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대륙풍 제2권 (전3권)
지은이: 서효원
- 차례 -
第 一 章 하늘(天)에의 도전(挑戰)
第 二 章 저주의 꽃, 야래향(夜來香)
第 三 章 절세가인(絶世佳人)의 눈물에 세상이 울다
第 四 章 누가 있어 천하(天下)를 구할 것인가?
第 五 章 밤의 제왕(帝王), 흑야마부(黑夜魔府)
第 六 章 무림의 태양, 천추제일문(千秋第一門)
第 七 章 신비혈문(神秘血門)에 뛰어들다
第 八 章 소녀(少女)를 드리겠어요
第 九 章 태극성녀(太極聖女)의 탄식
第 十 章 나의 검(劍)으로 사랑하는 그대를……
第十一章 사랑(愛)의 조건
第一章 하늘(天)에의 도전(挑戰)
1
종당(鐘堂)이라는 말은 종묘(鐘廟)의 만백관이 있는 구중궁궐을 의미한다.
종당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월동문 좌우로 오백여 명의 건장한 무사가 눈빛을 반짝이며 우뚝우뚝 서 있었다. 황궁 호위무사들이었다.
두두두두-!
멀리서 황진을 일으키며 일천여 필의 기마병이 월동문 쪽으로 내달렸다. 앞선 기마병이 목이 쉬도록 호통쳤다.
"병부… 사마… 납시오!"
황궁무사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던 장창을 일사분란하게 월동문 쪽으로 기울이며 응대했다.
"하마(下馬)하시오!"
그들이 장창을 기울인 것은 병부사마에 대한 예의였고, 하마를 명한 것은 지존(至尊)을 알현하기 위한 예의였다.
일천여 기병이 모두 말에서 내렸다.
사마강은 그들의 일사분란한 움직임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중원의 천자를 모시는 수하들이로군. 황궁무사다운 예의와 절도다.'
병부사마는 사마강에게 입궁을 청했다.
"공(公)께선 어서 안으로 드시오."
"대장군께서 먼저!"
사마강은 겸양하며 병부사마의 뒤를 따랐다.
그의 뒤로 파로수와 아력이 따르며 황궁의 웅위(雄威)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려 반시진을 걸어 그들은 수십 개의 월동문(月洞門)을 지났다. 맑은 내 위에 걸린 반월형 주작교(朱雀橋)의 우아한 모습은 사마강이 평생 동안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드디어 그들이 운천궁(雲天宮)에 도달했다.
사마강은 황제를 뵈옵기도 전에 황궁의 거대한 위엄에 짓눌린 듯한 마음이었다. 그는 고개를 지면에 숙이고 있었다.
"황제폐하 납시오!"
모든 지상의 존재를 짓눌러 버리는 듯한 위엄을 담고 곤룡포에 황관을 눌러 쓴 인물이 천천히 대전 안에 들어섰다.
사마강은 엎드린 채 황제가 신고 있는 어혜(御鞋)의 코끝을 보고 있었다.
작은 구슬들로 엮어진 가죽 신발의 덮개 또한 그가 평생 동안 처음 보는 호화롭고도 멋진 것이었다.
황제는 용상에 걸터앉았다. 위엄스러우면서도 예전에 한 번은 들어 본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고개를 들라."
사마강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을 때 사마강은 놀랍고도 당황했다.
빙그레 미소짓고 있는 중년의 황제는 미친 말에서 낙마(落馬)할 뻔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던 것이다.
"경은 짐의 얼굴을 기억하는가?"
"그러하옵니다."
"경은 그날 짐이 마음대로 한 행동에 크게 불쾌했을 것이야."
몸둘 바를 모를 쪽은 오히려 사마강이었다.
"황공하오이다, 폐하."
"아니야. 짐은 처음 경을 대하는 순간, 백만 황군을 얻은 것보다 더 반가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네."
"일개 낭인(浪人)에 대한 폐하의 과찬이시옵니다."
황제는 만면 가득히 미소를 지었다.
"해서 짐은 일부러 경을 시험해 보았지. 대장군의 기도가 있어도 그 마음 씀씀이가 어떤가를 살펴보기 위함이었네. 과연 재물을 초개처럼 여기는 경의 심성은 짐을 탄복시켰네."
