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놀이 [김선우]
배롱나무 아래 나무 벤치
내 발 소리 들었는지
딱정벌레 한 마리 죽은 척한다
나도 가만 죽은 척한다 바람 한소끔 지나가자
딱정벌레가 살살 더듬이를 움직인다
눈꺼풀에 덮인 허물을 떼어내듯 어설픈 움직임
어라, 얘 좀 봐. 잠깐 죽은 척했던 게 분명한데
정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딱정벌레 앞에서
죽은 척했던 나는 어떡한담?
햇빛이 부서지며 그림자가 일렁인다
아이참, 체면 구기는 일이긴 하지만
나도 새로 태어나는 척한다
햇빛 처음 본 아기처럼 초승달 눈을 만들어 하늘을 본다
바람 한소끔 물 한 종지 햇빛 한 바구니 흙 한 줌 고요 한 서랍.....
아, 문득 누가 날 치고 간다
언젠가 내가 죽는 날, 실은 내가 죽은 척하게 되는 거란 걸!
나의 부음 후 얼마 지나 새로 돋는 올리브 잎새라든지
나팔꽃 오이 넝쿨 물새 알 산새 알 같은 게 껍질을 깰 때
내 옆에 있던 기척들이 소곤댈 거라는 걸
어라, 얘, 새로 태어나는 척하는 것 좀 봐!
-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 2012
소리족 [송재학]
내 귓속의 소리족(族)들은 오래 살림하며 번식해왔다 그들은 내 입이고 나는 그들의 비명이다 육신의 빈틈이 또다른 생의 거푸집이라는 예감은 있다 그 생이 또다시 무언가의 거푸집인 것도 분명하다
줄의 한쪽은 내 귀에 닿아 있고 다른 한쪽은 소리를 힘껏 물고 있다 내 몸통 안에 한 줄의 현악기가 있다는 느낌은 무얼까 갈대와 바람이 서로 눕히는 소리, 오늘 깨끗이 씻어야 하는 머위잎 위의 하루를 적시는 빗소리, 너무 먼 곳까지 온 일몰에 잠기는 생각은 현악이지만 거푸집이 낡았다고 불평하는 건 어린 소리족들이다 꽃잎의 낙하를 읽어,라고 내 귀와 꽃의 귀애 동시에 속삭이는 늙은 소리들 덕분에 생의 느린 장면, 생의 정지 화면과 함께할 수 있다 씻어내려고 게워내려고 하지만 소리는 이미 내 귀를 나팔꽃 닮은 공명통으로 바꾸는 중이다
- 내간체를 얻다, 문학동네, 2011
'
잠깐 오는 비 [김남극]
더덕 잎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깐 더덕 냄새가 뜨락까지 닿았다가 사라졌는지
낙숫물 떨어지는 곳에도 냄새가 난다
나팔꽃 나팔 소리 멈추고 입을 닫았다
잠자리 날아간 바지랑대 끝
소매는 소매끼리 가랭이는 가랭이끼리 빨랫줄에서
턱턱 살결 없는 살 무딪는 소리가 난다
빨래 걷는 앞집 할머니 신발 끄는 소리 따라
앞산에서 콩새가 잠깐 울었다
고추장 단지를 덮으러 간 장독대
패각을 질질 끌고 배춧잎에 붙어선 달팽이
줄기 속 섬유질을 삭삭 갉아먹는 소리가 들리다가
후두둑 빗소리에 잠겼다
이 오지의 생활을 패각처럼 뒤집어쓰고 방바닥에 엎드려
양철지붕에 튕기는 빗소리 듣는다
패각에 구멍이나 안 날는지
안달하며
안달하며
- 하룻밤 돌배나무 아래서 잤다, 문학동네, 2011
나팔꽃 [박상천]
아파트 앞마당에 심은
나팔꽃 덩굴이 뻗어나가도록
줄 하나 걸어주었다.
나팔꽃의 꽃말이 허무한 사랑이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매일매일 덩굴손으로 그 줄을 붙잡고
온몸을 꼬아가며
길을 가는 나팔꽃.
나팔꽃의 꽃말이 왜 허무한 사랑일까.
길이 끝난 곳에 이르자 마침네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지만
더 이상 붙잡을 끈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그는 이내 시들어간다.
