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 잘나가는주스 <eunju310@hanmail.net>
- 창작실 : 20대 Planet 창작실Ⅱ
- 소설 제목 : 『come up』
- 소설 분류 : 총 60편의 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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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은석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선 강승재와 나.
난 그 긴장감 때문에 질식 해 버릴 것 같다.
손바닥에 끈적끈적한 땀이 배어난다...
" 위에 준후 형 있어? "
은석이를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서준후라는 사실이
은석이가 지독히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서준후라는 사실이
이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
" 네가 서준후 그 새끼는 만나서 뭐하게? "
여전히 피식피식 웃어대며 강승재가 빈정거리듯 말하자 은석이는 얼굴을 찌푸린다.
" 뭐야... 다들. 소리 누나도 형도 왜 준후 형 말만하면 예민하게 굴어? "
...
......
내 손바닥에 고여있던 땀이 흘러내릴 것만 같다.
말하지마.
말하지마...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제발......
...
" 그야 뭐... 걔 하는 짓이 좀 재수 없어서 그러지^^ "
강승재는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더니 하하 소리내어 웃고
은석이는 그 대답에 더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더니 내 쪽으로 성큼 다가온다.
" 준후 형 없어? "
" 으응... 아르바이트 때문에 조금 전에 갔어. 어디서 일하는지 가르쳐 줄까? "
은석이에게 서준후가 아르바이트하는 가게를 알려주는 내내 강승재의 눈동자는 나를 괴롭힌다.
집요하고 비열한 방법이다...
...
......
" 너 나랑 사귈래? "
시덥잖은 말을 해놓고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또 킥킥대는 강승재.
은석이가 남포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사라지자
다시 위로 올라가려는 날 붙잡고 고작 던진다는 말이 저런 말이다.
" 아니, 너랑 안 사귈래. "
" 지은초는 서준후가 데려갔으니 난 지은초 이미테이션이라도 갖고 싶어. "
" 누가 누구를 데려갔다는 거야? 말조심해. "
" 아까는 내 입 한 번 막아보려고 발정 난 암캐 마냥 질질 싸더니...... 큭큭... 벌써 맘 변했어? "
...
탁―
꽤 많은 힘이 실린 내 손이 어이없게도 공중에서 잡혀버린다.
내가 뭐라 할 틈도 없이 건물 입구 쪽에서 햇빛촌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자
내 손을 놓고 유유히 사라지는 강승재.
돌아서면서 나를 향해 비웃어 주는 일도 강승재는 잊지 않는다.
은석이와 강승재가 친척이라는 사실은 잘못 맞춰진 퍼즐조각처럼 이상하게 느껴진다...
뭔가가 이상해...
내 뒤로 현우 오빠와 소리 언니가 다가선다.
강승재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소리 언니에게 모든 걸 묻고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겁이 난다.
혹시라도 지금껏 지켜온 내 믿음이 모래성처럼 무너질까봐 겁이 난다...
...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고 길을 건너려 횡단보도에 섰다.
" 같이 가자. 데려다 줄게. "
" ... 세진이 데려다 줘요. 나는 혼자 갈래요. "
횡단보도 앞에서 태윤 선배와 함께 서 있으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신호등의 빨간 불과 파란 불이 나를 감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마치 파란 불일 때 이미 다른 곳으로 뛰어가 놓고 여기서 뭘 하느냐고 내게 묻는 듯 하다...
나는 선배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차도에 한 발을 내려놓는다.
" 제발 내 마음까지 네가 바꾸려고 좀 하지마. "
...
한 순간 공기의 흐름이 느려지고
나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의 숨소리까지 멈춰버린다.
세진이를 돌아보고 싶은데... 그래야 하는데...
그 전에 먼저 내 손목이 태윤 선배에게 잡혀 길 건너편으로 끌려가고 있다.
" 놔요. 놔! 이게 뭐예요! "
선배는 내 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택시를 잡고 나를 밀어 넣는다.
그 동안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단호함.
언제나 지나친 관대함이 날 힘들게 했는데... 선배는 이제 더 이상 모호하지 않다.
...
택시 안에서 선배는 뭔가에 화가 난 듯 창 밖만 바라본다.
그리고 나는 그런 선배의 침묵을 깨어버릴 만한 용기가 없다.
끝내 돌아다보지 못한 세진이의 얼굴이 맘에 걸릴 뿐.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우리는 서로 아무런 말이 없다.
내가 먼저 모질게 등을 보이며 돌아선다.
항상 이렇게 내가 먼저 선배에게 등을 보인다......
" 네가 요즘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지 알아? 늘 울 것 같아. 조금만 건드리면 금새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
나를 바라보는 사람의 야윈 한숨 소리.
내가 바라보지 못한 사람의 지친 신음 소리.
그리고 이 순간 내 입술을 뚫고 나오는 거짓말 같은... 울음소리.
선배는 내 뒤로 와 어깨를 짚으며 나를 돌려세운다.
따뜻한 손.
내 볼을 감싸고 내 울음을 감싸쥐는 손.
7월의 습하고 더운 바람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선배의 이런 행동이 더 나를 무력하고 나약하게 만든다.