"……."
"경은 짐을 도와 이 나라를 받들어 보고 싶지 않는가?"
사마강은 가슴이 무거워졌다. 참으로 곤란한 황명이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이 하찮은 낭인은 어려서 천하를 주유하는 것이 꿈이었고, 그 꿈을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허허… 짐을 받든다고 그 같은 일을 중단하라는 뜻이 아닐세."
"폐하, 외람되게도 명을 따르기 어렵겠습니다."
사마강은 고개를 들어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이 나라의 정승이라 할지라도 감히 그와 같은 행동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옛 말에 고위고관의 무리 속에 한 사람의 청려장(靑藜杖)을 짚은 산인(山人)이 낀다면 일단의 고풍(高風)을 더하는 것이라 하옵고, 어옹초부(漁翁樵夫)들이 다니는 길에 한 사람의 관복 입은 벼슬아치가 있다면 문득 허다한 속기(俗氣)를 보탠다 했사옵니다."
"으음……!"
"이 하잘것없는 낭인은 청렴한 산인이 못 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황제의 뜻을 거스른다는 것은 곧 죽음이었지만 사마강은 벼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목숨을 건 주청이었다.
황제는 그의 뜻이 완강함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아, 짐에게 복(福)이 없음이로다. 그러나 짐이 경에게 구함을 받았으나 아직도 사례하지 못했으니, 세 가지 요구를 말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오나 저 같은 낭인에게 어떤 물건이 필요하겠습니까?"
황제는 손을 내저으며 정색을 했다.
"허어! 경의 마음이 청백하다는 것을 짐은 이미 알고 있네만, 이 나라의 천자로서 어찌 배은망덕한 인물이 될 수가 있겠는가? 경에게 짐을 덜기 위해서라도 짐은 꼭 무언가를 해 줘야겠네. 그대의 세 가지 소원을 말하라. 짐이 어김없이 들어 주겠노라."
사마강은 참으로 난감했다.
더 이상 겸양한다는 것은 황제를 능멸하는 행동이었다. 황제의 권위도 존중해 주어야 했다. 하지만 무엇을 요구하는 문제는 실로 그를 곤혼스럽게 만들었다.
이때 여지껏 말이 없던 파로수(破路修)가 갑작스럽게 나섰다.
"폐하, 소인은 사마 대협을 모시는 하찮은 종복(從僕)이옵니다. 지금 사마 대협에게는 세 가지의 물건이 필요하온대, 소인이 감히 청해도 되겠사옵니까?"
황제는 힐끗 사마강의 종복이라 자칭하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황금빛 머리털과 분가루를 칠한 듯한 흰 피부, 그리고 파란 두 눈으로 미루어 색목인임에 틀림없었다.
황제는 그의 배짱과 지혜(知慧)로운 눈에 호감을 가졌다.
'호오, 저 같은 낭인에게도 대단한 하인이 있군. 과연 내 주위에 저러한 종복이 있었던가?'
황제는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말해 보라. 짐의 은공이 필요로 하는 세 가지 물건이란 무엇이더냐?"
파로수는 억양이 드센 이국 발음으로 세 가지 물건을 청했다.
"소인의 주인님에게는 황궁비고의 의형제천검(意形帝天劍)과 만선비학도(萬船秘學圖), 그리고 주룡칙령(朱龍勅令)이 필요하옵니다."
파로수의 주청에 황제조차 경악하고 말았다. 그만큼 그 세 가지 물건은 하나같이 엄청난 것이었다.
의형제천검(意形帝天劍)!
그것은 전설상의 신검(神劍)이다. 누구나 그 검을 가진다면 천하제일검이 된다는 보물로, 언젠가부터 황궁지보(皇宮至寶)에 속하게 되었다.
만선비학도(萬船秘學圖)!
천여 가지의 희귀한 선박을 만드는 비법이 수록된 책자로, 수전(水戰)을 대비해서 수로대장군(水路大將軍) 제갈명(諸葛明)이 엮은 병가의 비책이다.
주룡칙령(朱龍勅令)!
