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덕국제신도시 예정지역의 지명이야기
■ 고덕국제신도시지역의 자연마을
고덕면은 지리적으로 구 평택시의 서쪽, 구 송탄시의 남서쪽, 진위천의 동쪽에 위치한다. 조선시대에는 진위현 고두면과 수원부 종덕면, 오타면, 율북면, 수북면의 일부로 나눠져 있었다. 고두면은 원해창, 방시천, 마분, 동청, 좌교, 옹정, 여염, 율포, 건곤, 효학, 동고, 수어창 등 12개 자연마을이었으며, 오타면은 방시천, 원해창, 궁리, 신리, 건곤, 방축, 효학, 삽교, 울성의 일부였고, 종덕면은 막금, 당현, 두릉, 계루지, 문곡, 황조곡, 신기, 가산, 소고니면의 율포리 일부, 율북면의 동청리, 수북면의 동안리였다. 고덕면이라는 지명은 1914년 4월 1일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위 지역들이 통합되면서 고두면의 고(古)와 종덕면의 덕(德)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만들었다. 이때의 통합으로 해창리, 좌교리, 여염리, 율포리, 궁리, 방축리, 동고리, 당현리, 두릉리, 문곡리, 동청리 등 11개 법정마을이 형성되었다. 고덕국제신도시는 고덕면 가운데 좌교1리, 당현1리, 해창1, 5리를 재외한 좌교, 해창, 율포, 두릉, 당현, 여염리의 대부분과 궁3리가 포함되었다. 그 밖의 지역으로는 장당동의 광천, 광귀마을, 서정동의 갈평과 번성마을이 들어간다. 장당동은 조선시대에는 양성현의 월경지였고 갈평과 번성은 진위현 탄현면 지역이었다. 장당1동 광천은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광귀는 1960년대 귀농정착사업의 결과 조성된 마을이다. 갈평은 역사가 오래되었고 번성은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1. 좌교리(坐橋里)
1)마을지명
죄교리는 조선시대 진위현 고두면 지역이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저구역 개편으로 좌교리, 옹정리에 동청리 일부를 통합하여 고덕면 좌교리가 되었다. 이 지역은 바람산, 당산처럼 낮은 구릉이 발달하였고 마을 앞으로 서정천이 흘러서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1914년에 고덕면이 형성되면서부터는 면사무소와 파출소, 초등학교가 자리를 잡아서 고덕면의 정치, 행정, 교육,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앉은다리, 옹정, 중앙동, 좌신기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옹정과 중앙동, 좌신기 등이 고덕국제신도시에 포함되었다.
좌교1리의 자연지명은 앉은다리다. 좌교리라는 지명도 앉은다리에서 비롯되었다. 좌교2리의 자연지명은 옹정이다. 옹정은 우리말로 ‘독우물’이고 마을주민들은 ‘도구머리’라고 부른다. 현재 144호의 큰 마을로 밀양 박씨, 평택 임씨, 김해 김씨가 많고 당제, 정제가 발달하였다. 좌교3리의 자연지명은 좌신기 또는 새터다. 좌신기는 좌교리에서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좌교4리의 자연지명은 중앙동 또는 면실이다. 이곳은 본래 큰길가에 주막이 형성되어 ‘주막거리’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914년 고두면과 종덕면이 통합되어 고덕면이 형성되면서 면사무소가 위치하여 중앙동 또는 면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송성은 원좌교 마을의 서쪽에 형성된 작은 마을이다. 염소골은 좌신가 동쪽 끝에 위치한 옛 마을터다. 옛날에는 염씨들이 거주하던 마을이었지만 수해를 당하며 좌신기로 집단 이주하면서 폐동되었다.
