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양파다! 나는 옛이야기가 ‘양파’ 같다고 말하곤 한다. 거칠어 보이는 겉껍질 안에 하얀 속살이 들어 있다. 그 살을 벗기면 또 다른 속살이 나온다. 그리고 또 다른 속살이. 그 속살은 향긋한 맛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영양소가 가득하다. 이야기도 그렇다. 속살 안에 속살, 그리고 또 다른 속살. 겉보기로 알 수 없는 속살들이 겹겹이다. 그 속살은 재미와 의미로 가득하다. 양파를 양파이도록 하는 실체는 무엇일까? 겹겹의 속살 가운데 어느 하나만이 양파의 실체라고 할 수 없다. 속살 하나하나가 양파의 본질을 이루며 가치를 구성한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 가지 의미를 일컬어 이야기의 실체나 본질이라 말할 수 없다. 겹겹의 의미 요소들이 한데 어울려 이야기의 가치를 이룬다. 이렇게 말했더니 어떤 사람이 나한테 말했다. “양파의 속살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속살 가장 깊은 곳에 생장점이 있다. 그건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생장점이 없으면 양파는 생명력을 발현할 수 없다.” 말을 듣고 보니 그도 그러했다. 이야기에도 핵심적 생명력을 이루는 요소가 있다. 우리가 흔히 ‘원형’이라고 부르는 요소다. 원형적 요소가 제대로 살아나야 이야기가 본연의 힘을 낼 수 있다.
얼마 전에는 어떤 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양파의 겉껍질도 무시할 게 아니에요. 거기 영양가가 많다던데요.” 듣고 보니 그 또한 그러했다. 영양가가 있고 없음을 떠나서, 먹을 수 있는가 없는가를 떠나서, 겉껍질이 있으므로 그 안에 속살들이 깃든다. 붉고 거친 겉껍질 안에 희고 고운 속살이 있음으로 해서 양파는 더 아름답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거칠어 보이고 무미해 보일 수 있는 표면의 언술이 있음으로 해서 그 안에 다양한 의미 요소들이 오롯이 살아 움직일 수 있다.
이야기는 돌멩이다! 사마 광이라는 사람이 있다. 아마도 중국에서 꽤 유명한 사람인 듯하다. 중국 역사나 고사에 약한 나는 그가 어떤 일을 한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내 마음에 잊을 수 없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한문 교재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 편의 이야기 때문이다.
옛날에 한 무리의 아이들이 마을에서 놀고 있었다. 숨바꼭질을 하며 재미있게 노는데, 한 아이가 실수로 커다란 물독 속에 빠졌다. 독은 아이의 키보다 훨씬 큰데다 물이 가득 차 있어서 아이는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함께 놀던 친구들이 깜짝 놀라서 아이를 끌어당긴다, 어른을 모시러 간다 한창 법석을 떨 때였다. 한 아이가 큰 돌을 집어들더니 항아리를 힘껏 쳤다. 독이 깨지고 물이 빠지면서 친구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람들이 그 아이가 크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 아이가 사마 광이다.
저 급박한 위기의 순간에 돌을 들어 독을 깨뜨린다는 것, 그야말로 기지(奇智) 넘치는 일이다. 한 마디로, 틀을 깨는 창조적 사고! 듣고 나면 참 간단한 일이지만, 놓치기 쉬운 일이기도 하다. 그 간단한 길을 찾지 못한 채 당황하고 애달아하는 일이 어찌 많은지 모른다.
저 이야기는 ‘물독 밖에 있는 나’와 함께 하여금 ‘물독 속에 빠진 나’를 떠올린다. 깊은 물독에 빠져서 붙잡을 것 하나 없이 헤매는 상황. 버둥댈수록 몸은 빠져들고, 온몸의 힘은 빠진다. 어떻게 할 것인가. 독을 깨는 것이 답이다. 독을 깨기 위해서는 몸에 단단한 돌이 있어야 할 듯하다. 나에게는 ‘옛이야기’가 바로 그 돌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무기력과 불안, 좌절감에서 훌쩍 구해주곤 한다. 저 깊은 곳에서 우리를 일으켜주고 빛나게 하는 삶의 귀한 동반자, 옛이야기!
이야기는 운동이다! 나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특히 원형적인 옛이야기의 힘을. 좋은 이야기를 통해 얻은 깨달음은 순수하고 심오하며 강력하다. 그것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 새겨져서 몸을 바꾸고 삶을 바꾼다. 어느새 우리와 한 몸이 되어서 함께 움직여 나간다. 우리가 해야 하는 세 가지 운동이 있다. 무엇일까? 그 운동은 잠깐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해야 한다. 일찍 시작할수록 좋고, 꾸준히 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즐겁게 해야 한다. 나는 옛이야기를 하고 듣는 것이 최고로 즐겁고 효과적인 운동이라고 믿는다. (참고로, 운동은 보는 것보다 하는 것이 진짜다.)
□ 이야기와 더불어 살아가기 - 남도의 섬길에서 만난 바리데기
우리나라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수많은 신화가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도 ‘바리데기’라는 이름은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왜 바리데기인가 하면,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바로 자기를 낳은 부모한테서. 바리, 그는 공주였다. 한 나라 왕의 귀한 자식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자마자 버림을 받는다. 대를 이를 아들을 간절히 기다리던 왕은 일곱째 아이마저 딸로 태어나자 그를 깊은 산천에 내다버린다. 하늘의 도움으로 살아나 상처와 고독 속에서 자라난 바리는 버림받은 아픔을 원망으로 돌리는 대신 가없는 사랑으로 풀어낸다. 아버지가 죽을병에 걸려 누운 것을 알고 서천서역 저승길을 홀로 찾아가 생명수를 구해다가 아버지를 살려낸다. 그리고 신이 된다. 세상을 떠나는 영혼들의 죄와 한을 씻고 안식을 전해 주는 구원의 신이. 이 신화를 보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부모 없는 고아들. 특히 머나먼 나라로 입양되어 자라난 아들과 딸들은 이 시대의 바리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부모를 찾아서 이 땅으로 돌아오곤 한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부모를 원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품어 안기 위해서 온다는 사실이다. 저 바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바리데기는 한편으로 세상 모든 사람의 표상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누구라도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가져보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세상천지에 오로지 나 혼자뿐이라는 느낌. 그 순간 우리는 바리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 자신 외롭고 버림받은 느낌이 들 때면 바리를 떠올린다. 생명수를 찾아 먼 길을 휘적휘적 떠나던 그 모습을. 몇 년 전, 나는 홀로 남도 길을 흘러가고 있었다. 해남 고천암과 땅끝, 보길도와 청산도, 또 섬진강 꽃길을 거친 나의 발길은 남해도 섬길로 이어졌다. 찻길보다 샛길을 따르던 나의 발걸음은 문득 멈추어지곤 했다. 길은 가다가 갑자기 끊어졌고 길 위의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되곤 했다. 이번에 접어든 샛길은 꽤 넓고 훤했다. 건너편에 마을도 보였다. 그런데 끝에서 길이 흐지부지 사라졌다. 밭을 넘어서야 마을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때 마을에서 한 아낙이 나를 향해 소리를 쳤다. “거기 뭐예요? 길 없어요! 나가요!” 나는 당황했다. 밭둑으로 조금만 나아가면 마을인데 돌아 나가라니. 아무래도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우물거리며 걸음을 옮겨 마을로 들어서자 한 사내가 막아섰다. “우에 된 일입니꺼?” “네… 여행중인데 길을 잘못 들어서요……” “거기 길 아닙니더! 사유지라예!” “네, 죄송합니다. ……” 겨우 상황을 모면하고 마을 밖으로 걸어 나가는 나의 마음은 씁쓸했다. ‘참 냉정하기도 하구나. 소유에 구속되어 불행해진 사람들……’ 그때 갑자기 바리데기가 떠올랐다. 머나먼 서천서역 길을 걷던 바리가 만났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반갑게 다가가 길을 묻는 바리에게 두 사람은 어떻게 했던가.
“야야, 내가 너르나 너른 밭을 갈기도 바쁜데, 너한테 서천서역 길을 가르쳐줄 시간이 어디 있나.”
“내가 이 빨래를 하기도 바쁜데 언제 길을 가르쳐 주겠나. 빨래하기가 바빠서 못 가르쳐 준다.”
일이 바빠서 길을 안 가르쳐주겠다니 어찌 그리 냉정한지 모른다. 먼 길 흘러와 반갑게 다가오는 저 사람을 저렇게 딱 자르다니! 정이 뚝 떨어져서 돌아설 만한 상황이다. 그런데 그때 바리는 어떻게 했던가.