이것은 황제가 인정한 칙령으로, 이것을 가진 자는 황군을 호령할 수 있다.
파로수는 동서(東西)를 넘나드는 기술자이자 장사꾼으로 황궁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웃음을 터뜨리며 용상의 팔걸이를 탁, 쳤다.
"허허… 정녕 희귀한 물건들을 요구하는구나. 하지만 짐은 결코 허언(許言)을 하지 않는다. 게 누구 있거든, 이 세 가지 물건을 가져오너라!"
과연 대륙의 주인 천자(天子)다운 용단이었다.
2
장강(長江)의 파란 물에 파문이 인다.
강변의 갈대가 그 파란 파문에 비추어 흔들린다. 갈대 사이로 기이하게 생긴 선박 한 척이 나타났다.
별로 크지 않은 작은 배 위엔 한 명의 청년이 타고 있었다.
그가 배 위에 오름으로써 이 작은 선박은 너무나도 평온감을 느끼게 했다. 거대한 파도가 몰아쳐 배와 부딪혀도 끄덕하지 않을 안정감을 주었다.
그 같은 느낌은 배에 타고 있는 인물의 기도(氣度)에서 풍겨졌다.
하지만 이 배 또한 그 어떤 배보다도 안정감을 주었다.
쾌속연자선(快速燕子船)!
이 배야말로 만선비학도에서 얻어 낸 지혜로 파로수가 직접 만든 배였다. 쾌속연자선 위에 타고 있는 인물은 바로 사마강이었다.
'하늘이 도와 나에게 그들을 만나게 했을 것이다.'
사마강은 파로수와 아력을 생각하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줄곧 사마강을 주인으로 섬기려 했지만 사마강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그들은 사마강을 주인으로 생각했고,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기다린다고 했다.
사마강은 갈대밭 위에서 돛줄을 세웠다.
돛이 올려지며 갈대를 헤치고 쾌속연자선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매끄러운 빙판을 달리는 듯한 쾌속함과 술잔이 배 위에 올려져 있다 해도 넘칠 것 같지 않는 안정감은 쾌속연자선만의 자랑이었다.
과연 만선비학도의 제조술은 놀라웠다.
사마강이 탄 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와 장강의 교착점, 숭명도(崇明島) 앞바다에 닿았다.
사마강은 가슴이 후련해졌다.
"아, 시야가 이토록 넓게 트이다니… 바다! 여기가 꿈에도 와 보고 싶었던 바다이던가?"
사마강은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을 응시하며 긴 호흡을 들이켰다. 소금기 어린 바람이 다소 눅눅했지만 폐부로 빨려들며 호연지기를 일으켰다.
바다와 같은 동정호에서 자란 그였기에, 수평선을 보고 살아온 그였지만 역시 바다는 호수와 틀렸다.
"호수는 여인과 같고, 바다는 사내와 같구나."
만경창파(萬頃蒼波)가 몰아쳐 오는 바다 위를 쾌속연자선은 미끄러지듯 달렸다.
그는 파로수와 아력이 배를 제조하는 동안 바다의 지리와 항해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익혔기에 풍향과 태양의 위치를 가늠하며 방위를 분간할 수 있었다.
그는 선수를 고정해 남쪽을 향해 쾌속하게 달렸다. 저만큼 한 척의 고깃배가 다가오고 있었다.
"여어어-!"
사마강은 뱃사람들이 소리지르는 흉내를 내어 고깃배를 불렀다.
"어이-!"
고깃배 사람들이 대답하며 그의 배 쪽으로 다가왔다.
바다의 햇살은 유난히 강렬했고, 그로 인해 구릿빛으로 탄 건장한 체구의 어부들은 너무도 초라한 배를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직 연안을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 눈에는 한두 사람이 겨우 탈 조각배가 너무도 위태롭게 보였다.
어부들은 기이한 눈빛이 되어 물었다.
"젊은이는 뱃놀이를 하다가 여기까지 떠내려온 것이오? 그렇다면 우리가 목숨을 구해 주겠으니, 이 배에 오르시오."
사마강은 밝게 웃었다.