2)산과, 하천, 들판 지명
좌교리의 주산은 옹정마을 뒤에 위치한 바람산이다. 바람산은 산의 모양이 다리미와 같다고 하여 다리미산으로도 부른다. 산이 자고 저습한 고덕지역의 산들처럼 이 산도 홍수가 났을 때 바람에 떠내려왔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옹정마을 뒤 내슈라화장품 공장이 있는 산은 당산이다. 당산에는 옹정마을의 마을제당이 있었다. 옹정마을의 마을제는 일종의 산신제로 음력 10월 상일에 좋은 날을 잡아 올렸지만 지금은 중단된 상태다. 옹정마을에서 좌교1리 앉은다리 쪽으로 내려가는 길 왼쪽에 있는 고개는 안산이다. 안산은 마을 앞을 비보하는 낮은 언덕을 일컬어 말한다. 좌신기 뒷산은 다리개산이다. 해발 23.9미터의 아주 낮은 산이지만 주변이 저습한 개활지여서 마을을 보호하고 땔감을 구할 수 있었던 귀중한 산이었다.
좌교리의 고개는 치마자고개와 새마답고개가 있다. 치마자고개는 좌신기에서 두릉2리 계루지로 나가는 고개다. 이 길은 서정리역을 올 갈 수 있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새마답고개는 좌신기 뒤쪽으로 넘어가는 좁은 소로길이다. 새마답이란 부르드러운 풀이 무성하여 소를 묶어두던 곳에서 유래하였다. 좌교리는 산이 낮아 골짜기가 발달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성지골, 염소골, 사랏골을 들 수 있고 들판으로는 구동안들, 앞들, 그리고 고덕국제신도시지역에 포함되지 않은 좌교들이 있다. 구동안들은 좌신기와 중앙동의 경제기반이다. 앞들은 고덕초등학교 뒤에 있으며 옹정마을의 경제기반이다. 임숙골방죽은 좌신기에 있는 것으로 일제강점기 해창들이 개간되면서 일본인들이 쌓았지만 1973년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면서 쓸모가 없어졌다. 해좌교는 원좌교와 해창리 사이의 경계에 있는 다리다. 두 마을의 경계에 있다고 하여 해좌교가 되었다.
2. 해창리(海倉)
1)마을지명
조선시대 진위현 고두면과 오타면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1895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진위군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방시내, 마분, 동청리 일부와 수원군 오타면 방시내, 해창리 등을 통합하여 해창리라고 하였다. 해창(海倉)이라는 지명은 해창3리 창말에서 비롯되었다. 창말은 조선시대 진위현의 해운창이 있었다. 이곳의 해창에서는 진위현 일대의 세곡을 모은 뒤 아산의 공진창에 납부하거나 직접 한양의 경창(京倉)까지 조운(漕運)하였다. 해창리는 염촌과 방시천을 제외한 4개의 마을이 고덕국제신도시에 포함되었다.
해창1리 염촌은 고덕국제신도시에 수용되지 않는다. 이 마을은 120, 30여 년 전 파주 염씨들이 개척하여 염촌이 되었다. 해창2리는 마분이다. 마분은 마을 뒤쪽에 마정승의 묘가 있어서 유래되었다. 마정승의 묘는 신라와 고구려가 싸울 때 죽은 말무덤이라고도 하고 옛날 지체 높은 사람이 마을을 지나다가 말이 죽자 묻었던 곳이라고도 한다. 마분은 1980년대 이전만 해도 25호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다가 가나안연립주택이 들어서고 근래에 전원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130세대로 늘었다. 해창3리는 조선시대에 진위현의 조창이 있어서 원해창이다. 그래서 마을 북서쪽에는 창말이라는 지명도 있고 수로와 배를 맺던 음나무도 남아 있다. 해창이라는 지명도 해창리에서 비롯되었다. 해창4리는 신촌이다. 본래는 원해창과 같은 마을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송주헌 면장 때 두 개의 마을로 분리하였다. 마을이 분동되면서 새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신촌’이라고 하였다. 해창5리 방시천은 고덕국제신도시에 포함되지 않았다. 해창6리는 대창동 또는 고척골이다. 고척골은 대창동이 자리 잡은 골짜기의 지명이었고, 대창동은 한국전쟁 뒤 피난민들이 마을을 형성하면서 ‘크게 번창하라’는 의미로 작명한 것이다. 창말에 있는 창말밭은 본래 조창이 있던 곳이 밭으로 개간된 것이다. 창말밭 옆에 있는 마방터는 해창까지 세곡을 운반했던 말이 쉬어가던 곳이다.
