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함경도에서 태어나 농사를 짓다가 23세에 이민선을 타고 1906년 하와이로 이주하였습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1909년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윌로우스 (Willows)라는 작은 농촌에서 고국에서의 농사 경험을 되살려 땅을 임대해 농업을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흉년이 들어 빚을 갚지 못했고, 노예나 다름없는 소작농이 되어 수확물의 90%를 땅 주인에게 주어야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미국의 주식 곡물인 밀이 아닌 쌀을 묵묵히 성실하게 재배했고, 조금씩 자신의 땅을 늘려갔습니다.
어느새 400만 평의 땅에서 2만 석이 넘는 쌀을 거두어들여 사람들에게 “캘리포니아 백미 대왕”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피와 땀으로 이룬 재산을 한 가지 목적, 고국의 독립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그는 독립운동의 소식을 전하는 신문사에 인쇄기를 사 주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원에도 아낌이 없이 지원했습니다.
1920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최초의 “윌로우스 한인 전투비행학교”가 설립되었는데 학교부지, 비행기 구매, 학교 운영비 등 거의 모든 자금을 지원해서 대한민국 공군의 큰 뿌리를 마련하도록 도왔습니다.
그 많은 재산을 조국을 위해 사용했음에도 자식들에게조차 자신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바쳤고 그 위대한 업적 앞에서도 겸손했던 이 분은 누구일까요?
그는 바로 미국에서 최초의 한인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하여 한인 군사 훈련을 꾀한 독립운동가 김종림입니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부를 아낌없이 재미 한인들과 조국 독립을 위해 기부했고, 한인 비행사 학교를 설립하여 비록 이국땅이었지만 암울한 시대의 한인들이 기개를 펼칠 수 있도록 헌신했던 진정한 한국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