"아니오. 나는 만폭도(萬瀑島)란 섬을 찾아가고 있소. 혹시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오?"
뱃사람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배었다.
"만… 만폭도?"
"으음, 거길 가려면 죽음의… 바다를 건너야 하는데……."
사마강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죽음의 바다란 어느 곳이오?"
어부들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해 주었다.
"이곳에서 이레를 계속 가면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는 소용돌이가 일고 있는 마(魔)의 바다가 있소."
"젊은이, 마음 돌리시오. 왜 만폭도에 가려 하는지 모르지만, 이런 작은 배로서는 그곳까지 이르지도 못할 게요."
사마강은 그들의 우려를 따뜻한 인정으로 받아들였다.
"감사하오."
사마강은 어부들이 가리킨 방향으로 선수를 돌렸다.
연자선은 넘실대는 파도를 유연하게 넘어갔다. 그의 배가 물살을 가르는 속도는 대단했다.
"호오! 혹시 저 젊은이는 용왕(龍王)의 아들이 아닐까? 사십 년 동안 바다에서 살아온 우리들보다도 뛰어나게 배를 몰고 있으니 말일세."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네그려."
어부들은 연자선이 사라져 버릴 때까지 멍하니 응시하며 탄성에 젖었다.
너무나도 작은 배로 죽음의 바다를 건너려는 젊은이였지만 왠지 걱정스런 마음은 일지 않았다.
석양녘에 하늘은 음습해졌다.
해풍(海風)이 짭짤하게 일며 파도를 일깨웠다. 물방울이 꽤나 차가웠다.
사마강은 멀리 저물어 가는 저녁 바다를 응시하며 회남(淮南)의 자사(刺史)를 지냈던 위응물(葦應物)의 시를 읊었다.
고원묘하처(故園渺何處)
귀사방유재(歸思方悠哉)
회남추우야(淮南秋雨夜)
고제문안래(高齊聞雁來)
아득한 내 고향에 마음이 달리는 밤.
차가운 가을비는 왜 이리도 내리는지…….
더욱이 기러기 울음 차마 못 듣겠네.
그는 거대한 바다의 흔들림에 조금도 동여되지 않는 듯 오히려 여유 있게 시를 읊조렸다.
쏴아아아……!
싸늘한 빗방울이 후두둑거리며 밤바다에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사마강이 타고 있는 배의 일 장 주위로는 빗방울이 새어 들어오지 못했다.
그의 내가공력이 비를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폭풍우가 불어닥치지만 않는다면, 그의 능력과 연자선이라면 난파될 염려가 없었다. 아직 재난은 없었다.
사마강은 낚싯대를 선미에 걸쳐 놓은 채 여유 있게 고기를 낚기까지 했다.
"폭풍만 불지 않는다면 무난하다."
바다에 태양이 떠오른다.
그가 동정호에서 보았던 모습과도 흡사한 장면이다. 그러나 지금 운무를 뚫고 힘차게 솟아오르는 태양의 용솟음은 마치 세상을 태울 듯 강렬하기만 하다.
엿새를 달려온 떠오르는 태양은 언제나 그의 호기(呼氣)를 일깨웠다.
"친구, 너는 언제나 나를 반기면서 떠오르는구나. 나의 야망(野望)처럼 밝은 너를 보노라면 나는 세상에 부러움이 없다."
태양(太陽)은 오래 전부터 사마강의 벗이었다.
그의 대야망은 남달랐다. 그것은 세상의 지배가 아니었다. 하늘의 태양처럼 천하에 자신의 손길을 고루 뻗어 주고 싶은 마음일 뿐이다.
그 옛날 목동 때부터 가져온 포부가 그러했고, 의제를 만나 그는 그 뜻을 이루는 중이었다.
지난밤 그는 태양이 아침이면 떠오르기 위해 고통하듯 거대한 역경을 겪었다.
산악이라도 삼켜 버릴 것 같은 거대한 소용돌이에 밀려 정신이 어지러울 때까지 몸부림쳐야 했다.
다행히 쾌속연자선의 특이한 성능 때문에 그는 목숨을 구하고 오늘 또다시 태양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후후… 연자선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용궁에서 놀고 있었을 게야."