2)산과, 하천, 들판 지명
해창리에는 창말산, 재물산, 달구지산이 있다. 창말산은 진위현의 해창 뒤쪽에 있던 산이다. 바닷물이 들어올 때는 바닷가에 우뚝 솟은 모양이었지만 해창들이 간척되면서 낮은 구릉으로만 보인다. 재물산은 해창4리에서 진위천으로 삐쭉 나 앉은 산이다. 이 산은 천지개벽 때 떠내려 왔다고도 하고, 홍수 때 건너편 백봉산의 일부가 떠내려와 머문 것이라는 전설도 있다. 달구지산은 해창3리에서 마분마을방향으로 넘어 가는 산으로 옛부터 수레가 넘나들던 고개였다. 당산은 해창2리 마분마을 제당이 있는 산이다. 현재는 정상부에 고덕중앙교회가 있고, 마을제당은 교회 앞에 작은 동산처럼 남아 있다. 당재는 해창3리 창말에서 좌교리 방면으로 넘어가던 고개다. 좁은 소로였지만 옛날에는 고덕면사무소나 서정리장을 다닐 때 가장 많이 이용했던 고개였다.
해창들은 진위현의 조운선이 드나들던 바다가 일제강점기 전후 간척되면서 형성된 들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파 한상용과 한판서가 대지주였다. 보안들은 해창2리와 좌교리 사이의 넓은 들이다. 본래는 보(洑)를 만들고 언(堰)을 쌓아서 간척한 땅이라고 해서 보언 또는 보원이었지만 음이 변하여 보안들이 되었다. 해창3리에서 2리로 건너가는 좁은 길 옆으로 형성된 들판은 고주원 또는 고원이다. 이곳은 본래 바닷물이 들어오던 갯가였지만 제언(堤堰)을 높이 쌓고 간척을 하면서 고원 또는 고주원이라고 하였다. 텃논은 해창3리와 4리 사이의 작은 들판이다. 해창6리 대창동 앞에는 여우논이 있다. 옛날 이곳은 골짜기여서 여우가 자주 출몰하였다. 1950, 60년대 해창리와 안화리 사이에 쌓았던 보(湺)는 창내보 또는 해창보라고 하였다. 창내보는 오성들과 해창들, 구동안들의 농업용수를 공급하였다. 정부주도로 매년 설날이 지나면 봇물을 사용하는 오성면과 고덕면 주민들이 동원되어 담배를 품삯으로 받고 보(洑)를 축조하였다. 일명 갯보라고도 불렀다. 해창2리 마분마을 안에 있는 나무는 들메나무라고 부른다. 이 나무는 수종을 알 수 없으며 수령은 150년 정도 되었지만 최근 죽어버렸다. 즘나무는 해창3리 창말에 있는 나무다. 이 나무는 조선시대 해창에 들어온 조운선을 메었던 곳이라고 전한다.
3. 두릉리(杜陵里)
1)마을지명
두릉리는 조선시대 수원부 종덕면 지역이었으며 1896년 행정구역 개편 뒤에는 수원군 종덕면에 속하였다. 18세기 말의 기록에도 마을지명이 나타나지 않고 있어 최소한 19세기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지역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두릉리와 계루지를 통합하여 진위군 고덕면에 편재하였다.
