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여행3 - 위화타이레스링위엔 雨花臺烈士陵園 에서 국공내전의 상흔을 회상하다!
어제밤 늦게 난징 에 도착해 중심가인 씬지에커우 新街口(신가구) 에 있는 호텔에서 자고는
10월 20일 휴대한 전기남비로 밥을 지어먹고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난징 남역 에 도착합니다.
난징 남역 1층에 자리한 난징 버스터미널 南京汽车壮途站 에서 내일 黃山(황산) 으로
가는 7시 버스표를 끊은후에 다시 지하철을 타고 중화문 에 내려
10분을 걸어서 위화타이레스링위엔 雨花臺烈士陵園 (우화대열사릉원) 으로 갑니다.
이곳 “우화대열사릉원” 은 난징 남쪽 중화문 밖에 있는 100m 높이의 산인데 육조시대인
6세기 전반 梁武帝(양무제) 때에 운광법사 가 경전을 講(강) 할 때.....
천신이 감동해 하늘에서 꽃이 비처럼 내린 곳이라고 하여 雨花臺(우화대) 라고 합니다.
지금은 위화타이레스링위엔 雨花臺烈士陵園(우화대열사릉원) 이라고 불린다는데.....
현대사에서 국민당 정부때 공산당원 10만명이 처형 되었으며 혁명열사 기념관 이 있습니다.
여기 우화대 는 복잡한 시가지와는 달리 사방이 확 트인 너른 臺地(대지)에 솟은 산으로
중화민국의 南京(남경) 수도 시절에 이곳은 처형장 으로 쓰였던 곳입니다.
중국인들이 동상에 참배하는걸 보노라니 그 숙연한 자세에서 애국심 이 높은 것 같네요?
오른쪽길 언덕길로 걸어 올라가니 가게 앞에 관광차 가 서 있길래 탈려고 하니 운전수가
안된답니다! 요금은 10원이라는데, 왜? 돈을 내면 되는것 아니요?
그러니 운전수는 저 아래쪽을 가리키며 거기 광장 에서 타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사람아 다리가 아프니까 탈려는거지! 지금 저 아래 까지 다시 어떻게 내려가니?
시간도 없고 조금 가다가 내릴게? 운전수가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데...
그때 가게에서 쇼핑을 마친듯 단체 관광객 이 우르르 타는게 금새 자리가 꽉 차 버리네요?
듣자니 이 산에서만 생산되는 독특한 줄무늬의 돌 은 雨花石(우화석) 이라고 불려서
관광상품 이 되고 있다는데.... 이 사람들은 가게에서 그걸 구경한 것일러나?
민망한지라 쓴웃음을 짓고는 힘들게 언덕을 오르니 저 아래로 특이한 집들이 보이고
왼쪽 언덕에는 기념탑 이 보이는게...... 그럼 어느쪽이 혁명열사 기념관 일러나?
만주족 이 이자성의난 을 틈타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정복하고 건국한 淸朝(청조) 는
1,661년 강희제 를 시작으로 1,795년까지 이어지는 옹정제 와 건륭제 치세에
현군들이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신장과 티베트 까지 손에 넣으며 성세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고향 만주에서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땅에 들어간 만주족 滿洲族 은 인구가
100만명 이 조금 넘었다는데 ( 당시 조선은 400만 ) 6천만명의 한족 漢族
위에 당당히 군림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상무정신 이 사라지니 허약해 집니다.
광대한 영토와 인구 덕에 자급자족이 가능하므로 서양인과는 무역을 거부하고 조공 만을
요구하던 높은 콧대는 1,840년 아편전쟁 패배 로 일순간에 허물어 집니다.
1,850년에 일어난 기독교도 홍수전 의 태평천국의 난 을 청조의 군대가
진압하지 못하고 증국번과 이홍장등 한족 유림 의용군 이 일어나고....
침략자인 영국장군 고든이 이끄는 상승군 의 공격으로 1,864년 남경을 회복함으로써
14년에 걸친 난을 진압하자 청조의 위신 은 땅바닥에 떨어집니다.
그러자 한족 지사 들이 태평천국군이 내걸었던 멸만흥한(滅滿興漢) 운동에 나섭니다!
청조에 대항한 대표적인 인사가 중국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손문 이니 일본과 화와이 에
망명해 1894년 흥중회 를 조직하고 마침내 1911년 신해혁명 (辛亥革命) 성공으로
중화민국이 수립되었으나 무력을 가진 청조의 대신 원세개 (袁世凱) 가 실권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원세개 사후 청조의 장군 출신들이 저마다 무력을 가진 탓에 중화민국의 총통과
행정수반 자리를 두고 군대를 동원해 세력싸움을 벌이니 북양 군벌 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이홍장의 회군에 뿌리를 둔 안휘(安徽)파 와 원세개의 신군에 뿌리를 둔
직례파 (直隷派) 그리고 만주를 배경으로 등장한 봉천파 (奉天派) 등으로 대별됩니다.
