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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12.12반란> 이세호(李世鎬)대장 회고.
해뜨는 저녁 추천 0 조회 177 14.05.31 20: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全斗煥, 정규 육사 출신에 진급·보직 혜택 달라 요구”

- 일본 육군항공대 교육받다 히로시마에서 原爆 목격… 육사 2기생으로 建軍에 참여

- 제주 9연대 부대대장으로 남로당계 부하 文相吉에게 여러 차례 죽을 고비 넘겨

- 5·16 맞아 28사단장으로 全軍에서 유일하게 朴正熙 부의장에게 지지 서신 보내

-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월남전서 1100여 회의 대대급 이상 대부대 작전 펼쳐… 당시의 실전경험이 오늘날 국방력 강화의 자산돼

- 총장 퇴임 직후 박 대통령에게 보안사 직급 상향조정 불가 건의… 박 대통령이 전격 수용하면서

    全斗煥 소장을 보안사령관에 임명

 

 

 

 

 

                     

사람들은 나를 두고 “30세의 나이에 별을 달아 23년 동안 장성(將星)으로 있으면서 군 최고위직인 참모총장까지 오르는 등 화려한 군 생활을 했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군 생활은 내게 안락하고 영광스런 기억들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포연(砲煙)의 만신창이가 된 국토를 누볐던 시간들, 베트남의 자유를 위해 병사들과 뒹굴며 지휘하던 시간들은 민족과 국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이제 나이 구십을 바라보면서 그런 인생 행로가 하느님의 명령이었음을 깨닫는다.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마다 신의 은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히로시마 원폭(原爆)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6·25 직전 옹진(甕津) 사태로 가족학살을 면했다. 특히 제주 4·3사건 당시 부하 문상길 중위에 의해 몇 차례나 살해당할 뻔했고, 6·25 전쟁 중 7사단 정보참모로 홀로 남하하다 좌익들에 붙들려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상 초유의 해외파병 총사령관으로 임무를 완수하고 개선했던 일, 육군참모총장이란 2년 임기를 거듭해 4년 동안 감당한 것 등은 보람 있는 순간으로 남아 있다.

 

 

≫ “손 좀 흔들어요!”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1973년 3월 20일 ‘파월 개선장병 환영대회’와 ‘주월한국군사령부 해체식’이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식장에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내외, 3부 요인, 주한외교사절, 파월장병 가족 등을 비롯해 4만여 명의 시민과 학생이 참석했다. 오전 11시, ‘이겼다 우리 오빠, 자랑스럽다, 우리 형님!’ 등의 플래카드와 오색풍선이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가운데 군악대의 개선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1973년 3월 20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파월개선장병 환영

                                                                    대회에서 이세호 사령관이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뒷줄 오른쪽이 박 대통령, 왼쪽이 유재흥 국방부장관.

 

참전 부대들이 입장하자 객석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박 대통령 앞에 부동자세로 선 나는 이렇게 신고했다.

 

“신고합니다. 주월군은 대통령 명에 의해 사상 최초의 해외파견군으로서 1964년 9월 육군 제1이동외과병원을 파견한 이래, 건설지원단(비둘기부대),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 수도사단(맹호부대), 제9사단(백마부대), 제100군수사령부(십자성부대), 해군수송전대(백구부대) 및 공군지원단(은마부대) 등 7개 주요부대 연 병력 31만2853명으로 월남공화국에 대한 평정지원 임무를 완수하고 1973년 3월 14일 사령관 육군중장 이세호 이하 최종 파월군이 개선 귀국하였기에 삼가 신고합니다.”

 

  

이어 열병식이 이어졌다. 뒷좌석에 박 대통령과 유재흥(劉載興) 국방장관이 섰고, 나는 앞좌석에 탑승해 손잡이를 잡았다. 열병차가 움직이자 객석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나는 뒷자리에 대통령이 계시다는 생각에 경직된 자세로 손잡이만 움켜잡고 있었다. 그때 박 대통령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여보, 이 장군. 저 군중은 지금 나를 향해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주인공인 이 장군을 환영하는 것이니 이 장군이 먼저 힘껏 손을 흔들어 답례를 하시오!”

 

나는 송구스러웠지만 대통령의 명령 아닌 명령을 받고 열병이 끝날 때까지 힘차게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열병이 끝나자 박 대통령은 베트남전에 참가한 모든 부대의 부대기에 표창 리본을 달아주었고, 나는 8년여 동안 베트남의 정글 속에서 땀과 전진(戰塵)으로 때묻은 ‘주월한국군사령부기’를 대통령께 반납했다.

 

  

오후 2시부터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시청 앞 광장 연도에서 수십만 시민이 봄비를 맞으며 열광적인 환영을 보냈다. 지휘차량인 내 차가 시청 앞 광장에 들어섰을 때, 주변 고층건물에서 하늘을 가릴 정도의 오색종이가 눈발처럼 내렸다. 때맞춰 경기여고생들이 날린 오색풍선 2만 개가 하늘을 수놓았다. 그날 저녁 박 대통령은 육·해·공·해병대 등 주요 지휘관과 내외 귀빈들을 경회루(慶會樓)로 불러 성대한 환영 리셉션을 열어주었다.

 

 

≫ 히로시마 原爆 맞고도 구사일생으로 살아  

1944년 개성 송도중학을 졸업하고 집에서 머물고 있던 나는 일본 육군항공대 특별간부후보생 모집 소식을 들었다. 서울 용산에 있는 일본군사령부에서 시험을 치렀다. 내가 구태여 일본군을 선택한 이유는 아버지가 일본의 요시찰 인물로 끊임없이 조사를 받는 것이 싫어서였다. 며칠 초조하게 기다리니 합격통보서가 날라왔다.

                                                                                  개성 송도중학교(5년제)

                                                                                 졸업반 시절의 이세호.▶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일본 동경의 수의과대학 시험을 보러 갈 것이니 여비나 보태달라”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1944년 4월 일본 시즈오카현 하마마츠(濱松)의 육군항공대로 갔다. 중(重)폭격기 요원들을 육성하는 제7교육항공대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한 것이다.

 

  

입대 즉시 교육대에서 유언장을 작성했다. 입고 갔던 옷가지 등은 소포로 고향집에 송달됐다. 대학 입학시험을 위해 도일한 아들 소식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자살공격을 감행하는 ‘도코다이(특공대)’에 들어간 자식의 ‘유품’을 보고 식음을 전폐했고, 매일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하마마츠의 비행학교는 중폭격기 발진기지를 학교로 위장해 활용하고 있었다. 지상훈련을 끝내고 비행훈련을 받아야 할 과정이 되었으나 연습용 비행기마저 실전에 투입돼 있었다.

 

미군 폭격기들의 본토 폭격이 날로 심해지자 우리 부대는 시마네현 마쓰에(松江)로 옮겼다가 다시 히로시마시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시모기온(下祇園)의 항공기 부품 정비공장으로 이전했다.

 

1945년 8월 6일 일요일, 쾌청한 날씨라 생도 중 절반 이상이 외출허가를 받았다. 나도 동기들과 함께 히로시마 시내로 나가기 위해 시모기온 기차역으로 나가던 중 문득 비누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비누는 구하기 힘든 생필품이라 민가에 갖다주면 환대를 받기에 번거로웠지만 발길을 돌려 부대로 돌아갔다.

 

  

비누를 챙겨서 나오는 순간, “펑”하는 소리에 무의식 중 부복자세를 취했다. 온 천지가 노란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정신을 가다듬고 본능적으로 건물 밖으로 달려나와 개인호에 뛰어들어가는 순간, 이번에는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내가 막 뛰어나온 막사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연기와 먼지가 건물 주위로 자욱했다. 사람들은 “히로시마에 공중어뢰(空中魚雷)가 투하됐다”고 했다. ‘원자탄’이란 말은 사흘 정도 지나서야 나왔다. 35만 시민의 3분의 1인 14만명이 죽었다. 히로시마로 외출 나간 동기생들도 전원 돌아오지 못했다. 머리카락 한 올도 다치지 않고 멀쩡한 사람은 나뿐인 듯했다.