종덕장은 고려시대 두릉리와 당현리, 동청리 일대의 행정구역이다. 조선시대에는 수원군 종덕면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고두면과 통합되면서 고덕면이 되었다. 현재 종덕이라는 지명은 두릉2리 계루지마을에 있는 종덕초등학교가 계승하고 있다. 마을지명은 두렁이와 계루지가 대표적이다. 두릉1리의 자연지명인 두렁이는 마을 앞 고랑에 큰 두렁이 있어 유래되었다. 계루지는 청주한씨와 순흥 안씨가 대성(大姓)을 이루고 사는 마을이다. 계루지라는 지명은 큰 계수나무 정자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조선후기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주변일대가 간척지인 점을 고려할 때 계류지(溪流地) 또는 계류지(稽留地)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계루지는 동말, 안말, 서말로 구분된다. 이 마을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며 해방 후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민세 안재홍의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2)산과, 하천, 들판 지명
두릉리에는 낮은 구릉이 많이 있다. 구릉 가운데는 계루지마을 뒷산인 당산이 대표적이다. 당산 아래에는 청북으로 가는 지방도가 지나고 있으며 정상부에는 계루지 마을에서 당목으로 섬기는 음나무 아홉 그루가 서 있다. 주민들은 당산을 신령하게 여겨서 함부로 나무를 꺾거나 상여를 비롯하여 부정한 것이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당산의 신령함은 다음 이야기로도 알 수 있다. ‘옛날 어떤 선비가 말을 타고 당산을 지나는데 당목 앞에 이르자 말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히 여긴 선비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당산이 부정 탔을지 모른다고 일러주었다. 그 말을 듣고 올라보니 과연 문둥병자가 당목(堂木)에 기대어 누워있었다. 선비가 문둥병자에게 호통을 쳐서 다른 곳으로 가게 하였더니 신기하게도 말발굽이 다시 떨어졌다.’ 천황산은 두릉1리 마을에 있다. 모든 산맥이 여기에서 이어져 대황산이라고도 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산의 정기를 받아 난세를 구할 인물이 태어난다는 전설에 산맥의 혈을 끊고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계루지의 요굴산은 옹기를 굽던 가마가 있어 유래되었고, 천황산 동북쪽의 댕전산에는제 3075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마을의 주 경작지는 계루지들과 두렁이 마을 앞의 앞고실골이다. 앞 고실골이 간척된 것은 조선전기쯤으로 추정되지만 계루지들은 근대전후가 되어서야 간척되었다. 간척의 주체는 국가와 궁실, 동양척식(주)였다. 계루지마을 서쪽에 있는 종덕초등학교는 1949년에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고덕초등학교 종덕분교였다가 1955년 마을유지 안재홍선생의 큰조카며느리였던 변여사의 부지기증으로 정식학교로 개교하였다.
4. 궁리(宮里)
1)마을지명
궁리(宮里)는 고려시대에는 오타장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초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수원도호부 오타면에 편재되었다. 오타면은 인구와 경작지가 적어 살아가기가 어려웠다. 새로 영입되는 인구는 대부분 흉년이나 천재지변을 겪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빈농들이나 유민들이었다. 이들은 안성천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을 얻어 생활하거나 하천변에 형성된 간석지를 간척하여 경작하였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원군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고두면의 건곤, 오타면의 건곤과 궁리, 신리를 통합하여 궁리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뒤 건곤 뒤쪽에 복음촌과 중촌이 형성되면서 4개의 자연마을이 되었다.
궁리에는 궁안(다루지), 건곤, 중촌, 복음촌 같은 자연마을이 있다. 궁1리의 자연지명은 ‘궁안’ 또는 ‘다루지’다. 궁안은 진위천변에 형성된 궁방전의 안쪽 마을이라는 의미고, 다루지는 다라고비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다라고비진은 수원부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다. 이곳은 진위천과 안성천의 합류지점이어서 교통의 요지로 꼽혔다. 궁2리는 건곤(乾坤)이다. 건곤은 건군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건군이는 궁방전에 가까이 있다는 뜻의 건궁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옛날에는 진위천으로 유입되는 바닷물이 마을을 휘감아 돌았기 때문에 섬과 같다고 하여 노적도(露積島)라고도 하였다. 마을은 약 2백여 년 전만해도 궁안과 방축1리 새악들 사이에 있었다가 침식작용으로 페동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주하였다.