사마강은 힘차게 동천(東天) 위로 치솟는 태양을 응시하며 간밤의 악몽을 잊어 갔다.
한데 태양이 솟아오른 수평선 위로 또 하나의 붉은 기류가 모습을 보였다.
"아니, 또 하나의 태양이 떠오른단 말인가?"
사마강은 놀란 마음에 안력을 높였다.
붉은 운무가 스물거린다. 사마강의 배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태양이 또 하나 있을 리는 없기에 그는 오래도록 운무를 지켜보았다.
운무가 엷어지며 흐릿한 산(山)의 그림자가 나타났다가는 다시 짙은 운무에 덮여졌다.
"아아, 섬이다!"
그는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조난당한 사람도 아니건만 그는 환호하며 외쳤다.
큰 바다를 가로질러 온 사람이 아니면 그의 이 같은 심정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배는 살같이 붉은 운무를 꿰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사마강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폭도(萬瀑島)가 아닐까? 어부들의 말대로 엿새 이상을 항해해 왔으니, 방향과 거리만 맞는다면 만폭도가 분명해."
연자선은 섬 주변의 암초 사이를 요리조리 미끄러지며 섬 가까이로 다가섰다.
"응? 이 소리는?"
사마강은 연안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진동에 사뭇 긴장되었다.
우르르릉-!
섬 전체가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운무에 가려진 섬이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사마강은 운무를 헤치고 점차 섬 인근에 다다랐다.
갑자기 시야가 확 트여졌다. 운무가 사라진 것이다.
동시에 넓이가 수십 리에 달하는 거대한 섬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아직도 우르릉거리는 굉음은 계속되었다. 굉음의 진원지는 섬의 중앙이었다.
섬 중앙으로 거대한 봉우리 하나가 하늘을 찌르며 솟아올랐다.
사마강은 해변에 연자선을 올렸다.
해변의 백사장은 너무도 깨끗했고, 백사장 건너 기암괴석 사이로 기화이초(奇花異草)들이 피어 있었다. 인적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만한 섬이라면 사람이 살 만한 곳인데, 어째 배 한 척 보이지 않는 것일까?"
사마강은 해변을 거닐며 주위를 쓸어 보았다.
이 순간 그는 희미한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날렵한 발자국 소리였다.
"……?"
사마강은 경직됐던 몸을 풀며 피식 실소를 짓고 말았다.
"하하… 사슴이었잖아?"
한 마리 사슴이 마치 집으로 돌아온 주인을 반기듯 사마강에게로 달려온 것이다.
사마강은 사슴의 등을 어루만지며 섬을 둘러보았다.
무성한 수림과 깨끗한 자연은 전혀 인간의 손에 의해 침해되지 않은 태고의 모습 그대로였다. 태초에 만들어진 오랜 평화가 깃들여져 있는 기이한 섬이었다.
사슴은 그의 등을 쓰다듬는 인물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듯 그에게 등을 비볐다.
"흠, 만폭도가 틀림없다 해도 이 넓은 섬 어디에서 검제(劍帝)를 찾는단 말인가?"
사마강은 수림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사슴이 그의 뒤를 쫓았다.
깨애액- 깨액-!
무성한 숲에는 작은 원숭이들이 평화스럽게 살고 있었다. 그들 역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섬에서 지내다 오랜만에 희귀한 동물을 발견한 듯 깩깩거렸다.
사마강은 수림을 거닐면서 굉음이 울려 퍼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우르르르릉-!
미미하게 지축을 흔드는 굉음의 정체가 사뭇 궁금했다.
"흐음, 만일 섬에 위험이 닥치는 소리라면 짐승들이 난리를 피었을 텐데… 그렇다면 위험스런 소리는 아닌 것 같군."
사마강은 어기충소로 몸을 날려 수림 위로 치솟았다.
굉음은 산봉우리 쪽에서 들려 오는 것도 같았다. 그는 산 위로 뛰어올랐다. 수림 위를 미끄러지듯 날아가며 아무도 없는 고요한 섬을 횡단했다.
태양빛이 그의 발끝을 쫓았을 때 그는 이미 산중턱에 이르러 있었다.