바리는 이렇게 기꺼이 다가가 쟁기를 손에 잡고 빨랫감을 집어 든다. 또 잠든 노파의 머리의 이를 잡아준다. 그러자 저 할아버지와 할머니, 언제 그리 냉정했었느냐는 듯 밝은 얼굴로 바리의 손을 잡아 주고 나아갈 길을 열어 준다. 숨기고 있었던 본 모습, 자애로운 신(神)으로 돌아와서. 만약에 바리였다면 마을의 아낙과 사내 앞에서 어떻게 했을까? 그는 필시 미소를 띠며 말을 걸었으리라. “밭이 참 넓고 좋네요. 나물도 많이 났어요! 밭에는 무얼 심으시나요? 이야, 집도 참 잘 지으셨어요.” 그러면 아낙과 사내의 엄한 표정은 어느새 기쁨과 자랑으로 바뀌어 아마도 이리 말했을 것이다. “어디서 왔습니꺼? 와 이리 힘들게 걷습니꺼? 들어가서 차라도 한 잔 하이소!” 바리는 나에게 말한다. 세상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내가 바뀌면 우주가 바뀌는 법이라고. 그래. 인생이라는 벅찬 여행길에서 만나게 될 갸륵한 인연들. 내가 먼저 나서서 손길을 내밀어야 하리라.
□ 옛이야기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옛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이야기’다.
소설은 이야기가 아니다!? 옛이야기, 또는 설화(說話)를 이해함에 있어 사람들이 범하는 가장 흔하고도 큰 오류는 옛이야기를 ‘이야기’가 아닌 ‘소설’처럼 다룬다고 하는 점이다. 옛이야기는 ‘소설(小說; novel)’이 아니다. 소설을 보듯이 옛이야기를 보고, 소설적 감각으로 옛이야기를 풀어내면 문제가 발생한다. 민담을 비롯한 옛이야기와의 새로운 만남은 ‘소설적 감각’을 버리고 ‘이야기 감각’을 키우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그렇다면 설화와 소설은 어떻게 다른가. 흔히 소설이 설화를 완성시켰다고들 말하는데, 내 생각은 이와 다르다. 설화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 전설은 전설대로, 민담은 민담대로 고유의 서사적 맥락과 의미를 온전하게 갖추고 있다. 나의 관점에 의하면 소설은 설화를 완성시킨 양식이 아니라 설화를 ‘넘어선’ 양식이다. 소설은 이야기이지만 좀 특수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소설의 중심축이 아니다. 한 요소일 뿐이다. 소설에서는 많은 경우 스토리보다 ‘디테일’이 더 중요하다. 소설에서는 서사적 요소와 서정적 요소, 극적인 요소, 교술적인 요소가 복합되는 가운데 세상살이를 촘촘하고 리얼하게 반영한다. 리얼리티는 소설의 핵심 요소가 된다(환상적 리얼리티까지 포함해서). 소설과 달리 설화(옛이야기)는 ‘이야기’에 충실한 양식이다. ‘스토리’를 통해 재미와 의미를 발현한다. 스토리의 맥락과 상징, 의미구조를 잘 짚어내는 것이 설화를 잘 이해하는 길이며, 스토리를 재미있고 의미있게 잘 엮어내고 형상화하는 것이 곧 설화를 설화답게 풀어내는 길이 된다. 설화의 길과 소설의 길이 혼동되어 착종될 때, 그 결과는 설화도 소설도 아닌 어중간한 무엇이 되기 쉽다. 재미도 의미도 찾기 어려운 그 어떤 것. 예 : 아마추어의 습작 소설. 김동인이 정리한 야담들. 북한이나 연변의 설화집들. 그리고 어린이문학 작가들의 수많은 ‘전래동화’들!
설화의 길과 소설의 길
설화에 있어 스토리는 핵심적 요소가 된다. 스토리가 새롭고 견고하며 역동적이어야 한다. 스토리 속에 흡인력과 감발력이 내재해 있어야 한다. 그러한 힘이 살아나지 않을 때, 설화는 그 문학적 소임을 다하기 어렵다. 그러한 설화는 금세 외면되어 사라지기 마련이다. 어떠한 스토리가 힘을 가진 좋은 스토리인가. 원형적 상징성 내지 전형적 표상성을 지닌 스토리, 다방면으로 의미가 열려 있는 다층적이고 함축적인 스토리, 상상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주는 독창적인 스토리가 좋은 스토리이며, 앞뒤가 잘 들어맞는 안정되고 견고한 스토리, 반전과 비약의 포인트가 살아있는 역동적인 스토리가 효과적인 스토리라 할 수 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살아남은 옛이야기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와 같은 요건을 갖추고 있다 설화가 스토리 자체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스토리는 문학적으로 표현됨으로써, 형상적으로 육화됨으로써 그 힘을 실현하게 된다. 스토리 뼈대만을 건조하게 전달해서는 재미와 공감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특히 민담을 전함에 있어서는 실감나는 상황적 표현을 통해 이야기 맛을 살리는 것이 긴요한 요건이 된다. 관건은 그 형상화 작업이 스토리를 제대로 살리는 방향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스토리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단절되거나 이야기의 앞뒤 연결에 모순이 생겨서는 안 되며, 스토리가 촉발하는 자유로운 상상의 즐거움을 제한하거나 다방면으로 열린 스토리의 의미를 닫는 현상을 초래해서는 곤란하다. 설화는 본래 자유로운 상상의 여지를 열어놓은 열린 담화로서의 특성을 지닌다. 스토리의 핵심 줄기를 인상적으로 짚어 주면 나머지 부분은 수용자가 자기 식으로 재미와 의미를 되새기는 형태로 문학적 체험과 수용이 이루어진다. 설화의 형상화에 있어 각각의 서사 장면을 눈앞에서 펼쳐지듯 완벽하고 리얼하게 재현할 의무는 없다. 예컨대 <우렁각시>에 있어 총각과 각시의 만남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가> 총각이 한참 땅을 파는데 한심한 생각이 들어. 그래 한숨을 푸욱 쉬면서 “이 농사 지어봐야 누구랑 먹나?” 했거든. 그랬더니, 어디서 “나랑 먹고 살지” 하는 소리가 나네. 아니 이게 웬 소린가 하고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어. ‘허허, 내가 잘못 들었나?’ 또 땅을 파지. 파다가, “이 농사 지어서 누구랑 먹나?” 했더니, “나랑 먹고 살지!” 또 그러네. 살펴봐도 아무도 없고. ‘내가 귀신에 홀렸나?’ 또 땅을 파면서 “이 농사 지어서 누구랑 먹나?” 그러고는 귀를 쫑긋 세우고서 신경을 써서 살폈어. 아니나 다를까 “나랑 먹고 살지!” 하는데, 소리 난 곳을 유심히 살펴보니까 다른 건 없고 커다란 우렁 하나가 있는 거야.
얼핏 보면 소설적 묘사가 된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위의 상황묘사는 외로운 총각과 말하는 우렁이의 신기하고 놀라운 만남이라는 스토리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을 따름이다. 설화의 관습 가운데 하나인 ‘삼세번’의 규칙을 적용해서. 설화의 길을 따른 형상화다. 만약 이것을 소설식으로 풀어낸다면 어떻게 될까?
<나> 어느새 때는 저녁 무렵이 되어 서쪽 하늘엔 석양이 지고 있었다. 오늘 일구어야 할 김참봉네 논사래는 아직도 창창하게 남았는데 팔다리에는 힘은 점점 빠져만 갔다. 고개를 들어 석양을 바라보니 낯선 새 한 마리가 끼욱거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자기 신세를 생각하니 석봉이는 절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돼서 나이 서른 둘이 되도록 연애 한번 못해본 거지? 사람이 살아서 겪어보는 제일 좋은 일이 사랑이라는데 나한테는 그런 복 하나도 없단 말인가? 이렇게 힘들여 남의 땅에다가 농사를 지어봐야 무엇해? 다 쓸데없는 일이지!’ 긴 한숨을 내쉬던 석봉은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넋두리를 내뱉었다. “다 쓸데없어. 쓸데없다구! 이 농사 이렇게 죽도록 지어봐야 누구하고 먹느냔 말이야!” 그때였다. 어디선가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온 것 같았다. “나하고 먹고 살지요.” 순간 석봉은 귀를 의심했다. 손을 눈 위에 얹고서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사람은커녕 움직이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멀리 쓸쓸한 저녁 바람 소리가 휘이잉 울고 갈 따름이었다. 석봉은 긴장을 풀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 참, 살다 보니 별일을 다 겪는군. 이런 헛소리를 다 듣다니 말이야. 에잇, 그것 참!’ 석봉은 잠시 지팡이처럼 짚고 서 있던 괭이를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려서 힘껏 땅을 내리 찍었다.