궁3리의 자연지명은 복음촌이다. 복음촌은 한국전쟁 뒤 반공포로 일부와 경상도에서 이주한 사람들 평택지역의 빈농들이 이주하여 조성된 마을이다. 그러다가 심송영씨를 비롯하여 초기에 마을을 개척했던 사람들은 1960년대 초 문곡4리 신흥동이 개척될 때 이주하였고, 빈자리를 남도지방과 평택지역의 빈농들이 채우면서 오늘과 같은 마을이 형성되었다. 복음촌이라는 마을지명은 초기 개척자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많았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궁4리의 자연지명은 중촌이다. 이곳에는 본래 마을이 없었고 야산과 밭이 형성되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뒤 태평아파트 터에 정착하였던 반공포로들의 정착지가 재일교포에게 매각되면서 분산된 일부 주민들이 이곳으로 옮겨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중촌이라는 지명도 건군이와 복음촌 사이에 마을이 있어 유래되었다. 주민들 대다수는 벼농사를 하지만 일부는 축산업과 양계업을 하고 있다. 궁5, 6, 7리는 태평아파트이다. 태평아파트는 1994년 1단지가 완공되며 입주를 시작하였고, 이듬해 2단지, 1997년에는 3단지가 입주하면서 현재와 같은 규모가 되었다.
2)산과, 하천, 들판 지명
궁리는 남쪽으로 안성천이, 서쪽으로는 진위천이 흐른다. 근대 이전 만해도 진위천은 궁1리를 가로질러 동고리에서 안성천과 합류하였다. 그래서 물길이 여러 갈래로 마을을 진나갔고 나루와 포구가 발달하였다.
다라고비진은 궁1리 궁안마을과 해창5리 방시천 마을 사이에 있었다. 이 나루는 고덕지역에서 서평택지역으로 건너가는 가장 중요한 나루였으며, 경기만의 각종 해산물이 안성천과 진위천을 따라 들어와서 평택평야의 곡물과 거래되었던 곳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궁안교가 가설되기 전에는 돛배들이 다라고비진을 지나 동청포와 황구지포까지 들어갔는데, 일제강점기 다리가 건설되면서는 막사리 때만 빠른 물길을 따라 돛대를 누이고 노를 저어 올라갔다고 하였다. 100여 년 전 진위천의 물길이 갯고랑을 형성하며 다루지마을과 건군이 마을 사이로 흐를 때는 궁리성당 남쪽 기슭에 뱃터가 있었다. 뱃터는 건군이 마을 일대가 간척되면서 진위천과 서정천이 만나는 궁안휴게소 뒤쪽으로 옮겨갔다. 궁안교는 궁리에서 오성면 신리로 건너가는 다리다. 다리가 놓인 것은 일제강점기 초 국도 38호선이 가설되면서다. 하지만 초기에는 나무로 가설된 것이어서 장마 때 수해가 나면 떠내려가기 일쑤였다. 일제강점기 신문에도 궁안교가 떠내려가서 차량통행이 어려워 나루터에서 바지선을 이용하여 실어 나르기 때문에 고충이 많다는 기록이 있다. 나무다리의 고충은 1930년대 후반 콘크리트로 궁안교가 가설되면서 해결되었다. 궁안교의 건설은 주변 마을의 큰 화제였다. 일본인 기술자들은 다리를 건설할 때 사람을 제물로 바치면 다리가 튼튼해서 백년을 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해창리에서 머슴 살던 연고 없는 사람을 잡아 교각 콘크리트와 함께 넣으려고 하였는데 이 사람이 눈치를 채고 도망가는 바람에 다리 아래에 기거하던 거지를 대신 넣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바닷물이 유입되던 저습한 지역에서 농업용수 확보는 1년 농사를 가름하는 큰일이었다. 그래서 계곡 아래 낮은 지형을 골라 방죽을 만들었다. 향교저수지와 복음촌과 건군이 사이에 있는 궁덕방죽은 궁리 일대가 간척되면서 만들어졌다.