사랑의 줄타기,
온 힘을 다해 뻗어나가 보지만
어느 곳엔가 이르면 길이 끊긴다.
오늘도 그렇게 애써 길을 가고 있는
나팔꽃의 꽃말은 허무한 사랑이다.
- 낮술 한잔을 권하다, 책만드는집, 2013
가을 기차 [문인수]
들국 앉은 모습이 설핏 종지부 같다.
들국 가느다란 모가지 너머 저
빈 들 먼 끝머리
은빛 기차 한 가닥 천천히 가고 있다.
생각하면 엊그제
개나리 목련 피었다 서둘러 지고
라일락 진달래 아카시아 패랭이 분꽃 달리아 명아주꽃 장미
나팔꽃이 또 줄지어 겨우 겨우 따라왔다.
짧고 아름다웠던 보폭이여
어릴 적엔 그렇게 징검다리 건넜다.
아이들 여럿이 뒤뚱뒤뚱 건넜다.
아이들의 어린 동생들도 다 빠지지 않고 건너면
오, 꽃 자욱한 메밀밭
희고 자잘한 기쁨이 가슴에 들에 많았다.
그렇게 봄 가고 여름 간 것일까.
생각하면 엊그제
더 많이 어둡고 소란스러웠던 날들은
발목을 풀고 떠난 물소리 같은 것.
어느 날은 문득 뒤가 비어 있고
죄 없고 눈물 없는 것들만이 뼈처럼 이어져
이 큰 둘레의 가을을 건너가고 있다.
들국 앉은 모습이 설핏 종지부 같다.
- 뿔, 민음사, 2007
만년설 [정한아]
-아홉 살에 당신의 손이 할 수 있는 것
그해 겨울, 너의 혼자 놀기 목록은
파트라슈를 애도하며 빈 우유갑 + 먹고 남은 하드 작대기 둘 + 나무 젓가락 한 짝 + 압정 하나로 풍차 만들기
색종이 은종이 금종이를 오려 만든 고리 수백 개 이어 붙여 성탄목 꾸미기
눈 쌓인 주인집 마당에 쌀 한 줌 뿌려 소쿠리에 막대 받치고 참새 덫 치기
의기양양해지기
대추나무 가지마다 참새는 소쿠리 밑으론 안 들어오고 낄낄낄 웃기만
대추나무 뒤에선 아침 햇살이 썅썅썅 빛나고
길 건너 가겟집 아이 은경이, 아침 댓바람에 달려와 전날 이쁘다며 하룻밤만 데려간, 네가 봄부터 지렁일 먹여 키운, 당당히 볏도 솟기 시작한, 친동생 같은 수평아리가, 얼어 죽었다 한다
은경이 아부지와 은경이 동생 병찬이는 입술에 묻은 기름을 스윽 훔치고
그건 아무래도 영계백숙 국물 같고
배신이 금물이므로 의심이 자유여서
실 끝을 쥔 손은 벼린 칼처럼
거두지 못해 파랗게 얼었던 것이다
네가 만든 풍차는 바람이 불어도 돌지 않고
(그러나 직접 돌리면 반드시 돌고
―돌고 싶을 때 무언가 돌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유익한가)
베들레헴엔 오는 눈도 가는 눈도
(그러므로 오는 눈길도 가는 눈길도)
영영 없었을 터인데
소철 성탄목 위엔 이제부터 사철 녹지 않을
탈지면으로 위장한 만년설
(참새야, 실컷 낄낄거려라
영리한 새대가릴 소쿠리 밑에 들이밀면
가족이 있는 것들은 죄
잡아서 구워 먹으리)
배부르다는 듯 트림을 한 번 꺼억 하고 부러 깔깔 웃어보았으나
그날 밤 생전 처음 자발적으로 일기 쓰기를 ;
"삐약이가 죽었다. 은경이 아빠가 죽였을 거다. 은경이 엄마가 끓였을 거다. 은경이 엄마 아빠와 병찬이는 먹었을 거다. 은경이는 어쩔 수 없이 먹었을 거다. 세상은 멸망할 거다. 은경이는 용서해주자."