여기서 무너져 버릴 것만 같다......
나는 울음을 그치고서 선배의 손을 내친다.
별다른 힘이 실려있지 않던 선배의 손이 슬프게도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또 한 번 선배를 밀어내고 돌아서려는 나.
슬펐던 선배의 손이
또 한 번 나를 붙잡고 있다.
슬프고 또 슬픈 선배의 손이
나를 놓지 않고
나를 보내지 않고
나를 그대로 당겨 품에 안아...
...
......
입술이 닿아버린다.
42.
아찔할 정도로 빠르게... 심장이 뛰고 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내 몸 속을 돌면서 나를 지탱해 주는 붉은 피가 놀랄 만큼 뜨거워진다.
똑똑.
조심스런 노크.
그것이 무엇에 대한 노크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멍하니 열려버린 입술 사이로
말캉하고 부드러운 것이 밀려든다.
아프지 마.
울지 마.
내 상처를 핥고 만져주는 위로.
그렇게 내 구석구석을 헤매다... 잔뜩 위축되어버린 나를 찾아내고
천천히 엉켜 들어 나를 휘감는다.
하지만 그 뿐이다...
나는 그의 입술을 열고 들어가지 못한다.
나는 그를 받아들이면서도 나를 쉽게 밀어 넣을 수가 없다.
사랑을 받으면서도 줄 수 없는 나.
...
......
선배도 그것을 느꼈을까.
천천히 입술을 떼고 내 머리를 팔로 감아 나를 껴안는다.
선배의 어깨에 입술을 묻은 나는 힘겹게 입을 연다.
열기에 들뜬 내 목소리는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울음이 반쯤 섞여있다.
" 왜 밀어내지 않았냐고, 왜 뺨 한 대 때리지 않느냐고 그런 거 묻지마. 그런 거 물어보면... 가만 안 둘 거야...... 죽여 버릴 거야... "
" …… "
" 사랑이 변해. 하루에도 여러 번... 자꾸만 변해. 거짓말이 아니야. 선배를 속였던 게 아니야. 내가 계속 변해... 나는 또 변할 거야. 그러니 오지마. 나는 가지 못할 거야. "
...
나는 뒤돌아서 뛰었다.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어 비겁하게 귀를 막고 뛰었다.
내가 뛰는 만큼 돌아서 멀어져 주기를.
기다리지 말기를.
...
사랑이 자라.
누군가의 관심과 걱정을 받으며 자꾸 자라나.
선배의 마음으로 자란 사랑을 나는 다른 곳에 심어.
처음으로 사랑을 이끌었던 건 선배잖아.
나는 사막 같은 가슴으로 선배의 사랑만 받았을 뿐 키워내지 못했잖아.
내 생애 첫 키스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타인과의 소통.
최초의 의사소통.
그것이 내 첫 키스의 느낌이었다고 말할래...
내가 아닌 사람과 말없이 소통하는 가슴 저리도록 아픈 이야기였다고......
...
......
나는 테잎을 감았다.
그리고 잘라내었다.
이제 내 머릿속에는 오늘의 기억이 없다.
나를 오랫동안 지켜주던 옅은 비누 향의 그림자가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
......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바다.
기분 좋은 소금 냄새를 품은 바람은 내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준다.
나는 지금 '달래섬'으로 가고 있다.
2박 3일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일정.
이번 여행이 뭔가 내게 큰 선물을 해주길 바라며 나는 마음을 다잡는다.
태윤 선배는 오지 않았지만
오지 않은 선배의 마음까지 헤아려
나는 웃을 것이다.
햇살처럼, 물처럼 나를 키우고 자라게 했던 사람을 위해 웃을 것이다...
...
" 와― 근사하다. "
배에 내려 도착한 섬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 섬의 아담한 학교도.
우리를 환영하며 달려나오는 저 작은 꼬맹이들도.
하얗게 부서지는 태양만큼 모든 것이 아름답다......
43.
" 안녕하세요∼ "
해변 가에 작은 천막을 치고 오르간을 앞두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꼬마녀석들.
우리가 '달래섬' 에 온 것은 저 섬 아이들을 위해서다.
몇 명은 학교 안으로 들어가 점심 준비를 하고
몇 명은 이 곳으로 나와서 아이들과 오후를 보낸다.
나는 밖으로 나와 오르간을 치게 되었다.
사회를 맡은 것은 서준후.
서준후는 초등학교 때나 불렀을 법한 노래의 악보를 나에게 건네 주고
나는 열심히 그것을 쳐내고 있다.
곁눈질로 잠깐 살펴본 서준후의 표정은 밝고 따뜻하다.
한참 노래를 따라 부르던 아이들이 소란스러워진다.
왜 그러나 둘러보니 현빈이와 세진이가 무언가를 한아름 들고 걸어나오는 것이 보인다.
" 다들 점심 드세요∼ "
수도 없이 땀을 쏟아내고 있는 세진이의 표정이 경쾌하다.
세진이는 나에게 자신은 괜찮으니 태윤 선배의 마음을 받아주라는 말을 했었다.
나로 인해 태윤 선배와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기회까지 놓쳐버렸는데
세진이는 그저 담담하다.
