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진왜란(1592)과 이괄의 난(1624) 사이의 역사적 사실 [26회 30번]
정답: ⓵
* 임진왜란(1592)과 이괄의 난(1624) 사이의 역사적 사실
- 1592년 4월, 정명가도를 내걸고 왜군이 부산진과 동래성으로 침략해 오자, 정발과 송상현 등이 힘껏 싸웠으나 막지 못하고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 인조반정(1623) 과정에서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병력을 동원하여 공이 큰 이괄이 2등 공신으로 되자 평안도 절도사 겸 부원수로 임명된 후 불만을 품고 1624년 난을 일으켜, 도성이 함락되고 국왕이 공주로 피난가기 까지도 하였으나 도원수 장만에 의해 토벌되었다.
㉠ 광해군 때에 허준이 ‘동의보감(1610)'을 펴내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및 일본의 의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예방 의학에 중점을 두고 전통 약재를 사용한 치료 방법을 개발한 것이 특색이다.
㉡ 임진왜란 중에 제승방략 체제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진관을 복구하고 속오법에 따라 군대를 편제하는 속오군 체제로 정비하였다(1594).
속오군은 위로는 양반에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편제되어,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향촌 사회를 지키다가 적이 침입해 오면 전투에 동원되었다.
㉢ 정묘호란(1627) 이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군신 관계를 맺자며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12).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 숙종 대에는 남인 허적의 건의에 따라 상평통보(1678)가 주조되어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누구나 동전인 상평통보만 가지면 전국 어디에서나 물건을 살 수 있게 되어, 상업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2) 광해군의 중립외교 [22회 21번]
정답: ④
* 광해군의 중립외교
광해군(1608~1623)은 대내적으로 전쟁의 뒷수습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여진족 누르하치가 1616년 건국)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은 조선은 명의 후금 공격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고,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 명의 군대를 이끌고 명을 지원하게 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후금군에게 패하였고, 강홍립 등은 후금에 항복하였다(1619).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적절히 거절하면서 후금과 친선을 꾀하는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①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00여 년에 걸친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여 통일 국가를 이룬고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자신의 대륙 진출 야욕을 펴기 위해 조선을 침략하였다(임진왜란).
②, ③ 임진왜란으로 침략을 받은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에도 막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쓰시마섬 도주를 통하여 조선에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청해 왔다. 조선은 막부의 사정을 알아보고 전쟁 때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유정(사명대사)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7000여 명을 데려왔다(1607). 곧이어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어 동래부의 부산포에 다시 왜관을 설치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섭을 허용하였다(1609).
일본은 조선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고, 에도 막부의 쇼군(將軍)이 바뀔 때마다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조선에 사절의 파견을 요청해 왔다. 이에 조선에서는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⑤ 태조 때(1395)에 표전문(외교문서) 사건으로 인해 명과의 외교 갈등이 벌어지자 당사자로 지목되어 명의 압송 요구를 받은 정도전은 주도적으로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으나(1397), 1차 왕자의 난(1398)으로 이방원(태종)에 의해 제거당하며 중단되었다.
(3) 광해군의 중립 외교와 강홍립 투항 사건(1619) [19회 고급 23번]
정답: ④
* 광해군의 중립 외교와 강홍립 투항 사건(1619)
광해군(1608~1623)은 대내적으로 전쟁의 뒷수습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임진왜란때 명의 도움을 받은 조선은 명의 후금 공격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고,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 명의 군대를 이끌고 명을 지원하게 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후금군에게 패하였고, 강홍립 등은 후금에 항복하였다(1619).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적절히 거절하면서 후금과 친선을 꾀하는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① 효종(1649~1659)은 병자호란 때의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고자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하였으나 실행치는 못하였다.
② 세종 때에 북서 4군(최윤덕, 1433)과 동북 6진(김종서, 1449)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③ 인조 때에 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여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을 야기하였다.
⑤ 병자호란의 결과 조선은 명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국왕은 청조로부터 ‘조선 국왕’으로 책봉되고 조공을 바치는 군신 관계가 되었다.
(4) 병자호란(1636) [21회 23번]
정답: ①
* 병자호란(1636)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정권은 명.청 교체기의 상황 속에서 중립외교 정책을 펼치던 광해군 때와는 달리 명을 가까이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친명배금)을 펴서 후금의 경계심을 사게 되었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의 군대가 이를 틈타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 지역까지 쳐들어왔다(정묘호란, 1627). 그러나 당시에는 후금의 군사력이 조선을 무력으로 정복할 정도는 아니어서 일단 화의를 맺고 되돌아갔다.
그 후, 국력이 더욱 커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압박하여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해 왔다. 조선 정부가 이를 거절하자, 청의 태종은 10여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다시 쳐들어왔다(병자호란, 1536.12).
청군은 의주 부윤 임경업이 굳건히 지키는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10여일 만에 서울에 이르렀다.
서울이 청군에 의해 점령되자, 인조는 본래 강화도로 대피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항전하였다. 주화파(최명길)와 주전파(김상헌) 간의 농성 끝에 결국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三顧九饋: 세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이마를 조아리는 절).
두 차례의 호란은 왜란에 비하여 전쟁 기간은 짧았지만. 서북 지방이 입은 피해는 적지 않았다.
① 삼전도비는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으로 만주어, 몽골어, 한자로 씌여져 있다.
② 거란의 3차례에 걸친 침입을 막아낸 고려는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국방 강화에 힘썼다. 현종 때에는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 주위에 나성을 쌓았고, 그 후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아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였다.
③ 원을 막북으로 축출한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1388) 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④ 몽고의 침입 당시 고려의 최씨 정권은 민심을 모으고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 조성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사업은 고종 23년(1236)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제작하기 시작하여 고종 38년(1251)에 완성하였다.