여름 끝물에 거두어둔 나팔꽃 씨앗은 아직 책상서랍 안에서
따따따 따따따 주먹손으로
따따따 따따따 나팔 꿈을 꾸는지 마는지
자기가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
까맣게 까맣게 모르고
- 어른스런 입맞춤, 문학동네, 2011
새봄의 기도 [박희진]
이 봄엔 풀리게
내 뼛속에 얼었던 어둠까지
풀리게 하옵소서.
온 겨우내 검은 침묵으로
추위를 견디었던 나무엔 가지마다
초록의 눈을, 그리고 땅 속의
벌레들마저 눈 뜨게 하옵소서.
이제사 풀리는 하늘의 아지랑이,
골짜기마다 트이는 목청,
내 혈관을 꿰뚫고 흐르는
새 소리, 물 소리에
귀는 열리게 나팔꽃인 양,
그리고 죽음의 못물이던
이 눈엔 생기를, 가슴엔 사랑을
불 붙게 하옵소서.
- 청동시대(靑銅時代), 모음출판사, 1965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고영]
너……라는 말 속에는 슬픔도 따뜻해지는 밥상이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눈곱 낀 그믐달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밤마다 새 떼를 불러 모으는 창호지문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물구나무 선 채 창밖을 몰래 기웃거리는 나팔꽃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스스로 등 떠밀어 희미해지는 바람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진즉에 버렸어야 아름다웠을 추억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약속 그래서 더욱 외로운 촛불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죽음도 두렵지 않은 불멸의 그리움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평생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안고 괴로워하는 상처도 살고
너……라는 벼락을 맞은 뼈만 남은 그림자도 살고
-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문학세계사, 2009
지극히 사소하고 텅 빈 [김근]
첫 순간이죠. 이름을 기억하나요, 그대? 아무도 얘기를 안 했는지도 모르고, 아무도 얘기를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나는 나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내가 여름날 아침 나팔꽃처럼 시들 때 그대는 벼랑 끝에 걸린 아름다운, 더러운 노을이 되시겠다구요? 첫 순간이죠. 어쩌면 마지막인가요? 그대는 또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우리는 혁명을 기다리는 검은 그림자도 되지 못하고 그리움으로 뻗어나가는 푸른 이파리는 더더욱 되지 못하고, 하늘과 땅 사이를 쏘다니지요. 단지, 고삐 풀린 천사처럼.
기억하나요, 그대? 나라는 이름, 그대라는 이름, 이름이라느 이름, 혹은 잘못 붙인 무수한 명명들. 혹은 그 무수한 밤의 멍멍들.
아무도 얘기를 안 했는지도 모르고, 아무도 얘기하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 장뤼크 고다르의 영화<사랑의 찬가>에서 변용.
-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 문학과지성사, 2014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허만하]
높은 곳은 어둡다. 맑은 별빛이 뜨는 군청색 밤하늘을 보면 알 수 있다.
골목에서 연탄 냄새가 빠지지 않는 변두리가 있다. 이따금 어두운
얼굴들이 왕래하는 언제나 그늘이 먼저 고이는 마을이다. 평지에 자
리하면서도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흙을
담은 스티로폼 폐품 상자에 꼬챙이를 꽂고 나팔꽃 꽃씨를 심는 아름
다운 마음씨가 힘처럼 빛나는 곳이다.
아침노을을 가장 먼저 느끼는 눈부신 정신의 높이를 어둡다고만
할 수 없다.