어쩌면 슬픔이 지나쳐서... 울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 어머, 정연아 큰일났어!! "
백사장 중간쯤에 서있는 현빈이와 세진이가 호들갑을 떤다.
나는 점심 설거지를 하고 있다가 손에 거품을 묻힌 채로 냅다 달렸다.
" 왜? 왜 그러는데? "
서준후도, 현우 오빠도 다들 고개를 숙인 채 뭔가를 보고 있길래 덩달아 나도 고개를 푹 숙인다.
그 순간 내 몸이 공중으로 붕 뜬다.
" 아악! 뭐야!! "
" 하나, 둘, 셋∼ "
풍덩―
내 몸을 휩싸는 파란 바다.
" 정연이 보기보다 엄청 어리버리 하네∼하하. "
현우 오빠를 필두로 하여 모두가 장난 끼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놀려댄다.
그러고 보니 모두들 몸이 젖어있다.
내가 마지막 희생양이란 말인가 이런 나쁜 -_-
" 다 죽었어!! "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흐르는 여름에
미친 듯 백사장을 헤집고 다니는 우리들.
꼬마녀석들이 만들어놓은 모래성을 밟았다가 된통 꼬집히기도 하고
설거지 헹굼물을 뒤집어쓰기도 하고
넘어져서 모래 무덤에 파묻히기도 하고
그렇게 시끌벅적한 오후의 한 때가 유쾌하게 흘러간다.
...
......
" 아악!! 진짜로 큰일났어!!! "
현빈이의 고함소리.
하지만 이제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 그만 좀 하자. 탈진할 것 같단 말이야 -0- "
나는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세진이와 손을 잡고서 물을 마시기 위해 학교로 들어간다.
교실 문을 열려던 순간 나와 세진이를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든 현빈이의 비명 같은 외침.
...
" 소리 언니가 물에 빠졌단 말이야! 어떻게 해!!!! "
44.
나보다 조금 늦게 뒤따라 걷고 있던 서준후가 몸을 돌려 해변으로 달린다.
발이 땅에 닿는 시간조차 아까운 듯 서준후의 발은 급하게 허공을 가르고
하얗게 질려버린 그의 얼굴에선 안타까운 눈물 같은 땀이 흘러내린다.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다로 뛰어든 서준후의 몸놀림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다.
상대가 소리 언니라서 일까...
서준후는 필사적이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서준후를 기다리며
바다 속으로 사라진 소리 언니를 부른다.
말 없이 계속 혼자 있던 소리 언니를.
언제나 눈가가 젖어있던 소리 언니를......
...
" 언니!! "
세진이도 나도, 현빈이도 모두 한 목소리로 소리 언니를 부른다.
서준후의 품에 안겨 온 소리 언니의 얼굴은 파랗게 보일 만큼 창백하다.
백사장에 누워서도 의식이 없는 소리 언니.
" 소리야. 윤소리!! 눈 떠!!! "
서준후의 목소리는 거의 절규에 가깝다.
언니의 심장 부근을 손으로 눌러대다 서준후는 언니의 입술을 통해 숨을 불어넣고...
그러기를 서너 번.
...
콜록콜록.
기침소리와 함께 소리 언니의 입이 열리고 물이 쏟아진다.
그와 동시에 소리 언니를 품에 안는 서준후.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서준후는 언니의 머리를 꼭 안고 누구에게 말하는지도 모를,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한다.
언니의 젖은 머리칼을 따라 서준후의 눈물이 자꾸 떨어진다.
보석 같은... 서준후의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가슴이 시리다.
누군가 두 손으로 내 심장을 쥐고 비트는 느낌에 아프고 또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다...
...
어두운 복도.
나는 어렵게 구한 꿀을 탄 따뜻한 우유를 쟁반에 올려놓는다.
소리 언니가 고열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까봐 걱정이 된다.
그런 언니에 대한 걱정으로 서준후가 힘들어 할까봐 걱정이 된다......
교실을 개조해 만든 몇 개의 방중에서 유일하게 난로가 있는 방.
그곳에서 옅은 불빛이 새어나온다.
나는 문을 열려다가 두런두런 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잠시 주춤거린다.
[... 내가 너한테 고마워 할 줄 알았어? 나가. 네 얼굴 보고싶지 않아...]
불안정하고 예민한 소리 언니의 목소리... 아마도 저 말의 상대자는...
[그만 좀 해. 너 때문에 준후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너 진짜...]
[형, 나가자 ... 소리야, 잘 자.]
서준후 말고 한 사람이 더 있구나.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나오는 두 사람.
나는 괜히 복도 모퉁이를 돌아서 숨는다.
아, 이런 내가 왜 숨는 거지-_-;
달빛에 어렴풋이 드러나는 윤곽을 보아하니 한 사람은 서준후가 확실하고
또 한 사람은 현우 오빠 인 것 같다.
" 너 언제까지 윤소리 저러는 거 두고만 볼래? 그냥 다 말해. 이게 뭐야 도대체! "
화가 난 듯한 현우 오빠의 목소리.
나는 현우 오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더 귀를 쫑긋 세운다.
