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내에 개봉한 영화 <나를 찾아줘>의 주인공 에이미는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서 작가로 성공한 엘리트다. 극중에서 자전적 성장소설의 주인공으로 전국의 학부모와 청소년에게는 우상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실상의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중상모략과 거짓말을 주저하지 않고, 이웃은 물론 가족마저도 이용한다. 심지어 옛 연인을 끔찍하게 살해하고도 당당히 자신은 살인자 아닌 ‘전사’라고 주장한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물론 아니겠지만, 일상에도 간혹 분명한 이유 없이 참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 꽤 가까운 거리에서 어울리며 딱히 설명할 수는 없는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다.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번듯하게 사회 생활을 하는 그 사람, 오히려 공적이거나 피상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을 아주 유능한 사람으로 알고 있을 정도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내면의 것인 듯하지만 사실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그대로이기도 하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마음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의도대로 되지 않는 마음이란 것도 있다. 그런데 설명할 길 없이 불편한 그 사람의 마음은 철저히 내면에 감춰져 있는 것만 같다. 더 나아가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는 그 마음도 역시 철저하게 조종할 줄 아는 것만 같다. 그 사람,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까?
소시오패스, 그는 누구인가
‘반사회성 성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로 분류되는 질환이 있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 5)>에서는 이 질환을 ‘타인의 인권을 무시하거나 방해하는 광범위한 패턴’으로 규정한다. 이 질환의 여러 특징 중에서 중요한 핵심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거짓말이나 사기에 대해 편집증적 기호가 있으며 사회적 규범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전자와 환경 영향의 기묘한 조합으로 이런 반사회성 성격장애라는 질병을 지닌 사람을 이른바 ‘소시오패스(sociopath)’라고 한다.반사회적인 태도를 성격의 특징으로 정의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소시오패스 자체를 정의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소시오패스는 대체로 복잡하거나 분별 없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전략적이고도 지적이면서 대담하고 신중하다고 한다.
그러나 냉철한 대신 한편으로는 감정의 신호를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데, 이를 테면 타인의 당혹감이나 감정이 담긴 사회적 신호에는 적절히 반응하기를 어려워한다고 한다. 반사회성 성격장애의 특징은 내면적 사고보다는 행위의 범죄성에 중점을 둔다. 다시 말해 행위로 나타나기 전까지 소시오패스를 알아차리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사고 과정은 일부러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이상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 아닌가.
≫ 소시오패스는 정서에 대한 계산이 빨라 오히려 감성이 풍부하고 공감능력이 뛰어난 것처럼 연기할 수 있다고 한다. 출처/영화 <나를 찾아줘(Gone Girl)>(2014)
소시오패스를 잘 알아채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마음을 숨기는 것, 즉 마음에 가면을 쓰는 게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이런 가면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기에 자기 내면의 소시오패스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그리고 가까운 누군가 중에 소시오패스가 있을 가능성은 항상 있다. 신경정신과 전문가와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심각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소시오패스 범주에 들어가는 이들은 전체 인구의 무려 4%나 되는 것으로 조사된 적도 있다.
우리는 흔히 소시오패스라 하면 잔혹한 범죄의 범죄자를 떠올리기 쉽다. 그렇지만 범죄라는 극단적 수준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이러한 문제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현대사회에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사실상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것 중의 하나는 행동이 아니라 우리가 내면의 자신과 나누는 대화일 것이다. 여기에서 자기 내면의 존재, 심리적 동기란 바로 흔히 말하는 ‘양심’일지도 모른다. 이 연재 글에서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양심에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특이한 사람들을 넓은 의미에서 소시오패스로 다루고 있다.
소시오(socio)는 사회적(social) 혹은 사회(society)라는 뜻을 담고 있고 패스(path)는 병적인 고통이나 증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결국에 소시오패스는 사회적인 분별력에 장애가 있음을 의미한다.그러니 사회가 공유하는 사회 규범을 이해하는 능력은 갖추고 있지만 이를 알면서도 거리낌 없이 준수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심각한 특징이 얘기되지만 소시오패스를 진단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한다.
