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의 쉼터
오늘이 3월 23일(토)이다.
매월 두번째와 네번째 토요일은 백년지기들의 정기 월례회를 갖는다.
날씨도 영상 10도를 웃도는 봄날인 오늘이다.
동기들중에서도 다섯명의 정예 멤바인 셈이다.
연세들은 80을 넘긴 동기들이지만 만나면 언제나 10대 20대로 회귀하는 순간이다.
무릎 허리 모든 관절등이 시원찮아서 몸이 제대로 따라주지를 않으니 방법은 무엇일까.
전철 4호선 독립문역 4번 출구에서 만남이다.
독립기념관과 일제시대에 건설한 서대문 형무소의 터전이다.
오늘의 행선지는 안산(295m무악산) 봉수대를 향하리다.
안산(295m)은 서대문구 봉원동 연세대학교 뒷편에 있다.
일명 무악산이라고도 한다.
서대문 형무소는 한마디로 독립투사들의 죽음의 묘역이라고 함이 타당하리다.
독립만세를 목이 터지도록 부르짖다가 왜놈들의 총칼에 무참히 사라진다.
" 어머니 ~ 아버지 ~ ~ ~ 내 아들 딸들아 ! " 한마디도 못 하고 가슴에 품을 뿐이다.
부모님도 형제자매 그 누구도 모르게 저 멀고도 머언 하늘로 오른 순간들이다.
" 대 ~ 한 ~ 독 ~ 립 ! 마 ~안 ~ ~ ~세 ~ " 독립투사들의 마지막 부르짖음 뿐이다.
일본 군발이들 구둣발에 짓이겨지고 총칼로 무자비하게 몰살이다.
지금은 독립기념관으로 교육의 현장으로 탈바꿈한 곳이기도 하다.
유관순열사는 충남 천안(天安)에서 1902년 12월 16일에 출생하여
1920년 9월 28일에 서대문 형무소 지하에서 목숨을 거둔다.
17세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생으로 " 대한독립만세 "서울 만세시위에 참여를 한다.
고향에 돌아와 부모형제들과 함께 아우내(병천)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징역 3년형을 받는다.
서대문 형무소인 이곳 지하 감옥에서 수형 중 옥중만세시위를 주도하는 죄로 고문을 받아 순국한 것이다.
' 어머니 아버님 죄송합니다 " 한마디도 없이 어리디 여린 17세 꽃다운 나이이다.
삶의 꽃봉우리를 터뜨려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지도 못한 모습이리라.
"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 "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참을 수 있사오니
내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
유관순 열사 추념비인 동상 앞을 스쳐 지난다.
꽃 한송이, 물 한모금커녕 그저 바라볼 뿐이다.
이처럼 초라한 나의 모습을 무엇으로 표현을 할 수도 없으리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80대 노객들이다.
여태껏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
앞으로는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답답한 마음을 뒤로한채 무악산 중턱에 이른다.
세명의 동기들은 그대로 주저앉을 뿐으로 봉수대까지 오름을 포기이다.
겨우 두명만이 정상으로 향한다.
온 몸은 땀으로 젖고 발걸음은 거북이만도 못한 노객들이다.
5분여 정도면 이곳에서 봉수대를 사뿐하게 오르곤 하던 때가 언제이련가.
가다 쉬다를 반복으로 15분 정도가 걸려서 도착이다.
체력은 바닥이지만 마음만은 가볍기 그지 없다.
봉수대에서 몇컷의 사진을 폰에 넣는다.
건너편에 인왕산도 손짓을 하고 있다.
이곳에 오를라치면 항상 추억이 새롭게 보름달처럼 떠오르곤 한다.
인왕산 줄기 북서쪽에는 서울 여자상업고등학교 즉 서울여상(女商)의 터전이다.
서울여상을 생각하면 고등학교 시절로 회귀도 하는 순간이다.
KBS 방송국에서 라디오 게임이 생각된다. 1960대 초반일게다.
평생 처음 라디오 방송국에 들어선다.
모교인 DB고등학교 2학년때로 기억하고 있다.
라디오게임에 출전하려고 하는 모교의 대표이다.
CD여고와 한판 승부를 겨를 때이다. 각각 학교의 대표로 다섯명씩의 선수(?)들이다.
화학문제 대표로 출전이다.
" 찬물에도 녹는 금속의 동위원소는 무엇 ~ ~ ~ "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벨을 힘차게 누른다.