작중의 상황을 이렇듯 눈에 보이듯 세세하게 재현해 나가는 것, 그를 통해 독자를 그 상황 속에 이끌어들여 함께 움직여가게 하는 것이 소설의 길이다. 사건의 흐름 외에 인물이나 배경 또한 그 모습이 육박해 오도록 구체적으로 재현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독자들이 작중인물과 함께 움직여 나가면서 그가 겪는 인생 상황을, 예컨대 석봉의 고독이나 생활고 같은 것을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 둘을 비교하면, <나>의 표현이 <가>에 비해 더 상세하고 치밀하지만, <가>보다 <나>가 더 품격이 높다는 평가는 성립되지 않는다. <가>는 그것대로 충분히 재미있으며, 부족함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우렁각시의 스토리는 <나>보다 <가>와 같이 형상화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면이 있다. 이 이야기의 스토리는 상상적 재미와 생동성을 특성으로 하는 것인데 그것을 소설적으로 장면화하여 표현한 결과 서사의 맥락이 흐트러지며 생기와 재미가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로, <나>에 있어 <가>와 달리 상상력과 의미의 제한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상황이 훨씬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실감나게 장면을 떠올릴 수 있지만, 그렇게 펼쳐나간 상상이란 ‘서술자가 판단하고 규정하여 이끈 상상’이다. 주인공 총각(석봉)은 ‘남의 집 땅을 일구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농민’이며,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젊은이’이다. 그가 땅을 일구는 행위란 생존을 위한 마지못한 몸짓에 해당한다. 이렇게 인물의 성격과 행위가 구체적으로 설정되면서, 형상은 하나의 방향으로 정해지고 다른 상상의 가능성은 닫힌다. 이야기의 길을 따른 <가>에 있어 인물과 사건의 의미는 활짝 열려 있다. <가>의 총각은 나이가 스무 살일 수도 서른 살일 수도 있고, 성격이 세심할 수도 대범할 수도 있으며, 지금 기분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그에 대한 상상과 판단은 전승자들의 몫으로 맡겨진다. 사람들은 그러한 가능성이 두루 열려있는 상태에서 편안하게 스토리와 소통하고 교감한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 빈 공간을 채워 보며 재미를 찾고 의미를 찾는다. 모름지기 스무 살 총각은 이야기 주인공을 스물 또래로, 서른 살 총각은 서른 또래로 떠올릴 것이다. 기분에 따라 총각의 모습을 우울하게도 즐겁게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면, 어릴 적에는 즐겁고 재미있게만 받아들였던 상황을 나이가 들어서는 힘들고 슬픈 상황으로 새롭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인상적인 스토리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서 유동적으로 운동하는 가운데 다양한 방식으로 상상되고 음미되면서 의미를 실현하는 것이 설화의 문학적 존재방식이다. 설화가 갖는 개방성이고 보편성이다. 위의 <우렁각시>처럼 원형적 상징성과 함축성을 지닌 스토리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실현되는 것이 제격이다. 요즘 전래동화에서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보기 어려운 듯하다. 이야기를 소설식으로 윤색한 결과 재미와 의미를 함께 잃은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소설식 형상화가 더 우월한 것이라고 하는 착각 때문. 또 하나는 자기도 모르게 소설적 감각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 후자를 극복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된다. 이야기다운 이야기. 곧 아이들이 아이들 식으로 마음껏 상상하게 하며, 그 상상 속에서 진짜 재미와 의미를 깨닫게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이들한테 많이 주어져야 한다. 아이들이 음미하고 또 음미하면서 자연스럽게 ‘삶의 이야기’로 삼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러한 이야기를 어떻게 찾아내고 풀어낼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나의 답은 명료하다. 옛이야기를 자꾸 접해야 한다. 어설프게 가공되거나 윤색되지 않은 원형적인 진짜 옛이야기들을!
□ 옛이야기와 화소(話素)
이야기의 기본 원리 이야기(서사; 스토리)를 이루는 기본 요소는 ‘사건’이다. 행위에 따른 상황의 변동이 사건 성립의 기본 요소가 된다. 그 사건은 또 다른 요소를 수반하게 되어 있다. ‘누구’에 의해서 ‘언제 어디서’ 이루어진 사건인가의 문제다. 흔히 말하는 ‘인물’과 ‘배경’이다. 이들이 사건과 더불어 이야기의 기본 요소가 된다. 정리하면, 일정한 배경 속에서 특정 인물(주체)에 의해 펼쳐지는 모종의 사건을 풀어내는 담화가 이야기(서사;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물과 배경이 설정되고 사건이 펼쳐지면 곧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지나치게 단순하거나 일상적이어서는 이야기가 성립될 수 없다. 펼쳐지는 사건에, 또는 인물이나 배경에 무언가 특별한 자질이 있어야만 이야기로서의 의의를 발현할 수 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죽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앞으로도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 이 세상을 살게 될 것이다.
위의 담화에는 인물과 배경, 사건이 없지 않다. 이 세상이라는 넓은 공간과, 한둘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라는 행위 주체가 있으며, 사람이 태어나서 삶을 영위하다가 죽는다고 하는 크나큰 일이 담겨 있다. 하지만 위의 담화는 이야기가 될 수 없다. 그 내용이 지나치게 일반적이고 평범하여 특별한 점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언술을 이야기(스토리)로 살아나게 하는 특별한 자질이란 어떤 것일까. 쉽게 말하면 거기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낯섦’이 있어야 한다. 그를 통해 사람들의 정서적 반응을, 재미와 긴장, 감동과 놀라움 같은 것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특별함’은 인물과 사건, 배경 등의 제 요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설정될 수 있다. 예컨대 ‘세상에 사람이 살다/죽다’라는 평범한 언술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특별한 언술이 될 수 있다.
․ 마법사가 살다 ․ 무인도에서 살다 ․ 죽었다가 살아나다
위 언술들은 아주 단순한 것이지만, 특별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 마법사의 존재는 그 자체로 관심과 놀라움의 대상이 되면서 이어질 사건을 기대하게 한다. 누군가가 무인도에 산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어떻게 생존하면서 어떤 행동 양태를 보일 것인가에 대한 관심과 상상을 촉발한다. 누군가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도 그러하다. 어떻게 살아난 것일까, 죽었을 때 어떠했을까 하는 등의 호기심을 일으키며 사람들의 마음을 이끈다. 이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하여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는 서사 요소들을 일컬어서 화소(話素; motif)라 한다. 이러한 화소들이 서로 연결됨으로써 이야기가 성립되게 된다. 다음과 같은 식이다.
옛날 어느 나라에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마법사가 있었다. 그 힘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천신만고 끝에 그 마법사를 절해고도 무인도에 유폐시키는 데 성공했다. 마법사는 무인도를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다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위협이 사라졌다고 안도했으나, 오산이었다. 마법사는 죽음의 세계에서 악의 힘의 단련을 받으며 더 무서운 존재로 거듭났다. 그가 자신을 쫓아낸 나라에 나타난 순간, 세상에 잿빛 어둠이 내렸다. ……
옛이야기와 화소 옛이야기 연구에서 사용하는 기본 개념으로 유형(類型; type)과 각편(各篇; version), 화소(話素; motif)가 있다. 그 개념을 잠깐 짚고 넘어간다. ‘유형’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전승적인 이야기라고 규정된다. 사람들이 서로 ‘같은 이야기’라고 인식하는 여러 이야기들이 곧 하나의 설화유형이 된다. 유형의 경계는 길이나 짜임새와는 상관이 없어서, 이야기가 아무리 단순하거나 복잡해도 하나의 이야기로서의 독립성을 가지면 유형으로 인정된다. 같은 유형에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그 구체적인 내용과 표현은 화자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 하나하나의 이야기는 서로 같으면서도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인데, 기록문학의 ‘이본(異本)’에 해당하는 그 하나하나의 구체적 이야기를 일컬어 ‘각편’이라고 한다. 하나의 설화유형에 각편은 무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화소’는 이야기를 성립시키는 특징적인 이야기 요소를 일컫는 말이다. 사람은 화소가 될 수 없으나 `혹부리 영감'은 특이하고 인상적이니 화소이다. 결혼은 화소가 될 수 없으나 ‘사람과 짐승의 결혼’은 같은 이유에서 화소가 될 수 있다. 화소는 어떤 물건(부자방망이)일 수도 있고 행위자(잔인한 계모)일 수도 있고 행위(보지 말라고 하는 것을 보다)일 수도 있으며, 행위가 일어나는 장소(용궁)일 수도 있다. 화소들이 서로 연결됨으로써 유형이 성립된다. 간단한 유형은 하나의 화소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으나, 복잡한 이야기유형은 수많은 화소를 포함한다. 화소는 특이하고 인상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쉽사리 파괴되지 않고 용이하게 기억되며 독립적인 생명을 지니기에 같은 화소가 서로 다른 유형에서 나타날 수 있다. 세계 설화의 다양한 화소는 톰슨(Stith Thompson)에 의해 방대한 『화소색인』(Motif Index of Folk Literature)』으로 정리된 바 있다. 톰슨이 정리한 화소 색인. 꼭 한번 열어서 살펴보자! 그야말로 설화적 상상력의 무궁무진한 보고(寶庫)다. http://www.ruthenia.ru/folklore/thompson/index.htm
화소 분석의 사례
어떤 노부부가 아들을 낳았는데 뱀이었다. 뱀아들은 나이가 차니 김 정승의 딸에게 장가를 들고 싶다고 했다. 김 정승이 딸에게 의사를 물어 보니 첫째딸과 둘째딸은 거절했으나 세째딸은 아버지의 뜻이면 따르겠다고 했다. 혼인하던 날 뱀서방은 허물을 벗고 잘 생긴 선비가 되었는데 이를 알고 신부의 두 언니는 질투를 했다. 남편은 뱀 허물을 아내에게 주면서 잘 보관할 것이며 만약 없애면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며 집을 떠났다. 이 비밀을 안 두 언니는 뱀 허물을 훔쳐다 몰래 태웠다. 아내는 남편을 찾아 떠나 바위 속의 세계로 들어갔다. 남편과 아내는 노래를 주고받다가 만났다. 만나 보니 남편에게는 딴 부인이 있었다. 남편은 몇 가지 시험을 해서 무난히 통과하는 사람을 진짜 아내로 삼겠다고 했는데 찾아간 아내만 시험에 통과했다.