 

 

≫ “윔스 중령을 찾아가라”

       

▲ 1946년 12월 14일 육사 2기생 193명의 졸업사진. 육사 2기생은 대통령을 포함 장관 4명, 국회의원 3명, 합참의장 3명, 참모총장 1명 등을 배출했다. 원 안은 이세호 소위의 임관 사진.

  

광복 후 일본에서 목선에 의지해 천신만고 끝에 귀국한 나는 신학교를 나와 부친의 뒤를 이을 것인가, 아니면 샐러리맨이 될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아버지(김기연·金基淵)는 연희전문 문과, 일본 간사이(關西)대학 신학과와 미국 텍사스주 감리교대학(SMU)을 졸업한 목회자였다.

 

  

부친은 뜻밖에도 내게 “윔스(Weems) 중령을 찾아가 보라”고 말했다. 윔스 중령은 아버지의 미국 유학을 주선했던 윔스 목사의 아들이었다. 나는 중앙청으로 갔다. 윔스 중령은 반갑게 일본 항공대 생활에 대해 질문한 다음, “남의 나라 군대생활도 했는데, 곧 독립국가가 되는 한국의 창군 멤버가 되는 게 얼마나 자랑스럽고 명예스러운 일인가”라며 “조선국방경비대총사령관 원용덕(元容德) 소령을 찾아가라”고 했다.

 

원 사령관은 “내가 신원보증을 할 것이니 다가오는 9월에 육사 2기생으로 입학하라”고 했다. 다시는 군인의 길을 걷지 않겠다고 했던 결심을 바꿨다.

 

1946년 9월 24일 나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로 입학했다. 2기생은 1기생과 달리 각 연대의 우수사병은 물론 일반인을 대상으로 공개모집한 것이었다. 당시 교장은 2대인 원용덕 참령, 교수부장은 장창국 대위(합참의장 역임), 생도대장은 이치업 부위(27사단장 역임)였다.

 

  

2기생들의 나이는 천차만별이었다. 아래로는 스무 살을 갓 넘겼고, 30대 초반도 꽤 많았다. 특히 송호성(宋虎聲·1947년 육군 최초 준장 진급, 육군총사령관 역임)과 같은 분은 40세를 넘겼다. 일본군을 거친 젊은 후보생들은 침구 정돈을 나무상자를 방불케 할 정도로 했지만, 송 후보생은 어설프기 그지없는 모양새라 생도대장에게 기합을 받곤 했다. ‘앞에 총’ 자세로 연병장을 한 바퀴 돌게 해도 불평 한마디 없이 열심히 운동장을 뛰는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됐다.

 

  

졸업을 얼마 앞두고 송호성 후보생은 통위부(국방부) 호출로 일주일 정도 훈련에 결석했다. 일주일이 지나 우리 앞에 나타난 송 후보생의 어깨와 군모에는 ‘소령’ 계급장이 달려 있었다. 계급이 대위였던 이치업 생도대장이 하루아침에 후보생에서 상관으로 변한 송호성 소령 앞에서 좌불안석이었던 기억이 난다. 송 소령은 학교를 마치고 조선경비대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1946년 12월 14일, 2기생 동기 193명은 80일간의 훈련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했다. 졸업식 때 부여받은 내 군번은 10253번. 6·25 동란 중 우리 동기생은 대대장, 사단참모 등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전선의 핵심지휘관으로 활약했다. 6·25 전쟁을 치르는 동안 40여 명이 전사했고 17명이 실종됐다. 육사 2기생에서 대통령(朴正熙)이 탄생했을 뿐만 아니라 장관 4명, 국회의원 3명, 합참의장 3명, 참모총장 1명, 대장 6명을 포함한 장성은 모두 79명에 이른다.

 

 

≫ 친구 따라 제주행

1947년 1연대 인천중대장으로 있을 때 심흥선 대위(합참의장 역임)가 찾아왔다. 그는 유치원부터 송도중까지 동급생에다 같은 하숙집에서 생활까지 하는 등 이력서를 쓰면 이름과 생년월일만 다를 뿐이었다. 심 대위는 육사 졸업 후 송호성 경비대 총사령관의 전속부관으로 발령받아 잘나가다 근무 중 차량사고를 일으켜 제주도로 좌천당했다. 나도 1연대장 이성가(李成佳) 소령의 지프를 몰래 몰다 잔반통에 빠트려 혼쭐이 난 경력이 있어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꼈다.

 

  

반년 만에 휴가차 인천으로 찾아온 심 대위는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그는 “섬 구석에서 귀양살이를 하느니 차라리 군복을 벗을까도 생각했지만, 막상 제주도에 가보니 제주도는 천국이더라”고 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심 대위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권하는 바람에 나도 제주 근무를 해볼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농반진반으로 “그럼, 자네가 총사령부로 가서 인사명령이나 내봐”라고 하자, 그는 “내가 송호성 총사령관의 전속부관이었잖아. 자네 전속명령은 내가 책임지지. 나중에 다른 말 하기 없기다”라고 했다. 나는 1948년 1월 10일 제주도 모슬포에 도착해 9연대본부에서 김익렬 연대장께 부임신고를 했다. 9연대는 말이 연대지 대대 규모도 채 안 되는 2개 중대 병력에 불과했다. 나는 부대대장 겸 1중대장 보직을 받았다. 직속부하로는 문상길 중위가 부중대장을 맡고 있었다.

 

  

4·3사건 발생 전인 1948년 3월 초, 연대 병력 확보를 위해 모병관 임무를 받고 경남 함양, 산청, 거창 등지를 돌며 장정 약 250명을 모병했다. 장정들을 부산에서 배편으로 제주항에 입항시킨 날이 4월 4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제주를 출발할 당시 평화로웠던 항구는 삼엄하고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비상사태로 경찰은 모두 전투태세에 돌입한 상태였다.

 

  

모병한 병사들을 재편성해 9연대는 비로소 완전한 1개 대대급 편성을 완료하게 됐다. 부중대장 문상길 중위는 2중대장으로 진급했다. 나는 문 중위를 친동생같이 여겼다. 문 중위의 약혼녀는 서귀포에 살면서 떡, 과일, 음료수 등을 가지고 거의 매주 면회를 왔다.

 

 

≫ 부대원 40여 명 탈영해 대정지서 습격   

1948년 4월 3일 오전 4시 한라산 정상에서 봉화를 올리는 것을 신호로 남로당은 무장봉기를 시작했다. 조병옥(趙炳玉) 내무부장관, 군정장관 딘(W. F. Dean) 장군, 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 김익렬 9연대장 등이 모여 공비소탕작전에 경비대가 참가할 것을 결의했다. 48년 5월 초 박진경 중령이 9연대장으로 부임해 공비토벌 작전에 본격 시동을 걸게 됐다.

 

                                                              제주도 9연대 부대대장 시절의 이세호. 앞줄 맨 왼쪽이 이세호

                                                               대위, 두 사람 건너 김익렬 연대장, 심흥선 대위, 문상길 중위.

 

당시 나는 모슬포에서 9연대장 대리 겸 부대대장으로 잔류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다. 48년 5월 20일 오전 5시 비상나팔 소리가 적막을 깨트리며 울려 퍼졌다.

 

연병장으로 달려갔을 때 주번사령 문상길 중위가 “큰일 났습니다. 간밤에 연대병력 약 40명이 탄약고를 부수고 보관 중인 무기와 탄약을 절취해 탈영했다고 합니다. 주번사령으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보고를 드립니다”라고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때 느닷없이 요란한 총소리가 대정마을 쪽에서 들려왔다. 탈영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총성이었다. 침착하게 총성의 근원지를 파악하도록 했다. 보고를 받고 보니, 우리 연대 탈영병들이 대정마을 지서를 습격해 경찰관 전원을 사살하고, 한라산 방향으로 도주했다는 것이다.

