密直提學 李誠中이 家寶인 寶劍을 太宗에게 바치다
○殿下爲代言時, 達衷之弟密直提學誠中使其子携, 進家傳金飾寶劍, 殿下與王妃同坐受之。 王妃笑曰: “不知送寶劍何意耶?” 翌日, 殿下至誠中家謝曰: “吾, 儒生也。 何爲送寶劍乎?” 誠中對曰: “寶劍, 非小人所用也, 明公所當用也, 敢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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譯文
전하(殿下)가 대언(代言)이 되었을 때에, 이달충(李達衷)의 아우 밀직제학(密直提學) 이성중(李誠中)이 그 아들 휴(携)로 하여금,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오는 금으로 장식한 보검(寶劍)을 바치게 하니, 전하가 왕비(王妃)와 더불어 앉아서 이를 받았다. 왕비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보검(寶劍)을 보낸 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데?” 하였다. 이튿날 전하가 성중(誠中)의 집에 가서 사례(謝禮)하기를, “나는 유학(儒學)을 닦은 선비인데 무엇 때문에 보검(寶劍)을 보냈는가?” 하니, 성중이 대답하였다.
“보검은 저의 소용이 아닙니다. 명공(明公)께서 당연히 쓸 것이기에 감히 바치는 것입니다.”
출처 : 왕조실록 태조 총서
----------- 올려주신 자료를 보면서 연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성중 가계도
(17) 천(菊堂公 천)국당공파(菊堂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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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경중(敬中)-배중(培中)-달충(達衷)제정공파-성중(誠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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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援)-부(扶)-휴(携)54(19)
2, 이성중 묘소위치와 인물(의정부시 자일동 산 143)
이성중(李誠中)
曾祖는 문하평리(文下評理) 贈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 열헌(列憲)公 諱 핵
祖는 비서교서(秘書校書)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
검교정승(檢校政丞) 문희(文喜) 송암(松巖)公 諱 세기(世基)
先考는 추성보리공신(椎誠 輔理功臣) 삼중대광 첨의정승(三重大匡 僉議政丞)
예문관 대제학(藝文關 大提學)
문하시랑(文下侍郞) 동평장사(東平章事) 월성부원군(月城 府院君) 문효(文孝)
국당(菊堂)公 諱 천의 四男
公은 高麗 충혜왕(忠惠王) 辛未1331年 나시었는데
字는 계저(季著) 諡號는 정순(靖順)이다
충목왕(忠穆王) 丁亥年에 금인관방(金仁琯榜)에 급제하여 한림대언(翰林代言)
호부랑중(戶部郞中)
병부령(兵部令) 상서(尙書)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를 지내시고
개국 원종공신(開國 原綜功臣) 보국 검교좌정승(輔國 檢校左政丞)으로
기로사(耆老社)에 드셨다
初配는 貞夫人 昌原黃氏 諱 하연(河衍)의 女 生1男이요
系配는 貞夫人 晉州柳氏 삼사좌사(三司左使) 강정공(康靖公) 諱 지정(之淀)의
女로 슬하에
三男四女를 두시니 연안도호부사(延安 都護府使) 諱 원(援)이 長男이요
부사(府事) 諱 부(扶)는 次男이요 판 한성윤(判漢城尹) 휘 휴(携)는 三男이다
따님들은 남중문(南仲文) 최식(崔寔) 최청(崔淸) 오부(吳溥)에게 出家 하였다
朝鮮 太宗 庚寅1410年 享年80世로 卒하시니 제사(祭祀)를 내리고 예장(禮葬)하였다
墓地은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 산 143번지 분토곡(粉土谷) 손좌(巽坐)에
二配位合附하다
3,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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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殿下)가 대언(代言)이 되었을 때에 이달충(李達衷)의 아우 밀직 제학(密直提學) 이성중(李誠中)이 그 아들 휴(携)로 하여금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오는 금으로 장식한 보검(寶劍)을 바치게 하니, 전하가 왕비(王妃)와 더불어 앉아서 이를 받았다. 왕비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보검(寶劍)을 보낸 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데?”