평야가 넓고 구릉이 발달한 궁리의 주 경작지는 동고리 경계의 궁논과 번개들, 궁틀과 같은 들판이었다. 이 들판은 200, 300년 전만 해도 대부분 바닷물이 들어오는 황무지였다. 들판이 개간되기 전에는 구릉을 개간하여 밭으로 경작하였다. 구릉으로는 방축리 경계의 태평산과 건군이와 중촌 사이의 비밀재산이 있다. 산이라고 하지만 해발고도가 매우 낮아서 땔감을 공급하거나 밭으로 경작되는 수준이었다.
5.여염리(余染里)
1)마을지명
여염리는 조선시대 진위현 고두면 지역이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수원군 종덕면과 통합되어 진위군 고덕면이 되었다. 마을은 송탄, 평택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구릉이 발달하여 논농사와 밭농사의 비율이 반반이다. 자연마을은 1914년 이전만 해도 여염(성두)마을밖에 없었다가, 해방 전까지 임주마을이 생겨났고 한국전쟁 뒤에 아사리벌 마을이 새로 조성되면서 세 개가 되었다.
여염1리의 자연지명은 방축리성의 머리부분에 해당되어 ‘성머리’로 불렸고 한자로는 성두(城頭)다. 주민들은 150여 년 전에 성곽을 축조했다고 주장하지만 현재 성곽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여염2리의 자연지명은 ‘임주’다. 임주라는 지명은 임줄로도 불렀는데 마을 뒷산의 형세가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상이라고 하여 유래되었다는 설과, 옛날에 임금님이 지나다가 하루를 묵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마을에는 이괄의 전설이 전해오는 옻우물이 있었고, 동제(洞祭)나 정제(井祭) 또는 산신제가 발달하였다. 여염3리의 자연지명은 아사리벌이다. ‘아사리’라는 말은 ‘남의 것을 빼앗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많아 무법천지 상태로 변한 것’을 말한다. 아사리골은 여염리 근동에서도 가장 척박하고 사람살기 어려운 지역이어서 ‘아사리’라고 불렀다.
2)산과, 하천, 들판 지명
한뉴목장 쪽에는 옥녀봉이 있고 성머리 마을 남쪽에는 안산이 있다. 옥녀봉은 옥녀전설에 기인한 지명이다. 옥녀전설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지만 대개 한(恨)과 그리움의 상징으로 구성되었다. 옥녀봉에는 근대전후 군사훈련장이 있었다고 한다. 옥녀봉 옆에는 이괄 아버지의 묘가 있다. 이괄은 인조반정에 가장 큰 공을 세웠지만 2등공신에 책봉되었고, 이것에 불만을 품을 것을 두려워 한 반정세력의 견제와 모략에 분개하여 난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이괄의 난은 한양을 점령하는 등 큰 기세를 올렸지만 반란세력의 내분과 정부군의 반격으로 실패하였다. 이괄 아버지의 묘는 이괄이 이릴 적 율포리에서 머슴을 살 때 기지를 발휘하여 천하의 명당자리인 묘 자리를 알고 아버지의 묘를 썼지만 반란이 실패한 뒤 파묘되었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비슷한 전설로는 난이 실패한 뒤 다리가 다 자라지 못한 용이 나와 승천하였다는 임주마을의 용우물이 있다. 한뉴목장은 성두마을과 장당동 광천마을에 걸쳐 조성된 목장이다. 1967년 한국과 뉴질랜드가 합작하여 조성하였기 때문에 한뉴목장이라고 하였다가 나중에 매일유업에 매각되어 매일유업시범목장이 되었고, 현재는 운영이 중단되어 고덕국제신도시 예정지역에 편입되었다. 소새비들과 소새비방죽은 아사리벌 동북쪽에 있다. 소새비방죽은 일제강점기에 축조되어 좌교들과 율포리 앞들에 물을 댔다.