" 은초 두 번 죽이고 싶지 않아. 그게 승재를 위해서도 더 좋은 거고...... "
승재라면 강승재?
뭔가 중요한 얘기인 것 같은데...이런 젠장할...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 그럼 너 평생 누명 쓰고 살래? 저 원망 평생 들으면서 살래? 어? "
...
......
" ...그래. 나 혼자 욕먹고 말 일이라면 그렇게 할래. 그것말고는 방법이 없어...... "
45.
나는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현우 오빠와 서준후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현우 오빠는 다른 사람과 달리 서준후를 조금 싸고돈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나보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현우 오빠는 알고 있는 것이다......
조금 전에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 보려다가 난 우유가 식어간다는 것을 느끼고 급하게 교실 문을 열었다.
언니는 우두커니 창 밖을 보고 있다가 나를 보고 살짝 웃는다.
나는 언니의 손 끝 즈음에 쟁반을 내려놓는다.
" 따뜻한 우유 먹고 자면 잠 잘 온대요. 드세요 언니. "
" 고마워... "
언니의 안색은 아직도 창백하다.
그런 언니를 보며 서준후는 속으로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안아주지 못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
" 언니, 물에는 왜 들어간 거예요. "
" 어떤 꼬마가 파도에 튜브 밀려갔다고 어찌나 울어대는지...그거 가지러 가다가...^^ "
" 언니 수영은 할 줄 알구요? "
" 아니. "
" 대단한 용기이십니다-_-^ "
" 네가 봐도 그렇지? ^^; 헤헤... "
언니는 이불을 끌어다 내 무릎에도 덮어준다.
잠시 우유가 담긴 컵을 만지작거리던 언니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연다.
" 정연아. 은초 죽던 날 얘기해줄까... "
...
서준후.
윤소리.
지은석.
그리고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사람.
은초 언니의 이야기.
막상 소리 언니가 이야기를 해준다고 하니 들을 자신이 없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언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잠시 웃다가 내 손을 잡는다.
" 들어줘...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못한 얘기야...... 나 잔인하지? 널 준후 곁에서 떼어놓으려고 말하는 거야...^^ 지금까지는 준후만 생각했는데 이젠 네 걱정이 돼... 너도 나처럼 다칠까봐...... "
별이 떨어진다.
내게 단 하나의 별이.
네 심장을 믿겠다는 약속을 어쩌면 지키지도 못할...
그렇게 가슴속의 내 별이 떨어져 내린다.
...
......
" ...그 때도 오늘 같은 이런 무더운 날이었어. 은초는 아침부터 안색이 좋지 않았어.
그런데 체육 시간이 지난 다음부터 은초가 보이지 않더라...
나는 왠지 불길한 예감에 미친 듯 온 학교를 다 뒤졌어. 그런데도 은초는 없었어.
은초가 사라진 지 1시간이 더 지났을까.
난 체육 시간 중간에 체육관 창고로 들어가는 은초를 본 것 같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창고로 달려갔어... 그리고... 그곳에서 은초를 찾았어.
...
은초는... 매트 위에 누워 있었어. 그 매트 위에는......
거의 피바다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많은 피가.. 은초의 몸에서 흐르고 있었고......
나는 그 때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거야...
은초는 너무나 아팠고 잠시 쉬기 위해서 창고에 갔다가... 곧 하혈이 시작되었다는 걸.
나는 교무실로 달려가 제일 믿을만한 선생님 한 분을 부르고 은초를 병원에 보냈어.
하지만.....
은초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죽어버렸어......
...
나는 그때 은초의 곁에 있지도 못했어. 나는... 계속 체육관 창고에 있었거든......
은초를 더 아프게 할 사람들의 시선과 손가락질이 싫어서...
나는 은초의 피가 묻은 매트를 쓰레기 소각장에 버리고... 창고 바닥에 묻은 피를 닦아내려
미친 듯 걸레질을 했어.
자신의 일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서... 끝내 나조차 부르지 못한 내 친구를
그렇게 오래도록, 자신이 죽을 만큼 많은 피를 흘리면서도 말하지 않은 그 마음을...
지켜주는 것이... 내 도리라고 생각했거든......
...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 마음 여린 애가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을까.
어제는 자신의 아기를 지우고 오늘은 죽어 가는 자신을 보면서... 은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은초를 유독 잘 따르던 은석이는 은초의 사인(死因)이 과다출혈이라는...
그것도 중절수술로 인한 것이라는 걸 알고는 거의 그 자리에서 돌아버렸고
은초의 부모님은 딸의 죽음을 실컷 슬퍼하지도 못하신 채 도망치듯 시골로 내려가셨어... "
...
......
" 나 기억이 나버렸어.... 은초가 죽던 날, 아니라 애써 믿어오던, 내 기억에서 애써 지우려 하던 일이...... "
" …… "
" 그 전날 나 준후 집에 찾아갔었어...... 그리고 현관문 틈 사이로 은초의 신발을 보았어. 그리고 들었어...... "
...
......
" …… "
...
......
" 아기를 지우라고 말하는...... 준후의 목소리를. "
46.
내 별이 부서진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 버린다.
