쭈뼛거리는 모험심
전선현
(1) 혼자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추억의 파랑새는 자꾸 나를 불러댔다. 아들들 중학교 입학 이후론 발길을 뚝 끊었지, 이젠 올 때도 되지 않았어? 은밀하게 속삭이는 듯했다. 잊을 수 없었다. 온몸을 훑고 지나가던 그 강렬한 기쁨들.
(2) 초등학생 때 서울 친척들과 놀이동산에서 바이킹을 탔던 적이 있었다. 내 사투리를 흉내 내는 사촌 동생이 내 옆에 앉았다. 배가 높이 솟았다가 아래로 툭 하고 떨어지는데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것이 있다니, 나는 세상을 처음 보게 된 사람처럼 놀랐다. 배 밑바닥에 숨어 있다가 몇 번이고 타고 싶었다. 무섭다고 고개도 못 드는 사촌 동생을 보자 의기양양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날 난 보물선을 타고 항해하다 보물을 발견한 해적이었다.
(3) 둘째에게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엄마, 엄마 나이가 조금 더 많아지시면 함께 가 드릴게요. 지금 가면 제가 친구 없어서 엄마랑 다니는 사람처럼 보여서 안 돼요. 죄송해요.”
자신의 연애운을 막기라도 하는 듯 에둘러 거절했다.
(4) 벌써 내 나이도 오십 중반을 향해 달리고 있다. 둘째가 말하는 나이가 되면 회전목마만 타게 될지도 몰랐다. 결국, 나는 혼자 조용히 떠나기로 했다. 아는 사람 없는 곳에서 마음껏 “꺅,꺅”거리다 와야지.
(5) 놀이기구를 타는 것,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 작은 모험을 계획하는 것, 모두 삶은 즐겁고 신나는 것이 숨어 있으니 찾아보라고 일깨우는 신호탄 같다. 더운 여름날 펌프질로 끌어올린 찬물 한 바가지 등에 끼얹는 것 같은 청량감을 주는 것들. 어떤 즐거운 일이 있을까 하루를 기대하는 어린애의 마음, 그 마음을 찾으러 가는 것 같다.
(6) 그러나 입구에 들어선 순간, 내 소박한 기대는 사라졌다. 귀청을 울리는 음악에 맞춰 신나게 몸을 흔드는 행렬과 관람객들. 교복을 빌려 입고, 같은 머리띠를 한 연인들, 아이들을 데리고 온 엄마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가린 여인들, 중국 사람들, 베트남 사람들, 사방에서 퍼지는 여러 나라 말들, 놀이 동산을 혼자 다니는 것이 이렇게 어색할 줄이야.
(7) 그래도 꾸역꾸역 바이킹을 찾아갔다. 안내판에 제한 나이는 65세라고 쓰여있었지만 줄 서 있으려니 얼굴이 괜스레 화끈거렸다. 모두 놀기에 바쁘겠지, 아무도 나를 보진 않을 거야. 라고 되뇌면서도, 마스크와 모자를 잊고 온 것에 후회가 밀려왔다. 모두 나를 힐끔거리며 ‘저 아줌마는 설마 혼자 온거야?, 참 주책이네.’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8) 하지만 바이킹을 탔다. 뒷자리 남는 좌석을 보고 얼른 달려가 앉았다. 바이킹은 내 나이를 묻지 않고 힘껏 날아올랐다. 기억보다 더 높이 날아올랐다가 생각보다 빠르게 낙하했다. 또 반대편으로 올라갔다가 뒷걸음치듯 떨어졌다. “꺅” 소리가 폭발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아는 유일한 단어는 “꺅”뿐. 1분 50초. 서너 번 내동댕이쳐지며 꺅을 토했다. 배가 멈추고 사람들이 내렸다. 내 몸에는 재미만 남았다. 몇몇 애들은 무섭다고 벌벌 떨면서 내렸다. 뿌듯함이 내 입가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9) 자, 아직 해보고 싶은 모험 기구가 몇 개 더 남아있다. 나는 어깨에 힘을 주고 실외로 나갔다. 그러나 의기양양했던 기분도 잠시 파란 성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아이들을 보자 또 주눅이 들었다. 아무도 나를 안 본다고 주문을 외웠다. 이용권 비용을 날려선 안 된다. 입장권으로 매어준 분홍색 팔찌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10) 바이킹 다음으로 타고 싶었던 것은 번지드롭이었다. 아들들이 초등학생이었을 때 조카까지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조카는 번지드롭을 타고 나서 엉엉 울었고, 권했던 나는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얼마나 재밌었던지 나는 매일이라도 타고 싶었다.
이 번지 드롭도 나를 꾀는 파랑새였다. 일 년에 몇 번씩 번지 드롭 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11) 직사각형 탑 둘레로 의자가 있다. 그 의자에 탑승객들이 앉아 어깨 고정바를 내리면 안내원이 벨트를 확인한다. 의자는 하늘까지 솟아 오를 듯 하나, 둘, 셋, 만에 몇십 미터를 올라간다. 꺅. 발밑에 호수가 조그맣게 보인다 싶을 때 사정없이 낙하한다. 마음은 꼭대기에 있는데 몸이 먼저 떨어진다. 마음이 놀라서 꺅거리다 따라온다. 이게 얼마나 재밌는지.
(12) 그렇게 나는 예전에 한 번도 타 본 적 없는 놀이기구까지 두어 개 더 탔다. 마음껏 꺅 소리를 질렀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꺅은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꺅이 묵은 먼지들까지 다 데리고 나갔는지, 내 속엔 파란 바람 소리만 남았다.
(13) 타고 싶은 놀이기구를 다 타고 놀이 동산을 빠져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놀이 동산의 즐거움 옆에 서 있던 짙은 불편함에 대해 생각했다. 인파 속에서 나와만 함께 한 시간은 해캄이 덜 된 조개를 씹은 듯 버석거리고 까끌까끌했다. 혼자는 낯설었다. 군중 속을 걸을 때 내 머릿속은 따뜻한 관조나 투명한 무심 대신 억측의 연기로 자욱했다. 내 용기는 절뚝거렸다.
(14) 그러나 빛에 그림자가 따르듯 모험에 불편함도 당연한 것 아닐까. 짧은 시간, 부지런히 내 감정을 살필 수 있었다. 남은 생, 그림자를 달고 있는 모험을 향해 또 쭈뼛거리며 떠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