6.장당동
1)마을지명
장당동은 조선시대에 양성현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진위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광천과 원장당을 통합하여 송탄면 장당리가 되었다. 그 뒤로 광천에서 원장당 가는 길에 장자울이 형성되었으며, 1960년대 귀농정착사업으로 광귀마을이 형성되면서 4개의 자연마을이 형성되었다. 광천마을의 자연지명은 너브내다. 너브내는 마을 앞으로 서정천이 흘러 넓은 내를 형성하였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너브내는 윗말과 아랫말로 구분된다. 원장당은 서정역에서 장당동으로 들어오는 초입에 형성된 마을이다. 해방 전만해도 두 집만이 있어서 ‘두집매’라고도 하였고, 지형이 노루목처럼 잘룩하게 들어가서 ‘노루목’이라고도 불렀다. 장자울은 너브내에서 노루댕이로 가는 길의 중간쯤에 형성된 마을이다. 지금은 공장이 들어서서 마을의 경관이 많이 훼손되었다. 광귀는 본래 외딴집 한 채만 있어서 ‘외집매’라고 불렀다. 행정구역으로도 원장당과 같은 마을이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제3공화국 정권이 서울의 도시빈민들 가운데 귀농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집단 이주시켜 황무지를 개간하여 정착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대부분 정착에 실패하여 떠나버렸고 지금은 한 집만 남아 있다. 방아다리는 서정역에서 장당동으로 들어오는 초입에 있다. 옛날에는 방아다리가 있던 마을이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2)산과, 하천, 들판 지명
장당동은 산과 계곡이 조화롭게 형성되었다. 지제동 뒤 매봉에서 너브내로 이어지는 능선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산이다. 봉골 아래 율포리 방향으로는 봉골저수지가 있다. 장고봉은 노루댕이 뒤에 장구처럼 생긴 산이다. 산의 모양이 특이하여 마을의 자랑거리였지만 지금은 깎여서 평평한 대지가 되었다. 너브내 앞에 있는 낮은 산은 안산이다. 본래 안산은 마을을 비보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영등은 노루댕이에서 너브내로 들어오는 입구다. 이곳에서 마을로 넘어오는 가파른 고개는 영등고개다. 영등고개는 지금은 비교적 낮아졌지만 가파르기도 하고 험하여서 함부로 넘나들지 못했다. 영등고개를 넘어 교회 옆으로 넘어오는 고개는 엄나무재다. 엄나무재에는 너브내마을의 당목이었던 엄나무고목이 있었다. 엄나무당목은 주민들의 쉼터도 되었고 오월 단오에는 그네를 매고 놀던 곳이다. 당목은 10여 년 전 죽어버렸고 지금은 죽은 나무뿌리 아래에 제단만 만들어 놓았다.
도통안골은 광귀마을이 들어섰던 골짜기 이름이다. 주민들은 도톰안골을 개간하여 경작지로 삼았지만 지금은 대부분 떠나버렸다. 너브내 마을 앞 열두 마지기쯤 되는 논은 궁논틀이다. 궁논틀은 옛날에 궁방전으로 개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너브내 마을 앞에는 방죽논도 있다. 방죽논은 늦가을에 추수를 끝내고 물을 가둬두었다가 늦봄 모내기철에 물을 대었던 논방죽이 있었다. 노루댕이 마을 앞에는 산골밭이 있다. 이곳에서는 산골이 많이 출토되어서 뼈가 부러졌을 때 캐다 바르면 잘 나았다.
서정천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던 시절에는 배가 들어왔다. 그래서 (주)퓨리나사료 공장 아래에는 뱃터가 있었다. 뱃터는 돛대처럼 삐쭉 튀어나온 작은 언덕이어서 돛대배기라고 불렀다. 노루댕이 안쪽 오리가든 뒤쪽에는 숯을 굽던 가마터가 있었다. 그래서 유래된 지명이 숯구댕이다. 머롱거지는 서정역에서 노루댕이로 들어오는 초입이다. 큰샘은 너브내 마을의 공동우물이다. 큰샘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우물고사를 지냈다.