- 그럼 너 평생 누명 쓰고 살래? 저 원망 평생 들으면서 살래? 어?
한 사람은 그것이 누명이라 말하는데...
- 그리고 들었어...... 아기를 지우라고 말하는...... 준후의 목소리를.
한 사람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한다.
- 진실은 사실과 달라. 사실은 진실과 달라.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한 사람은 진실은 다른 곳에 있다고 노래하는데
- 소리가 입을 열지 않아서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내 느낌에 서준후 짓이다... 준후가... 은초 그렇게 되게 만들었어...
한 사람은 그 노래가 거짓이라고 말한다.
...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 걸까.
까만 먹구름이 드리워진 것처럼 한 치 앞도 분간해 낼 수가 없는데......
원인도 모를 눈물이 계속 흘러내린다.
그동안 소리 언니가 겪었을 아픔이 내 피부 곳곳으로 스며든다.
얼마나 아팠을지, 또 얼마나 울었을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는 그 날밤 한 숨도 잘 수가 없었다.
진실을 찾는답시고 죽은 사람의 치부를 들추어내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끝내 잠들 수가 없었다......
...
......
둥그런 고무 통에 물을 붓고 커다란 빨래 감과 이불을 넣고 밟아댄다.
오늘은 어제보다 훨씬 더 바쁘다.
학교 건물 대청소도 해야 하고 꼬마들의 도서관을 위해 책 정리도 해야 한다.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책을 한 권 한 권 쌓아올리는 서준후의 자세가 진지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먼지 마신다고 가까이도 못 오게 하면서
자신은 회색 먼지를 잔뜩 뒤집어써서 눈만 보일 지경이다......
미워할 수 없는 사람.
미워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는 사람.
나는 서준후가 바닥으로 떨어뜨린 책을 주워주려 다가갔다가
눈이 잠시 마주치자 얼른 그 눈을 피해버린다.
내 마음을 다 읽어버릴 것 같아서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다.
세진이와 함께 빨래를 끝내고 다 널어놓고 나니 시간이 조금 남는다.
괜히 밖으로 나가 해변을 서성인다.
내 발끝까지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는 파도.
그 파도에 내 심장을 던져버리고 싶다.
사람의 몸 중에서 유일하게 암 세포가 생길 수 없는 곳이 심장이라고 했어.
암 세포는 찬 기운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늘 뛰고 있어, 따뜻한 심장에는 암이 생길 수가 없다고.
너는 따뜻한 사람이잖아.
다른 사람을 해치고 너를 해칠 암 세포 따위 자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너, 심장이 멎어버린 거니...
아니면 너도 모르게 누군가 너를 병들게 한 거니......
...
쏴아쏴아―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파묻으니 아주 멀리서 들리는 냥 파도 소리가 잦아든다.
별이 진다.
환한 대낮, 떠오르지 말았어야 할 별이 멋대로 태어나 내 속에서 멋대로 죽어간다...
이제 별은 곧 수면 밑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
......
조그맣게 피워놓은 모닥불 위에서 큼지막한 조개들이 익어간다.
익기 시작하면서 조개들의 입이 벌어지자 한 쪽 껍데기를 떼어내고 매운 고추 다져놓은 것을
먹기 좋을 만큼 뿌려준다.
맛있기는 한데 약간 짜다.
나는 옆에 있던 생수 병을 들어 한 입에 털어 넣었다.
" 야야야! 은정연! 그거 술이란 말이야!! "
햇빛촌의 다른 친구들이 말리기 시작한 건 내가 그 물을 다 삼켜 버린 뒤였다.
나는 몰랐다는 듯이 몇 번 켁켁 거렸지만...
혀끝에 닿는 순간 그것이 물이 아닌 걸 알고 있었다.
식도를 뜨겁게 데우며 지나간 알콜은 내 몸 속으로 들어가 혈관을 확장시키며
잔뜩 긴장해 있던 나를 나른하게 풀어버린다.
나는 조개구이 몇 개를 집어들고 소리 언니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언니는 어제와 비슷한 자세로 꼬마 몇 명과 앉아있다.
빨갛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보자 정색을 하는 소리 언니.
" 정연아, 술 마셨어? "
" 네... "
더운 방안에 오니 갑자기 취기가 돈다.
어질어질... 제대로 몸을 가누는 것이 어렵다.
" 언니... 왜 그랬어요? 왜 나한테 말했어요... "
" 정연아...... "
" 왜 말했어요... 나 그냥 몰랐으면 더 좋았을 텐데...... "
이번 여행이 좋은 추억이 되기를
좋은 선물을 받아갈 수 있기를 그렇게 바랬는데
내게 온 선물은 고작 이런 거야......
" 네게 미안했어... 햇빛촌 심사하던 날 피아노 앞에 앉아 울먹이는 너 보면서... 나 너한테 너무 미안했어...... "
" 그럼 그냥 미안해하기만 하면 되잖아요. 어떻게 해요... 나 어떻게 해요...... "
" …… "
...
......
" 그래도 좋은 걸... 그래도 준후 오빠가 좋은 걸. 아직도 믿을 수가 없는 걸...... "
...