-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솔, 2002
쓴맛 [천양희]
쑥부쟁이와 구절초와 벌개미취가 잘 구별되지 않고
나팔꽃과 메꽃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은사시나무와 자작나무가 잘 구별되지 않고
미모사와 신경초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안개와 는개가 잘 구별되지 않고
이슬비와 가랑비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가리와 두루미가 잘 구별되지 않고
개와 늑대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적당히 사는 것과 대충 사는 것이 잘 구별되지 않고
잡념 없는 사람과 잡음 없는 사람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평생을 바라본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왜 그럴까
구별없는 하늘에 물었습니다
구별되지 않는 것은 쓴맛의 깊이를 모른다는 것이지
빗방울 하나가 내 이마에
대답처럼 떨어졌습니다
- 유심 11월호
비의 동행 [허만하]
나팔꽃 같은 우산을 받쳐들고 번들거리는 포도를 걸
었을 때 나의 왼쪽 어깨가 젖었었다. 내 곁에 붙어 선
그는 바른쪽 어깨가 젖고 있었다. 뿌연 오렌지 빛 가로
등 불빛은 온몸으로 비에 젖고 있었다. 길은 끝이 없었
다. 갈림길에서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대형 유리
창에 비친 그의 얼굴을 얼른 훔쳐볼 수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한 그 얼굴은 바로 나 자신의 얼굴이었다.기억과
는 다른 시간에 속하는 나의 얼굴. 비스듬히 들이치는
비에 머리칼이 젖어 있는 얼굴 위에 빗방울이 흘러내리
고 있었다. 나는 희미한 우유 냄새를 풍기는 엷은 밤안
개처럼 젊은 릴케 발자국이 살아 있는 비 내리는 프라
하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비 냄
새를 머금고 있던 아, 돌의 도시 프라하.
- 시의 계절은 겨울이다, 문예중앙, 2013
이 몸에 간질간질 꽃이 피었네 [김소연]
오래도록 밟아서 생긴 숲길을
아무 작정 없이 걸어보았네
화장을 하지 않아도
눈치 채는 이가 없었네
품에 안겼던 사내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게 되자
심장에 뿌리를 박고
분꽃들이 만개했네
다 알 만한 물방울들이
풀 끝에 맺혀 있었네
아득히 들리던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칠 때
땀구멍을 뚫고 채송화가 피었네
멀리 누런 벼들은
논바닥에 발톱 벗어둔 채
누워 있었네
나는 발이 시렸네
발가락 사이로 패랭이가 피었네
허벅지를 타고 나팔꽃이 만개했네
오래도록 밀봉해 둔 과실주를
아무 작정 없이 열어 독배하였네
새들이 울러댈 때 귓속에 길이 열렸네
길을 잃어도 길 속에 있었네
-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민음사, 2006
나팔꽃 [박주하]
그는 오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나는 점점 다리가 길어졌고
수없이 많은 손가락이 생겨났다
내 몸의 곳곳에서 움트는
초록빛 죽음들
쓰레기 더미 위에서도
나는 그를 잊은 적이 없다
머리와 어깨와 다리에
그의 목소리가 생살을 찢으며 박힌다
그래도 나는 자란다, 무장무장 자란다
생애를 의심 받으면
나의 꽃은 더욱 붉어진다
- 숨은 연못, 세계사, 2008
나팔꽃 - 정호승
한쪽 시력을 잃은 아버지
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
까만 나팔꽃 씨를
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
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
- 포옹, 창비 2021
나팔꽃 봉오리 하나가 [이윤학]
나팔꽃 봉오리 하나가
내 창문에 와 귀를 대고
뭔가를 엿듣기 시작했다.
닫힌 창문 곁에 와
한낮의 창문에 귀를 대고
고요한 방 안을 탐색하고 있었다.
돌아와 창문을 열면
나팔꽃 봉오리 하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묵묵히 지켜보던 나팔꽃 봉오리 하나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향기를 전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내 창문은 안에서 닫혀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나팔꽃처럼 창문 밖
드넓은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문학과 지성, 2003
천천히 가는 시계 [나태주]
천천히 천천히 가는 시계를 하나 가지고 싶다
수탉이 길게 길게 울어서
아, 아침 먹을 때가 되었구나 생각을 하고
뻐꾸기가 재게 재게 울어서
어, 점심 먹을 때가 지나갔군 느끼게 되고
부엉이가 느리게, 느리게 울어서
으흠, 저녁밥 지을 때가 되었군 깨닫게 되는
새의 울음소리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팔꽃이 피어 날이 밝은 것을 알고
또 연꽃이 피어서 해가 높이 뜬 것을 알고
분꽃이 피어서 구름 낀 날에도
해가 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고
시도 쓸 만큼 써보았으니
나도 인제는,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하나쯤
내 몸 속에 기르고 싶다.
- 너도 그렇다, 시화집
첫댓글 다음은 어떤 꽃이 등장할까요. 기대됩니다.^^
ㅎㅎ 생각하고 계신 꽃일 확률이 99.9퍼센트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