<뱀서방>이나 <구렁덩덩신선비>로 불리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 담긴 화소는 다음과 같이 분석될 수 있다.
*뱀아들 : D.마술 Magic / D.0-699 변신 Transformation / D.300-399 animal to person / D.310-349 animal to person / D.390 reptiles and miscellaneous animals to person / D.391 serpent(snake) to person. *사람과 뱀의 혼인 : B. 동물 Animals / B.600-699사람과 동물의 혼인 Marriage of person to animal / B.640 Marriage to person in animal form / B.646 Marriage to person in snake form. *아버지가 뱀과 혼인하게 하다 : S.자연스럽지 않은 잔인성 unnatural cruelty / S.200-299 cruel sacrifices / S.240 Children unwittingly promised / S.240.1 부모로 인해서 괴물과 혼인하게 된 처녀 Girl promised unwittingly by ger parents to orge* *세째가 결혼하고, 언니들은 시기하게 되었다 : L.행운의 뒤바뀜 Reversal of Fortune / L.0-99 Victorious youngest child / L.54 Compassionate youngest daughter / L.54.1 막내딸이 괴물과 혼인하기로 했고, 언니들이 나중에 시기했다. Youngest daughter agrees to marry a monster:later the sisters are jealous. *뱀 허물을 보존하지 못했다 : C. 금기 Tabu / C.700-899 Miscellaneous tabus / C.750 Time tabus / C.757 동물의 허물을 파괴해 금기를 어겼다. Tabu:doing thing too soon / C.757.1 Tabu: destroying animal skin of enchanted person too soon. *언니들이 비밀을 알았다 : C. 금기 / C.400-499 speaking tabu / C.420 Tabu: uttering secrets / C.421 초인적인 남편의 비밀이 탄로나다. Revealing secret of supernatural husband. *뱀 허물을 잃어 남편을 잃었다 : C. 금기 / 900-999 Punishment for breaking tabu / C.930 Loss of fortune for breaking tabu / C.932 금기를 어겨서 남편을 잃었다. Loss of husband for breaking tabu. *남편을 찾아가다 : H. 시험 Tests / H.1200-1399 Tests of prowess:quests / H.1250-1399 Nature of quests / H.1370 Miscellaneous quests / H.1385 Quest for lost person / H.1385.4 잃어버린 남편을 찾다. Quest for vanished husband. *바위 속의 세계로 들어가다 : F. 경이 Marvels / F.0-199 딴 세계로의 여행 / F.100-199 Miscellaneous world / F.130 Location of otherworld / F.131 Otherworld in hollow mountain.* *잃은 아내와 만나다 : D. 마술 / D.1800-2199 Manifestations of magic power / D.1950-2049 Tem porary magic characteristics / D.2000 Magic forgetfulness / D.2003 잃어버린 연인 Forgotten fianc?e* *남편에게는 딴 아내가 있었다 : N. 기회와 행운 Chance and Fate / N.400-699 Lucky accidents / N600-699 Other lucky accidnts / N.680 Lucky accidents miscellaneous / N.681 Husband (Lover) arrives home Just as wife(mistress) is to marry / N.681.1 다른 사람과 결혼하려는 잃어버린 남편을 아내가 찾았다. Wife finds lost husband just as he is to marry another.* *시험에서 이기면 진짜 아내로 삼겠다 : H. 시험 / H.300-499 혼인의 시험 Marriage Tests / H.460 wife tests.
옛이야기의 화소 하나하나는 상징과 비의(秘義)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십중팔구 우리가 막연히 상상하고 기대하는 것 이상이다. 화소의 상징을 핵심적으로 짚어내는 것만으로도 옛이야기에 대한 깊은 이해에 다다를 수 있다.
※ 옛이야기의 화소와 상징, 몇 가지 예 : 화수분 / 짐승 말 알아듣기 / 호랑이 눈썹 / 마법의 거울 / 거인 / 마녀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옛이야기의 화소를 소설적 상상력으로 읽어서 ‘리얼리티’로 풀어내지 말아야 한다. 그리 하면 옛이야기는 흉측한 ‘괴물’이 되고 만다. 그 대표적인 예 : 기류 마사오,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1-3.
□ 옛이야기가 삶을 비춰주고 변화시킨다?!
문학치료학이라는 학문
․ 문학치료학의 치료 대상 문학으로 사람을 치료한다. (△) 문학을 치료한다. (○)
․ 자기서사 : 나의 삶을 움직이는 우리 안의 서사. 나의 문학. 자기서사를 깨닫는 데서 변화는 시작된다. 자기서사가 바뀌면 삶이 바뀐다.
<그림 1> 자기서사 작품서사 인생살이 작 품 ㉠ ㉡
㉠ 외면, 텍스트 ㉡ 내면, 서사
자기서사 작품서사 인생살이 작 품 ㉠ ㉡ ㉤ ㉢ ㉣
<그림 2>
㉠ 자기서사에 의한 인생살이 설계 및 운영. ㉡ 인생살이의 돌발요소에 의한 자기서사의 조정. ㉢ 자기서사에 의한 작품서사의 구성. ㉣ 작품서사에 의한 자기서사의 조정. ㉤ 작품서사에 의한 작품의 창작 및 해석.
자기서사의 사례
․한 여학생의 ‘여우구슬’ 이야기 ․그 딸은 어떻게 ‘여우누이’가 되었는가 ․상사병을 앓다 죽으면 무엇이 될까? ․엄마를 잡아먹은 호랑이의 정체는? ․왕자를 무쇠 난로에 가둔 늙은 마녀의 정체는? ․영리한 엘제, 영리하다고 칭송받던 그 아이의 미래는?
* 옛이야기는 존재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내는 거울이다(영혼의 엑스레이!). 스스로 제 자신을 비춰볼 수도 있으며, 타자를 비춰볼 수도 있다. 의식적으로 풀어낼 수도 있고, 무의식중에 느끼고 변화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은 몸과 마음에 대하여 왜 그렇게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인지…….)
병든 서사에서 건강한 서사로 - <여우 누이>와 <열두 오빠> 사이
먼 옛날 한 마을에 부자가 아들 셋을 낳고 살았는데 딸이 없는 게 한이었다. 여우라도 좋으니 딸을 하나 얻어서 키우는 것이 큰 소원이었다. 어느 날 그 소원이 이루어져서 그 집에 딸이 태어났다. 사람이 아닌 여우가. 어느 날부터인가 집에 변고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닭이나, 소, 말이 차례로 내장을 앗긴 채 죽어나갔다. 큰 아들 둘째 아들이 밤에 기색을 살폈으나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막내아들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핀 끝에 그것이 다 누이동생이 벌이는 일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집에서 내쫓았다. 집에서 쫓겨난 막내아들은 한 여인의 도움을 받고 짝을 이루어 살다가 아내의 만류를 무릅쓰고 본가를 찾아갔다. 부모와 형들은 다 죽고 집은 흉흉한 폐가가 되어 있었다. 누이가 오빠를 발견하더니 살기를 띠고 다가왔다. 오빠가 도망을 치자 여우 누이가 무서운 속도로 쫓아왔다. 오빠는 붙잡힐 뻔할 때마다 아내한테 받은 병을 던져서 위기를 모면했다. 끝까지 오빠를 추격하던 여우누이는 마지막 병에 맞고서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여우 누이>는 아마도 한국의 가장 무서운 옛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짐승의 몸속에 손을 집어넣어서 간을 빼먹는 어린 누이. 짐승으로 모자라 부모와 형들의 간을 다 꺼내 먹고서 나를 향해 손길을 뻗쳐 온다. “오빠, 어디 가? 이리 와!” …… 완전한 악몽의 한 장면이다. 예쁜 누이인 줄 알았더니 무서운 여우였던 저 아이, 그의 존재적 실체는 무엇일까? 많은 이야기들이 문면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이 아닌 여우가 누이로 둔갑해서 가족들을 속인 것일까? 하긴, 여우의 재주라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저 여우 누이에 대해 이와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저 누이가 본래부터 여우였던 것이 아니라 본래 사람이었는데 여우가 된 것이라 여기고 있다. 누구에 의해서인가 하면 그 부모에 의해서. 여우라도 좋으니 딸이 있으면 좋겠다던 저 아버지, 딸을 여우로 키운 것이었다. 딸을 편애했던 저 아버지는 보나마나 딸이 바라는 것을 뭐든지 다 해줬을 것이다. “그래 그래, 아이고 이쁜 것!” 하면서. 사랑을 독차지하는 가운데 원하는 것은 다 제 것으로 삼을 수 있었을 저 아이, 어느새 남의 간을 빼먹는 존재가 된다. 자기를 위해 남을 죽이는 존재가 된다. 아마도, 제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도 아득히 모르는 상태에서. “아빠, 나 저거 가질래!” …… “오빠, 그거 나 줘! 그 간.” ……. 어느새 완전한 여우가 된 저 누이, 막을 수 없다. 그대로 있다가는 속절없는 죽음이다. 내 소중한 것을 다 빼앗기고 속이 텅 빈 채로 쓰러져야 한다. 도망해야 하며, 쓰러뜨려 죽여야 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다. 이야기 속의 막내아들은 천신만고 끝에 여우누이를 물리치거니와, 끝까지 악령처럼 따라붙는 저 여우 누이의 모습에서 우리는 편애에 길들여진 존재가 얼마나 무섭고 위험천만한 것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유럽의 대표 민담집인 『그림형제의 민담집』에는 우리 설화와 맥락이 통하는 이야기들이 무척 많다. 그 중 한 이야기에서 ‘여우누이’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인물이 눈에 쏙 들어왔다. ‘천사 누이’라고 일컬을 만한 그 아이는 <열두 오빠>의 주인공이다.
