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삶은 no return 이고 one way ticket 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 자체가 지나가는 하나의 시간이라는 線分상으로 쉬지않고 걸어가는 나그네 길이라고 들 한다. 그러고 보면 이런 저런 인연으로 삶을 시작 했으니 군소리 없이 열심히 살아가야 하듯이우리의 생도 타의에 의해서 이건 아니면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인하여 강제로 정지를 당하거나 자연의 순리대로 온 몸의 진기가 저절로 소진되어 멈추게 될 때까지 우리의 이 삶의 길은 이어질 것이다. 하루 온종일 길을 걸어 가다가 보면 옛 선현들의 말씀처럼 " 우리는 원하건 싫어하건 간에 소도보고 중도보아야." 할 것이다.
지난주 금요일 강원도 기린면 진동리를 다녀왔다. 월, 화, 이틀간은 대구 경북인 재경향우회 시,군, 회장단 연수계획의 일환으로 경주 양동 마을과 보문단지 그리고 구미 박대통령 생가를 돌아오는 계획이 있어서 함께 다녀 왔다. 그 여독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지만 북경에서 살고 있는 귀염둥이 아네스가 지난 4월에 친정으로 와서 머물다가 5월에 귀여운 손녀를 무사히 순산을 하였고 집에서 2개월을 같이 산후 조리를 마치고 8월 초에 북경에 있는 저희 집으로 돌아갔다. 여러가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아내도이것 저것 챙겨서 아네스 모녀와 같이 북경으로 떠나가고 나 혼자서 40 여 일을 혼자 지내면서 끼니를 해결 할 수밖에 없는 비상(?)사태가 생겼었다. 궁즉통 (窮卽通)이라고 하더니 그런 난관을 헤치고 아직도 잘 살고 있으니 이제는 그러한 유사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적응력도 생겼다. 그러다가 아내가 서울로 돌아 온 후 처음으로 아내와 같이 자동차를 끌고 바람도 쏘일겸 집을 나섰다.
지난 5월에 나 혼자 가서 철이 다 지난 다음 이기는 해도 현리 사내로 나가서 고추와 옥수수,그리고 들깨, 피망 ,가지 등의 모종을 사다가 이랑을 만들고 비닐을 씌우고 반세기전에 시골에서의 삶을 반추하면서 서투른 솜씨를 총동원하여 심었다.그 당시 앞집 아저씨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 모종 값이면 사다 먹는 것이 더 풍성하겠다."고 하면서 웃던 기억이 생생하다. 때 늦은 시기에 모종을 했지만 비료도 주고 세수 대야로 물을 떠다가 뿌리면서 부디 잘 살아나라고 언덕을 오르내리며 온종일 간난신고를 하고 귀경을 했었다. 다시 또 3개월이 지난 다음 지난 8월에 가서 잡초를 좀 다스리고 또 다시 3개월 지났는지라
"논 밭에서 자라는 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자란다."고 하는데 3개월에 한번씩들은 게으른 주인이 발자국 소리를 겨우 들으면서 가물 가물한 그 기억을 어떻게 활용해서 얼마나 잘 자랐는지 궁금하기도 하고,또한 나를 그리도 감격시켰던 아득한 그날의 그 단풍도 어느 정도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겸사 겸사 하여 진동리를 향하여 집을 나섰다.
보통 진동리로 갈 때는 홍천을 지나 철정에서 아홉사리 고개를 넘어 상남 그리고 오미재 고개를 넘어서 가곤 했는데 이번에는 코스를 좀 다르게 잡았다. 벌써 18년 세월이 흘러갔지만 아직도 그곳에서 근무했던 시절이 생생하다. 특히 동해안 잠수함 사건과 무장공비 섬멸 작전을 실시 했던 그 2개월 동안에 항공 단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나의 작전지휘하에 여단규모의 공중기동 작전을 2회나 실시 하였고 수백 소티의 항공지원 작전을 하면서도 단 한건의 항공기 사고도 없이 그야 말로 완전무결 항공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로 군사령부 대간첩작전 강평 회의시에는 대 간첩작전 부대 표창을 받기도 했던 그 시절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른다.
