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28:1-10
찬송가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오늘 본문은 역대상 11장부터 시작된 역대기 속 다윗 이야기 결론부입니다. 이제 다윗도 나이가 들어 왕좌에서 내려올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부터 29장까지는 다윗의 고별설교이자 유언으로 불립니다. 다윗의 마지막 일성을 앞둔 상황은 이렇습니다.
성전 건축에 대해 연설하는 다윗(1-3절)
(1) 다윗이 이스라엘 모든 고관들 곧 각 지파의 어른과 왕을 섬기는 반장들과 천부장들과 백부장들과 및 왕과 왕자의 모든 소유와 가축의 감독과 내시와 장사와 모든 용사를 예루살렘으로 소집하고
다윗은 자기 코끝에서 호흡이 멎기 전 나라 주요 관료들에게 꼭 할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고관을 예루살렘으로 소집했습니다. 이들은 앞선 역대상 23장부터 27장까지 소개된 그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소집된 이들 중 흥미로운 그룹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내시입니다.
내시는 성적 기능을 상실한 남자 관리입니다. 이들은 보통 왕실 여성들에 관한 일을 담당했습니다. 이때 내시들은 여호와의 총회, 즉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공적 모임이나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신명기 23장 1절이 이 사실을 이렇게 알려줍니다.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이런 이유 때문인지 역대기보다 앞선 역사서인 사무엘서에는 내시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자손에 대한 복을 강조하는 아브라함과 다윗 언약에 비추면, 자손을 낳을 수 없는 내시는 언약 파기로 인한 징계와 심판의 상징이기도 했기에(왕하 20:18) 기피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시들은 다윗의 마지막 연설을 들을 뿐 아니라 유언의 증인 되는 자리에 당당히 있습니다. 심지어 다윗이 불러서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얼핏 본문을 한숨에 읽으면 어색함을 발견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또 이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역대기 첫 독자들이 처한 삶의 정황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역대기 기자는 한 가지 의도를 갖고 내시들을 언급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시들은 이제 심판은 끝났고 회복을 위한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더는 생명의 통로가 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이들이 성전 국가라는 새 역사의 막이 오르는 자리에 당당히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역대기 독자들도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짓고 여전히 황폐한 고국을 회복하기 위해 함께 모여 손에 역대기를 붙들고 읽고 듣습니다. 현실은 선조들의 불순종으로 나라 명맥이 끊긴 지 오래입니다. 어찌어찌 고향에 돌아온 자신들도 그 선조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본문 속 내시들을 통해 하나님이 이제 새 시작을 허락하신다는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이사야 56:5-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사실 오늘 우리도 본문 속 내시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과연 매 주일 예배를, 가까이 오늘 새벽기도회 자리를 내가 의지 내어 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셔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영적 고자와 다름없는 우리를, 스스로는 선한 것 낼 수 없는 우리를 불러 주셔서 말입니다.
그리고 나아온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로 하나님 나라 역사의 증인 되는 영예를 주시겠다고, 더불어 우리에게 더는 내시나 영적 고자가 아닌 생명 낳는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선사하며 그리스도인으로 부르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 나온 모든 교우님, 고개를 드십시다. 바로 어제까지 엉망진창으로 살았어도 하나님은 오늘 하나님 부름에 응답해 나온 우릴 통해 새 일을 이루십니다. 그러니 고갤 푹 숙인 채 못난 내 모습에 시선 두고 한숨 쉴 게 아닙니다. 고갤 들어 창문을 열고 하나님을 보십시다. 이 은총을 놓치지 않는 모든 교우님 되시길 축원합니다. 한편, 이렇게 모인 내시를 포함한 고관들에게 다윗이 한 첫 말이 이렇습니다.
(2-3) 이에 다윗 왕이 일어서서 이르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봉안할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어서 건축할 재료를 준비하였으나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전쟁을 많이 한 사람이라 피를 많이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모인 이들을 내 형제요 백성이라고 부르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때 다윗이 고관들을 형제라고 부른 게 주목할 만합니다. 왕이 자신을 신하들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과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메시지에 따라 필요한 일에 동참하자고 초청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본문과 같은 상황에 놓여있지 않습니까.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일마다 우리를 내 형제라 부르시고, 내 말을 좀 듣고 함께 걷자고 초청하시니 말입니다. 고관들에게 다윗의 음성이 얼마나 묵직하게 들렸을지 모릅니다. 감격과 함께 막중한 책임감으로 다가오지 않았겠습니까.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도 주일마다 듣는 하나님 말씀을, 그리스도의 초청을 어떻게 듣고 받아들이는지 돌아보는 은총 누리십시다.