옛날에 어떤 왕과 왕비가 열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딸이 태어나기만 하면 왕자들을 다 죽이고 온 왕국을 공주가 갖도록 하겠다면서 열두 개의 관까지 만들어놓았다. 열세번째 아이가 태어나는 날, 왕비는 나무 위에 숨은 아이들에게 붉은 깃발로 위기가 닥쳤음을 알렸다. 열두 왕자는 누이동생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하면서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새로 태어난 공주는 착하고 예뻤다. 그 이마에는 황금별이 박혀 있었다. 어느 날 공주는 빨랫감 속에서 열두 벌의 남자 속옷을 발견하고 누구 것인지 물었다. 왕비가 열두 개의 관을 보여주며 왕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자 공주는 오빠들을 찾아 숲속으로 들어갔다. 숲속을 헤매던 공주는 어느 마법에 걸린 집에서 열두 오빠를 찾아냈다. 누이를 죽이려고 마음먹었었던 오빠들은 어여쁜 동생을 보자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느 날 동생은 오빠들에게 주려고 정원에 피어 있는 열두 송이 백합꽃을 꺾었다. 그러자 오빠들은 열두 마리 까마귀로 변해 하늘로 날아가고, 집과 정원은 다 사라져 버렸다. 놀라서 방황하는 공주에게 한 노파가 다가와 7년 동안 벙어리가 되어 말을 안 하고 웃지 않아야만 오빠들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말을 하거나 웃으면 오빠들이 죽을 거라고 했다. 공주는 그 날부터 입을 꾹 닫은 채 나무 위에 앉아 실을 잣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 나라 왕이 사냥을 왔다가 공주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져 아내로 삼았다. 결혼식을 거행하고 함께 살면서도 왕비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았다. 그러자 왕의 노모가 왕비를 모함해서 끝내는 화형대에 묶이게 만들었다. 왕비의 몸에 막 불이 붙으려는 순간 예정된 7년의 기한이 찼다. 하늘에서 열두 마리 까마귀가 날아오더니 사람으로 변해 불을 끄고 누이동생을 구해주었다. 왕비는 왕에게 그간의 사연을 말해주고 오해를 풀었다. 이후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다.
말 그대로 완전한 ‘천사 누이’이다. 오빠들을 살리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내고자 한 갸륵한 누이동생. 오빠들의 간을 빼먹으려고 손을 내미는 여우 누이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들은 그 출발점이 서로 같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 핵심 요소는 바로 ‘편애’이다. <여우누이>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 이야기 속의 아버지도 자식을 편애한다. 아들이 아닌 ‘예쁜 딸’을. 그가 열두 아들을 담을 관을 만들었다는 것은 진작부터 자기의 모든 사랑을 딸에게 몰아줄 준비를 했다는 말이다. <열두 오빠>는 누이동생이 태어나자 열두 오빠가 종적을 감추었다고 말한다. 나는 이를 그들의 존재가 무화된 상황으로 이해한다. 저들은 아버지의 안중에서 사라진 채 버려진 존재가 되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버려진 마음속에 무엇이 깃드는가 하면 분노와 복수심이 깃든다. 그 분노는 무서운 권력자인 아버지 대신 어린 경쟁자인 누이에게로 향한다. 편애의 피해자가 나타내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이다. 저 공주는 열 살이 되도록 오빠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이 또한 서사적 상징으로 이해한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저 딸은, 이마에 황금별이 떡하니 박혀 있는 저 딸은 옆에 오빠들이 있으면서도 없는 것을, 그림자처럼 죽은 듯이 존재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우가 되어 가고 있던 저 공주. 만약 거기서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나아갔다면 십중팔구 무서운 요괴가 되어 오빠들의 간을 빼먹었을 것이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런데 저 소녀는 문득 깨달았던 것이었다. 오빠들이 분노에 휩싸인 채로 어둠 속에서 자기를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오누이를 보면서 어머니가 슬피 울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그릇된 일이었고, 극복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저 갸륵한 누이는 그 상황에 안주하는 대신 오빠들을 되찾아서 살리는 길로 나선다. 서사의 분기점에서 그녀는 여우 누이와 다른 험로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 되찾음과 손잡음의 길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누이가 먼저 나서서 손을 내밀자 오빠들은 분노를 내려놓지만, 그건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일이었다. 그곳은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폭발할 수 있는, ‘마법에 걸린 집’이었다. 비유하자면, 지뢰 밭. 누이가 오빠들을 위한다면서 백합꽃을 꺾은 것은 지뢰를 건드린 상황에 해당한다. 나는 그 백합을 오빠들이 힘들게 지켜온 자존감 같은 것을 상징하는 존재로 이해한다. 저 동생은 무심코 그 자존감을 꺾었다는 것이다. “내가 오빠들 행복하게 해줄게.” 하면서 보호자이고 시혜자인 양 화려하게 나서는 순간, 오빠들은 빛을 잃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표상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까마귀’다. 분노도 잃고 자존감도 잃은 채 동생 앞에서 보잘것없어진 순간 저들은 까마귀로 귀착되었다는 말이다. 까마귀를 다시 사람으로 되돌리기 위해 주어지는 과제가 무엇인가 하면 ‘절대 말하지도 말고 웃지도 않으면서 7년을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제가 상처받은 형제들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낮추고 죽여서 몸을 바꾸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화소라고 이해하고 있다. 나서서 주장하기[말]를 당연시하고, 혜택을 누리며 즐기기[웃음]을 당연시하는 삶으로부터의 도피다. 그 도피에 성공해야만 편애의 시혜자와 피해자 사이의 심연이 메꿔질 수 있다. 서로 나란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공주의 이마에 박힌 황금별이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 까마귀들은 사람으로 돌아와 저 누이와 손을 잡을 수 있다. 7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아무 말도 않고 한 번도 웃지 말아야 한다는 것. 한 존재의 몸 바꿈이란 이렇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저 갸륵한 어린 소녀, 그 어려운 일을 기어코 해내고 만다. 그것은 죽음의 문턱을 넘는 일과 같았지만, 사실은 절벽 끝에서 삶을 길어내는 일이었다. 오빠들의 삶을. 그리고 자기의 진짜 삶을. 부모가 저질러놓은 부조리를 자식이 감당하여 풀어낸다는 것. 특히 사랑과 혜택을 받은 당사자가 그것을 다 내려놓고 어둠을 빛으로 바꾼다는 것. 아름답다. 가슴이 뭉클하도록. 세상은 그렇게 바뀌는 법이니, ‘여우누이’의 길을 ‘천사누이’의 길로 바꾸는 존재적 결단을 통해 한 개인의 삶이 바뀌고, 나아가 이 세상 이 우주가 바뀌게 되는 것이었다. 저 천사 누이의 모습에서 톨스토이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의 원형적 형상을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 『삶을 일깨우는 옛이야기의 힘』, 나의 자기 서사 이야기
나의 과거와 현재를 비춰주는 이야기들
․고갯마루에서 돌이 되어 버린 장자 며느리의 서사. ․하늘이 내린 장수를 죽인 부모, 또는 이웃의 서사. ․“이건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야!” ... 신립의 서사. ․손님이 오지 않도록 하려고 혈을 끊었던 부자의 서사. ․번듯한 외양, 그러나... ‘구렁이각시(지네각시)’의 서사. ․자식보다 아내보다 자기 욕망이 먼저였던 저 사람, ‘칠성님’의 서사 - ‘용예부인’을 찾아 짐승의 모습으로 황토섬을 헤매는 ‘안심국’의 서사. 등등 - 자식이 뜻에 맞지 않으면 내다버릴 당금애기 아버지의 서사. ․선녀나 우렁각시가 분에 넘치는 ‘찌질한’ 나무꾼과 우렁남편의 서사
내가 나아갈 길을 밝혀주는 이야기들
․고갯마루를 넘어선 그들, 웅녀와 바리데기의 서사. ․민담형 인물, 또는 행동파. 복 타러 간 머슴과 막동이의 서사. ․휴머니스트! 이순신의 서사. ․구렁이에게 ‘인참’을 전한 선비의 서사. - 순수의 표상, 이무기를 용으로 부른 ‘어린아이’의 서사. -호랑이에게 손을 내민 나무꾼의 서사. ․도량 넓은 남편, 도량 넓은 아내의 서사. - 돈 천 냥을 내던진 소년과 홍순언의 서사. ․걱정 없는 늙은이, 또는 우주의 열린 주인공 ‘무수옹’의 서사. 등등
□ 옛이야기, 미래의 주인공을 위한 송가
바이칼, 그리고 앙가라 2008년 6월,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와 바이칼 호수를 방문한 기억이 생생하다. 바이칼의 풍광은 눈과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 이야기들이 있었다. 샤먼이 들려주는 서사시가 있었고, 시베리아 유형에 얽힌 역사가 있었으며, 바이칼 대자연에 얽힌 전설들이 있었다.