......
천천히 내 몸이 아래로 무너져 내린다...
...
......
너를 지켜줄게.
세상 사람 모두 네게 돌을 던진다고 해도... 그 돌 다 내가 맞아 줄게.
이 고된 길도 네가 선택한 것이라면 나는 그저 아무 말 하지 않을게.
다른 사람의 물과 햇살을 빌려 네 마음의 모래가 흙으로 변했고
그렇게 해서 키워낸 사랑이 바로 너야.
그렇게 쉽게 시들도록 하지 않을 거야.
별이 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나를 믿어 줘......
47.
내 이마에 뭔가 서늘한 것이 와 닿는다.
누군가의 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 듣지 못하는 너도 아프겠지만 말하지 못하는 나도 아프다 임마... 하지만 그게 모두를 위하는 거라면...... 너하고 나, 조금만 더 아프자...... 미안하다... "
누구의 목소리...?
이건 꿈이야? 뭐야......?
" 잘 자라 정연아... "
불을 끈 것일까. 곧 모든 것이 아득해진다...
...
......
얼마나 잔 것인지 눈을 뜨니 아침이다.
소리 언니와 이야기를 나눈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꿈도 아닌 이상한 기억을 제외하고는.
대충 세수를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한창 짐을 꾸리느라 바쁘다.
" 은정연 일어났네∼ "
제일 먼저 나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세진이와 현빈이.
어쩐지 그 녀석들의 표정이 조금 요상하다.
생글생글 굉장히 신나는 표정.
떠나는 날인데 섭섭하지도 않나...
" 야, 너 어제 장난 아니더라 킥킥... "
나는 장난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현빈이를 바라보다 저 쪽 끝에서 걸어오는 서준후와 눈이 마주친다.
갑자기 확 인상이 일그러지는 서준후.
예전에는 한 쪽 눈만 찡그렸는데 이번에는 아주 온 얼굴 전체가 다 구겨진다.
인사를 하기도 전에 서준후가 번개같이 지나가 버리고
" 서준후 왜 저래? "
황당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다 세진이가 더듬더듬 입을 연다.
" 진짜 기억 안 나? 너 어제 난리도 아니었단 말이야. "
" 내가 뭘 어쨌는데? "
세진이가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숙이자 현빈이가 대신 온 지구가 떠나가라 큰 목소리로 말한다.
" 휘청휘청 걸어나오더니 준후 오빠 뒤통수를 팍 후려치질 않나, 똑바로 살아라는 둥, 왜 여러 사람 울리냐는 둥 너 장난 아니었어. "
...
맙소사.
맙소사도 이런 맙소사가 없다-_-;;
" 그래도 준후 오빠쯤 되니까 저 정도하고 넘어가지 다른 선배였음 너 죽었어.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만 찍찍 해대고... 푸하하! "
현빈이가 저렇게 놀려대는 데도 나는 아무런 반박을 할 수가 없다.
다만 이제부터 서준후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걱정에 하염없이 한숨만 내쉴 뿐-_-
" 그래도 너무 걱정 마. 준후 오빠 화 안 났어. "
그나마 세진이가 터지는 웃음을 참아가며 나를 위로한다.
내가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자학하자 동그란 눈을 뜨고 내 어깨를 붙잡는 세진이.
" 선배 화 안 났다니까. 그래도 너 넘어진다고 업고 교실까지 데려다 줬어. "
...
아... 나도 모르게 그런 엄청난 신세를 지다니...
기억이나 좀 나면 좋으련만...
어째서 그 중요한 순간이 기억나질 않는 거야.
...그럼 내가 잠들 때 옆에 있었던 사람이 서준후라는 건데...
그럼 어제 그 꿈도 아닌 이상한 기억 속에서의 목소리가 서준후 일수도 있다는 건데...
내가 무슨 질문을 했길래 말할 수 없다고 했을까.
안개가 낀 것처럼 모든 게 흐릿해서 잘 떠오르지가 않아......
...
나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몇 번 내려치지만 그런다고 해서 기억날 리 만무하다.
잠시 그 생각은 접어둔 채 나는 짐을 챙긴다.
하는 일도 없이 시간만 흘러버렸다.
눈물을 글썽이는 꼬맹이들을 안아주고 사진도 몇 방 찍고
배에 오르니 12시를 지나 어느새 오후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는 길.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떠나올 때의 바다빛깔은 올 때와 다르다.
조금 더 까맣고 흐려 보인다.
내 마음처럼......
...
......
8월이 와버렸다.
나는 '달래섬'을 벗어나 돌아오는 길에 8월을 만났다.
결코 반갑지 않은 손님.
이럴 때는 시간이 정직하다는 사실이 야속하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다음 날부터 나는 학교에 나갔다.
보충수업을 신청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가는 것이기도 했지만
사실 은초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부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아
학교를 가는 것이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누군가 내 옆에 다가온다.
" 여행 재미있었냐. "
힐끔 고개를 돌려보니 은석이가 보인다.
이상하게 은석이와 나는 잘 마주친다.
길거리에서 오다가다 마주친 것도 한 두 번이 아니다.