실제에서는 소시오패스가 사회인의 역할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온전한 능력을 갖춰 평범한 사람, 때로는 대단히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소시오패스는 사회가 정한 옳고 그름의 기준은 잘 알고 있지만, 단지 그 기준에 자기 행동을 맞춰야 한다는 감정적 압박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오랫동안 소시오패스를 연구해온 미국의 마사 스타우트(Martha Stout) 박사는 소시오패스를 ‘진단’하는 게 아니라 ‘식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에게 소시오패스의 기질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은 그냥 소시오패스라는 얘기다. 진단은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내리는 것인데, 소시오패스에게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치료법이 따로 없으므로, 진단이 아닌 다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스타우트 박사의 말처럼 소시오패스가 증상이나 병이 아닌데다 치료법도 없다면 이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감성지능이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대니얼 골만(Daniel Goleman) 박사는 타고난 유전자라 하더라도 나타내지 않는다면 아예 갖고 태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타고나는 기질은 선택할 수 없어도 그것을 발현할지 않을지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소시오패스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물음은 바로 이렇게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감성에 무능한 소시오패스
소시오패스와 보통 사람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인간의 언어처리 방식에 관한 실험을 통해, 소시오패스의 두뇌 기능에 대해 들여다보는 의미 있는 연구가 있다. 미국 콜롬비아대학교의 셰리 윌리엄슨(Sherrie Williamson) 연구팀은 주어진 단어들에 반응하는 대뇌피질의 전기적 기록을 통해서 정상적인 사람과 소시오패스의 차이점을 밝혔다.
연구팀은 먼저 보통 사람의 경우에는 중립적인 단어, 이를테면 정서가(價)가 없는 명사인 책상, 도로, 휴지, 열쇠와 같은 단어를 보았을 때보다는 정서가가 있는 단어인 사랑, 고통, 행복, 존중과 같은 단어를 보았을 때 더욱 빠르고 강렬하게 반응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실험에서는 단어에 대한 반응 시간뿐 아니라, 의미 있는 단어와 의미 없는 비(非)단어를 구분하는 반응속도의 차이도 측정해 비교했다. 이를테면, 정서 단어인 ‘배려’와 비단어인 ‘배규’를 보며 ‘배려’ 단어를 골라내는 반응속도가 중립 단어인 ‘수건’과 비단어 ‘수먼’을 보며 ‘수건’을 골라내는 반응속도보다 훨씬 빠르다는 결과를 얻었다.
보통 사람의 두뇌는 정서적 경험을 가리키는 단어를 중립적 단어들에 비해 우선 주목하고 기억하며 또한 의미를 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족’이라는 단어보다 ‘가족’이라는 단어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고, 이는 ‘사족’보다 ‘가족’이 이들한테 당연히 의미 있는 정보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시오패스를 대상으로 한 반응 실험에서는 이와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정서가가 있는 단어에 반응할 때에나 중립적 단어에 반응할 때에나 별 차이가 없었다. ‘상처’나 ‘존경’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의 반응이나 ‘달력’이나 ‘배추’에 대한 반응이 똑같았다. 소시오패스들에게는 정서가 담긴 단어나 중립적인 단어나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정서’라는 것이 보통 사람이 느끼는 것과 소시오패스가 해석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는 또 있다. 뉴욕 보훈청메디컬센터(Bronx Veterans Affairs Medical Center)와 콜롬비아대학 심리학 연구팀 등의 공동연구에서는, 정서를 담은 단어들이 포함된 의사결정 문제를 접했을 때 일반 실험참가자와 소시오패스의 두뇌에서는 서로 다른 방식의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단일광자 단층촬영(SPECT)의 관측을 통해 밝혔다.
정서를 담은 단어들이 있는 의사결정 문제를 접했을 때 소시오패스는 측두엽으로 혈류가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보통 사람의 경우에 덧셈뺄셈 같은 약간의 인지적 능력이 필요한 계산문제를 해결할 때 머릿속에서 보이는 현상이다. 이런 실험결과를 해석하면, 결국에 소시오패스는 정서가 담긴 단어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때 마치 계산문제 풀이를 요구받은 듯이 반응한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거의 즉시 반응하는, 노력이라곤 필요 없는 문제들이 소시오패스들에게는 산수 문제를 풀 듯이 계산해야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연구 결과를 볼 때, 소시오패스의 경우는 대뇌피질에서 이루어지는 정서의 자극 처리가 일반인과는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왜 이런 차이가 일어날까? 이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원인이 규명되지 못했다. 다만 어떤 선천적인 기질 문제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정도의 추측이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그 원인을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못하지만, 신경발달에 나타나는 타고난 차이가 소시오패스의 부분적 원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소시오패스는 사랑과 배려와 같은 소중하고 귀한 정서적 경험을 방정식 풀 듯이 계산하지 않는 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정서에 대한 계산은 빨라 평범한 사람보다 오히려 감성이 풍부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것처럼 보이도록 연기할 수도 있다고 한다. 소시오패스가 때로는 화려한 언변과 특유의 자신감으로 무장해 주변의 호감을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랑할 줄 안다는 것, 모른다는 것