모두 7개 군벌 들이 난립한 혼란한 시대에.... 국민당 은 군벌들을 제압하고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해 중국 영토를 통일하자는 운동을 시작하니 이른바 북벌 입니다.
1,924년 맺은 제1차 국공합작 은 국민당과 1,921년 탄생한 공산당이 손을 잡은 것입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1차 국공합작 은 군벌과 제국주의에 대항해 국민혁명에 이바지했으니
1920년 레닌이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민족 및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를 발표해 식민지 해방투쟁에서 부르주아의 역할 을 중요시한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국민당 도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1923년 쑨원(손문) - 이오페 선언을 거쳐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공식적인 연합전선 이 형성되었던 것이지요.
해서 국민당은 “연소(聯蘇)· 용공(容共)· 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을 채택하고
공산당원 은 당적을 보유한채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하여 이대소등 3명이 중앙집행위원에, 모택동 등 4명이 중앙집행위원 후보에 선출됩니다.
1927년 무한에 혁명정권이 수립되면서 손문 사후 총통이 된 장개석은 두려움을 느꼈으니
이에 국민당 총통 장개석은 1927년 4월 상하이 에서 "반공 우파 쿠데타" 를
감행함으로써 국공 합작은 결렬되고 공산당은 수많은 사망자를 내고는 불법화 됩니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토지혁명 을 추진함으로써 농촌지역에서의 세력 확장에 주력
했으며 모택동 을 지도자로 하는 강서성 “중화소비에트”를 성립해
난징정부에 대항하니 이에따라 10년간에 걸친 1차 국공내전 이 전개되었던 것이지요.
공산당은 장제스 군대의 강서 소비에트 에 대한 포위망을 뚫고 장정(長征) 으로 구사일생
연안으로 쫃겨가서는 1935년 8· 1 선언을 통해 항일민족통일전선 을 제창하고 1936년
장학량이 공산당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방문한 장제스 를 감금한 서안사건 이 일어납니다.
그러던중 1,937년 7월 일본이 만주 점령에 만족하지 못하고 중일전쟁 을 일으켜 중국을
침략하여 북경을 점령하자... 일치항일 (一致抗日) 제2차 국공합작 이 성립됩니다.
공산당군은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개칭되어 전선에 배치되었으나 국민당은 합작에 두려움 을
느껴 1938년경 부터 적전내전 이 시작되어 분열을 거듭하던 중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협상이 결렬된 1946년 6월 국민당은 공산당 지구를 침공 하여 전면적인 내전 을 개시합니다!
미군의 적극적인 지원 으로 국민당군 은 전투기와 탱크에 대포 등 중무장인데 비해서...
공산군 은 소련의 일부 지원을 받았지만 소총 등 재래식 후진 무기에다 병력수도
국민당군 430만에 공산당군은 120만 으로 월등한 우위라 내전은 곧 끝날듯 보였습니다.
1947년 3월에는 국민당군의 후쫑난이 지휘한 20만의 병력은 북진하여 중국 공산당 본부
가 있던 중국 서북부 연안 을 점령하여 기세를 올리기도 했으나.....
중국 전역으로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려 병력을 분산시키는 전략적 오류 를 범하게 됩니다.
게다가 훗날 베트남전 에서 보듯이 국민당 정부의 총체적 부정부패 와 사익 추구
무능과 인플레로 인한 경제 붕괴.... 그리고 이반된 민심 이
어우러져서는 1948년 부터는 전세는 오히려 공산당에 유리하게 내전이 전개됩니다.
1948년 가을 린뱌오(임표) 가 지휘한 조선인 이 대거 포함된 동북 인민해방군 이 만주에서
30만 국민당군을 격파 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힘의 균형이 깨집니다.
인민해방군 은 1949년 1월 31일 베이징 에 입성하였고 파죽지세로 양쯔강을 건너
4월 23일 에는 이곳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남경) 을 함락하는데.....
사진에서 보듯이 공산당군은 나룻배 를 타고 양쯔강을 건너는데도 저지하지 못합니다!
이때 병력수는 완전히 역전 되어 민심을 잃은데다가 패배를 거듭한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150만 으로 줄어든데 비해 공산당군은 지원자가 쇄도 하여 400만 병력에 이르렀습니다.
5월 27일 중국대륙 최대 도시 상하이 까지 손에 넣으니 장객석은 대만 으로 후퇴하는데...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 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을 선포하는 것이지요.
1,933년에 민족주의 독립군이 소멸된 후에 30년대 중반 들어 만주에서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인과 조선인 연합군 만여명을 동북항일연군 이라고 했는데 주진, 강건, 김일성,
최현, 최용건, 오백룡, 임춘추 등이 부대장으로 있었으나.... 1,939년 일본군은
50만 병력을 동원해 공격하니 주보중과 김일성 등은 소련으로 후퇴해 88여단에 합류합니다.
1,946년 6월 만주에서 국공내전 이 발발하자 1,930년대 처럼 공산군 에 참전한
조선인은 12만명 으로 이중에 살아남은 자 들이 상당수 조선 으로 인계됩니다.