 

  

제주 토벌사령관에게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려 했으나, 탈영병들은 용의주도하게도 전화선마저 모두 절단해 버렸다. 주번사령 문상길 중위에게 “부재중 더 이상의 사고가 나지 않도록 당부한다”는 말을 남기고 부랴부랴 발동선을 타고 제주읍 토벌사령부로 향했다.

 

  

박진경 토벌사령관에게 전말을 보고했다. 박 사령관은 “이 대위,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귀관이 지휘하는 9연대는 제주도 병사들이 많으니까 당분간 토벌작전에 9연대 투입을 보류하고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장병들 신상과 동태파악에 최선을 다하게”라고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귀대 후 문 중위에게 박 사령관의 지시사항을 소상히 전해 주었다.

 

  

드디어 우리 연대도 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라산 중턱에서 어승생악 동굴을 수색하게 됐다. 이 동굴은 공비들의 보급창고였다. 동굴 내부에 들어가자 재봉틀, 식료품, 의약품, 의복 등 엄청난 양의 무기와 보급품이 쏟아져 나왔다. 이에 박진경 사령관은 “9연대는 제주국민학교로 이동해 휴식하는 포상을 내리고 차기 작전을 준비하라”고 격려했다.

 

  

쉬고 있던 중 문상길 중위가 느닷없이 찾아와 “일신상의 사정이 있으니 다른 부대로 전출시켜 달라”고 했다. 나는 “얼토당토않은 소리 그만하라”며 일언지하에 그의 청을 가로막았다. 며칠 후 문 중위는 다시 나를 찾아왔다. “몸이 아파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시 그의 입원을 허가했다.

 

  

6월 28일 공비토벌에 여념이 없던 박진경 중령은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는 진급 축하연을 마치고 제주농업학교 내 연대장실 야전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새벽에 느닷없이 “탕, 탕, 탕” 하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사령관방 안에 참혹한 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이를 목격한 부대원이 내게 “큰일 났습니다. 오늘 새벽 박진경 사령관이 사령관실 침상에 누운 상태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아 무참히 살해당하셨습니다”라고 전했다. 얼마 후 더 놀라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김종평 정보참모는 “9연대 문상길 중위를 조사하라”는 첩보를 입수했다고 했다. 주민 신고로 문 중위를 박 사령관 살해 배후로 체포했다.

 

 

≫ “박진경을 사살하라” 지령  

그를 내 손으로 때려죽여도 배신감을 털어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헌병대장 이풍우 대위에게 “진상을 알고 싶다”고 했다. 헌병대장 입회하에 문 중위를 면회했다.

 

                    7사단 정보참모 시절의 이세호 소령(앞줄

                       가운데). 1949년 8월 15일 촬영했다.▶

두 손은 수갑, 팔은 굵은 동아줄에 묶이고, 양발도 차꼬(족쇄)가 채워져 끌려나오는 문 중위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어 측은한 생각까지 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뵐 면목이 없습니다.”

 

그는 사건의 전모를 털어놓았다. 문 중위는 자신이 주번사령일 때 남로당의 지시를 받아 우리 중대 병사 41명을 탈영시켜 대정지서를 습격하도록 했으며, 9연대의 전화선 일체도 그가 절단했다고 했다. 특히 자신이 주번사령으로 있을 때 일에 대해 질책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차없이 방아쇠를 당기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내가 사령부를 다녀왔을 때 토벌사령관이 우리 부대에 대한 책임 추궁과 이에 따른 문책이 있게 되면 부대대장인 나를 사살하고 9연대 전체를 이끌고 한라산으로 도주할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문 중위는 내가 ‘어승생악’ 공비보급창을 급습해 큰 전공을 올렸을 때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권총을 빼들고 나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인간적 유대 때문에 권총을 겨눌 수 없었다고 했다. 차라리 나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부대 전속을 자원했고, 나의 반대에 부딪히자 결국 병원 입원을 자청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공비소탕에 적극적인 박진경 사령관을 살해하라는 지령을 받고 입원 상태에서 암살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워 남로당 당원이며 경비대원인 양희진 일병에게 취침 중인 박 사령관을 암살하라고 시켰다는 내용을 털어놨다.

 

  

문 중위의 약혼녀는 서귀포 남로당 총책의 딸로, 그녀는 아버지의 영향 아래 남로당 당원으로서 문상길 중위에게 접근해 약혼했던 것이었다. 문 중위는 정식으로 재판에 회부돼 사형을 언도받고 수색(水色)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나는 맞선을 보기 위해 10일간의 휴가를 얻어 서울로 나왔다가 제주로 돌아가기 전, 서울 경비대 총사령부 정문 입구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낯선 중령을 만났다. 그는 총사령부 최영희 인사국장이었다. 그가 요직 중의 요직인 인사국 보임과장 자리를 제안했다. 4·3사건으로 지칠 대로 지친 데다, 제주도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송요찬(宋堯讚) 9연대장은 내가 서울로 휴가를 간 동안 나를 대대장으로 진급시켜 놓고 기다리다가 총사령부에서 인사명령서가 날아들자 길길이 뛰었다. 나는 “심복 한 사람을 총사령부에 심어두었다고 생각하시고, 9연대 간부는 1급 장교들로만 보내겠다”는 약속을 하고 제주를 빠져나왔다. 친구 따라 강남 갔던 나는 그곳에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 간신히 ‘상륙(上陸)’할 수 있었다.

 

 

≫ 뜻하지 않은 정보장교 생활

인사국 보임과장으로 일하던 중 당시 정보국장이던 백선엽(白善燁) 중령을 찾아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백 국장은 “보임과장도 중요한 자리지. 그런데 금번 우리 정보국에는 특수임무를 수행하게 될 SIS(특별조사과·CIC의 전신)라는 부대가 신설돼 지금 요원을 인선 중인데, 임자도 이번 기회에 SIS요원으로 자리를 옮겨 교육받는 것이 어떤가”라고 제안했다.

 

  

백 국장은 아예 “그래, 자네가 SIS에서 일하는 게 좋겠어. 내가 전속명령을 내리도록 조처하겠네”라고 했다. 참으로 기이한 일과 인연이 계속되고 있었다. 생면부지의 최영희 국장도 초면에 나를 보임과장으로 발탁했는데, 백 국장도 처음 보는 나를 자기 휘하로 발탁하고자 한 것이었다.

 

  

사람이란 자기를 인정하고 무조건 신뢰하면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 정보의 ‘정(情)’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느닷없이 SIS요원으로 발탁돼 48년 8월부터 약 3개월간 장충단에 위치한 박문사(博文寺)에서 특수정보 교육을 받았다. 동기생 중에는 김안일 대위와 김창룡 중위도 포함돼 있었다.

 

  

교관들은 주로 사정국 요원들로 짜여 있었다. 그들이 가르친 과목은 미행법, 흔적 찾는 감찰법, 유인법, 조서작성법 등 내게는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수사기법들이었다. 48년 10월 20일 새벽 5시, SIS에서 비상소집 명령이 내려왔다. 당시 교육기간이 끝나지도 않은 상태였는데, “교육을 중단하고 총사령부 정보국으로 모이라”는 지시에 영문도 모른 채 국장실로 집합했다. 뜻밖에도 여수 14연대에서 반란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남부지구 전투사령부인 5여단의 호남지구 SIS대장으로 임명됐다. 광주 14연대에 도착해서 포로수용소부터 설치했다. 연일 압송돼 오는 수많은 반란혐의자를 우리 SIS요원들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광주경찰서 수사요원들까지 총동원했고, 이들의 지원으로 밤낮없이 반란군을 조사했다. 수사업무를 처음 경험하는 나는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감당하기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여순반란사건은 전군을 숙군(肅軍)하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제주 4·3사건, 여순반란과 나주사건 등을 감안해 정부에서는 이러한 사태를 근본적으로 예방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제정·공포했다. 국보법은 48년 12월 1일부터 발효됐고 이 법률에 의해 육군 정보국에서는 특별수사과를 설치했다. 이후 육군은 특별수사과를 특무대(SIS·대장 김안일 대위)로 바꾸는 등 조직을 강화하고 업무를 확대했다.