하였다. 이튿날 전하가 성중(誠中)의 집에 가서 사례(謝禮)하기를,
“나는 유학(儒學)을 닦은 선비인데 무엇 때문에 보검(寶劍)을 보냈는가?”
하니, 성중이 대답하였다.
“보검은 저의 소용이 아닙니다. 명공(明公)께서 당연히 쓸 것이기에 감히 바치는 것입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17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역사(歷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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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대언사(代言司)가 아뢰기를,
“검교(檢校)는 유품(流品)2005) 밖이어서 원래 그 예(例)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검교 정승(檢校政丞)은 반드시 노덕(老德)이 있는 자이다. 하물며, 종1품 이상은 모두 예장이 있는데, 비록 검교라도 어찌 종1품 아래에 두겠는가? 이제부터 마땅히 예장법(禮葬法)을 세우라.”
이성중은 경주(慶州) 사람인데, 문과(文科)로 출신(出身)하여 우리 태조(太祖)의 원종 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여러 벼슬을 거치어 정헌 대부(正憲大夫)·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에 이르고, 드디어 검교 의정부 좌정승(檢校議政府左政丞)이 되었다. 졸(卒)하니, 나이 80이었다.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사제하고 부의(賻儀)를 보내고, 시호(諡號)를 정순(靖順)이라 내려 주고, 유사에 명하여 예장(禮葬)하였다. 아들이 셋인데, 이원(李援)·이부(李扶)·이휴(李携)이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606면
【분류】 *인물(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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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야사에 전해지는 내용중에...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15> | 이재황의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 태종 이방원에 대하여
5 기타 참고해 볼만한 내용들
- 대언공 이담의 누나 딸이 태종의 후궁인 의빈권씨로
대언공 담은 익재공의 증손이고, 정순공 이성중의 당숙이 바로 익재공임
당시 두분은 손자와 할아버지 촌수이지만 중앙정치에서 같이 알고 지냈던
분이었음
간략정보 의빈권씨(懿嬪權氏) - 성균 악정 권홍의 딸(의빈권씨)을 별궁으로 맞아들이다
- 태종의 후궁 의빈권씨(懿嬪權氏)
시대
조선
생몰년
미상
활동분야
후궁
의빈권씨(懿嬪權氏)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제3대 왕 태종의 후궁. 정혜옹주(貞惠翁主)의 생모이다. 처음 궁인으로 궁중에 들어와 태종의 총애를 받아 궁주에 봉하여지고, 정혜옹주를 출산하여 의빈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422년(세종 4) 태종이 죽자 비관하여 세종에게 고하지 않고 머리를 깎아 중이 되었다. 밤낮으로 불경을 외우면서 선왕의 명복을 빌었으므로 후궁들이 본받아 앞을 다투어 머리를 깎았다.
당시 조선은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 때였으나 궁중에서는 심하게 금지시키지 않았으므로 범패와 공양의 도구를 준비해두고 조석으로 예불하였다. 세종의 여섯째아들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를 맡아서 길렀다.
1453년(단종 1) 늙고 병들자 금성대군이 사저에서 한양(閑養)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혜빈궁 양씨(惠嬪宮楊氏)의 처소로 옮겨서 지냈다.
1457년(세조 3) 선왕을 위하는 왕의 특별배려로 궁호를 영수궁(寧壽宮)으로 고치고 노후를 안양(安養)하게 하였다.
태종 2년 임오(1402, 건문 4)
3월 7일(경인)
성균 악정 권홍의 딸을 별궁으로 맞아들이다
성균 악정(成均樂正) 권홍(權弘)의 딸을 별궁(別宮)으로 맞아들이었다. 처음에 대부인(大夫人) 송씨(宋氏)가 정비(靜妃)에게 말하기를,
“궁빈(宮嬪)이 너무 많아서 그것이 점점 두렵다.”