1,949년 7월 선양에 있던 방호산의 166사단이 먼저 조선에 넘어오고 이어 8월에는 장춘에
주둔하던 김창혁의 164단등 합쳐 4만명이 북한군에 편입되어 6.25 남침 을 했던 것이지요!
만약 국공내전 에서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승리 했더라면 조선인들은 전사 했을 것이고
북한은 고립되어 감히 남침을 할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니 통탄스러운데...
중공의 등장 으로 일어난 6.25 를 생각하노라면 몇가지 떠오르는 의문 들이 있습니다!
1. 미스터리 : 6.25 하루전날 국군은 3개월째 계속해온 비상 경계태세를 해제 하고 장병의
3분지 1 을 휴가내지 외박 으로 내보내며 트럭도 수선을 위해 후방으로 철수시킨다.
서울에 장교구락부 낙성식 을 열어 수도권 장교들이 대거 참석해 술과 춤으로 파티를 열었다.
한국 육군본부의 반대 에도 불구하고 두가지 모두 미군 군사고문단 의 강권 이라.....
그런후 미군 고문단 지휘부는 동경 으로 외박차 가버리고 장군들은 12시에 술에취해
잠들었는데 4시간후 6.25 남침이 벌어졌으니 춘천의 6사단을 제외한 수도권은 무방비라 ?
2. 김일성의 오판 : 미국은 1,2차 세계대전에서 보듯 의회 동의를 얻어야 하는지라....
전쟁참가에 1년 이상 이 소요되는데 주한 미군을 철수한후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
을 발표하니 미국의 방위선은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선으로 한국과 대만을 제외 합니다.
1,949년 8월 장개석 이 한국을 방문하자 미국은 이승만에게 국민당과 연합하면
원조를 끊겠다고 경고했습니다. 따라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3개월 이내에
전쟁을 끝낸다면 "미국이 참전하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확신했는데....
주말인데도 유엔안보리 가 소집되고 트루먼은 의회를 거치지 않고 파병을 결정 합니다.
규슈에 주둔중인 24사단 21연대 1대대(스미스 부대) 는 전쟁이 일어나지 불과 6일만인
7월 1일 부산에 상륙했고 딘 사단장도 7월 3일 대전에 들어왔으며.....
1대대(스미스부대) 는 북상하여 7월 5일 경기도 오산에서 북한군과 첫 전투 를 벌입니다.
사단 전체가 부산에 상륙한 것은 전쟁발발 9일만인 7월 4일 이니 가히 "전광석화"
라고 할만한데.... 미군은 신속 과감한 전진에도 불구하고 국공내전 에서
단련된 조선군 은 미 24사단을 대전에서 격파하고 딘 사단장을 포로 로 잡게됩니다.
3. 맥아더의 오판 :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 은 절대로 없다고 장담하며 유엔군이 38선을
넘는데..... 중공은 평양이 위험 해지자 압록강 을 넘어왔으니 1.4후퇴 로 이어집니다.
역지사지 易地思之 라! 임진왜란 때에 평양이 함락 되자 7년간 합계 25만에 가까운 대병을
파병해 재정파탄으로 인해 망한 명나라 예에서 보듯..... 중국은 세계
최강대국 미군이 중국 국경선에 주둔 하는 상황은 절대로 용인할수 없었던 것이지요?
4. 가장 위험했던 순간 : 중공군이 평택 까지 밀고 내려오자 영국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국을
압박하여 중공에 "현전선에서 휴전" 을 제의하는데 모택동과 주은래가 이를 거부하자
미군은 융단폭격 으로 반격하였으니.... 만일 받아들여졌으면 대한민국 국경선은 충청도선???
5. 과유 불급 : 맥아더가 평양과 원산 선에서 진격을 멈추고 중공측에 더이상 북진하지
않겠으며 그 북쪽에 북한 정권을 용인 하겠다고 약속하고 휴전을 제의 했으면....
중공군은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며 김일성은 패배 책임으로 실각하고 허약해진 북한은
훗날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고 신뢰를 쌓으면 동독처럼 흡수통일 되었을 것이니 원통하네요!
여기 雨花臺烈士陵園 (우화대열사릉원) 은 1927년 장개석이 신의를 저버리고 비열하게도
동맹인 공산당을 배신하고 상해에서 쿠데타 를 일으켜 제1차 國共合作(국공합작)
이 결렬되면서 공산당원 및 反(반) 국민당 세력에 대한 숙청의 피바람 이 분 곳입니다.
이후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은 1949년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철수할 때 까지
무려 10만명 에 달했다는데...... 묘 앞 기념비에는
“死難烈士萬歲(사난열사만세)”라는 毛澤東(모택동)의 글씨 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고는 위화타이레스링위엔 雨花臺烈士陵園(우화대열사릉원) 을 나와 택시를 타고는....
중화먼 中华门 (중화문)에 내리니 거대한 성벽과 육중한 성문 이 보는 사람을 압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