우르릉거리는 진동이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았다. 그러나 역시 먼 곳이었다. 그는 속도를 높여 산 정상으로 올랐다.
정상에서 보는 섬은 의외로 컸다.
수많은 능선과 구릉이 부챗살처럼 뻗어 있었다. 뱀의 등같이 굽어진 계곡이 완만하게 해안까지 펼쳐졌다.
의문스런 굉음은 더욱 심해졌고, 진원지는 산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듯싶었다.
"음, 저쪽인 것 같군."
그가 시선을 돌린 남쪽 산 벼랑 아래로 자욱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차 한 잔을 마실 시간 동안 유성처럼 내달렸다.
우르르릉-!
귀가 멍멍하도록 웅장한 소리가 더해 갔다. 벼랑 전체가 금세라도 붕괴될 듯이 뒤흔들렸다.
사마강은 단애(斷崖) 끝에 이르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쏟았다.
"오오……!"
굉음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거대한 폭포(瀑布)였다.
콰르르릉-!
폭이 자그만치 삼백여 장에 이르는 거대한 폭포가 벼랑 아래로 떨어지며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물기둥이 떨어지며 형성되는 물보라로 인해 주변은 항상 비에 젖는다.
중원(中原)에서 가장 거대한 폭포는 남만의 구룡폭포(九龍瀑布)이다. 그러나 구룡폭포조차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참으로 믿기 힘든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폭포가 이 멀리 외딴 섬에 존재해 있었던 것이다.
"아, 틀림없다. 만폭도(萬瀑島)! 이곳은 틀림없는 만폭도다. 이토록 거대한 폭포가 존재해 있기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울 수 있는 것이다."
사마강은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경신술을 펼쳐 웅장한 폭포수 아래로 접근해 갔다. 물안개 때문에 근접하기도 어려운 이 거대한 폭포 아래에는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소(沼)가 있었다.
물기둥의 추락에 괴로운 듯 물보라를 뿜어 내는 소는 희뿌연 거품으로 덮여 있었다.
사마강은 너무도 습한 공기에 호흡마저 막혀 왔다.
"이곳이 분명 만폭도라면 검제는 폭포 어딘가에 계실 것이다. 그분이 굳이 만폭도를 찾아온 이유는 이 거대한 폭포 때문일 테니까."
그는 나름대로 판단했고, 그 판단은 아주 정확했다.
그의 시선은 폭포수와 약간 떨어진 매끄러운 암벽 가에 굳어 버렸다. 누군가를 찾아 낸 것이다.
벌거벗은 노인이 석상처럼 암벽 옆에 앉아 있었다.
'아, 저분이 검제인가?'
사마강은 가슴이 요동치는 환희와 흥분에 젖었다.
그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천하쌍제 중 의제와는 아주 우연하게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검제는 그가 원해서 찾게 된 기인이었다.
그는 상대가 검제가 아닐 수도 있기에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며 큰소리로 외쳐 불렀다.
"노인장!"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폭포 소리 때문에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군.'
그는 가까이 다가서며 삼 성의 공력을 주입해 외쳤다.
"노인장!"
폭포의 굉음을 뚫고 그의 맑은 외침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여전히 상대방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마강은 비로소 노인이 좌화(坐化)된 몸임을 깨닫게 되었다. 발밑에 녹슬은 검의 파편을 늘어놓은 이 노인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시신이었다.
스스로의 내력(內力)을 최후까지 소모하다 강시( 屍)가 된 시신은 매끄러운 암벽에 몇 줄의 글을 남겨 놓았다
<검명(劍鳴)이 제아무리 커도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만은 못하고, 검파(劍波)가 제아무리 드세어도 폭포수의 기세만 못하도다.>
다분히 탄식 어린 글귀로 시작되는 유서를 읽으면서 사마강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노부는 천고제일의 검결을 얻기 위해 천하의 수많은 검경(劍經)을 읽었도다.
그리고 백 년 세월을 검학(劍學)에 몸담아 왔도다. 모두가 노부를 일컬어 고금제일검(古今第一劍)이라 일컬었으나…….>
그의 손끝은 채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여기서 끝나 있었다.