 

  

49년 창설된 육군특무부대는 숙군작업에 박차를 가하면서 육군 내 모든 부대를 대상으로 5개월여에 걸쳐 수사를 진행했다. 4·14·6·15연대가 주 대상이었다. 군 내부의 공산분자 364명을 색출해 내는 성과를 거뒀다. 만일 숙군작업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6·25가 발생했다면 “40만명 이상의 민중봉기와 군 내 반란으로 하루아침에 공산화된다”는 박헌영의 예언이 적중했을 것이다. 백선엽 정보국장이 앞날을 내다보고 SIS란 특수부대를 창설해 군 내부는 물론 국가의 안위와 안정을 도모한 것은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다.

 

 

≫ 8사단 정보참모로 영천전투 참전

숙군작업을 일단락하고 백선엽 정보국장에게 전출을 졸랐다. 그는 “남들은 SIS로 오지 못해 야단들인데 그만두겠다는 사람 처음 보았다”면서 “정 그렇다면 앞으로 서울에 7여단이 창설되는 데 정보참모로 가라”고 했다.

 

  

50년 4월 7일 시흥보병학교 고등군사반 5기생으로 입교했으나 졸업 일주일을 앞두고 6·25 전쟁이 발발해 학생들은 큰 충격을 받고 원대복귀했다. 개전 초기 적의 공세에 7사단은 해체되다시피 했다. 그해 8월 8사단 정보참모로 치른 영천회전은 나의 6·25 전쟁에서 가장 소중한 명예로 남아 있다. 영천전투는 당시 국군 제2군단이 영천 지역으로 침공한 북한 공산군을 격퇴하고 방어에 성공한 전투로, 영천이 돌파되면 영천으로부터 대구 또는 경주로의 돌파구가 형성돼 한·미연합군의 낙동강 방어선이 큰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북한군은 15사단을 주축으로 한 5개 연대 병력을 투입해 50년 9월 5일부터 9일간에 걸쳐 영천 지역의 한국군 제2군단을 집중 공격했다. 이 교전에서 한국군 2군단은 8사단을 주축으로 한 7개 연대 병력으로 맞섰으나, 초전에 영천 지역을 빼앗기고 금호강 남쪽으로 밀리게 됐다.

 

  

위기에 처한 한국군은 미군 전차의 지원하에 반격전을 전개해 북한군 15사단의 주력을 격멸하고 영천을 탈환했다. 이로 인해 한국군은 낙동강 전선의 동부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고, 북한군은 좌우 인접사단과 측방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됐다. 결과적으로 북한군은 전반적인 작전에 차질을 빚어 9월 공세에 실패하고 만다.

 

  

이때부터 6·25의 전세가 역전되어 한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6·25 전쟁 중 한국군이 단독으로 펼쳤던 가장 큰 대규모 작전은 바로 영천전투였다”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 30세에 장군이 되다  

휴전이 되고 육대 졸업 후 22사단 부사단장에 부임하려는데, 난데없이 연대 연병장에 헬리콥터 한 대가 착륙했다. 최영희 장군이었다. 5군단장인 최 장군은 나를 5군단 참모장으로 임명하겠다고 했다. 군단 참모장에 발탁된다는 것은 장군 승진이 보장되는 것이었다. 55년 6월 1일 30세란 어린 나이에 별을 달았다.

                         육사교장 재임 중이던 1967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이 육사 23기 임관식에 참석했다.▶

  

57년 9월, 나는 충북 증평의 37사단에서 첫 사단장을 했고, 이어 33사단장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불시 시찰로 전격 교체되는 바람에 졸지에 33사단장으로 부임했다. 33사단장으로 6개월 근무하고 있던 59년 2월 18일 28사단장 서정철 준장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졸지에 28사단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당시 황망했던 기억이 난다. 백선엽 당시 참모총장은 민병권 인사참모부장을 통해 나를 육본으로 불러들였다. 중간에 박병권 6관구사령관을 만나 점심식사를 하고 총장방에 들어가니 민 장군은 “총장님이 식사도 못 하시고 기다리고 계신다”며 야단을 했다.

 

  

백선엽 총장은 기분이 좋으면 반말을 하지만, 기분이 언짢으면 부하에게도 경어(敬語)를 쓰는 특성이 있다. 백 총장은 “부대에서 몇 시에 출발하셨지요?”라고 했다. “아뿔싸, 총장님이 단단히 화가 나셨구나!” 백 총장은 내게 보고서 한 장을 주며 “읽어보시오”라고 했다.

 

  

28사단장이 부하에게 피살됐다는 부대 내 하극상 내용이었다. 총장은 “지금 동대문 신당동 비행장에 이 장군이 타고 갈 비행기가 대기 중이니 빨리 6군단으로 가라”고 했다. 나는 “총장님, 그럼 33사단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니, “지금 이 시간부터 이 장군은 28사단장이야. 33사단은 걱정 안 해도 돼. 즉시 떠나시오”라고 했다.

 

  

전임 사단장 피살사건은 군사령부, 육본, 국방부, 감사원, 국회조사단까지 파견돼 진상조사에만 무려 6개월이 걸렸다. 계속해서 어수선한 나날을 보냈다. 결론은 예비사단인 28사단이 교육훈련 중에 상하의 견해 차이로 발생한 우발적 사고였다.

 

  

개요는 이랬다. 6군단으로부터 한·미 1군단장을 모시고 ‘수색정찰’ 시범을 하라는 지시를 받은 서정철 사단장은 81연대 1대대장 정구영 중령을 책임자로 지명했다. 사단장이 시범준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나가 “누가 영어로 브리핑을 할 건가”라고 물었다. 정 중령은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사단장은 “그럼 지금 해보라”고 했다.

 

  

정 중령이 브리핑 도중 수색정찰이란 단어를 패트롤(patrol)이라고 하자, 사단장은 “아니지, 리카니즌스(reconnaissance)가 적합한 단어야”라고 했다. 대대장은 “패트롤이 맞습니다”라고 고집을 부렸다. 정 중령은 영관급 중에서 제일 영어가 능숙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서 사단장 역시 장군급에서는 제일 영어를 잘하는 것으로 소문나 있었다. 두 사람의 자존심 대결이 되고 만 것이었다. 서 사단장은 불쾌해하며 지휘봉으로 정 중령의 배를 찔렀다. 이에 정 중령이 권총을 뽑아 장전한 탄알 7발을 모두 발사한 것이었다. 참으로 어이없고 안타까운 사건이라 아니 할 수 없다.

 

 

≫ 4·19 때 李起鵬 의장 일가 피신 도와  

1961년 자유당은 3·15 부정선거를 위해 군 수뇌부 지휘관들에게 회유와 압력을 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나는 장병들에게 소신대로 투표를 하도록 했다. 자유당 정권이 물러나고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전방 사단장 이상이 모두 교체됐지만 유독 나만 교체되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은 28사단을 방문, 대대장급 이상의 장교들에게 공명선거에 대한 치하를 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육군참모총장 시절, 여군창설식에 참석한 박근혜 영애가

                                                                       이세호 총장의 부인 오영숙 여사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4·19 때 박마리아 여사, 둘째아들 강욱, 운전기사 1명, 수행 경감 1명 등 이기붕(李起鵬)씨 일가 5명이 28사단 81연대로 찾아들었다. 즉 6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산정호수의 귀빈 숙소(실제는 허술한 퀀셋 건물)에 거동이 불편한 이기붕씨와 그 일행이 피신해 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나는 급한 대로 퀀셋 내부를 개조했다. 박마리아 여사는 오른쪽, 왼쪽이 각기 다른 짝짝이 신발을 신고 있었다. 급하게 집을 나왔음을 알 수 있었다. 박 여사는 장병들의 함성과 군가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며 불안해했다. 장병들의 함성과 군가 합창도 중지시켰다.

 

이들은 이틀밤을 자고 “더 지내다 가시라”는 만류에도 서울로 황급히 떠났다. 다음 날 이들의 자결 소식을 들었다.