" 재미있긴... 놀러 갔다 왔나 뭐. 넌 어째 더 탄 거 같다? "
은석이는 인상을 팍 쓰더니 나를 쥐어박는 시늉을 한다.
여러 번의 우연한 만남이 은석이의 마음을 조금씩 열고 있다.
그래서 은석이는 내게 상냥하다...
하지만 은석이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모질게 독이 오른 자신의 칼날로 누구를 베어야 할지......
그래서 가르쳐 줄 수 없다.
혹시라도 강승재가 모든 일을 얘기해버릴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
- 나는 서준후. 남들이 뭐라고 지껄이든지 간에 서준후...
나조차 아무것도 모르던 날에 무조건 서준후를 믿겠다고 재연 오빠에게 말한 적이 있다.
지금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명이라던 현우 오빠의 말을 믿고, 또 믿는 방법 밖에는......
...
" 은정연, 내가 놀라운 이야기 하나 해줄까...... "
생각에 빠져 무심히 걷고 있던 내 팔을 건드리며 은석이가 입을 연다.
은석이의 얼굴에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삐딱한 냉소가 걸려있다...
"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너라면 같이 웃어줄 것 같기도 해서 말하는 거야 ...편지가 왔어. "
나는 나보다 키가 큰 은석이의 얼굴을 보기 위해 한참이나 위로 고개를 뺀다.
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무슨 편지냐고 묻자 한참을 망설이던 은석이가 킥킥 웃어댄다.
...
" 누나 편지... 은초 누나가 쓴 편지...... 내 생일 축하한다는 편지...... "
48.
당황하는 은석이를 거의 반강제적으로 협박해서 따라온 은석이의 집.
아니, 은석이의 집이라기 보다는 은석이 고모의 집.
강승재의 집이다.
은석이를 따라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2층 은석이 방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발견한 노란 편지 하나.
너무나 놀라서 말조차 이을 수가 없다.
" 우리누나, 얌전하기는 해도... 가끔 엉뚱한 짓을 잘 했었거든. 우체국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내 생일날 부쳐달라고 했었나봐. 그 전에 죽을지도 모르고 병신 같이..... "
은석이의 목소리는 어느새 젖어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은초 언니의 편지를 집어든다.
동글동글 귀여운 글씨체.
정성 들여 쓴 듯한 편지.
나도 모르게 그 편지 위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믿을 수가 없어서
믿을 수도 없을 만큼 서러워서
이렇게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곁에 없다는 게 슬퍼서...
자꾸 자꾸 눈물이 난다.
" 주소는 또 어떻게 알았나 몰라... 예전 집으로 부쳤으면 내가 받지도 못 했을 텐데... 죽을지 알았나봐. 귀신같은 짓만 골라하잖아 씨발...... "
나를 위로하려는 건지
자신을 위로하려는 건지
두서 없이 힘들게 이어지는 은석이의 이야기.
눈물에 젖어 모든 게 다 뿌옇게 보이는 내 눈 속에 유독 선명히 들어오는 얼굴.
액자 속 은초 언니.
정말 나를 닮았다.
웃는 모습까지 나와 많이 닮았다...
" 그만 봐. 우리누나 얼굴 닳겠다. 누나 이렇게 만든 새끼... 가만 안 둬. 죽을 때까지 용서 안 해...... "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산 사람을 위해 죽은 사람을 힘들게 하고
또 산 사람을 지키기 위해 죽은 사람의 슬픔을 모른 척 해야 하는 나는......
...
언니 용서해 주세요...
...
......
" 야, 그만 울어... 짜증나! 왜 그렇게 우는 거야!!! 에이씨... 너 여기 좀 있어. 마실 거 갖다줄게. "
은석이는 커다란 발소리를 내며 1층으로 내려간다.
한참 요란한 소음을 내며 무언가를 찾던 은석이가 슈퍼 좀 다녀올게, 하며 큰 소리로 외치고
나는 그런 은석이의 부재를 오히려 반가워하며 실컷 울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이지만
내 친언니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은초 언니가 너무 보고싶다......
언니라면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모든 걸 다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 가르쳐 줘요 언니......
...
......
달칵.
누군가 방문을 여는 소리.
나는 얼른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돌린다.
"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
복잡하게 얽혀버린 인연 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인연.
바로 강승재와 나의 인연이다...
49.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 언니의 편지를 숨긴다.
왠지 무섭다...
" 너 왜 여기 있냐고! "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강승재는 이상하리만큼 화가 나 있다.
멍하니 대꾸도 없는 나에게 화가 난 것인지 내 뺨을 내려치는 강승재.
" 너 정말 뭐 하는 계집애야! 서준후도 모자라서 은석이까지 건들여? 은초한테 배우기라도 했냐? 이 남자 저 남자 집적거리는 거!! "
강승재의 말을 헤아려 보기도 전에 다시 내 뺨이 불에 데인 듯 뜨거워진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입술이 터져 버리고...
왜 이러냐는 말 한마디가 입 밖으로 나와주지 않는다.
온 몸이 꽁꽁 묶인 듯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다.
몇 대를 맞았는지 알 수도 없다.
