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을 살아내며, 12월의 일기, 함박스텍 추억
내게 특별한 추억이 하나 있다.
특별한 추억이 어디 한둘 이겠냐마는, 이 추억은 먹는 것으로 슬펐던 것이어서, 내 특별하다 하는 것이다.
먹는 것으로 슬펐던 것도 한둘 아니다.
중학교 시절에 어느 여름 방학 때에 서울의 잘 사는 외삼촌 집으로 놀러가서 구차하게 밥 얻어먹은 것도 슬픈 추억이고, 쫄딱 망한 집안 형편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고향땅 점촌 역전에서 막노동으로 근근이 먹고 살 때 또래의 김병채 친구에게 날이면 날마다 짜장면 곱빼기 얻어먹은 것도 슬픈 추억이고, 조무래기 검찰수사관 시절에 얄팍한 주머니 사정으로 구수해 보이는 설렁탕을 못 사먹고 불그죽죽한 시레기 해장국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던 것도 슬픈 추억이다.
그 추억들 중에서도 특별한 추억이 하나 있다.
곧 함박스텍 추억이다.
그 역시, 내 검찰수사관 말단 시절에 겪었던 사연이다.
그때만 해도 내게 있어서는 의식주(衣食住) 해결이 참 어려웠다.
북아현동 시민아파트 아래쪽의 쪽방에 혼자 월세 얻어 살면서 밤잠도 안 자고 불철주야(不撤晝夜) 공부만 해서, 끝내 9급 말단의 검찰수사관이 되기는 했지만, 입고 먹고 사는 것은 늘 헐벗고 굶주렸었다.
거덜이 날 정도로 아주 쫄딱 망해서 원체 가난한 집안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터라,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내 그때 친가나 외가에 대해 두루 반감을 갖게 됐었다.
오로지 박봉의 나 혼자서 우리 집안의 살림을 다 감당을 해야 했었다.
구두를 사 신을 수 없어서 값싼 운동화를 신고 다녀야 했었고, 양복을 맞춰 입을 형편이 안 되어서 싸구려 작업복을 입고 다녀야 했었다.
그것도 단벌로 세탁하기가 쉽지 않아서 때가 잘 타는 목 부분에는 수시로 세탁이 가능한 칼라를 따로 붙였었다.
내 정확한 기억으로, 그때 하숙비가 2인 1실에 12,000원이었는데, 내 받는 월급이 그 돈도 채 되지 않아서 하숙을 못하고, 어느 허름한 기와집의 문간방에 세 들어 자취를 해야 했었다.
얼마나 작은 문간방이었는지, 내 몸만 겨우 들어갈 정도였고, 그것도 화장실 옆에 붙어 있어서 악취까지 스며들어왔었다.
먹는 것 또한 말이 아니었다.
굶기 일쑤였다.
아침은 자취로 대충 때우고, 저녁은 선배들 따라 다니면서 얻어먹는 것으로 그런대로 해결을 했으나, 점심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쩌다 내게 업무적 심부름을 시키는 옆자리 선배가 나를 데리고 가서 해장국이니 떡라면이니 해서 점심끼니를 해결해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나 혼자서 해결을 해야 했다.
대부분은 굶었다.
그렇다고 사무실에 멍하니 앉아서 굶을 수는 없었다.
쪽팔리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바깥으로 나가서 당시 서소문에 있던 검찰청사의 정원이라고 생각했던 덕수궁으로 무료입장해서 그 정원을 한 바퀴 휘돌고 나오는 경우가 숱했었다.
그래서 마치 점심끼니를 때운 것처럼, 이빨 쑤시개를 입에 물고 사무실로 들어서고는 했었다.
그래서 며칠을 굶어 몇 푼의 돈이 굳어지면, 나 혼자서 서소문 식당가나 북창동 먹자골목으로 건너가서 그동안 먹고 싶었던 음식을 챙겨먹고는 했었다.
그때 주로 챙겨먹었던 점심끼니가, 서소문 진주집 김치찌개였고, 우래옥 해장국이었고, 북창동 먹자골목의 어느 경양식집 돈까스였고, 정동교회 앞의 문방구 떡라면이었고, 검찰청사 옆 골목의 유림분식 튀김우동이었다.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유림분식 그 집의 판모밀을 먹을 수 없었고, 북창동 경양식집의 함박스텍을 먹을 수 없었다.
조금 더 비싼 몇 푼을 감당할 형편이 되지를 않아서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함박스텍을 먹을 수 없음이 참으로 서러웠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참 슬픈 추억들이다.
해발 1,106m의 백두대간 주흘산 저 너머의 연풍휴게소를 찾았다.
지난 일요일인 2023년 12월 3일 오후 1시쯤 해서의 일로, 그 전날 우리 집 김장 하느라 애쓴 손길들과 국민학교 동기동창인 친구들 몇과 어울려, 그곳 양식당의 함박스텍을 먹을 작정에서였다.
함박스텍 한 조각을 잘라서 입에 물었다.
딱 그 순간, 지난날 함박스텍으로 슬펐던 추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