 

정국이 안정을 되찾을 무렵, 강영훈(姜英勳) 6군단장은 육사교장으로 영전하고, 후임 6군단장에 김응수(金應洙) 장군이 부임했다. 이한림(李翰林) 장군은 1군사령관으로 부임, 우리 28사단을 초도 순시차 방문했다. 이 장군은 전방을 요새화한 금굴산 진지를 눈여겨보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한림 1군사령관은 장병들에게 표창과 금일봉을 전달했다.

 

  

61년 5월 15일은 제1야전군 창설기념일이었다. 전 사단의 장성들은 원주 1군사령부에서 성대한 기념식을 치르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5월 16일 새벽 4시, 1군사령관은 사단장과 군단장 모두에게 비상소집을 발령했다. 호텔 밖에 대기시켜 놓은 버스편으로 이동, 군사령부 회의실로 들어갔다.

 

  

이한림 장군은 “지금 박정희 장군이 군사혁명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았다. 모두 원대복귀해 차후 명령을 기다리라”는 간단한 지시를 내렸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1군 산하 사단장급 이상 장성들이 모였는데 야전군의 진로에 대한 의견수렴이나 군 사령관으로서의 지휘복안, 결심도 없이 헤어지는 게 무미건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朴正熙 장군에게 혁명 지지 편지 띄워

귀대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직속상관인 김응수 군단장에게 무전을 쳤다. “군단장님, 오늘 사단장 이상 일선 지휘관이 모였는데, 메시지 하나 없이 흩어지는 것이 몹시 아쉽습니다. 우리 6군단 산하 사단장들만이라도 이 기회에 모여 앞으로 일선부대가 취할 수 있는 제 문제를 토의하는 발전적 모임을 갖는 것을 제의합니다.”

 

  

김응수 장군은 6군단 산하 모든 사단장을 군단사령부로 집합시켰다. 6군단 포병 155mm 대대장 구자춘(具滋春) 중령(내무부장관 역임)이 육군본부를 점령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고, 그런가 하면 6군단 포병사령관 문재준(文在駿) 대령(육군 헌병감 역임), 작전참모 홍종철(洪鍾哲) 중령(문교부장관 역임) 등은 혁명을 지지한다며 목청을 높였다.

 

  

갑론을박(甲論乙駁) 끝에 6군단장은 “혁명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책임을 면할 수 없는 형편이니 각 사단에서는 황소 한 마리씩 갹출(醵出)해 5마리를 서울로 올려 보내 성의표시를 하자”고 했다. 회의 분위기는 대체로 혁명 지지로 쏠렸다. 훗날 밝혀졌지만 포병사령관, 작전참모 모두 혁명주체였던 것이다.

 

  

나는 귀대 전 우리 28사단 대대장급 이상 간부들을 집합시켰다. 거기서 “5·16 군사혁명에 대해 기탄없이 각자의 의견을 소신껏 발표하라. 모든 발언은 책임을 묻지 않겠다. 토의 결과에 대한 최종 결론은 사단장인 내가 내릴 것”이라고 했다. 대체로 80~90%가 혁명 지지 입장을 나타냈다.

 

  

나는 “28사단은 여러분의 의견을 종합, 수렴해 혁명을 지지한다”면서 “그러나 우리 사단은 최전방 방어임무를 수행해야 할 사단으로 단 1개 분대라도 사단장의 허가 없이 병력을 동원하든가 중구난방의 개별행동을 취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니 조용히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혁명 지지 서한을 작성해 작전참모를 통해 참모총장과 박정희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박정희 부의장은 전군(全軍)에서 유일하게 서신으로 지지입장을 밝힌 내 편지를 받아들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사실상 그때부터 박 대통령과 나의 인연은 시작된 것 같다.

 

나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육사 동기라는 것, 나이가 여덟 살 정도 많다는 정도밖에 몰랐다. 임관 후 같이 근무한 적도 없었다.

 

이튿날인 5월 17일, 1군사령관 박림항(朴林恒) 장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이한림 1군사령관이 유고로 방금 내가 1군사령관에 부임했기 때문에 1군 사정에 어둡고, 6군단장 역시 유고로 공석이 돼 다음 6군단장이 부임할 때까지 이세호 장군이 6군단장 업무를 대행해 달라”고 지시했다. 사정을 알아보니 6군단장 김응수 장군과 정강 8사단장은 혁명에 반대하다 혁명군에 연행됐다.

 

 

≫ 월남전 작전지휘권 놓고 韓美 간 신경전

       

▲ 1969년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임명받은 이세호 중장이 박 대통령으로부터 ‘주월군사령관 이세호’라고 쓴 지휘봉을 하사받고 있다. ‘모세의 지팡이처럼’이란 구절이 눈에 띈다.

  

육군보병학교장을 거쳐 64년 8월 국방대학원을 졸업하자 당시 김종오(金鍾五) 합참의장은 나를 합참 전략정보국장으로 임명했다. 내게 주어진 급선무는 우리 전투부대의 파월과 관련한 일이었다. 월남에는 64년 9월 이미 이동외과병원(병원장 이형수 중령)과 태권도단(단장 백준기 소령)이 파견돼 있었다.

 

  

65년 3월 16일 조문환(曺文煥) 장군을 단장으로 일명 비둘기부대(건설지원단)가 사이공시 외곽 비엔 호아인 옛 월남 정부 철도청 자리로 이동해 사이공 외곽 경비와 도로·교량 확장 등 역할을 수행했다. 그 후 월남 정부는 전투부대 파병을 우리 정부에 요청했고, 합참 작전국은 전투부대 파월에 대한 제반사항을 검토했다.

 

  

이러한 가운데 파월 미군사령부 맥도널드 중령 등이 방한, 한국군과 수차례 회의를 열어 우리 군 전투부대의 파월 문제를 토의했다. 회의에서는 지엽적 문제만 논의하고, 작전지휘권 등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한국 측 연락장교단이 베트남을 방문해 결정하기로 했다.

 

  

65년 6월 연락장교단 파월 방침에 따라 내가 단장으로 8월 18일부터 한 달 동안 베트남 사이공에 체류하면서 미군, 월남군과 정보, 작전, 인사, 군수 등 각 분야에 걸쳐 다각적 협의에 들어갔다. 미군은 월남 주둔군으로서 미군의 현황을 설명하면서 마지막 순서로 베트남에 파병된 모든 우방군의 지휘체계 도표를 제시하고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도표 내용대로라면 파월 한국군은 주월미군사령부에 예속돼 우리 군 자체의 지휘권 내지는 통솔 권한이 배제되는 것이었다.

 

나는 즉각 이의를 제기했다. “작전지휘권 문제는 한미 양국군이 별도로 토의해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감안해 달라”고 제동을 걸었다.

 

 

≫ 미군 측, “한국군, 독자 작전능력 있나?”

며칠 후 국제군사원호처(IMAO) 미 대표인 쿡(Cook) 대령은 “파월 한국군은 파월 미군사령관의 작전 통제하에 예속되는 것으로 미·월 양국군 간에 합의됐다. 이런 조치는 지난 7월 12일 방한한 미군 측 연락장교단이 합참 작전기획국장 주관하에 개최된 한미 연합회의에서 한국 측이 표명한 의견에 근거한다”면서 “월남에 파병되는 맹호사단의 작전통제권은 미 1야전사령부(FFC)의 작전통제를 받게 된다”고 했다.

 

  

나는 즉각 항의했다. 미군 측은 파월 한국군의 급식은 한국 정부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고도 했다. 우리 군수 관계를 담당한 김용휴(金容烋·총무처장관 역임) 준장은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의 요청에 의해 파월했으므로 우리 군의 급식 책임은 월남군을 지원하는 미국 측이 져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나는 김용휴 준장을 대동하고 월남군 참모장 탕(Thanh) 소장을 방문해 쌀, 소금, 식용유, 차 등의 제공을 요청하며 “우리와 같은 동양문화권의 우방”이라고 호소하자, 그는 유달리 친밀감을 나타내며 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 후 미측과 대부분 합의했으나 작전지휘권을 놓고는 한 발짝의 양보도 없이 평행선을 달렸다. 미군 측 참모부장 아베이(Abbey) 준장은 “과연 한국군이 독자적 작전 수행능력을 갖고 있느냐”는 모욕적인 발언을 해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다.