그 곳에는 나의 "별빛 가득한 집"이 있다
<산 높고 물 맑은곳 기린면 진동리에방 한칸을 들여 놓고
홀연히 찾아가서 책도 보고 글도쓰며
오나라 장한처럼 음풍농월 하려했네
젊은 날 내 모든 꿈 벼슬길에 묻어두고
마음속에 담아둔 일 꿈꾸는데 사십여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820번지
-별 빛 가득한집.
봄이라도 빨리와야 꽃이라도 심어놓고
답답한 도시에서 언제든지 훌쩍떠나
철따라 피는 꽃은 방안에서 즐기면서
부득 반자연 늦었지만 명상에나 잠겨 보리>
언제나 아홉사리를 넘어 다녔는데 이번에는 그 고개를 넘어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가기로 했다. ,시간이 촉박하지도 않고 하여 모처럼의 나들이라 인제 원통을 거쳐 내설악 한계령을 거쳐서 필래 약수터를 돌아서 가기로 마음을 먹고 느긋하게 차를 몰았다.
내가 살고 있는 구리 토평동으로 부터 기린면 진동리 꿩밭으로 가는 동안 거쳐야 하는 지역 하나 하나에는 나의 군시절의 여러가지 추억이 서려 있다.
구리를 떠나서 지나가는 남양주 덕소에는 코브라 헬기 대대가 2개 있다. 내가 여단장 시절 나의 휘하에 있던 공격헬기 대대들이 덕소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당시 어떤 간부가 음주운전으로 부대를 이탈하여 강원도 춘천까지 갔다오는 동안 과속과 민원을 야기시켜서 징계조치를 했던 일도 있었다.
좀더 달리다 보면 마제라는 양수리 근처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도 나온다. 양수리를 지나면 좌우로 수려한 경관이 다가온다. 내가 장군 진급을 하고 처음으로 근무 했던 부대이기도 한 20기계화 보병사단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군인으로서 장군으로 진급을 하여 보람과 긍지를 지닌체 그 부대의 작전 부사단장으로 근무했던 보람을 느꼈던 시절이었다. 차량의 앞범퍼에 장군 계급장을 보기좋게 부착하고 싱싱 바람을 일으키면서 그 지역을 오고갈 때는 나보다도 운전병 녀석이 더신명이나는듯이 잘도 달렸다. 그런저런 지나간 세월의 추억들이 그 곳을 지나갈 때마다 길마다 산마다 새롭게 다가온다.
또한 홍천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는 성남 세곡동에 있던 상급부대로 항공 작전 계획 보고를 하러 새벽길 짚차를 타고 달려서 오고가던 일이 새롭고, 지평리를 지나다 보면 비행장이 하나 있는데 홍천에서 근무하던 시절 야간 비행을 하면서 원주와 양평 그리고 여주 이천의 밤하늘을 비행을 할 때마다 경유하는 야간 주외 비행 항로을 비행하던 시절 수 없이 지나 다녔던 시절 보는 각도에따라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모양으로 보였던 주읍산의 야간 지형,지세들이 아직도 뇌리에 감돌고 있다, 자동차를 타고 그 곳을 지나면 지금도 어린아이같이 그 시절 야간 항법 비행간 참조물로 사용했던 그 주음산의 모양을 떠올리며 옆자리에 앉은 아내에게 신나게 설명을 하면서 그 길을 지나간다.
철정 검문소지나 홍천 병원 그리고 신남을 지나고 소양댐으로 인하여 수몰이 되었던 관대리 비행장터를 지나면 그 시절 그곳에 근무했던 선배들의 무용담이 떠오르고, 군축교를 지나면 목마와 소녀의 시인 박인환 문학관이 있는 인제가 나타난다.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면서 육군 대학을 졸업하고 진해에서 전방으로 전속을 가던 군인 가족들이 이삿짐 차을 타고 5~6시간을 달려서 홍천까지 왔는데 아직도 몇 시간을 더 가야 한다는 말에 첩첩산중 강원도 길에 지쳐 울었다던 그 인제를 지나다 보면 합강교 가 나온다.
