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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공무원으로는 최초로 국립묘지에 안장된 인물이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 옥천 금산 지역에서 미군 24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이 실종되었다. 임시 수도인 대전의 사수 임무를 맡은 24사단은 북한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밀려 영동으로 후퇴했다. 당시 미군은 북한군의 포위망을 뚫고 퇴각하던 중, 딘 소장이 미처 탈출하지 못한 것이다. 미군은 딘소장을 구출하기 위한 33명 규모의 특공대를 조직하고 열차를 이용하여 적진에 침투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전황으로 보아 열차를 몰고 적치하로 들어간다는 것은 살아 돌아올 확률이 거의 없는 작전이었다. 이들 특공대원들은 옥천역에서 출발한 석탄수송열차가 맡았는데, 작전 중 특공대원 20명 전원과 2명의 기관사가 북한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 가운데 1명이 김재현 기관사이다. 딘소장은 종전 후 포로교환 협상에 따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김재현 기관사는 자원하여 증기기관차인 미카3-129호를 조종하고 작전에 참여하였다. 김재현은 1950년 7월 19일, 현재영 황남호 두 기관조사와 함께 석탄차와 화차 각 1량을 연결한 기관차를 몰고 18시에 이원역을 출발하여 대전으로 향했다. 세천역을 통과하여 중앙터널을 빠져 나올 즈음 인민군의 따발총과 박격포, 수류탄 등의 공격을 받았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대전역에 도착 한 특공대는 1시간 여 동안 이미 적치하에 떨어진 대전역 인근을 수색했으나 딘 소장을 발견할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다시 영동을 향해 철수했다. 철수시에도 이를 미리 예측한 인민군은 대전 인근 판암동 산기슭에 매복했다가 철수열차를 공격했다. 이 때 부상 당한 1명의 미군과 기관조사인 현재영 외에는 모두 사망했다. 김재현은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숨을 거두면서도 기관차의 가감변을 놓지 않았고, 그가 숨이 끊어지는 순간 현재영 기관조사가 이를 인계받아 운전했다. 그러나 현재영 기관조사 역시 왼팔에 관통상을 입자, 석탄을 기관에 퍼 넣는 일을 담당하던 황남호 기관조사가 이어 기관차를 운정하여 간신히 공격을 벗어났다.
이 때 김재현은 전신에 8발의 총알을 맞고 사망했다. 김재현의 유해는 동료들에 의해 영동산 아래 묻혔다가 휴전 후 다시 고향인 충청남도 논산군 노성면 정암리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1983년, 전사 33년 만에 국립묘지의 영관급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가 순직한 지점으로 추정되는 현재의 대전시 지하철 판암영업소 근처에 그의 순직비가 세워져 있다.
첫댓글 조율님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냥 주변에서 사소한것정리해놨다가 푸는 것이지요. 좋은 글은 아닙니다.
아닙니다~조율님이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도 저희에게는 소중한 것입니다~~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맞아요~이런 분들을 기억해야 합니다~~(__);
아주 유익한
역사의 한페이지군요
한 사람 목숨을 위하여 희생된 숫자가 많네요..
이렇게 많이 댓글이 달리니 부담스럽네요.
그렇게 부담 안 가져도 될듯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