 

 

≫ 웨스트 모어랜드 장군과의 담판 

다음 날이면 귀국일, 준비를 서두르던 오후 7시경 미군 측 연락장교가 나를 찾아왔다. 미군 웨스트 모어랜드 대장이 급히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했다. 파월미군사령부로 직행했다. 웨스트 모어랜드 장군은 평소와 달리 정복 차림으로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1969년 4월 27일 미군이 마련해 준 소형제트기

                       T-39를 타고 사이공 근교 탄손 누트 공항에 도

                 착했다.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가운데)과 월남

                                의 땀 장군(오른쪽)이 마중을 나왔다.▶

    

그는 “단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웨스트 모어랜드 장군은 “지난번 방한한 우리 연락장교단과의 합동회의에서 파월 한국군은 미군사령관의 통제하에 예속되는 것을 무한의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보고받았는데, 어째서 귀관은 이의를 제기하나”라고 물었다. 나는 “한국군 합참 작전국장과 본인은 같은 건물에서 매일 얼굴을 대하는 사이”라며 “본인이 연락단장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그분은 지휘권과 관련해 언급한 바가 없다. 아마 합참 실무회의에 참석했던 쿡 대령의 언어상의 뉘앙스 차이로 와전된 것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귀관은 순수 군인의 입장에서 작전지휘권 일원화를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물었다. 나는 “전 대한민국 합참을 대표해 온 군인이기 때문에 순수 군인의 입장으로 말씀드릴 수 없어 송구하다”고 하자 그는 “한국군은 단독작전을 치를 능력이 있는가, 미 해공군과 포병의 지원 없이 어떻게 작전임무를 수행하나, 한국군 자체 안전유지와 비상사태 시 안전철군을 위해서라도 미군 작전 지휘하에 예속됨이 유리하지 않나”라고 했다. 나는 신중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한국군의 파월은 박정희 대통령의 용단으로 성사된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미국에 협조하고 성심으로 월남을 돕는다는 참뜻이 명실상부하게 부각되려면 한·미·월 3군이 동등한 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한국이 미국의 통제를 받게 되면 주권국가로서의 체면과 위상은 추락할 뿐만 아니라 한국이 월남을 돕고자 하는 국제적 명분이 사라지게 됩니다. 지금 북한을 비롯해 공산국가들은 한국군이 미 제국주의자들의 주구(走狗)로 월남 침략전쟁에 가담하고 있고, 용병으로 청부전쟁을 하고 있다고 악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독자적 작전권을 갖지 못하면 악선전에 휘말리는 동기를 제공하게 됩니다.

 

미국과 장군님의 지휘통솔 능력을 불신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 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대내외 정세의 배경, 국제적 대의명분을 살리기 위해 우리가 독자적 지휘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웨스트 모어랜드 장군은 내 말을 듣더니 “지금 참모회의가 열리고 있으니 참석해 보라”며 참모들에게 “한국군에 대한 지휘통제는 한·미·월 3군 대표로 구성된 IMAO에서 협의 결정하기로 됐으니 이를 골자로 한 한미 군사약정서를 작성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휘권 문제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파월 한국군 사령관에게 있다’로 결론이 났다. 우리가 바라던 대로 일단락됐고, 난 이 내용을 급전으로 국방부에 타전했다.

 

 

≫ 1100여 회 대대급 작전으로 실전경험 쌓아  

9월 25일 맹호사단은 온 국민의 환송을 받으며 월남으로 떠났다. 66년 8월 100군수사령부, 백마부대인 9사단도 월남에 증파됐다.

 

                                     월남 전통혼례를 수놓은 자개장식을

                                  이세호 주월한국군사령관에게 선물하

                                      는 구엔 반 티우 대통령(오른쪽).▶

 

나는 69년 5월 1일 채명신(蔡命新) 주월사령관 후임으로 부임했다. 당시 김재규(金載圭) 보안사령관은 비밀유지를 당부하며 “박 대통령은 사단장을 세 차례나 한 경륜, 우리 군을 대표해 파월 연락장교단장으로 한·미, 한·월 군사협정을 체결한 경험, 68년 김신조의 1·21사태를 잘 마무리한 공로를 눈여겨보았다”고 인선배경을 전해주었다.

 

  

월남으로 떠나는 날, 박 대통령은 나를 불러 ‘주월군 사령관 이세호, 모세의 지팡이’를 새긴 지휘봉을 하사했다. 지금도 이 지휘봉은 가문의 영광으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53년 육대 재학 시절, 학교에서 내준 앙케트지 희망란에 ‘해외원정군 사령관’이라고 쓴 게 16년 만에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한국군은 월남전 전투작전면에서 1100여 회의 대대급 이상 대부대 작전, 57만여 회의 소부대 작전, 4만여 명의 공산군 사살, 2만여 점의 각종 화기 노획, 7000여km 평정 등 성과를 올렸다. 특히 안케(An Khe) 패스 작전, 망양(Mang Yang) 패스 경계작전, 성마(聖馬) 작전 등 실지회복을 위한 월남군의 반격작전 지원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특히 단독 작전권 확보로 한국군은 월남전 참전 이래 31만2853명이 실전경험을 쌓았다. 이것은 북한이 지금도 가장 두려워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현대전의 최신 전술교리, 최신 전투장비 능력 보유, 외국군과의 연합작전 능력 보유, 산악전, 게릴라전 등의 실전경험을 터득함으로써 현역에서 예비역으로 크게 활약하고 국방력 강화에 큰 자산으로 남았다.

 

  

육군참모총장으로 부임한 지 열흘 만인 75년 3월 10일, 월맹군 18개 사단이 월남의 17도선을 일제히 공격하고 있다는 긴급보고를 받았다. 나는 국방부 장관에게 긴급 각군 참모총장회의를 소집하고 월남 거주 우리 교민들의 긴급철수를 단행할 것과 해군의 협조로 LST의 급파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73년 1월 27일, 파리 휴전협정에 따라 한국군이 개선 철군한 지 꼭 2년 만이다. 세계 4위의 군사력을 보유한 월남은 전투화도 제대로 신지 못한 월맹군의 파상 공격에 겨우 50일 만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75년 4월 30일 사이공 대통령궁에는 월맹기가 게양됐다. 월남공화국이란 어엿했던 한 나라가 지구상에서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월남전에서 3000여 명의 한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우방군 5만8000여 명이 피를 흘렸음에도 희생에 대한 보람이 사라지는 것 같아 우울했다. 나는 월남 패망 이후 교훈을 깨달았다. ‘외국과의 전쟁에서는 지든지 이기든지 무조건 애국자가 된다. 그러나 동족 간에서는 지는 편은 무조건 민족반역자, 배반자로 낙인 찍히고 만다.’

 

 

≫ 대통령께 드린 마지막 보고서

79년 2월 1일, 나는 반세기에 가까웠던 세월 동안 썼던 철모와 입었던 군복과 신었던 군화를 벗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의 연장선상에서 삶을 꾸려오다 긴장을 하루아침에 풀어버린다는 것은 오히려 부담이었다.

 

  

참모총장 연임을 끝내고 현역을 떠난 자연인으로 생활하면서 내 눈에 비친 군 내부의 문제점과 그 문제점은 반드시 시정돼야 한다는 충정에서 나는 대통령 각하께 진언을 올렸다. 서신을 올리게 된 직접적 계기는 보안사령관의 직급을 중장에서 대장으로 상향조정한다는 소식을 접한 데서다. 서신 골자는 다음과 같다.