전설상의 기인 검제(劍帝)!
중원검도의 제황(帝皇)이자 의제의 죽마고우였던 검제는 폭포수를 역행시킬 수 있는 검학을 연구하다가 죽어 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폭포수를 꺾지 못했다.
대자연의 거대한 힘을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하늘을 향해 도전하겠다던 자신의 집념과 목표를 이루지 못하자 죽음을 선택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애석한 죽음이었지만, 검제 그 자신으로서는 부끄러운 죽음이었다.
고금제일로 불리운 그였지만 대자연의 힘 앞에서는 한낱 미약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사마강은 검제의 시신 앞에 구배를 올려 죽음을 애도했다.
비록 검제에게 의발(衣髮)을 이은 제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비급을 품고 있는 이상, 제자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마강은 거대한 폭포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에 정광이 번득였다. 그것은 하늘에 도전하려는 투지였다.
"검제 노선배님! 이 후배의 생각이 꿈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노선배님께서 이루지 못했던 포부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아, 하늘에의 도전이었다.
검제는 검을 부러뜨리며 죽었으나 헛된 죽음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사나이다운 집념과 포부를 남긴 것이다. 그리고 그 웅지(雄志)는 다음 세대에 전해졌다.
콰르르릉-!
사마강은 그 순간부터 검제가 앉았던 바위 옆에 앉았다. 그는 한 자루의 검을 빼들고 폭포수를 겨냥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검은 허리에 찰 수 있는 연검(軟劍)으로, 황궁의 보고에서 얻은 의형제천검(意形帝天劍)이었다. 아직 그 가치와 위력은 모른다.
검신이 광망을 발하자 물안개 속에 칠채의 무지개가 수놓여졌다.
사마강은 검을 보지 않았다.
검을 폭포수에 겨냥한 채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적과 싸우기 전에 적을 상대하는 듯한 자세였다.
그는 폭포수를 이기기 위한 정신력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마강은 자신의 심득(心得)을 혼신의 힘으로 펼쳐 폭포수를 벨 수 있는가를 판단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와 같은 고수 백 명이 힘을 합쳐도 이 거대한 폭포를 역행한다는 것은 이룰 수 없는 꿈임을 절감했다.
"그렇다. 이것은 검제도 느꼈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토록 고집스러웠던 고금제일검도 좌절할 수밖에 없었겠지."
사마강은 폭포수를 향하던 의형제천검을 거두었다.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정면 대결로는 폭포 귀퉁이의 물 한 조각도 베어 내지 못할 것임을 알고 그는 방법을 바꾼 것이다.
"이런 공격으로는 폭포수를 이길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저 안으로 들어가 동화(同化)되어 그 기세를 얻을 수 있다면, 폭포를 역행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의삼을 벗었다.
단단한 근육으로 뭉쳐진 그의 모습이 물안개 속에 흐릿하게 나타났다.
콰르르르릉-!
그는 쏟아지는 폭포수의 가장자리에 자리를 정하고 앉았다. 그의 머리 위로 가는 물줄기가 힘차게 떨어졌다. 그 압력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으윽! 폭포의 중심권 밖에 이르렀는데도 견딜 수 없구나. 이런 상태라면 중심권에 이르기도 전에 전신이 폭발하고 말겠다.'
그는 그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쏟아지는 거대한 물기둥에 귀가 멍멍했다. 온몸이 저리고 급격히 떨어지는 체온으로 인해 숨이 가빠졌다. 손끝의 감각마저 마비돼 왔다.
'고통을 잊으려 진기로 대항할수록 불리하다. 이 힘을 내 안으로 끌어들이는 거다.'
그는 고통을 잊으며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폭포수의 가공할 압력에 혈맥이 진탕되어 자칫 주화입마로 빠져들 위험한 순간이었지만, 그는 정신을 집중하여 진기를 십이 경맥으로 흘러 보냈다.
그렇게 몇 주천을 하자 호흡이 한결 편해졌다.
수압에 의한 암경에 조금씩 적응된 것이다. 그만큼 그의 내공은 증진되어 갔다.
