴도 못 본 무인가게 주인이지만, 그 속이 얼마나 쓰라렸을까. 그 자리는 생선구이집이 대신 했으나, 생선 냄새는 맡아보지도 못하고 다시 문을 닫았다.
(6) 공사가 끝나가는 휴대폰 가게에는 커다랗게 입점 안내 천막이 걸렸다. 시들었던 개나리가 살아 돌아온 듯 화사한 노랑바탕에 카페 이름이 크게 박혀 있었다.
“아…또 커피집이야?”
(7) 학원이 많아 하교 후 아이들과 엄마들의 이동으로 골목은 분주하다. 그럼에도 간단히 간식을 해결할 수 있는 서민적인 먹거리 공간은 거의 없다. 국수집과 김밥 체인점이 하나 있긴 하다. 그러나 국수 가격도 예전같지 않고, 김밥집은… 미안하지만 왠지 발길이 가지 않는다. 그런 김밥집이 여지껏 운영할 수 있는 것은, 그 집 사장님이 건물주라 가능하다는 소문도 있다.
(8) 문득 예전 내 어린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집으로 가면서 들렀던 떡볶이 집이 생각난다. 비닐을 씌운 초록색 플라스틱 접시에 아이 손가락만한 떡 10개가 얌전히 누워있다. 삼각형으로 잘린 납작한 어묵도 두어 개 들어있고, 삶은 계란은 돈을 더 낼 수 있는 아이의 특권. 때론 내가 때론 친구가 그 특권을 누리며 반을 갈라 먹기도 했다. 배가 딱히 고프지 않아도 참새 방앗간처럼 으레 들러 쉬어 가던 곳. 그래서일까, 아들도 함께 공유할만한 추억을 만들어 주고픈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아들의 하교길 추억속엔 작은 봉지 속 젤리가 담길 듯 하다. 아기 손바닥만한 와플 한조각에 3500원이나 하는 비싼 간식을 하교길마다 사줄 일은 없을테니 말이다.
(9) 2023년 기준으로 전국의 자영업자 열명 중 한 명이 폐업을 한다고 했다. 2005년 이래 가장 높은 수치라고도 한다. 장사 잘 되는 금싸라기 땅 명동에서도 1층 공실 상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니, 위기는 위기인 모양이다. 그러니 아무리 분식집이 먹는 장사라 해도, 아이들 상대로 떡복이를 몇접시나 팔아야 높은 월세와 인건비며 식자재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알고보니, 아들 피아노 학원 건물 카페도 분식집이 폐업했던 자리라 한다. 그러니, 누군들 다시 용기 내어 분식집을 열려고 할까. 우리 동네나 이웃 동네 역세권 상권에도 분식집 귀한 이유가 다 있었나보다.
(10) 학원 가는 길목이 노랗게 밝아진 것과 달리, 길 건너 작은 카페 주인속은 커피콩보다 짙게 타들어가지 않았을까. 횡단보도만 건너면 바로 맞은편 그 자리에, 자신의 가게보다 두 배는 넓고 게다가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가 또 들어오다니. 그렇지 않아도 백여미터 거리에 이미 유명 연예인이 광고하는 커피집이 자리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 뿐인가 몇 발짝 가면 있는 학원 빌딩 1층에 또 하나의 커피체인점이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11) 나 역시 한 때 월 600만원의 월세를 따박따박 내던 시절이 있었다. 한 달의 끝은 순식간에 돌아왔다. 자영업자가 내야 할 것이 어디 월세뿐인가. 각종 고지서를 열어보는 손끝은 항상 떨렸다. 매출로 감당이 되지 않는 지출이 이어졌다. 현대판 소작농이 따로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든 사업. 남편과 싸움이 잦아졌고 24개월을 갓 넘긴 아들에게도 필요 이상으로 화를 냈다.
(12) 그래서일까. 하필 간판도 초콜릿색으로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커피집이 내 눈에 띄었나보다. 그렇다고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처지도 아니면서 무슨 오지랖인가. 수요가 한정적인 주거지역에 이렇게 과포화 상태로 문을 여는 커피 체인점들의 미래가 괜찮을지... 그저, 카페인에 약한 나 혼자만의 기우이길 바라야 하나. 분식집이 들어왔다면, 이미 한 집 건너 운영되고 있는 커피집의 생태를 거론했을까. 줄줄이 문을 닫고 떠나버린 점포 주인들이 다시 생각 났을까.
(13) 오픈 기념으로 반값 커피 손에 든 이들이 눈에 많이 띈다. 맞은편 커피집 근황을 물으니, 어제오늘 좀 휑했다고 한다. 매출에 분명 타격을 입었을 카페주인. 그를 위한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우리나라에서는 <흡연, 감사합니다>로 2005년에 개봉한 <Thank You For Smoking>.
담배회사 로비스트의 이야기다. 비록 건강을 해치지만, 담배 필 권리를 설파하는 일. 주인공은 가는 곳마다 경멸에 찬 시선을 받는다. 심지어 12살 아들은 아빠가 학교에 오는 것도 꺼리는데… 어느날. 아들은 ‘담배 권하는 일’하는 이유를 묻는다. 영화상, 주인공의 ‘도덕성’ 이나 그가 주장하는 ‘도덕적 융통성’ 의 논란을 떠나, 주인공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If you can do Tobacco, you can do anything.”
(어려운) 담배를 팔 수 있다면, 너는 (세상) 그 어떤 힘든 다른 일도 해낼 수 있다는 메세지로, 아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로 남고자 했다.
(14) 한 집 건너 한 집이 카페인 현실.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골목 카페 운영자분들 모두, 아니 이왕이면 한국시장에서 견뎌낸 자영업자 사장님들 모두. (세상) 어디에서 무얼 해도 거뜬히 해 낼 수 있는 능력 키워내기를 소망해본다.
(15) 그나저나 휴대폰 가게 주인아저씨는 어디에서 무얼 하실까. 문득 그의 안위가 궁금해진다. 저 가게가 분식집이었다면, 아마도 나는 떡볶이 먹느라 안부 물을 생각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