이렇게 입을 연 다윗은 자신이 성전 짓기를 몹시 원했으나, 하나님이 그 일을 막으셨다는 걸 전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국가 간 전쟁을 신들의 전쟁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승전국 원수는 성전을 지어 자신들 신의 강함을 자랑했습니다. 동시에 그때 신전은 승전기념비의 기능을 했습니다. 어쩌면 당대 패왕이었던 다윗도 이런 차원에서 그토록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이런 보편적 이유 말고도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내밀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집’이 되어주시며 그에게 안식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본래 집 밖 내놓은 자식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무시 받는 설움만 아니라 장인과 아내로부터도 경멸받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다윗에게 하늘 아버지는 결코 그를 내버리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때론 따끔하게 질책하셨지만 그만큼 그 아들을 사랑으로 품는 분이셨습니다.
이런 아빠에게 다윗이 집을 지어드리려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일약 스타덤에 오른 연예인이 첫 정산금으로 부모님께 집을 해드렸다는 기사를 심심찮게 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모든 전쟁을 마치고 이스라엘에 평안이 찾아왔을 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자 하나님의 발판으로 여겨지는 언약궤를 다윗성에 안치했습니다. 그 뒤 언약궤가 있기에 보다 어울리는 성전까지 지으려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피를 많이 흘린 전쟁의 사람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불허하셨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이러한 결정에 다윗은 하나님에게서 고갤 돌릴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다윗이 흘린 피 대부분은 하나님 명령을 수행하다 흘린 게 아닙니까. 이런 면에서 다윗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놓고 정작 대미를 장식하는 일에선 배제됐다는 억울함에 사로잡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결정을 수용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자, 그제야 다윗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다음 일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일은 이렇습니다.
솔로몬이 왕위 계승자임을 연설하는 다윗(4-8절)
(5-6) 여호와께서 내게 여러 아들을 주시고 그 모든 아들 중에서 내 아들 솔로몬을 택하사 여호와의 나라 왕 위에 앉혀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려 하실새 내게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 그가 내 성전을 건축하고 내 여러 뜰을 만들리니 이는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아들로 삼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임이라
다윗은 자신이 오늘까지 온 건 다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도적인 선택 때문임을 이미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한 자기 역할을 받아들이자, 자신이 받은 선택이 지금은 솔로몬에게 향함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다윗은 성전을 짓는 일도 자기 의지나 노력이 아닌 하나님 은혜의 영역임을 비로소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솔로몬에게 임할 것임을 온 백성도 알 게 선포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솔로몬을 다윗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 아들로 입양하신다는 사실까지 공표합니다. 다만 이때 다윗의 바통을 이어받는 솔로몬에게는 은혜와 함께 한 가지 책임이 생겼습니다.
(7) 그가 만일 나의 계명과 법도를 힘써 준행하기를 오늘과 같이 하면 내가 그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계명과 법도를 힘써 준행하기. 이것이 솔로몬이 져야 할 책임이었습니다. 오래전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그의 나라가 영원히 있게 하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를 다윗언약이라고 합니다. 이때 다윗언약은 무조건적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이 언약에 ‘순종’이라는 조건을 답니다.
사실 순종은 하나님이 주신 무조건적 언약에 대해 사람이 보일 합당한 ‘반응’입니다. 즉, 언약 당사자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는데 전자가 더 온당한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이 ‘순종’을 언약 성취의 조건으로 달며 솔로몬에게 사서 고생, 긁어 부스럼의 길을 선사합니다.
혹자는 다윗의 이 말을 역대기 기자가 첨가한 걸로 보기도 합니다. 순종하지 않아 멸망에 이른 선조의 죄를 회개하고,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추측하지 않고 다윗이 정말 이 말을 했다고 봐도 우리가 얻는 교훈이 달라지거나 빛바래진 않습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 당사자인 솔로몬은, 그리고 오늘날 새 언약의 수혜자인 우리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때 이 순종이란 책임은 비단 솔로몬 한 사람만 지는 게 아닙니다.