" 아 니 ~ 이개 뭐야 ~ " 상대편인 CD여고 대표 여학생 벨이 먼저 울리는게 아닌가.
결국은 4 : 6인가로 패배이다.
" 정남아 ! 너는 그 문제의 답을 모른거냐 , 응 " 화학선생님의 한마디이시다. 할 말이 없다.
화학(化學)이라면 언제나 시험을 치면 만점을 받곤하던 화학반 소속 학생이니 어찌할까.
그 당시에 연속 3회 우승을 차지한 학교가 서울 여상인 것이다.
우승기도 우승컵도 트로피도 서울여상의 소유물이 되는 영광의 시절이리다.
그리고 십여년이 흐른 1970년에 H약품 제약회사에 입사를 한다.
첫 출근하는 바로 그날 첫눈에 들어온 여직원이다.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얌전하면서 틀림없는 또렷한 여직원이 아닌가.
영업부 약사들의 거래처인 서울시내 약국과 병원등을 관리하는 부서에 근무하고 있다.
나중에야 서울여상 출신임을 알게된 것이다. 나의 평생 천생연분이 그녀가 될줄이야,
내 손주들의 할머니이며 아들 딸의 오마니이다.
안산(무악산)의 봉수대를 오를 때면 건너편에 있었던 서울여상이 그립기도 하다.
겨울이면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고 여름이면 소낙비도 휘몰아 쳤을 것이다.
책가방을 힘겹게 들고 겨울이면 장갑도 없다. 자그마한 손가락들은 빠알게 부어오르고 동상(凍傷)이렸다.
여름에는 우산도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리다.
그 어여쁘고 착한 여학생의 모습이 가슴을 저리고 있다.
바로 나의 고교시절의 모습과 겹치기도 하고 있지 않는가.
지금은 서울 관악구 관악로 85로 이전한 것이다.
관악경찰서 옆으로 서울 문영 여자중학교와 문영 여자고등학교와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다.
모두가 같은 재단이 아닐까. 아마도 40여년은 흘렀을 터이다.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 지기들의 부르는 목소리가 봉수대를 흔들고 있다.
서둘러 하산이다. 중턱 바위 곁에 자리한 곳이다.
다섯의 정예 멤버들이 둘러앉는다.
도토리묵 찹쌀영양밥 김치 막걸리 고량주 찹쌀떡 두유 초코파이 등 각자가 준비해온 간식이다.
언제나 한 녀석은 빈손으로 동냥만 하고 있는 지기도 있다. 그 이름은 바로 누구이더냐.
금화아파트를 지나서 서대문 로타리로 향하고 있다.
안산 산줄기에는 살곳도 먹을 것도 없는 빈손의 서민들이 살고있던 판자촌이었던 곳이다.
군사독재정권 시절로 김 # @이라는 분이 서울시장 때이다.
그 당시에 곳곳에 이같은 서민 아파트를 줄줄이 시공이다.
한 마디로 불도저식 "빨리빨리"의 보여주기식 성과 내기인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마포구 창전동 산1번지 와우아파트(시민아파트) 사건이다.
15동이 무너져 70여명이 사상자를 속출이다. 판잣집 짓듯이 기가 차고 어이가 없다.
1960대 중반에 서대문구 냉천동 이곳에 금화아파트가 들어선다.
기억으로는 5층인가 6층 정도되는 서민아파트이다.
10여평 정도되는 단칸방으로 부엌은 연탄을 때든지 나무가 연료인 것이다.
아내가 처녀시절에 살고 있던 곳이기도 하다.
태여나서 첫 아파트라는 곳으로 들어서 본 곳이다.
두 청춘 남녀만의 짜릿 짜릿한 쾌감을 스스럼없이 발산하는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20대 청춘 남녀의 꿈과 희망이 깃든 사랑의 쉼터가 아니랴.
종각역 근처 맛집을 나와야 한다. 오후 세시경에 들어선 곳으로 네시간을 넘긴 저녁 일곱시이다.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주절인 노객들의 아집뿐이다.
다음 만날 그날을 고대하면서 아쉬움을 달랜다.
오늘도 종착지는 오롯이 하나뿐인 사랑과 행복의 쉼터인 그곳이 아니랴.
2024년 3월 23일(토) 무 무 최 정 남
이곳에 동기들 모습이
{ 1 } https://photos.app.goo.gl/DJ2eshWbvzgFUbix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