그는 하루에 일 장씩 폭포수의 중심권으로 이동해 앉았다. 압력은 더욱 가중돼 왔지만 그의 적응력도 대단했다.
한 달이 지났다.
그제서야 사마강은 간신히 폭포수의 중심권 안에 들어설 수가 있었다.
'이 폭포수를 적의 암경(暗勁)으로 생각하는 거다. 그 여력은 수천 명의 절대고수(絶代高手)가 장풍을 발휘하는 것과 동일하다.'
사마강은 거대한 폭포 기둥에 몸을 묻은 채 장심에 전신의 내공을 모으고 장력(掌力)을 쳐올렸다.
그러나 수천만 근의 물기둥이 그의 장력쯤에 밀려갈 리가 없었다.
"으윽!"
그는 수압을 이기지 못하여 크게 내상(內傷)을 입었다. 그는 폭포수 속에서 퉁겨져 나왔다.
"이익!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오기를 부리며 투지를 불태웠다.
세 시진에 걸친 운기조식으로 겨우 내상을 치유한 그는 다시 폭포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차아앗-!"
그는 의형제천검을 빼들고 힘차게 휘저었다. 간신히 그의 검이 물을 베었지만, 그 여력은 점차 폭포의 기세에 밀려갔다. 그는 곧 검을 아래쪽으로 늘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으으, 이리도 강하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듯, 그는 고집스럽게 폭포수와 싸우고 있었다.
어느덧 백 일이 지났다.
태양이 떠오르고 또 지고… 계절이 바뀌어 간다.
사마강은 쉬지 않았다. 백 일이 지난 지금은 거대한 폭포의 여력 속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검초를 거의 능숙하게 시전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그는 천천히 폭포수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젠 진정으로 네놈에게 도전하는 거다. 결코 너를 이길 수 있기 전에는 난 여기를 떠날 수가 없다."
사마강은 아득히 높은 폭포수를 올려다보며 불끈 주먹을 쥐었다.
거대한 폭포수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수천만 근의 수압 속에서도 그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수확이었지만 그는 검제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그는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그에게 용기를 주듯 태양은 밝게 웃고 있었다. 그는 검제의 시신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마지막 도전이다. 이번에도 너를 꺾지 못하면 내 한계를 알고 검제 옆에 뼈를 묻겠다."
그의 앞가슴에 꿈틀거리듯 황금빛 광망이 점차 눈부시게 밝아졌다.
하늘의 주인임을 상징하는 천(天)이란 글자가 가슴에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콰르르릉-!
폭포수를 앞에 둔 사마강의 눈빛은 고요했다. 그리고 담백했다.
무념무상 속에 화두(話頭)를 돌리는 노승처럼 그는 굉음 속에 젖어 있었다.
며칠이 그런 고요함 속에 지나갔다.
밤(夜)이다. 중천(中天) 쪽으로 십오야(十五夜)의 만월이 떠오른다. 물보라에 가려 희뿌옇게 보였지만 둥근 달의 형태는 분명했다.
'달(月)… 저 달을 베어 버리고 싶다!'
그는 묵묵히 고요함을 지켰다.
이 순간 그의 전신에선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아니, 그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자연(自然)과 동화된 듯이 느껴졌다.
점차 십오야의 만월이 중천으로 솟아올랐다.
그것은 검과 폭포와 일직선을 이루었다.
"차아압-!"
사마강은 암반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어느 새 그의 손에는 의형제천검이 쥐어졌다. 그는 달을 겨냥하며 폭포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콰르르릉-!
한순간 천지의 흐름이 멈추어졌다.
하늘을 밝게 비추던 달빛도 멎었다. 그렇게도 거센 기승을 부리던 폭포수 소리가 뚝 그쳐졌다.
세상이 정지되는 순간이었다. 천지는 움직임에서 정적으로 이어져 갔다.
사마강의 전신은 금빛으로 투영되었다. 그의 신형은 서서히 금빛 광망을 뿌리며 검과 함께 치솟았다.
그 순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전개되었다. 거대한 폭포수가 사마강과 함께 하늘로 치솟는 것이다.
폭포수의 역류(逆流)!
마침내 그는 하늘에의 도전을 성사시킨 것이다.
첫댓글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