(8) 이제 너희는 온 이스라엘 곧 여호와의 회중이 보는 데에서와 우리 하나님이 들으시는 데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구하여 지키기로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이 아름다운 땅을 누리고 너희 후손에게 끼쳐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다윗은 솔로몬이 져야 할 책임을 소집된 고관들도 함께 지자고 당부합니다. 그렇게 다 함께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땅을 계속 누리고 후손에게도 전할 수 있다며 말입니다. 이렇게 고관과 백성에게 연설을 마친 다윗은 고갤 돌려 솔로몬에게도 당부합니다.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과 순종을 당부하는 다윗(9-10절)
(9-10)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그런즉 이제 너는 삼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택하여 성전의 건물을 건축하게 하셨으니 힘써 행할지니라 하니라
다윗은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힘써 행하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이때 다윗은 몇 가지 명령어를 사용해 힘써 행함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온전한 마음과 기쁨으로 섬기는 것,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것, 그리고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는 것, 이것이 솔로몬이 힘써 행할 내용이었습니다. 이 자세를 견지하며 성전을 건축할 때 하나님은 솔로몬을 만나주실 것이며 그의 나라를 영원히 세워주신다며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자세는 비단 3천여 년 전 솔로몬만 갖춰야 할 게 아닙니다. 스룹바벨 성전을 위시하며 새 시대를 맞이할 역대기 첫 독자들에게는 당연하거니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지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마지막 연설은 참 무겁고 엄중합니다. 성도의 책임을 촉구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을 묵상할 때 떠올리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신명기 속 모세의 고별설교 장면입니다. 다윗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구약 성경 두 기둥 중 한 사람인 모세도 생을 마감하기 전 마지막 설교를 했습니다. 온 민족을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 모으고 말입니다. 그때 모세에게도 이루고 싶고 이룰 능력도 있으나 이룰 수 없는 꿈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입성입니다. 하지만 그 꿈은 모세가 아닌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할 일이었습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결정을 수용한 모세는 백성과 여호수아에게 당부합니다. 부디 하나님 말씀, 율법을 지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입성하면 그 땅을 정복해 심히 아름다운 그 땅을 온전히 취하라고 말입니다.
이 장면은 정말 본문 속 다윗의 연설과 똑 닮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게도 이렇게 떠오른 장면이 역대기 첫 독자들에게는 어떠했겠습니까. 저보다 더 빨리, 본문을 읽는 즉시 생생하게 기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여호수아를 위시한 이스라엘의 후일도 떠올렸을 것입니다. 처음엔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그들이 잠식당해 버렸고 결국은 사사시대라는 암흑이 찾아왔다는 걸 말입니다.
다윗의 당부를 듣는 솔로몬을 두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이 이처럼 막중한 책임을 갖고 성경 무대에 등장하지만, 그가 소임에 충성하지 않았다는 걸 역대기 독자들은 금세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다윗이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던 안식은 차치하고, 그들 나라에 불안과 분열이 생겼고 끝내는 나라를 잃었다는 사실까지 말입니다.
여기까지 이해가 이를 때, 그렇다면 우리의 힘써 행함은 하나님 앞에 합당함이라는 수준에 이를 수 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실패하고 또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힘써 행해야 합니다. 이 사실은 역대기가 실망과 절망의 책으로 남지 않고 소망의 책으로 읽히는 것이 증명합니다.
역대기는 우리의 힘써 행함이 비록 보잘것없어도 결국 하나님 역사는 거대한 강처럼 멈춘 듯 보여도 분명 고고히 그리고 힘 있게 흐른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결국 사사시대의 어둠은 걷혔고, 멸망한 나라의 포로민들은 귀향한 것처럼 말입니다. 동시에 그 사이사이 남은 우리의 가엾은 순종도 다 잊히지 않고 모여서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아직은 다 알지 못하더라도 끝내는 반드시 이 땅에 우뚝 설 한 완전한 성전의 도래를 대망하며 오늘 우리 앞의 일, 맡은 소명을 힘써 행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그 완전한 성전이신 예수님이 우리 손과 발이 행하지 않은 순종을 대신해 손과 발에 못 자국이 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몸 그대로 부활하며 이 앞일을 미리 맛보아 알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내 앞에 펼쳐진 길을 힘써 담대히 걸으십시다. 그때 우리의 걸음은 역대기의 진정한 결말을 가리켜 보이는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오늘 말씀 속 다윗이 나라 고관과 백성 그리고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의 엄중함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받은 성도로서 맡은 바 책임이 적지 않습니다. 당장 오늘도 겨우겨우 살아내는 우리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패마저도 하나님 나라 도래의 길로 쓰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힘써 행하는 모든 몸짓을 통해 진정한 성전을 이 땅에 우뚝 세우실 것을 믿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다시 또 맞는 오늘 하루 우리의 힘써 행할 바를 넉넉히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내시가 다윗의 고별연설 현장에 초청받은 것을 기억할 때 매 주일 예배에 나오는 우리 마음가짐은 어때야 하겠습니까?
2. 다윗은 자기 신하들을 ‘내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내가 형제·자매로 여기며 나와 동일시해야 할 이들은 누구이고, 그들이 이 호칭을 괴리감 없이 느끼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3. 우리는 하나님께 안식을 드리려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안에서 안식하는 걸 더 원하십니다. 내 열심이 하나님 뜻보다 앞섰던 경험을 생각해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안식하는 삶을 위해 어떤 삶의 제세가 필요할지 생각해봅시다.
4. 사람이 힘써 행해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그 성전을 처음 목적대로 보전 계승하는 일이 가능한지 묵상해봅시다. 아울러 우리가 계속해서 힘써 행할 수 있는 동력은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작성: 이종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