바이칼 왕에게는 삼백여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었다. 딸의 이름은 앙가라였다. 바이칼은 앙가라를 애지중지 사랑했다. 바이칼은 딸이 이르쿠츠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앙가라의 마음은 딴 데 있었다. 예니세이라는 청년을 사랑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앙가라는 바이칼의 눈을 피해 집을 나와 예니세이를 찾아 도망 길을 나섰다. 그 사실을 안 바이칼은 격노했다. 그는 달아나고 있는 딸을 향해 커다란 바위를 집어던졌다. 그 바위는 딸에게 명중하여 앙가라는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하지만 예니세이를 향한 앙가라의 마음은 죽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앙가라는 죽은 채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흐르고 또 흘러 강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예니세이한테로 가 닿았다. 이때부터 앙가라강은 예니세이강과 합쳐지게 되었다. 다른 모든 강물이 바이칼 호수로 흘러드는 데 비해, 앙가라강은 유일하게 바이칼로부터 흘러나간다.
바이칼, 그는 세상에서 제일 딸을 사랑한 아버지라 했다. 그는 딸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완전한 비극이었다. 딸은 그 사랑을 배반하고 짓밟는다. 누구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저 멀리로 도망을 간다. 바위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그 눈물은 아버지가 아닌 반대쪽을 향한다. 누군지도 잘 모르는 헛된 희망 예니세이를 향한다. 그때 저 아버지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하지만 나는 저 딸이 아버지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구원한 것이라고 믿는다. 왜 구원인가. 중앙아시아-시베리아 지도를 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 .... 만약 앙가라이가 바이칼에서 흘러 나가지 않았다면 바이칼은 어찌 됐을까. 그는 필경 드넓은 황야에 갇힌, 유폐된 존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고인 채로 흐려지고 썩어져 죽음의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앙가라가 그로부터 흘러나가서 예니세이를 만나서 드넓은 바다로 흘러갔기 때문에, 바이칼은 마침내 생명의 존재, 우주적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여기 부모 자식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이치가 있다. 품안의 자식이란 뜰 안의 화초일 뿐, 그를 통해 자신의 삶은 펼쳐지지 않는다. 자식은 부모와는 다른 세계로 나아가 자신의 삶을 일구어야 한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삶을 실현하는 길일 뿐 아니라, 그들을 세상에 낸 부모의 존재를 확장하고 실현시키는 길이다. 자식들이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펼쳐냄으로써, 그러한 확장이 계속 이어짐으로써, 부모로서의 나는 우주의 존재가 되고 영원의 존재가 된다. (슬퍼할 일 아니다. 그 뿌리는 맞닿아 있다는 사실!)
만약 앙가라가 아버지 곁에 머물렀다면 그림형제 민담집의 <별별 털복숭이>. 딸과 ‘결혼’하고자 한 아버지. 딸에게 흉한 털가죽을 씌우다. 피로 얼룩진 짐승의 가죽. 상처와 죽음. 그 털가죽을 벗기 위해 저 딸한테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는지!
감은장애기의 길
강이영성이서불은 윗마을 거지이고 홍문소천구애궁전은 아랫마을 거지였다. 그들은 길에서 만난 뒤 연분이 되어 결혼하여 살게 되었다. 그들이 동냥을 하여 살아가던 중 아이가 생겨나 딸이 삼형제가 되었다. 첫째는 은장애기, 둘째는 놋장애기, 셋째는 감은장애기라 했다. 감은장애기가 태어난 뒤 모든 일이 잘 풀리기 시작하여 부부는 천하의 거부가 되었다. 어느 날 부부는 자식을 불러놓고 그들이 누구 덕에 잘 사느냐고 물었다. 은장애기 놋장애기가 부모님 덕이라고 하는데, 감은장애기는 ‘하느님도 덕이고 지하님도 덕이고 부모님 덕이기도 하지만 내 몸에 복이 있는 덕’이라 했다. 그 대답을 괘씸하게 여긴 강이영성은 당장 감은장애기를 집에서 내쫓았다. 딸이 막상 집을 나서자 마음이 안 좋아진 부부는 은장애기를 시켜 감은장애기를 잠깐 불러오라 했다. 은장애기는 감은장애기한테 부모님이 때리러 오니 빨리 사라지라 했다. 그때 그녀는 몸이 변하여 청지네가 되었다. 다시 놋장애기가 언니가 그랬듯 거짓말로 동생을 쫓아내고서는 말똥버섯이 되었다. 직접 문을 나오려던 강이영성과 홍문소천은 작대기와 문고리에 눈이 찔려 장님이 되었다.
집을 떠난 감은장애기는 작은마퉁이와 결혼한 뒤 금덩이를 발견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감은장애기는 어느새 다시 거지가 되어 유랑하고 있던 부모를 찾은 뒤 그들의 눈을 띄워주었다. 이후 감은장애기가 전상(전생)의 신 삼공(三公)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이야기에서 부모는 자식한테 묻는다. ‘너희들은 누구 덕으로 살지?’ 이는 부모가 자식한테 ‘너희 삶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은 것과 같다. 자식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부정토록 하는 우문 중의 우문이다. 큰딸 은장애기와 둘째딸 놋장애기는 부모의 의도에 맞춰 스스로를 부정한다. 오직 감은장애기만이 자신이 제 삶의 주인임을 천명함으로써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다. 존재의 신성을 찾아내고 발현하는 길이었다. 그 진실을 몰랐던 부모는 무엇이 되는가 하면 장님이 되었으며, 진실에 눈을 감고 거짓에 몸을 담은 두 언니는 청지네와 말똥버섯이 되었다. 청지네는 음습한 곳을 기어 다니는 동물이고, 말똥버섯은 소나 말의 똥에 기생하는 식물이다. 신(神)의 길과 상반되는 물(物)의 길이다. 그들이 이렇게 물화(物化)된 것은 스스로 제 삶의 주인이기를 포기하고 타인의 품에 안주하기를 선택한 데 따른 응보였다. 다른 누가 그들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법이니 그것은 그들이 자초한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부모가 장님이 된 것 또한 마찬가지다. 진실에 눈이 먼 이들이니 장님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갖은 고생 끝에 감은장애기를 다시 만나 눈을 뜨게 되거니와, 그것은 그들이 그 순간 자신들이 외면했던 진실과 비로소 만났기 때문이었다. 어찌 부모와 자식의 관계뿐일까.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그렇고, 선배와 후배의 관계가 그러하다. 아니, 세상 모든 관계가 그러하다. 사람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의지하고 살기 마련이지만, 제 삶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제 자신이다. 자기 길을 찾아야 한다. 그 중심을 잃고 스스로를 방기할 때 삶은 무너지고 만다. 멀리 시베리아의 전설과 한국의 옛이야기가 함께 전해주는, 원형적 서사가 전해주는 인간과 삶의 진실이다.
그리고, 심청의 길 아버지를 살리려고 길을 떠난 심청. 그것은 죽음의 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심청은 그 떠남을 통해 새 생명을 얻는다. 그리고 그것은 심청만의 일이 아니었다. 심청이 가슴에 짐으로 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 아버지, 그도 조금씩 일어서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 신동흔 외, 『프로이트, 심청을 만나다』(웅진지식하우스, 2010)
집안의 무능아, 집밖의 능력자
옛날에 어떤 집에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하고 사는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이 어찌나 게으른지 아랫목에서 밥을 먹고는 윗목에서 똥을 누는 게 일이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들한테 다른 집 아들들은 나무도 하고 돈벌이도 하는데 너는 매일 밥만 먹고 똥만 눌 거냐고 다그쳤다. 그러자 아들은 참깨를 심어볼 테니 참깨와 괭이를 얻어다 달라고 했다. 어머니가 참깨를 얻어다 주자 아들은 밭에다가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서 참깨 씨를 그 구덩이에 쏟아붓고 흙을 덮었다. 나중에 거기서 싹이 하나 트자 아들은 거름을 한 동이씩 부어주었다. 그러자 참깨나무가 쑥쑥 커서 가지가 사방으로 뻗쳐 하늘을 덮었다. 참깨를 수확하는데 줄기가 어찌나 큰지 도끼를 갖다가 쳐서야 겨우 넘어뜨릴 수 있었다. 그 나무에서 참깨를 다섯 말이나 얻은 아들은 기름을 짜서 한 동이 가득 담아두었다. 그런데 그 동이에 쥐가 한 마리 들어가서 참기름을 쪽쪽 다 빨아먹고는 커다랗게 살이 쪘다. 쥐가 어찌나 기름진지 손으로 잡으면 쭉쭉 미끄러졌다. 아들은 그 쥐를 장으로 가지고 가서 참기름을 한 동이 먹여 키운 쥐라면서 큰돈을 받고 팔아서 부자가 되었다. 쥐를 사간 남자가 쥐를 물에다 담갔다가 빼니 참기름이 되어서 그걸 팔아 부자가 되었다. - 한국구비문학대계 4-2, 충남 대덕군 구즉면 설화, ‘게으른 놈도 한몫’(요약; 김중관 구연)
얼핏 보기에 그냥 한번 깔깔 웃어넘기면 그만인 허풍스러운 이야기다. 주인공으로 말하자면 게으름뱅이에 엉뚱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에서 똥 누는 골칫덩어리! 기껏 농사를 짓는다 해서 도구를 얻어줬더니만, 엉터리도 이런 엉터리가 없다. 그런데 그 엉터리 짓이 뜻밖의 결과를 낳아 큰 부를 가져왔으니, 이 설화는 ‘한 엉뚱한 바보의 뜻밖의 행운’에 관한 이야기라 할 만하다.