흔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소시오패스에게는 이런 말이 그저 ‘죄 의식 없음’ 정도의 단순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사람이 느끼는 정서 경험에서 얻는 가치나 진정한 인간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연결하는 능력이 소시오패스에게는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양심은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소시오패스의 정서는 ‘사랑의 부재’에 기초한다고 볼 수 있다. 소시오패스한테는 사랑의 감성이 중요치 않게 보인다는 특징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양심을 지닐 수 없다. 양심은 다른 사람에 대한 정서적인 애착을 토대로 삼는 의무감이다. 따라서 양심이 없는 사람은 참된 사랑을 모른다. 사랑에서 의무감을 빼면, 남는 것은 고작 얄팍한 소유욕의 충족이나 지배욕뿐이다. 이는 사랑도 그 무엇도 아니다. 지배성에 의한 집착은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사랑할 줄 모른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일이다. 양심은 가장 큰 위험을 무릅쓰면서 지켜내는 용기, 즉 사랑을 얻고 지키는 최고의 도구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때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의 편에 서서, 알면서도 합리성을 저버리기도 한다. 아마 이런 사람들의 가슴을 소시오패스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소시오패스가 아닌 보통 사람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양심이자 사랑 덕분이다. 양심은 결코 어떤 행동이 아니며 우리가 행하는 무언가도, 심지어 우리가 생각하거나 심사숙고해야 하는 무언가도 아니다. 오히려 양심은 우리가 ‘느끼는’ 그 무언가다. 즉, 양심은 행동적이지도 인지적이지도 않다. 양심이 주로 존재하는 곳은 우리가 ‘감정(emotion)’이라고 알고 있는 ‘정서(affect)’의 영역이고, 양심은 정서 그 이상이다.
이타적인 사회를 위해
과학을 통해 소시오패스의 존재가 밝혀지고 있지만, 그것은 거대한 빙산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앞서 설명한 마사 스타우트 박사의 말처럼, 소시오패스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의 질문으로 접근해야 한다. 우리는 왜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고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는지 물어야 한다.
공동체를 기반으로 생활했던 농경사회에서는 소시오패스가 활개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반사회적 행동에 대해 공동체의 즉각적 응징과 격리 조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비인간적 접촉이 빈번한 사회에는 일일이 이들을 구분하고 이에 대응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들이 원하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을 제공하기도 한다.
≫ 소시오패스 문제는 그들을 찾아내어 격리한다고 사라지지도 않고, 풀리지도 않는 문제다. 출처/영화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2011)
많은 사람이 맹목적 성공에 열광한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성공, 혹은 생존을 위해서는 자신보다 약한 타인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고들 말한다. 에스엔에스(SNS)처럼 비인간적 접촉이 점점 흔해지는 사회에서 익명과 집단의 그늘에 숨어 특정 대상을 향해 드러내는 양심의 부재 상태는 점점 조직적이고 과격해지는 것 같다. 일시적이든 특수한 상황이든 양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소시오패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양심 없는 사람이 성공할 수 없는,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드는 데에도 힘을 써야 한다. 정직한 노력이 박수를 받고, 부정과 불법이 통하지 않는 정의로운 세상이라면 소시오패스든 양심 없는 비(非)소시오패스든 이들이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보다 뛰어나다는 착각은 더 이상 불가능할 것이다.
세상에 모든 존재는 나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진화심리학에서는 보통 사람들을 조건적 협력자로 규정한다. 이들로 구성된 집단에 무조건적 착취자가 있다면, 이들은 집단내 자원이 고갈될 때까지 자기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에 한계효용 범위 안에서 자연스럽게 늘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진화생물학에서는 1960년대까지 고전적 집단선택론을 통해 집단내 이기적 개체는 결국 세대를 거치며 소멸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소멸은커녕 이들은 여전히 건재하고 오히려 더 늘어난 것 같다. 이에 새로운 집단선택 모형에서는 이기적 개체가 늘어나도 이타적 개체군과 혼합을 통해 다시 이타적 개체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식으로 이타성의 진화를 설명한다. 한마디로 많은 이타심으로 적은 이기심을 뒤덮어버린다는 설명이다.