그 합강교 다리 옆에는 번지 점프를 하는 곳이 있고 그 옆으로 원통 방향으로 조금 더 달리다 보면 리빙스턴 다리가 나온다. 6.25 전쟁당시 이지역을 지나던 미군 포병 대대장이 부하들과 홍수가 나서 물이 불어난 합강을 건너지 못하고 지체하던 중에 적의 기습 공격을 받아서 많은 피해를 입었고 대대장도 중상을 입고 후송되어 치료를 받던 중에 죽었다고 한다. 그 리빙스턴 중령이 임종 직전에 부인에게 그 곳에 다리를 놓아 줄 것을 유언으로 부탁했고 그 대대장 리빙스턴 중령의 부인이 돈을 모아서 남편의 유언에따라 이곳 합강에 놓았다는 리빙스턴 다리는 그 리빙스턴중령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다리 이름이다.
죽은 남편의 유언에따라 그 부인이 돈을 모아 만들었다는 다리 ㅡ리빙스턴 교-그 다리를 지날 때 마다 감회가 새로워진다.처음에는 미군이 공사를 맡아서 했으나 비가 많이 온다는 이유로 중단했다가 70년대 초 한국군이 3개 중대병력을 투입하여 공사를 완료 했다고 한다.
공사 초기에는 아이빔에 목재를 깔아 가설하고 붉은 색칠을 해 ‘붉은 다리’로도 불렸다고 한다. 피부색도 다르고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이 작은 나라 한국 땅에 유엔의 깃발아래 자유와 평화를 심어 주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와서 용감히 싸우다 산화한 리빙스턴 중령.그의 고귀한 희생정신은 리빙스턴 교와 함께 언제나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 숨쉴 것이다. 이와 같이 수만리 이국땅에 와서 자유 대한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죽어간 그들의 희생위에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번영이 이룩된 것이라고 생각해도 틀림이 없으리라. 입만 열면 반미 반외세를 외치는 저 한심한 사람들. 20대 약관에 전선을 누비며 생사의 고비를 넘기던 90노구의 백선엽장군을 반역자라고 하는 철부지들이 리빙스턴 교를 한번 걸어보기를 바란다.
계속 더 차를 달리면 을지부대가 나오는데 그곳에 조금 못 미쳐 가면서 좌측으로 강물을 바라보면 나에게 잊혀지지 않을 또하나의 슬픈 추억이 있다. 합강 지점을 지나가다보면 을지부대에 근무하는 간부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있고 그 옆에는 독신장교들이 살고 있는 숙소들(B.O.Q)이 있고 그 앞으로는 강이 흐르고 있다.
K라고 하는 항공 동기생이 있었는데 항공 병과에서 십여년을 같이 근무했던 그 K소령이 그의 어린 딸과 함께 익사했던 곳이라서 ..그는 나와 같이 항공 학교에서 근무를 했던 마음씨착한 동기생이었는데 82년도로 기억되는 그 시절 사단의 작전 항공 장교로 근무하던 어느날 야간 철야 근무를 마치고 오전에 집으로 퇴근을 하여 관사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관사 바로 앞의 강물에서 그의 어린 딸이 또래 아이들과 얼음을 타고 놀았는데 얼음이 깨어져서 세명의 어린이가 동시에 얼음속으로 빠져 버렸던 것이다. 같이 놀던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관사에서 잠을 자던 그 k소령이 앞뒤를 안가리고 얼음속으로 뛰어들어 세 어린이를 모두 안고 나오려고 하니 얼음은 앏아서 계속 깨어지고 또 깨어지고 ......,부근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가 현장으로 달려가서 그를 구조하여 보려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소총의 끝을 뻗쳤으나 그 총 끝을 잡은 k소령과 팔에 안겨 있던 어린이 3명의 무게로 인하여 초병까지 얼음속으로 끌려들어 가려고 하니 겁에 질린 그 병사가 혼비 백산하여 자기의 소총을 놓아버리게 되었고 .....그리하여 어린아이 3명과 그 k소령한께 얼음속으로 빠져들어 가서 4사람이 같이 익사를 했던 일이 있었다. 당시 삼각지 육군 본부에서 근무하더 내가 몇몇 동기생들과 같이 이곳 원통까지 왔었는데 .그 4사람의 합동 영결식장에 참석을 했었는데 세어린이와 한명의 젊은 아버지의 합동 영결식장이 온통 울음 바다가 되었던 그날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한날 한시에 여러 사람이 같이 죽는 경우는 동해안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알게 되었는데. 고기잡이를 나갔던 배가 사고를 당하면 같은 배에서 고기를 잡던 선원모두가 같이 사고를 당하니 한 동네에서 같은 날 저녁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여러 집이 있었던 것을 보았던 일이 있었지만 이렇게 안타까운 죽음을 보기는 드문 일이었다.