 

  

“각 군의 보안사를 국방부로 통합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를 계기로 보안사령관의 직급을 상향조정한다는 것은 더욱 문제가 됩니다. 미군 제도를 보면 헌병(MP), 방첩대(CIC)가 일반기구보다 한 단계 계급이 낮은 것은 지휘권 강화와 보좌역의 방편이 돼야지 마치 감시·감독기구가 돼서는 안 된다는 오랜 경험에서 도출한 조치입니다. 권력기구는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의 수면활동을 통해 지휘관을 보좌해야 하는 기구입니다. 권력이 표면에 노출되면 권력남용, 횡포, 조작으로 제2의 지휘관 행세를 하며 권력을 남용케 됩니다. 저 역시 권력기관과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 체력소모전하에 있었음을 통감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경호실 이재전(李在田) 차장(예비역 육군중장·작고)이 “각하 지시로 찾아뵈었다”면서 “각하께 올린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했다. 나는 “보안사령관의 직급을 대장으로 하면 각 군 참모총장은 마치 권력기관의 눈치나 보는 형국이 되고, 현재 보안사령관이 중장임에도 월권·조작하는 마당에 만약 대장으로 상향조정한다면 그 결과는 엄청난 악영향을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이재전 장군도 군단장을 경험한 바 있어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하기에,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각하께 보고 드리시오”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나의 건의를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그 뒤 보안사령관은 2군사령관으로 전보됐고, 1사단장으로 근무한 지 채 1년도 안 된 전두환(全斗煥) 소장이 ‘소장’으로 보안사령관에 발탁·임명됐다. 그는 느닷없이 야인이 된 내게 집으로 양주를 사들고 찾아왔다.

 

  

나는 취임을 축하하며 “보안사령부는 군 지휘권을 확립하는 보좌역을 해야지 감사를 하는 역할이 아니다”고 했고 그는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돌아갔다. 그가 보안사령관으로 임명을 받자마자 나를 찾아온 것은 아직도 내가 무슨 큰 영향력이나 있는 사람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 “아드님도 육사 출신 아닙니까?” 

퇴임한 지 불과 8개월 만에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시해됐다. 박 대통령 서거 후 내게 불어닥친 시련은 가혹했다. 그 후폭풍은 권력을 탐하는 사람들의 욕망에서 비롯됐음이기 때문이다.

 

        월남 탄손 누트 공항에서 열린 주월한국군사령부 이월식

   에서 이세호 사령관이 주월미군사령관 와이어드 대장(왼쪽)

 과 월남군총사령관 비엔 대장(오른쪽)의 환송을 받고 있다.▶

  

그날의 행태를 곱씹는 것은 전두환씨와의 사적인 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한 나라의 운명과 역사에 오점을 남긴 불법적 행태는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언급하려는 것이다. 계엄하 합동수사본부장이란 군은 물론 검찰, 치안본부와 중앙정보부까지 장악하게 되니 막강한 권력을 가진 실력자다.

 

  

더욱이 전두환 소장은 그동안 자신의 후견자로 섬겨왔던 박 대통령과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이 사망하자, 자신들의 보호막이 무너졌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불안한 전두환 소장 주위의 측근들은 이러한 상황을 오히려 대권 장악의 기회로 삼자고 간언해 전두환을 움직였고, 이로써 신군부 세력들은 대권 찬탈 수순을 밟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불순한 움직임을 감지한 정승화(鄭昇和) 계엄사령관은 전두환 소장을 한직으로 인사조치하려 고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눈치챈 측근이 전두환에게 알렸고, 전두환을 비롯한 추종세력들은 급기야 12·12사태를 일으켜 직속상관인 계엄사령관이며 육군참모총장을 구금하는 전대미문의 하극상을 자행했던 것이다.

 

  

내가 2군 참모장 시절, 그의 장인이 되는 이규동(李圭東·경리감 역임) 장군이 관리참모로 계시면서 육사 출신인 전두환 대위를 사위로 맞아 즐거워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전 소장은 5·16 이후 주로 경호실과 특전부대에 근무하면서 대통령 경호근무를 했으며, 내가 월남사령관 때는 9사단 29연대장으로 같이 월남전에 참전했다.

 

  

육참총장 때의 일화로 자신이 육사 출신을 대표한다며 찾아와 “아드님도 육사 출신 아닙니까? 우리 정규 육사 출신들은 기타 장교들과는 구별하여 보직이나 진급에 우선순위의 혜택을 부여하여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던 일이 있다. 그가 1공수특전단장(준장)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찌 보면 그 말이 바른말로 이해될 수 있으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러한 발상은 군의 기강은 물론 질서를 해치기 십상인 발언이었다.

 

“귀관은 정규 육사 출신으로 어떻게 그렇게 비상식적인 말을 함부로 하는가? 내가 귀관의 입장이라면 ‘우리는 4년이라는 교육을 이수한 정규 육사 출신으로 기타 장교들과 실력을 겨루는 데 자신이 있다. 그러니 정정당당한 실력의 경쟁을 통해 인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해야 당연하지 않은가?

 

  

4년제 정규 육사가 아닌 장교들, 특히 6·25에 참전했던 학도병, 갑종 또는 종합 출신의 장교들은 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대학의 학문도 중단, 또는 일터를 버리고 자진 입대해 목숨을 바쳐 낙동강 등 전쟁터에서 적들과 치열하게 싸우지 않았는가? 그런 장교들에게 혜택이 주어져야 한다고 진언하는 것이 육사 출신 장교들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장군 등 고급 지휘관이 되기 위해서는 일선 연대장 등 군 내의 여러 업무를 마스터해야 육사 출신으로 군의 핵심장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귀관이 오늘 나를 찾아와 진급, 보직 운운하는 것은 그 자체가 군인의 도를 벗어난 발언이 아닌가?”

 

 

≫ “서부활극을 보는 것 같다” 

이렇게 질책해 그를 되돌려 세웠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후 나는 육사 12기 중 합리적인 사고와 유달리 정의감이 뚜렷한 군인으로 눈여겨보았던 박준병(朴俊炳) 장군을 인사참모부 인사관리처장에 임명하면서 “자네들 정규 육사 출신과 갑종, 현임, 학군, 종합 등의 장교들과 비교해, 현재의 환경과 여건에서 어떤 불이익이 초래되고 대우에서 차별이 발생하는지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확인해 보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

 

 

                                                                             월남 파병 중이던 1970년 4월 9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세호 사령관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박준병 장군은 그와 같은 불만과 불평이 없음을 내게 확인해 주었다. 그 후 전두환씨는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거쳐 보병 제1사단장으로 근무하면서 ‘고량포’의 제3땅굴을 발견하는 공을 세웠다. 그 후 내가 박 대통령께 마지막 건의서를 올리면서 그는 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됐다. 사람의 인연이란 묘한 것, 내가 마련해서 천거한 조치에 나 자신이 당할 줄이야.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다.

 

  

전두환씨도 ‘하나회’ 회원이었다. ‘하나회’ 비리 사건은 고 강창성(姜昌成) 장군(보안사령관 역임)의 저서 《일본 및 한국의 군벌정치》에 소상히 밝혀져 있다. 그분은 ‘후일을 위해서라도 군의 정치적 사조직은 근절되어야 마땅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강창성 당시 보안사령관은 하나회 ‘킬러’라는 호칭을 받기도 했다. 박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면서 강 장군은 합수부에 끌려가 그들 ‘하나회’를 매도했다 하여 2년여 기간 동안 삼청교육대를 포함해 혹독한 수감 생활을 치렀다.

 

  

본래 ‘하나회’는 박 대통령이 군의 핵심인재를 키울 목적으로 만든 정규 육사 출신들의 모임이었으나, 이들이 ‘근위대’ 또는 ‘친위대’ 식의 군 내 사조직화했다는 것은 정말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보안사와 청와대 경호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이들은 특권의식을 갖게 됐다. 이들은 안하무인 행태로 말썽을 부리는 일이 많았다. 뒤늦게 박 대통령은 이 조직을 만든 것을 후회하고 하나회 조직 해체를 보안사령관인 강창성 장군에게 지시, 해체시켰던 것이다.