≫ 옌스 스톨텐베르그(Jens Stoltenberg) 전 노르웨이 총리. 출처/ Wikimedia commons소시오패스 문제는 그들을 찾아내고 격리한다고 사라지지도 않고, 풀리지도 않는 문제다. 비록 소시오패스로 태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소시오패스로 살지 양심적인 협력자로 살지는 얼마든 선택할 수 있다. 공동체 기반 사회에서 소시오패스들이 침묵했던 이유는 착취보다 협력이 생존에 더 유리했기 때문인 것은 아니었을까. 서로가 연결되어 돌보고 공정한 규칙을 지킬 때 더 큰 이익이 보장되는 사회라야 가능할 것이다. 감성과 양심이 없는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사실에 역설적으로 휴머니즘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사랑은 더 자라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
2011년 여름, 노르웨이에서는 극우 성향의 청년 브레이비크가 일으킨 총기 난사 테러로 80여 명이 사망하고 32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청소년 정치캠프에 참가한 어린 청소년이 주로 희생됐다. 이런 끔찍한 반인륜적 범죄의 이유도 알려진 바에 의하면 어처구니없고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사건이 수습되고 희생자를 추도하는 자리에서 옌스 스톨텐베르그(Jens Stoltenberg) 당시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테러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개방성, 인간애입니다. 단순한 대응은 절대 답이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고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은 여전히 있겠지만, 답은 먼 곳에 있지 않아 보인다. 인류는 사랑하는 존재가 아닌가.
첫댓글 보통 한국에서 자주 듣는 하는 말 중 "사람이 처세술이 좋아야 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게 상대에 따라 말을
다르게 하고 상대방이 힘있는 자인지를 먼저 저울질한 후에 힘있는 자라고 생각되면 잘하고 자기보다 못하면
무자비하게 짓밟고 무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거짓말도 하면서 본인의 이익을 챙기는 것을 말하더라구요~~~
양심적이고 내가 소중하듯 남도 소중한 존재라는 기본적인 개념과는 거리가 먼 듯 한데......
여전히 한국에서 성공하는 사람의 기본조건이라 들었습니다~~~
뭐 가족내에서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처세술좋은 자는 대접받고, 착하고 모자라서 일만하는 사람은......
ㅎㅎ 자기보다 못한사람 , 가난한사람, 들에게 ,혹은 약한 사람들에게 도와주고 이끌어 주는 것이 제가 아는 처세술 입니다,,ㅎㅎ 왜냐하면 자기보다 못한사람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이 아님니다, 더더욱이 약한사람도 아닌데 ,, 어떻게 그런 체세술이 가능한 사회인지 ,,,,,
DNA 문제도 있겠지만 애정결핍(lack of love) 특히 어릴때 성장과정에서 주위사람과 사랑의 교감을 못 느끼고 학대나
악용 ( 내 얘긴가 ???) 당핸 경우 그리고 해방구를 찾지못할때 마음 깊이 잠재 되겠지요 그러다 성장 후에도 트라우마를
정상 생활로 배출 내지 예술적 행위로 승화시키지 못하면 약자에 대한 공격으로 보상 받으려 할 수도 있겠습니다
칼융은 숙련된 포카쟁이도( 포커페이스 마찬가지) 순간의 변화는 있고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정신과의사의 일이라고
했지요. 눈에 명기 (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맑고 밝음)가 없는 사람은 뭔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감추려는 것이 있고
진심으로 세상과 소통하기를
꺼려한다고 봐야겠지요 소시오패스도 있을거이고 작가 알베르트 까뮈가 직장동료도 글 쓰는줄 몰랐다하니 자기가 사는 세상이 뭔가 맘에 안 들어서리 문학으로 승화시켰다고나 할까요 ? 그리고 보이 작가 이상도 매한가지 다른 많은 예술가도
이범주에 들겠지요.. 그러이 칼융은 예술가들을 일종의 정신병자로 분류했고요 ㅋㅋ 하물며 정신과 의사 조차도 아~ 못말려 ! 그럼 정상은 뉘긴겨~~~~~?? 그래서 앨튼 죤은 노래 부릅니다 baby~~got ~~~blue ~~~eye~~ like ~a~ deep blue sea~ 아님 말고 ㅡ,.ㅡ
까뮈가 아니라 소설 변신을 쓴 카프카 같은데 회원님의 확인 바라며 낚시질이 아님을 천명합니다 아~멘~타~불~
간만에 orchid님의 포스팅 반갑습니다. 가벼운 주제는 아니군요.^^ 모르는 사이에 내 자신도 Sociopath가 되어가지 않나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늘 자신을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어제 GONE GIRL를 흥미롭게 봤습니다... 소시오패스의 전형적인 사례라 하기는 좀 그렇지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약간의 모순이라 싶은데 뭐든지 과하지 않는 자기만의 소신이 확실 하다면 오~케이..^&^
소시오패스가 인구의 4%가 된다는 통계와, 그들이 '평범한 사람보다 오히려 감성이 풍부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것처럼 보이도록 연기할 수도 있다'는 점이 끔찍합니다. 결국 막판에 가서 뒤통수를 맞을때까지 그들이 그런 사람임을 모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네요.
내가 요행히도 - 그런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며 반성 해봅니다 . .
갈수록 심화되는 물질주의와 개인주의, 이른바 이기주의 행태가
더욱 그런 성격장애를 유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