하지만 나는 이 설화를 놓고서 엉뚱한 상상을 한다. 저 친구야말로 ‘진짜’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에서 똥 누기가 다반사였다니 그야말로 골칫덩어리 백수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이었다. 의뭉한 저 사내, 흉중에는 남다른 봉황의 뜻을 품고 있었으니, 한 그루 참깨를 제대로 키워서 놀라운 수확을 얻는 저 모습을 보라. 요컨대 그것은 ‘한 마리 토끼’에 투자를 집중하여 최고의 소득을 창출한 일이었다. 게으름뱅이 멍청이인 줄 알았던 저 친구, 사실은 능력자였던 것이다.
앞집 아들은 머이던거나 일을 잘 할라꼬 싸코, 이래 싸아도 뒷집에 아 이놈아는 생인(생전) 일도 안하고 장 앉아서 이 집에서 이 골목 밖에도 안 나가고 이래 떡 엎디리가꼬 집에서 장 있은께네 부모가 하는 말이 머라 카는 기 아이라, “앞집에 이, 머시는 저리 너랑 한 동갭(동갑)이라도 일을 자꾸 하고 저래 갖고 머이거나 곡식도 잘 그거하고 이래 했는데, 너는 와 장- 밥만 쳐묵고 집에서 거석만 하고(놀기만 하고) 이래 갖고 있노?”
주인공과 달리 늘 부지런하고 성실했다는 앞집 아들. 부모와 이웃의 칭찬을 한몸에 받는 그는 이른바 ‘엄친아’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주인공이 된 건 그가 아니라 무능아(백수!)로 낙인찍혔던 뒷집 아들이었다. 엉뚱해 보이지만 그것이 엄연한 세상의 이치임을 저 설화는 웅변으로 말하고 있다. 타인의 기준보다는 자신의 기준이, 틀에 박힌 사유보다는 창조적인 발상과 행동력이 ‘진짜 주인공’의 자질이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비좁은 방안은 저 주인공이 뜻을 펼치기에는 좁은 세상이었다고. 그는 너른 세상에 나가면 훌쩍 비상할 존재였다고. 지금 방안에서 뒹굴고 있는 저기 저 문제아, 그가 이 세상을 훌쩍 뒤집어놓을 주인공일 수 있다. 자식을 무능력자로 단정하고,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고 여기고서 품안에 낀 채 끙끙대는 부모들. 그들이 진짜 문제일 수 있다. 그냥 담뿍 믿고서 떠나보내자. 그러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뭔가를 이룰 것이다. 뜻있는 것을 못 이룬다면 그 또한 할 수 없다. 어차피 인생은 자기가 사는 것이니까.
□ 옛이야기에 깃든 진실의 목소리 - ‘요하네스’, 또는 ‘수정 구슬’이라는 이름의 자아
충성스런 요하네스
옛날에 한 늙은 왕이 깊은 병이 들자 충성스런 시종 요하네스를 불러 아들의 앞날을 부탁했다. 아들에게 성안의 모든 것을 보여주되 황금 궁전에 사는 아름다운 공주의 초상화가 숨겨진 마지막 방만은 보여주지 말라고 했다. 왕은 요하네스의 맹세를 믿고 세상을 떠났다. 요하네스는 젊은 왕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다. 그는 왕에게 갖은 보물이 가득한 성을 구석구석 보여주었지만 마지막 방만큼은 허용하지 않았다. 방안이 궁금해진 왕은 문을 열어 달라고 사정했다. 방에 못 들어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꼼짝하지 않았다. 요하네스는 도리 없이 길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방에 들어가 공주의 초상화를 본 왕은 그 찬란한 모습에 넋을 잃어 쓰러지고 말았다. 젊은 왕의 마음은 황금 궁전의 공주로 가득 찼다. 목숨을 걸고라도 그녀를 얻고자 했다. 왕은 요하네스에게 제발 자기를 도와 달라고 매달렸다. 요하네스는 최고의 금 세공품들을 만들어 배에 실은 뒤 왕과 함께 황금 궁전을 찾아 떠났다. 요하네스가 보여주는 금붙이에 마음이 혹한 공주는 다른 물건을 보려고 배에 올랐다. 공주를 만난 왕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요하네스는 사공을 시켜 배를 출발시켰고, 왕은 공주에게 사랑을 고백해서 그 마음을 얻어냈다. 배가 바다 위를 달릴 때 세 마리 까마귀가 날아와 지저귀기 시작했다. 요하네스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왕이 마중 나온 적갈색 말을 타면 공주를 잃게 되니 총으로 쏴 죽여야 한다고 했다. 왕이 성에서 화려한 결혼 예복을 입으면 타죽게 되니 불에 던져야 한다고 했다. 또 왕비가 춤을 추다 쓰러지면 오른쪽 가슴에서 세 방울의 피를 빨아서 뱉어야 한다고 했다. 이 사실들을 누설하면 몸이 돌로 변할 것이라고 했다.
요하네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주인을 구하러 나섰다. 총으로 적갈색 말을 쏘고, 왕의 예복을 불에 던졌으며, 쓰러진 신부의 오른쪽 가슴에서 피를 빨아 내뱉었다. 두 번은 그냥 넘어갔으나 세번째까지는 참을 수 없었던 왕은 요하네스를 옥에 가두고 사형을 언도했다. 교수대에 세워진 요하네스는 마지막 발언 기회를 얻어서 자기가 그리 행동한 이유를 이야기했다. 왕이 놀라서 사면을 명했지만, 요하네스의 몸은 어느 새 돌로 변하기 시작한 뒤였다. 왕은 죽어서 석상이 된 요하네스를 곁에 두고 지내면서 그를 되살릴 수 있기를 기원했다. 세월이 흘러 아들들까지 얻은 왕은 어느 날 석상을 보면서 요하네스가 다시 살아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러자 석상이 입을 열더니 왕이 쌍둥이 아들을 죽여서 그 피를 자기한테 바르면 살아날 수 있다고 말했다. 왕은 슬픔을 무릅쓰고서 아이들의 목을 잘라 그 피를 석상에 발랐다. 그러자 요하네스의 생명이 돌아왔다. 살아난 요하네스는 두 아이의 몸에 목을 얹고 피를 바르자 두 아들은 말짱하게 되살아나 뛰어다녔다. 왕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으며,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왕비도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요하네스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충성스런 시종? 진정한 친구? 그 이상! 이야기 속의 요하네스는 말 그대로 충성스러운 존재였다. 젊은 주인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는 사람이었다. 왕을 위해 황금 궁전의 아름다운 공주를 데려오는 것쯤은 오히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진정 어려운 것은 자신의 충심이 주인의 오해를 낳게 될 일들이었다. 멋진 말을 죽이고 예복을 불태우는 일은, 나아가 왕비 가슴의 피를 빠는 일은 주인의 기대나 욕망에 반하는 일이었다. 오해와 미움을 사는 일이고 죽음을 자초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일을 한다. 자기 온몸이 돌로 변해서 굳어지는 것을 무릅쓰고서. 왜냐하면 그는 충성스런 요하네스였으므로. 요하네스를 보면 곁에 이런 시종을 하나 둘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충신을 곁에 두는 것은 꽤 불편한 일이기도 하다. 그는 걸핏하면 나를 막아서고 힘들게 하는 존재이므로. 그는 내가 가고 싶어하는 길을 막아서며, 나의 사랑하는 물건을 손상시키고 사랑하는 이에게 손을 댄다. 그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한 일이려니 하고 믿으면 될 일이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다. 저 왕이 그러했듯이 벌컥 화를 내면서 그를 가두고 없애려 들 것이다. “이건 도대체 어쩔 수 없어!” 이러면서. 저 요하네스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것은 한 명의 진정한 친구이다.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는 친구. 심지어 오해 속에 버림받을 것을 무릅쓰면서까지 험한 일을 대신해 주는 친구. 늘 나를 바른 길로 이끌려고 바른 말을 해주는 친구. 때로 귀찮거나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친구 하나만 있다면 삶은 온전히 지켜질 터이니 얼마나 고맙고 복된 일일까. 요하네스에게서 진정한 친구를 연상하면서 ‘나한테 그런 친구가 있는가’ 하고 생각하던 나의 머리가 문득 띵해지고 말았다. 나한테는 과연 그런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나뿐만이 아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친구가 있다. 나를 일깨워주는 또 다른 나. 그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바로 우리 안에 있다. 저 깊은 곳에서 나를 일깨워주는 그 무엇. 양심(良心). 초자아(超自我; superego). 그렇다. 참 자아. 이야기 앞쪽으로 돌아가서 요하네스가 마지막 방문을 막아서는 장면과 만나보자. 방문 안에 있는 공주의 초상이 무엇이길래 요하네스는 그것을 막아서는 것일까? 이야기는 황금 궁전의 공주를 한번 보면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한번 휘말리면 헤어날 수 없는 아름다움이란 금할 수 없는 유혹의 상징이라 할 수 없다. 강력하고 위태로운 함정. 그래서 요하네스라는 이름의 초자아는, 냉철한 이성은 그 길을 막아서는 것이다. 하지만 이성의 힘은 강렬한 유혹을 마침내 이기지 못한다. 요하네스를 밀치고 방안에 들어선 왕, 이제 길은 일사천리다. 공주로 표상되는 욕망을 향한 거침없는 달음박질! 