 

  

해체된 그들 멤버는 비밀리에 조직을 유지하다 10·26 후 전두환씨가 권력의 선두로 부상하자 다시 신군부 세력으로 모여든 것이다. 신군부는 쿠데타로 대권(大權)을 잡는다는 수순으로 표면에 ‘시국수습방안’이란 명분을 내세웠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 방안 등이다. 80년 5월 17일 오전 10시 전두환씨는 청와대로 들어가 신현확(申鉉碻) 국무총리, 주영복(周永福) 국방부장관, 이희성(李熺性) 계엄사령관 등이 입회한 가운데 시국수습방안을 발표했다.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은 “그 같은 상황은 5·16 하나로 족하니, 특히 군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다시는 헌정이 중단되는 사태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며 수습방안 결재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그들의 계획대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불법을 행사했다.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하달된 포고령 제10호로 모든 정치인의 정치활동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김종필(金鍾泌), 김대중(金大中), 김영삼(金泳三)씨 등을 체포, 자기들 집권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때 김수환 추기경은 “마치 서부활극을 보는 것 같다”라는 소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 영장 없이 연행  

나는 계엄 확대 소식도 알지 못한 채 다음 날인 5월 18일 송효찬 장군과 오찬 약속을 하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그날 5월 17일 오후 8시경, 현관의 초인종이 울렸다. 집사람이 문을 열자, 그들은 “보안사 군인”이라면서 강제로 나를 연행했다.

                                  6군단장 시절인 1968년 1월,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1·21 사태에 대

                               해 작전을 숙의하고 있다.(가운데).▶

  

총장직에서 물러난 지 엊그제(79년 2월)인데 대명천지 대한민국 땅에서 나를 체포·구금하다니, 순간 ‘군 내 공산 불순세력에 의한 국가 전복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파월사령관으로서, 또는 여순사건과 숙군 등 북한의 타도 대상으로 납치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끼쳤다. 숨도 쉬지 못한 채 그와 같은 불순세력에 의한 것이 아님을 인지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공포에서 벗어나자 이번에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그들은 서빙고의 보안사 별관에 나를 감금했다. 심문 형식의 질문도 별로 없었다. 옆방에서는 매일 새벽이면 사람을 패는 소리, 신음 등이 들려왔다. 어떤 날에는 나를 데리고 다른 방, 도살장을 방불케 하는 여러 가지 고문 형틀이 갖추어진 실내를 보여주며 “이 방이 정승화 참모총장을 물고문 하던 방”이라고 간접적으로 협박하는 것이었다. 이런 협박을 되풀이하면서 이들은 나를 잡아온 명분을 찾는 데 고심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들로부터 ‘재임기간 동안 인사, 보직과 관련한 청탁에 의한 금품거래 내지는 부조리 가담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나보다 당신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내 재임기간 동안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그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샅샅이 뒤지고 따라다니지 않았는가? 나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들까지도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이 판국에 무엇을 내놓으란 말인가?”

 

         

이러한 답변을 계속하자 조사관 중 한 사람은 결국 “총장님께서 특별히 죄가 있어서 오셨겠습니까? 모두가 시대의 흐름에서 비롯된 것이려니 하고 이해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1973년 7월 2일 초대 3군사령

                                              관으로 박 대통령에게 사령부

                                            기를 받고 있는 이세호 장군.▶

  

보안사 중심의 ‘혁명’이 성공하자 권력에 부침하는 무리가 앞다투어 실세에게로 몰려들고 있었다. 전두환씨를 비롯한 이들 군상(群像)들은 그들의 경계인물 1호로 나를 지목한 것 같았다. 퇴임한 지 얼마 안 되는 데다, 연대장급 이상의 지휘관들은 내가 총장 때 임명한 신임하는 장교들로, 국군 장악에 앞서 군권(軍權)을 잡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내가 장애요인의 제1호로 지목된 모양이었다. 내 손발을 사전에 묶으려 하는 것 같았다.

 

  

이들은 내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라고 강요했다. 내가 가진 것들을 몰수해 나의 활동을 저지하려는 것 같았다. 때문에 나의 내자가 퇴역 후 집안 경제를 위해 장만했던 부동산과 부모가 내게 남겨준 유산, 아내의 패물, 술을 마시지 못해 모아두었던 양주들, 심지어 기념으로 받은 기념품들까지 그들은 가택수색을 해 전부 가져갔다.

 

  

그들은 강제로 빼앗아가면서도 명목상으로는 ‘국가에 헌납’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명분도 ‘권력형 부정축재자 재산환수, 헌납’이란 제목으로 발표, 사회적 매장까지 실행했다. 나는 대명천지 대한민국 땅에서 공산주의식 기법에 의한 재산 몰수의 수모를 당하는 꼴이 되었다. 그것도 내가 키운 부하들에게 말이다.

 

 

≫ “총알이 날아올 때는 엎드려 피하는 게 상책”

육사 33기인 아들 영수도 한미연합사 장교로 군인의 길을 걷다 못난 아비 때문에 신군부의 뒷조사를 받다 견디지 못하고 대위로 군문(軍門)을 떠났다. 그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그때 서빙고에는 김종필, 이후락(李厚洛)씨도 함께 연금되어 있었는데 나는 80년 7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5·18 광주항쟁 사건이 발생했음을 알게 되었다. 즉 5·17 비상계엄 확대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계산에서 나를 비롯한 정치인들을 감금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시국을 주물렀던 것이다. 그때 광주에는 전투교육사령부와 31사단이 있었음에도 진압군들을 별도로 준비, 광주로 들어가 우리 민족사에서 씻을 수 없는 천추의 한을 남겼다.

 

  

당시 보안사 대공과장은 5·18 당시의 정치인, 재야인사 등을 체포해 연금 등 공직에서 사퇴, 재산헌납을 강요했고, 광주민주화 운동의 인사와 학생들을 체포해 사법처리하는 등 그 횡포가 극심했다. 그 살벌하던 때에 정일권(丁一權) 전 국회의장은 나를 신라호텔로 불러 점심을 대접하며 “이 총장, 세상을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아요, 그러니 총알이 날아올 때는 엎드려 피하는 것이 상책이오”라고 위로해 주었다. 후배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씀씀이가 듬뿍 고여 있어 몇 번이고 속으로 눈물을 훔쳤다.

 

  

박 대통령은 5·16 혁명을 일으키면서 혁명에 선뜻 동조하지 않았던 당시 참모총장을 끝까지 혁명군의 대표로 옹립했다. 자신은 오히려 부(副)의 위치에서 군의 전통과 명예를 무너뜨리지 않고 위계질서를 끝까지 유지시켰다. 그리고 떳떳한 입장에서 혁명공약을 발표, 국민들에게 혁명의 당위성을 호소, 혁명을 역사의 바른 궤도로 진입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전두환씨와 그를 추종했던 신군부는 총장이며 계엄사령관을 무력으로 급습, 체포, 구금해 국권을 찬탈하는 게릴라식 방법으로 국권을 장악했다. 현재 광주에서 5·18 희생자들을 위한 제2의 국립묘지가 조성된 것은 누구 때문인가? 도대체 이렇게 엄청난 국가 변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전두환씨는 지금도 손톱만큼의 반성이나 뉘우침이 없다.

 

  

나와 악연일 수밖에 없는 전두환씨의 장인 되시는 고 이규동 장군은 나와 육사 동기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연장자(1911년생)이고 군 경력도 많다. 성품도 매우 인자하신 분이다. 그분은 그때 따님(이순자·李順子) 결혼 주례를 군사령관인 최영희 장군께 부탁했다.

 

  

따님의 신랑은 4년제 정규육사 졸업생인 전두환 대위였고, 우리 모두는 결혼식에 참석해 축하를 했었다. 사위와의 악연을 잘 알고 있던 이규동 장군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나를 초대해 점심을 사주셨다. 그때마다 그는 “이해하고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2001년 9월 이규동 장군이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전해들었다. 그때 나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분과의 관계라면 당연히 문상(問喪)을 해야 했지만, 그 자리에 가면 전두환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끔찍한 생각 때문에 나는 장례식에 불참했다. 그러곤 마음속으로 명복을 빌었다. 한편으로는 당시 나의 행동이 옹졸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과 후회가 밀려온다. 가슴 아픈 기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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