" 너 정말 죽을래...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야. 너 나 엿먹이려고 이래? "
내게 하는 말 같지가 않다....
강승재의 눈빛이 이상하다.
잔인하게 일렁이는 눈동자는 나를 향하고 있는 게 아니야...
탁―
강승재의 거친 손길에 하복 윗옷 단추가 떨어진다.
몸이 움직이지 않아.
목소리가... 목소리가......
무지막지하게 나를 바닥에 내팽개친 강승재는 우악스러운 힘으로 나를 내리누르고
" 왜 넌 죽어서까지 나를 괴롭히는 거야! 나 그렇게 우습게 만들고 갔으면 됐잖아!! "
내 배를 정확히 내려치는 강승재의 주먹.
숨이 막혀온다.
기절해 버릴 것 같다.
온 몸의 마디마디가 끊어질 듯 아프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는데 강승재의 손이 가슴 부근에 닿는다.
뒷걸음질 칠 수조차 없을 만큼 몸이 굳어온다.
...
......
오른쪽 팔을 마지막으로 내 몸에서 벗겨져 나가버린 내 윗옷.
...
- 은초 두 번 죽이고 싶지 않아. 그게 승재를 위해서도 더 좋은 거고......
...
하나 남은 내 속옷을 풀기 위해 그가 내 등을 아프게 움켜쥔다.
...
- 듣지 못하는 너도 아프겠지만 말하지 못하는 나도 아프다 임마... 하지만 그게 모두를 위하는 거라면...... 너하고 나, 조금만 더 아프자...... 미안하다...
...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딱딱해진 내 몸 때문에 화가 난 강승재가 다시 내 뺨을 후려친다.
...
......
그 순간, 안개가 걷히고 기적처럼
여행 마지막 날 밤, 서준후와 나눈 이야기가 생각난다......
...
......
" 흐흐흑... 흑... "
내 기도가 열리고
숨이 새어 나오고
목에서 울음소리가 터진다.
...
......
갑자기 내 몸을 놓아버리는 강승재.
미친 듯 눈물이 흘러내리는 내 눈과 강승재의 눈이 마주친다.
멀고멀었던 길.
나 혼자 외로웠던 길.
이제 끝이 보이는 길.
입술을 세게 깨물었던 것인지 강승재의 입에서도 피가 새어 나오고 있다.
몰랐으면 했던 일.
나만 없었다면 평생 아무도 몰랐을 일.
이제야 알아버린 일.
나는 반쯤 풀려버린 속옷 사이로 보이는 내 가슴을 더듬더듬 손으로 가린다.
잠시 눈을 꾹 감다가 옆에 있던 내 교복을 던져주는 강승재......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사라져 버린다......
50.
아무리 손으로 옷을 저며도 떨어져 버린 단추 때문에 보기가 좋지 않다.
나는 가방으로 대충 앞을 가리며 길을 걷는다.
내 걸음 걸음마다 쉴새없이 눈물방울들이 떨어진다.
이런 옷차림으로 버스도 탈 수 없어 얼마나 걸었는지
발목이 시큰거린다.
환한 가게 앞을 피해 어둑어둑한 길을 따라 걷는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병신처럼 눈물이 쏟아진다.
눈물 때문에 보기 흉해진 내 얼굴을 사람들이 힐끔거린다.
손이 덜덜 떨려서 가방을 제대로 쥘 수가 없다.
나는 집 근처 편의점 앞을 스쳐 지나간다.
환하게 불이 켜진 우리 집 앞에서 나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한 곳만을 골라 걸어간다.
발목이 시큰거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
목덜미도, 가슴팍도, 배도 빨갛게 부풀어올라 너무나 아프다.
" 은정연...... "
발목이 쓰라려 잠시 비틀거린 사이에 가방이 떨어진다.
" 정연아... "
눈이 부시다.
눈물 때문에 모든 게 다 일그러져 보이는데
오직 저 사람만 눈이 부시다.
" 정연아... 은정연. "
나는 가방을 주우려 몸을 숙인다.
어쩌면 튿어진 옷 사이로 내 속옷이 보였을 지도 모른다.
빨갛게 부풀어 오른 손자국을 봤을지도 모른다.
나는 수치심을 느낀다.
무언가 내 어깨를 감싼다.
마 소재로 된 회색 정장 자켓.
웃어야 하는데, 웃어야 할 것 같은데
입술이 고장나 버렸다.
터진 입술 사이로 피만 새어나온다.
" 오빠... 오빠...... "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한 것인데 엉뚱한 말이 튀어나온다.
세련된 타이 없는 회색 정장.
까만 셔츠.
그리고 끔찍한 내 몰골을 담고 있는 회색 눈동자.
" 준후 오빠... "
그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자켓 옷깃을 여며준다.
갑자기 뒤돌아서 등을 숙이는 이 사람.
나는 그의 목을 천천히 안는다.
그는 나를 업고 천천히 발을 뗀다......
내 눈물이 그의 목덜미를 자꾸 적신다.
나는 눈을 꼭 감았다.
더 이상 그의 셔츠를 젖게 하기 싫었으니까......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감긴 내 눈 안으로 아무것도 파고들지 않는다.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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