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악산 이정표를 따라 조금 들어서서 민박집 너른 마당의 잔디가 대단하다 싶었다. 한 때 나와 같은 회사에서 근무를 했던 박 사장은 하자보수를 하러 왔다. 나는 참 얼떨결에 예까지 따라 오게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다란에서 함께 있었고 귀국해서는 한 부서 근무를 한 토목쟁이이고 회사를 그만 둔 뒤에도 가끔 연락을 하다가 그는 직접 회사를 차렸다. 1978년 중동 특수가 터졌지만 공사가 끝나면 귀국한 직원들에게 보직을 주지 않으니 소리 소문 없는 해고가 이루어질 때였다.
전국 오지 산골이나 마을에 화장실 정화시설을 하는 작은 규모의 회사로서 관급공사를 하면서 대금 결제는 현금이라서 견딜만 하다고 했다.
더구나 작년 봄에 그는 내게 작은 현장 하나 안맡아보겠냐 했고 이번의 내 처지가 백수인생이니 그가 한 번 놀러 오라는 말에 자석이 끌리듯 그를 찾았다. 아침에 전화를 거니 지방 현장 하자보수 공사를 하러가야 한다고 했다. 회사를 그만 두었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월차를 얻었네' 했다.
정화조의 처리 순서는 이랬다. 정화조는 3단계로 되어 있었다. 첫째 맨홀은 오물을 걸러서 부패시키고 있고, 둘째 맨홀은 한 번 더 걸르고, 마지막 맨홀은 거의 원래의 수준의 깨끗한 물이 나온다.
나는 시골 구석의 화장실은 재래식 처리로 퐁당퐁당하는 줄 알았더니 이런 것도 다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하자의 내용은 집의 화장실에서 물이 잘 안내려간다고 군청으로 항의가 들어가서 시행자인 박사장네 회사로 연락이 왔다. 직원 몇 명 안되는 회사라서 사장이 직접 내려갔다.
공구는 들고 온 망치와 가스통 하나. 그 걸 갖고 뭐하나?
첫단계 정화조의 배관에서 공기가 꽉 차는 증세라고 박사장은 진단한다. 공구가 부족하다. 주위를 돌아보니 철근 동가리가 있다. 가스통으로 철근을 달구었다. 10분을 달군 뒤에 배관에다 구멍을 뚫어도 별로 흐름이 고르지가 않다.
첫째 맨홀에는 음식물의 오물이 둥둥 떠 있었다. 긴 장대를 주위에서 주워서 안을 휘저으니 마대가 걸린다. 도저히 나오지 않는다. 나는 내 차의 트렁크에 가서 일회용 비닐 장갑을 꺼내서 끼고는 박사장이 겨우 겨우 들어 올린 마대를 내 손으로 꺼낸다.
내심 좀 켕겼다. (이거, 무슨 토막 시체 들어 있는 것 아냐?) 그러나 마대는 마대였지. 내가 겁먹은 대로의 마대는 아니었다. 박사장이 이 짓을 하고 다니는 게 그에게 만족을 주는 지 궁금했다. 배관에 구멍 하나 뚫고 공기 빼는 일에도 열성을 다하는 그가 새삼스러워 보였다.
사업이 만만한 것이 아니구나. 공사를 철저하게 해도 사용자들이 잘못 다루어 문제가 생기면 시공자들의 책임이라 탓하니 뚝심 민원에 누가 당하랴. 오물 하나 치워주려 3시간을 달려오고 돌아가는 걸음에 수고했다는 따뜻한 말 한 마디 없었다.
월악산을 지나 문경새재를 넘어 예천 비행장이 바라다 보이는 철로를 따라 마을에 들어서니 준공이 거의 다된 오수처리장에 도착했다.
그곳의 현장은 극동건설에서 함께 박사장과 근무하던 한 부서의 과장이었던 이가 소장으로 있었다. 그 당시 박사장은 대리였고 소장은 박사장의 직속 상관인 과장이었다. 작년에 박사장이 내게 함께 일하자고 권할 때 나는 그이 양소장을 추천했다.
거의 1년동안 양소장은 2개의 현장을 준공했다. 박사장은 꼼꼼하게 공사준공 상태를 점검했다.
"양소장님, 울타리가 높낮이가 안맞습니다. 다시 치십시오. 울타리에 철사로 횡으로 두 줄을 치게 되었는데 본사에서 보낸 철사는 어디갔습니까? 치십시오. 전기실 철판에 흙을 걸레로 닦으십시오. 전기팀에게 시키십시오. 지지대의 철부분에 녹에 '후끼'를 매기십시오…."
내가 들으니 말마다 다 옳다. 전임 상관은 지금의 상관에게 꼼짝 못하고 당하고 있다. 박사장은 정말 제대로 안된 공사에 대하여 아주 엄격했다.
나는 시골 곳곳을 찾아다니며 분뇨처리를 하는 정화조 공사를 하면서 생계를 꾸리려 하면서 갈등에 빠진다. 양소장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밖에 집에 못간다고 하니 아내 사랑이 끔찍한 양형이기에 사람 사는 일이 무엇인가 혼란스럽다.
"황형. 정신차려. 문경의 새 현장 보러 가자고…."
박사장 말에 제 정신이 든다.
박사장이 "황형 어때요. 함께 일해 볼래요"하는 말에 "생각 좀 해 보고..."하면서 나는 내가 오늘 월차라고 그에게 말했던 사실을 깜빡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