그 강물을 보면서 차를 달리다 보니 지나간 그 30여년의 일들이 주마 등같이 떠 올랐다. 계속 달리다 보면 215 이동외과 병원이나온다. 동해안 잠수함으로 침투했던그 무장 공비소탕 작전중에 적탄에 맞아서 순직했던 고 오영한 장군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 당시 러시아를 방문했던 국방부 장관과 그날 오후에 대통령이 직접 문상을 오겠다고 하는 예정된 시간전에 서울 수도통합 병원까지 그의 시신을 옮기라고 지시를 받았지만 안개가 자욱하게끼어 있어서 헬기가 뜰 수가 없었는데도 불같은 명령은 계속되고 .....시신을 헬기로 후송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방안은 없고 그 답답한 심정으로 달려 갔었던 그 날 영안실에서 헬기로 옮겨 지던 그의 전투복 차림의 모습속에.... 떠오르던 그와의 추억들,어느 일요일 저녁 식사를 같이하고 노래방에 갔을 때 <영영>이라는 노래를 잘도 부르던 그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던 215 병원에서의 그와의 마지막 작별의 순간 ,그 모습도 기억속에 떠올랐다.
그 길을 계속 달리면 내설악이 나오고, 한계령 휴게소(지금은 오색령이라는 돌로된 표지석이 서 있음)가 나온다. 현리에서 항공단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헬기를 타고 넘나들었던 그 한계령의 주전골 오색약수터 부근에도 어느덧 단풍이 져서 울긋불긋한데 20여년이 세월을 건너 뛰어 아내를 태우고 자동차를 달려서 필레약수터를 지나서 귀둔으로 가는 길 여기저기 그 가을 산의 골짜기 마다에 얽혀 있는 지난 군시절의 그리운 추억들이 떠올랐다.
진동리로 들어 가다가 방동막국수 집에서 수육과 감자전 그리고 막국수를 시켜서 추억과 시원한 국수물과 시원한 가을 바람에 시원한 육수국물을 들이키고 ,다시 그리고 만산이 홍엽으로 단풍이 들어 있는 그 길을 달려서 꿩밭으로 가서 이틀을 머물다가 왔다 .
옥수수는 이미 영글어서 삶아 먹지는 못하고 튀겨서나 먹을 수가 있었고 고추와 가지.들깨 그리고 피망까지 다 수확을 하고 여름철에 와서 옮겨심었던 다복송 한그루는 말라서 죽어버렸고 철 지난 코스모스대를 낫으로 자르고 말라버린 잡초들도 대강 자르고, 실로암 물결따라 아침 산책도 즐기고 일요일 오후에 귀가 길에 태극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황소 유원지를 지나서 현리에서 유명한 매화촌에 들러 매화촌 해장국을 한그릇 먹었다.그 시절 도시에서 찾아오는 손님들과 이른 아침에 와서 즐기던 그 시절3,500원하던 해장국이 지금은 7,000원이란다. 뉘엇뉘엇 넘어가는 저녁해를 보면서 아홉살이고개를 넘고 며느리고개를 지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이기도 하고 한바탕의 꿈이기도 하고 그러나 쉬임없이 흘러가는 여행길이라 길게 하나의 연속적인 여행속에 단막극처럼 짧은 여러개의 여행의 결합체 이기도 하겠지.
멱이라는 동물은 꿈울 먹고 살고 우리들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더니 그 말이 생각이난다.
<깊이 생각하고 온화하게 말하고 ,많이 사랑하고 자주 웃음지으며 ,열심히 일하고 ,
선심좋게 내주고,즉시 지불하고 ,마음 속으로 기도하고 그리고 친절히 대하라.>
-졸저 修己治人 .182항.-
|
첫댓글 월간 詩세게에 보낸 글