하였는데, 정비의 투기는 더욱 더 심해만 갔다. 임금이 권씨(權氏)가 현행(賢行)이 있다 하여 예(禮)를 갖추어 맞아들이려고 하니, 임금의 옷을 붙잡고 말하기를,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감과 더불어 함께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禍亂)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
하며,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음식도 들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가례색(嘉禮色)을 파하도록 명하고, 환관(宦官)과 시녀(侍女) 각각 몇 사람만으로 권씨를 별궁에 맞아들였다. 정비는 마음에 병을 얻었고, 임금은 수일 동안 정사를 듣지 아니하였다.
태종 2년 임오(1402, 건문 4)
5월 11일(계사)
이지직과 전가식을 순군에 내리고, 파직시키다
이지직과 전가식을 순군에 내리고, 그 관직을 파면하였다. 대사헌 이지(李至)와 지평(持平) 이지(李漬) 등이 임금의 뜻을 알고 이지직 등의 죄를 다시 청했기 때문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국론(國論)이 이와 같으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곧 이지직·전가식 등을 순군(巡軍)에 내리고,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 우인렬(禹仁烈)·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전가식이 처음 이 말을 하였습니다. 신은 간관(諫官)으로서 감히 입을 다물고 잠잠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전가식을 형문(刑問)하면 반드시 ‘성색(聲色)을 좋아하신다.’고 말했다 할 것입니다. 나는 직언(直言)하여 꺼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고, 전가식이 말하기를,
“이같이 국문(鞫問)하시니 직언(直言)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고, 자기 손으로 초사(招辭)를 쓰기를,
“신이 가만히 《춘추전(春秋傳)》을 보건대, ‘제후(諸侯)가 한번 장가드는 데 아홉 여자를 데려오는 것은 계사(繼嗣)를 넓히려는 까닭이요, 데려올 때 반드시 동시(同時)에 데려오는 것은 근본을 어지럽히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정실(正室)의 자손이 번성한데도 또 권씨(權氏)를 맞이하시니, 이것은 전하께서 호색(好色)의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데려오되 동시에 데려오지 아니하셨으니, 어찌 뒷날에 구실을 삼아 말하는 자가 잉첩(媵妾)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적실(嫡室)로 삼을지 알겠습니까? 이것은 일찍 도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은감 불원(殷鑑不遠)한 까닭에 다만 성색(聲色)을 즐긴다고 말하여 슬며시 풍자한 것뿐이요, 감히 그 일을 두드러지게 말 못한 것뿐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이 일은 반드시 사주(使嗾)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바른대로 말하고 피하지 말라.”
하니, 전가식이 말하기를,
“신이 간관(諫官)으로서 어찌 남의 말을 듣고 하였겠습니까?”
하였다. 다시 국문하자, 전가식이 말하기를,
“어느날 은문(恩門)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의 집에 가서 이 일을 고하였더니, 대답하기를, ‘네 말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순군(巡軍)에서 그 말대로 아뢰니, 이지직·전가식 등을 놓아주라고 명하고 그 직(職)을 파면하였다. 민제(閔霽)는 이때부터 문생(門生)을 접견하지 아니하였다.
** 정순공 이성중과 태종의 관계를 더 살펴 보실려거든
대언공 이담.청호공 이희.의빈권씨(대언공 담의 누나 딸) 등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실것 입니다.
이상 올려주신 자료에 살을 붙여 보았습니다.
2011년 6월 14일 이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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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세한자료올려주셔서감사합다
감사합니다.
제정공 휘 달충 방선조님과 태조와 관계되는 일화도 정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의견입니다.
제정공 달충과 태조와의 인연에 대해서도 살펴보면 도움이 될듯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위의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정확한 독음입니다. 오자인 것 같은데 혹시나 하여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맞습니다. 자료를 폄 하는 과정에서 ,,,,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