⑤ 흥선 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였다(1865~1872). 이는 광화문 앞의 6조 거리를 포함하여 한양의 도시 구조를 되살리고, 왕실의 권위를 되살린다는 의미가 있었다.
(5) 병자호란과 주전론, 주화론 [28회 24번]
정답: ①
* 병자호란과 주전론, 주화론
인조반정(1623)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또한 후금의 침입에 대비해 평안도에 주둔하였던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1624)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자, 그 잔당들이 후금으로 피신하여 조선 침입을 종용하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특히, 정봉수는 철산의 용골산성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형제관계의 화의와 조공과 국경에서의 관무역을 조건으로 철군하였다.
그 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군신 관계를 맺자며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12).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항전하였으나, 청과 싸우자는 주화파(김상헌과 윤집.오달제.홍익한-삼학사)와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최명길 등)의 논쟁 속에 결국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3배 9고두: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땅에 찧음)를 맺었다.
그 동안 조선에 조공을 바쳐 왔고, 조선에서도 오랑캐로 여겨 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거꾸로 군신 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후 효종 때에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복수설치: 復讐雪恥),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재조지은: 再造之恩) 청에 복수하자는 의식이 대두되어 북벌 운동이 준비되었다.
②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의주까지 피신하였다.
③ 효종 때 어영청을 중심으로 북벌 군대를 양성하던 중, 연해주 흑룡강 방면으로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격퇴키 위해 청은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여 북벌 훈련 중의 조선 군사(조총병)을 보내어 청나라 군사와 함께 2차례의 정벌(나선 정벌)에 나서 큰 전과를 올렸다(1차: 1654-변급, 2차: 1658-신유).
④ 광해군은 중립 외교 정책의 일환으로 명의 요청으로 후금을 토벌키 위해 심하(深河)에 강홍립과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적당히 싸우다 항복하케 하였다(1619).
(6) 병자호란 이후의 역사적 사실 [30회 21번]
정답: ③
* 병자호란 이후의 역사적 사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정권은 명.청 교체기의 상황 속에서 중립외교 정책을 펼치던 광해군 때와는 달리 명을 가까이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친명배금)을 펴서 후금의 경계심을 사게 되었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의 군대가 이를 틈타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 지역까지 쳐들어왔다(정묘호란, 1627). 그러나 당시에는 후금의 군사력이 조선을 무력으로 정복할 정도는 아니어서 일단 화의를 맺고 되돌아갔다.
그 후, 국력이 더욱 커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압박하여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해 왔다. 조선 정부가 이를 거절하자, 청의 태종은 10여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다시 쳐들어왔다(병자호란, 1536.12).
청군은 의주 부윤 임경업이 굳건히 지키는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10여일 만에 서울에 이르렀다.
서울이 청군에 의해 점령되자, 인조는 본래 강화도로 대피하려 하였으나(비빈과 원손.왕자들은 강화도로 피신했으나 청군에 의해 잡히고 김상용 순절) 여의치 않아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항전하였다. 주화파(최명길)와 주전파(김상헌) 간의 농성 끝에 결국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이 후 명과의 관계 청산 및 철저한 군신 관계 설정,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볼모,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의 처형 등의 치욕적인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에 대하여 표면상 사대 관계를 맺고 사신(연행사)이 왕래 하며 서양 과학기술이 전래되고 교역을 활발하게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청에 대한 적개심이 오랫동안 남아 있어서 북벌 정책을 추진하였다.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하였다.
어영청을 중심으로 북벌 군대를 양성하던 중, 연해주 흑룡강 방면으로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격퇴키 위해 청은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여 북벌 훈련 중의 조선 군사(조총병)을 보내어 청나라 군사와 함께 2차례의 정벌(나선 정벌)에 나서 큰 전과를 올렸으나(1차: 1654-변급, 2차: 1658-신유), 청의 국력이 절정에 달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③ 세종(1418~1450) 때에 여진을 토벌에 나서 최윤덕을 시켜 중.상류 지역을 확보하여 북서 4군을 설치하고(1433), 김종서를 시켜 두만강 하류 일대까지 확보하여 동북 6진을 설치하여(1449),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의 국경선을 확보하였다.
(7) 인조(1623~1649) 대의 역사적 사실 [17회 고급 25번]
정답: ⑤
* 인조(1623~1649) 대의 역사적 사실
• 제시된 자료는 인조 반정으로 북인이 물러가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광해군 때의 북인(지춘추관사 이이첨, 동지춘추관사 박건 등) 정권이 작성한 선조 실록을 수정하자는 의견에 관한 것이다.
• 인조 때의 서인 정권은 광해군 때와는 달리 명을 가까이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펴서 후금의 경계심을 사게 되었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1624)이 일어나 궁궐이 불타고 왕이 공주까지 피난하는 등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의 군대가 이를 틈타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 지역까지 쳐들어왔다(정묘호란, 1627). 그러나 당시에는 후금의 군사력이 조선을 무력으로 정복할 정도는 아니어서 일단 화의를 맺고 되돌아갔다.
그 후, 국력이 더욱 커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압박하여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해 왔다. 조선 정부가 이를 거절하자, 청의 태종은 10여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다시 쳐들어왔다(병자호란, 1636). 한양이 청군에 의해 점령되자,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항전하였으나, 결국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1608~1623)은 전쟁의 뒷수습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먼저, 토지 대장과 호적을 새로 만들어 국가 재정 수입을 늘렸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산업을 일으켰다. 또,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방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전란 중에 질병이 널리 퍼져 인명의 손상이 많았던 경험을 되살려,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하였다(1610).
㉡ 정조(1776~1800)는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장용위:1785->장용영:1793)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