7.중앙동
1)마을지명
중앙동은 1981년 평택군 송탄읍이 시(市)로 승격되면서 서정동에서 분리 독립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진위현 송장면과 탄현면 지역이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송탄면이 되었다. 서정동에 속할 때는 갈평, 점촌, 번성, 복창, 중앙, 신서, 서두물, 기장, 사거리, 황해도촌(신흥), 지장동, 절골, 원적봉 등 12개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중앙, 신서, 신선, 서두물, 갈평, 번성이 분동되어 중앙동에 속하게 되었다. 본래 서정동은 서두물에서 유래되었다. 서두물 마을에는 세 개의 공동우물이 있었는데, 식수를 얻기가 어려웠던 평택지역에서는 소문난 우물이었다.
갈평은 청북고가도로 건너 첫머리에 있는 마을이다. 갈평이라는 지명은 ‘칡같이 번성하라’는 의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옛날에는 마을의 위치가 서정천의 상류로 갈대숲이 무성한 습지대였던 점을 고려할 때 ‘갈대평야’에서 유래되엇을 가능성이 높다. 이 마을은 본래 10여 호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가 근대이후 서정역 주변에 도시가 발달하고 송탄지역이 확대되면서 현재는 200세대가 넘는 큰 마을이 되었다. 큰동네는 갈평의 본마을이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풍양조씨 동족마을이었고 나중에 이천 서씨 등이 입향하였다. 뒷골모랭이는 큰동네와 새동네 사이에 형성된 마을이다. 모랭이는 ‘모퉁이’의 사투리로 ‘뒷골모퉁이’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새동네는 1970년 경 새마을 시범주택이 조성된 마을이다. 그래서 새마을동네라고도 부른다. 번성은 해방 전후에 형성되었다. 번성이라는 지명은 마을이 번성하기를 기원하며 주민들이 작명한 것이다.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일곱 집에 불과하다가 전쟁 피난민들과 1960년대 충청도 일대의 빈농들이 정착하면서 120호 219세대의 큰 마을로 성장하였다.
2)산과, 하천, 들판 지명
두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산은 갈평마을 뒤에 있는 갈평뒷산이다. 갈평뒷산은 마을의 주산으로 마을제당이 있으며, 이충동 부락산에서 바라보면 개가 엎드린 모양이어서 ‘개산’이라고도 불렀다. 안산은 갈평마을 앞에 있다. 다른 마을에서와 같이 마을을 비보하는 성격을 가졌는데, 현재는 과수원으로 개발되었다. 옛날에는 안산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밀물 때를 이용하여 배가 닿았다. 궁벌은 갈평마을 앞 큰 들판으로 조선 말기 궁실에서 간척을 하였던 궁방전이있었다. 아홉거리는 갈평마을에서 율포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다. 본래 골짜기가 아홉이어서 구걸재라고도 하였는데, 옛날에는 동청포에서 내린 청북사람들이 진위 봉남교를 건너 한양을 오갔다. 사람이 많이 오가다보니 산마루에는 주막도 있었고, 아홉 대에 걸쳐 정승이 나올 명당이라거나, 당대에 왕이 나올 명당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수렁다리논은 갈평과 율포리 사이의 논이다. 수렁은 물이 많이 나는 곳을 말하는데, 이 논에서도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많아서 농사짓기에 편했다. 농업의 기계화가 이뤄지기 전만해도 수렁논은 가뭄에도 모내기를 할 수 있어 흉년 밥그릇이라고도 하였고, 천수답에 비하여 값이 두, 세 배가 넘었다. 갈평마을 공동우물은 조선 인조 때 반란을 일으켰던 이괄이 군대를 주둔하며 먹었던 우물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일설에는 난이 실패하자 손발이 다 자라지 못한 용이 나왔다고도 한다. 우물에 반란군에 대한 전설이 아름답게 전하는 것은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의 실패에 대한 불신이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