기적과도 같이 공주를 얻으니 세상이 다 제 것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진짜 함정은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적갈색 말과 화려한 예복, 그리고 신부의 가슴……. 이들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마구 치닫는 욕망과 화려한 도취감, 그리고 배타적인 소유욕 등을 상징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요하네스가 나서서 애써 그들을 제어하려 하지만 그 모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왕은 질투를 동반한 독점적 소유욕 앞에서 결국 무너지고 만다. 그게 다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이제 요하네스가 있을 자리는 없었다. 왕은 이미 자기 욕망의 함정 속에 빠져든 터다. 어떤 시늉을 하든, 진실의 목소리는 더이상 그의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요하네스는 그렇게 돌이 된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구원의 기회가 온다.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돌이 된 요하네스를 차마 버리지 않고 곁에 두고 있던 저 사람, 진심으로 그가 되살아나기를 소망한다. 자기 본 모습을 되찾기를. 그러자 그 진심에 요하네스가 응답한다. 그가 주문한 것은 아주 가혹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자식들의 목을 잘라서 피를 내라는 것. 이 주문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면,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는 자기를 죽일 만큼의 희생과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눈물을 삼키고서 그 일을 해내자 죽었던 요하네스가 살아난다. 그리고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난다. 내 손으로 버린 나의 소중한 분신이 훌쩍 되살아난다. 죽었다 살아났으니 진짜 삶의 시작이다. 요하네스와 자식들은, 참 자아와 삶의 가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늘 내 안에 머물면서 나를 지켜주는 요하네스. 내가 그를 믿지 않고 외면할 때 그는 돌이 되어 어둠의 침묵 속에서 눈물을 흘린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어디에 있는지? 그가 활짝 웃으며 모습을 드러내나게 하려면, 결단이 필요하다. 나를 통째로 버리는 아픈 결단이.
참 자아의 또 다른 표상, ‘수정 구슬’
옛날에 한 마녀에게 세 아들이 있었다. 자식들의 힘을 두려워한 마녀는 맏아들을 독수리로 만들어 바위산으로 보내고 둘째 아들을 고래로 만들어 바다 속에 살게 했다. 위험을 느낀 셋째 아들은 집을 나와 길을 떠났다. 그의 발걸음은 황금 태양의 성에 갇힌 공주에게로 향했다. 공주를 구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으나, 그는 기꺼이 그리 하고자 했다. 문제는 태양의 성으로 가는 방법이었는데, 뜻이 있으니 길이 열렸다. 거인들에게서 빌려 쓴 마법의 모자가 순식간에 그를 성으로 옮겨주었다. 황금 태양의 성에서 만난 공주는 소문과 달리 추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거울에 비춰진 공주의 모습은 한없이 아름답고 애처로웠다. 공주는 자기를 구하려면 수정 구슬이 필요하다고 했다. 샘가의 사나운 들소와 싸워 이기면 그 죽은 몸에서 불새가 날아오를 것이며 불새의 빛나는 알 속에 수정 구슬이 노른자처럼 들어있을 것이라 했다. 불새를 괴롭혀 알을 떨어뜨리게 하되 알이 땅에 닿으면 안 된다 했다. 땅에 닿으면 모든 것이 타버리고 수정 구슬도 녹게 될 것이라 했다. 젊은이는 산에서 내려와 들소와 맞섰다. 힘든 싸움 끝에 칼로 들소를 찔러 죽이자 그 몸에서 불새가 나왔다. 불새가 하늘로 날아오르려 할 적에 독수리로 변해 있던 큰형이 날아와 불새를 마구 쪼았다. 불새의 알이 땅으로 떨어져 불길이 일어나려 할 적에 고래로 변해 있던 작은형이 세차게 물을 뿜어서 불을 껐다. 젊은이가 불새의 알을 찾아서 살펴보니 껍질은 깨졌지만 수정 구슬은 무사했다. 그가 마법사를 찾아가 구슬을 내밀자 마법사는 힘을 잃고 항복했다. 젊은이는 성의 왕이 되었고, 형들은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공주가 찬란한 모습으로 젊은이 앞에 섰다. 둘은 기쁨에 가득 차서 반지를 교환했다.
이상이 <수정 구슬>의 사연이다. 세상의 모든 흉포한 마법을 깨고 행복을 기약하는 찬란한 수정 구슬이라니 ‘절대 반지’를 연상시키는 놀라운 보물이다. 그런 보물 하나 있으면 참 좋겠다 싶은 그 구슬은 실상 우리 모두에게 있다. 어딘가 하면 우리 안의 깊고 깊은 곳에. 앞서 말했던 바, ‘참 자아’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가히 의미 있는 존재라 할 수 없는, 그러나 그것을 얻으면 세상 모든 것을 가지게 되는 그 무엇, 나의 진정한 자아. 저 수정 구슬을 얻는 일은, 존재의 진정한 가치와 만나는 일은 무척 힘들고 험난한 과업이었다. 사나운 들소로 표상되는 동물적 본능[수성(獸性)]과 싸워 이겨야 했으며, 시뻘건 불새로 표상되는 불타는 열정을 제어할 수 있어야 했다. 뜨겁고 빛나는 열정은 수정 구슬을 배태하고 있지만 그것을 한순간에 태워버릴 수도 있었다. 그 구슬을 얻기 위해서는 독수리 같은 매운 용기와 고래의 물보라 같은 차가운 이성이 필요했다. 그 위태롭고도 아슬아슬한 싸움에서 승리하여 마침내 참다운 자아와 만난 저 사람, 세상의 당당한 주인공이 된다. 일컬어 왕. 그 존재에서 우러나는 빛은 세상 모든 어둠을 훌쩍 걷어낸다. ‘마법’이라는 이름의 얄팍한 거짓이나 흉한 폭력 따위는 더 이상 인간을 우롱하지 못한다. 이야기는 수정 구슬을 얻기 위한 젊은이의 싸움을 단 한 번의 일인 것처럼 말한다. 물론 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실제의 삶에서 저 들소와의 싸움은, 그리고 불새와의 싸움은 하고 또 해야 하는 무엇일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평생에 걸쳐 끝없이 이어가야 하는 힘겨운 싸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수정 구슬이 없다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늘도 또 내일도 기꺼이 그것을 찾아 나서야 하는 일이다.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은 그 수정 구슬이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것을 원한다면, 진정으로 그것을 향해 나아간다면 저 구슬은 어느새 우리 손 위에서 찬란히 빛나게 될 것이다. (이 글은 <열린어린이> 2013년 8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 옛이야기, 믿어도 좋다!
- 어떤 이야기가 아이들한테 좋을까? - 이런 이야기 과연 괜찮을까? - 이 이야기는 어떻게 들려주는 게 좋을까? - 이 이야기에 담긴 교훈을 어떻게 전할까?
옛이야기는 우리가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 이상이다. 아이들한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요소들이 그 안에 켜켜이 깃들어 있다. 믿고 들려주자. 있는 그대로. 그리고 아이들로 하여금, 맘껏 이야기하게 하자!
* 참고논문 : 박현숙, ?설화 구연 전통에 기반한 옛이야기 들려주기 방법 연구?, 건국대 박사논문, 2012.
** 어린이책 읽기 모임 같은데서 옛이야기에 깃든 상징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받게 되는 질문이 있다. 설명을 듣고 보면 그렇구나 싶은데 이야기만 봐서는 모르겠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는 것이다. 아이들도 무심하게 이야기를 넘길텐데 무언가 해석을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아이들이 이야기와 제대로 만나다 보면 어느새 그 속에 깃든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제대로 된 만남’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를 듣고 또 들으며 직접 말해보기도 해야 하는데, 그러기가 영 어렵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하곤 한다. 일일이 다 설명해 주는 건 아니더라도 살짝 맥을 짚어주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고. “저 수정 구슬은 도대체 무얼까? 그걸 얻기 위해서 왜 들소랑 싸우고 불새랑 싸워야 할까?” 이렇게 물음을 던지고 아이와 함께 답을 찾아보는 것이다. 옛이야기 속의 상징을 헤아려보는 것은 즐겁고 유익한 일이다. 상상력과 논리력을 키우는 데 이만한 일이 따로 없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첫댓글 다들 잘 다녀오세요.. 좋은강연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